주관주의 혹은 개인주의의 역사는 오래다 
 

"인간이 만물의 척도이다"란 말이 프로타고라스에 의해 생긴 후부터 주관주의 혹은 개인주의가 논리적으로 성립되기 시작했다.
인간이 만물의 척도란 말 이면에는 우리 각자 모두가 개인적으로 만물의 척도가 되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박카스 종교로부터 이미 주관주의 혹은 개인주의의 요소가 나타났으며 거의 모든 종교가 신비주의를 통해서 첨예한 주관주의 혹은 개인주의를 용납했다고도 말할 수 있다.

에피큐러스가 찬양한 우정은 스토익에게도 해당되었지만 스토익은 친구의 잘못이 너의 덕을 망친다고 훌륭한 친구와 우정을 나눌 것을 주장했다.
스토익의 덕에는 예수의 가르침처럼 이웃을 자신의 몸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주문이 없었는데 그런 감성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칸트는 형제를 사랑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그 이유로 형제를 좋아하기 때문에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도덕적으로 친절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했는데 주관주의 혹은 개인주의적인 말투이며 스토익주의와 일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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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이란 있을 수 없다 한 제노 
 

머레이는 저서 <스토익 철학 The Stoic Philosophy>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제노는 실재 세계를 주장했다.
'실재란 너의 말은 무슨 뜻이냐?' 하고 회의주의자가 묻자
'내 말은 확고한 물질을 말한다. 내 말의 뜻은 이 탁상은 확고한 물질이다.'
'그럼 신은? 혼은?'이라고 회의주의자가 묻자 제노는
'온전히 확고하다. 탁상보다 더욱 더 확고하다'고 대답했다.
'그럼 미덕, 정의 혹은 법칙도 확고한 물질들이냐?'고 묻자
'물론이다. 아주 확고하다'고 제노가 대답했다.
럿셀은 저서 <서양 철학사>에서 제노가 너무 서둘러 자신의 형이상학 이론을 정립하려고 했던 것 같았다고 적고 있다.

스토익의 주요 사고는 우주적 예정론Determinism과 인간의 자유였다.
제노는 우연이란 있을 수 없다고 단정하면서 만물은 자연의 법칙에 따라서 운행된다고 주장했으며, 우주에 곧 화재가 발생해 만물은 다시 불로 환원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스토익은 기독교의 교리처럼 불로 환원되는 현상을 세계의 종말로 보지 않고 한 주기cycle의 마감으로 이해했으며 이런 주기는 계속 반복된다고 보았다.
그러면서 그는 모든 사건은 과거에 이미 일어난 적이 있었던 것들이고 또 미래에도 일어날 일들이라고 했는데 여기까지는 데모크리투스의 이론과 다름이 없으며 스토익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의 관점에 불과했다.
스토익주의는 자연의 법칙이 만물을 다스린다고 믿었으므로 18세기의 신학과 마찬가지로 자연의 법칙을 신의 의도로 믿었다.

제노는 신을 전능자로 인식하면서 신을 제우스Zeus라고 부르기도 했고, 세네카Seneca는 제우스를 보통 사람들이 믿고 있는 신들에 비해서 더욱 더 전능한 신으로 믿었다.
스토익주의자들에게는 신이 훌륭한 휴양지에서 피서를 즐기며 인터넷을 통해 우리 인생을 관망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는 세계의 혼으로서 우리의 혼은 그의 신성한 불의 일부분이라고 생각했다.
마치 힌두교와 불교에서 세계의 혼을 바다로 비유해 우리의 혼은 물 한 방울인데 방울들이 모여 바다를 이루기 때문에 우리의 혼은 전체 혼의 일부분이란 말과 유사하다.
이런 신학은 진전된 것으로 신과 인간을 한데 묶어두는 것을 의미하며, 윤리적 면으로는 세계의 혼은 자연의 법칙이 가진 지고의 선이므로 우리의 혼이 자연의 법칙을 따르면 조화로 나타나 선하지만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면 부조화로 나타나서 악해진다는 논리가 성립되어 종교에서 다루어야 할 윤리의 문제도 함께 해결되는 것이다.
스토익주의는 우리의 의지will가 자연의 의지 혹은 자연법칙과 같을 때 미덕virtue이 된다고 했다.
그러면 부덕vice이란 무엇이냐 하는 문제가 발생하는데 스토익주의자들은 사악한 자들도 자연의 법칙대로 행위하지만 그들은 자의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비자발적인 방법 즉 강제에 의해 행위하는 것이라고 했으며, 클린테스Cleanthes가 비유한 바에 의하면 사악한 자들은 수레에 묶여 있는 개와 같아서 수레가 가는 대로 끌려다닌다고 했고, 그런 행위도 자연의 법칙을 따르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스토익주의는 덕을 유일한 선으로 간주하면서 건강, 행복, 그리고 소유를 덕의 내용에서 제외시켰다.
덕은 우리의 의지 문제이기 때문에 가난하다고 덕이 없으란 법이 없으며, 독재자가 우리를 감옥에 쳐넣는다고 우리의 덕이 상실되는 것도 아니고, 사형에 처하더라도 덕이 있으면 소크라테스처럼 고상하게 죽을 수 있다는 것이 스토익주의자들의 주장이다.
그들은 부덕 혹은 악이 오히려 그것을 겪어야 하는 사람들에게 덕을 추구해야 한다는 필연성을 새삼 깨닫게 해주는 적절한 기회를 제공해준다고 주장했는데 여러분은 기독교가 왜 스토익의 주장을 환호하며 반겼는지 이제 이해할 줄 안다.

스토익은 우리에게 덕이 있는지 없는지의 여부는 우리 스스로가 자각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미결로 남았다가 신의 결재를 받은 후에야 알 수 있게 된다고 주장했다.
현대인들이 덕의 여부를 미결로 남겨두어야 한다면 덕의 장점에 회의를 가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자각할 수 없는 덕이라면 과연 덕이겠느냐는 의심이 생긴다.
스토익은 주관주의 혹은 개인주의를 추구했는데 어떤 열정에 한해서만 사악한 것이 아니라 모든 열정을 사악한 것으로 믿었고, 아내 또는 자식이 사망했다고 그런 것이 자신의 덕에 영향을 끼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심히 괴뤄워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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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익주의Stoicism 
 

스토익주의Stoicism의 출발은 기원전 3세기 초 제노Zeno의 가르침으로 시작되었지만 그의 가르침이 일관되게 전수된 것은 아니었고, 기원후 2세기 후반 이후 스토익주의의 간판스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의 가르침의 경우 제노의 가르침과는 같지 않았다.
제노는 유물론자였고 그의 주요 사상은 견유학파와 헤라클리투스의 이론을 혼용한 것이었는데 그를 따른 제자들이 차츰 플라톤의 철학을 받아들이더니 유물론을 버렸으므로 유물론을 유추할 근거가 나중에는 조금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보통 사람들은 스토익주의 철학보다는 윤리에 관해 관심을 기울이면서 윤리와 관련이 있는 신학에 관해서 말한다.
스토익주의는 대부분 시리아 사람들이 동조했으며 나중에 로마인이 가세했다. 탄Tarn은 저서 <그리스인의 문명 Hellenistic Civilization>에서 갈데아인Chaldean이 스토익주의에 영향을 주었다고 주장했으며 길버트 머레이는 "알렉산더 이후 거의 모든 집권자들 다시 말하면 모든 왕은 자신들을 스토익이라고 말했다"고 기술했다.

스토익의 창설자 제노는 기원전 4세기 후반에 사이프러스Cyprus에 있는 시티움Citium에서 태어난 페니키아인Phoenician이었고, 그의 집안은 상업에 종사했던 것 같았으며, 제노가 아테네에 온 것은 장사 때문이었던 것 같았다.
그는 철학을 진지하게 받아들여 공부했는데 견유학파의 가르침이 특히 그를 사로잡았으며 그는 철학적으로 절충주의를 선택할 줄 안 융통성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플라톤을 추종한 사람들은 그의 융통성을 못마땅하게 여기면서 그런 행위는 아카데미에 대한 표절이라고 비난했다.
스토익주의자들은 소크라테스를 가장 이상적인 성자로 여겼는데 재판과정에서 그가 보여준 당당함, 탈옥하라는 친절한 권고를 물리친 점, 죽음에 임박해서도 여유있게 침착한 태도를 보여준 점, 자신을 기소한 사람에게 불의를 행하는 자는 자신을 해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경고한 점, 이런 것들은 바로 스토익주의가 추구한 내용들이었다.

소크라테스는 우리가 아는 대로 춥거나 더위에 상고나하지 않았고, 음식과 옷차림에 무관심했는데 이런 것들도 스토익주의가 추구한 것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플라톤의 아이디어들에 관한 이론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대부분의 스토익주의자들은 그가 주장한 혼이 불멸하다는 이론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후기 스토익주의자들은 혼을 비물질이라고 생각했지만 초기 스토익주의자들은 헤라클리투스의 이론을 받아들여 혼은 물질인 불로 구성되었다고 믿었다.
이런 사고는 에픽테투스Epictetus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철학에서도 나타났는데 그들은 불을 만물의 네 요소들 물, 먼지, 바람, 불 가운데 한 요소로 인식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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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움은 선으로 본 사람은 에피큐러스였다
 

즐거움은 선으로 본 사람은 에피큐러스였다.
그는 말했다.
"즐거움은 축복받은 인생의 시작이고 끝이다."
"내가 만약 맛의 즐거움과 사랑의 즐거움 그리고 듣고 보는 즐거움을 상실한다면 선을 상상할 수가 없다."

에피큐러스는 또 말했다.
"모든 선의 시작과 뿌리는 밥통의 즐거움이고 지혜와 문화조차 밥통과 관련이 있다."

여러분은 그렇다면 그의 철학과 향락주의Hedonism가 다를 게 무엇이며, 그는 왜 궁상맞게 영양실조에 걸려 자신의 밥통을 학대했느냐고 묻고 싶어 할 줄 안다.
그는 향락주의자들과 견해를 달리 했는데 동적Dynamic 즐거움과 정적Static 즐거움을 구분하면서 동적 즐거움은 궁극적으로 욕망한 바를 획득하므로써 이루어지는데 이런 욕망은 고통을 수반한다고 믿었다.
배고픔이 해결되면서 배고픔에 대한 만족은 동적 즐거움이고, 배고픔을 완전히 만족하는 것은 정적 즐거움이라는 것이 그의 구분이었다.

여러분은 식당에 동적 만족을 구하러 가는 것인지 정적 만족을 구하러 가는 것인지 먼저 자문할 수 있는데 이럴 경우 여러분은 자신이 향락주의자인지 에피큐러스를 추종하는 사람인지를 분별할 줄 알게 된다.
여하튼 그가 주장하는 바는 사람이 음식을 먹고 싶어서 먹게 되면 안 되고 절제있게 먹어야 정적 즐거움을 즐길 수 있다고 했는데 그는 실제적으로 즐거움을 찾았다기보다는 고통이 없기만을 바랬던 것이다.
빵과 물을 밥통의 허기진 고통을 덜려고 그는 먹었던 것 같았는데 금욕주의자가 음식을 밥통의 즐거움을 위해 먹었다고 주장한다면 그야말로 웃기지도 않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그러니까 그에게는 고통이 부재하는 상태가 바로 즐거운 상태이며 이런 상태를 현자의 고상한 덕으로 간주했다.

에피큐러스는 제자와 친구들에게 "문화의 모든 형태로부터 달아나라"고 주문했다.
그는 성적인 충동에 의해 섹스를 하는 것은 동적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단정하고 이런 섹스를 금했다.
그는 말했다.
"섹스는 인간에게 결코 선하지 못하며 만약 해가 안 된다면 다행한 일이다."

에피큐러스는 아이들을 무척 좋아했는데 그렇다면 그는 자신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들의 자녀들을 좋아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를 추종한 루크레티우스Lucretius(200년 후의 사람)는 열정으로부터 떠난 섹스는 해가 되지 않음을 발견했다.
열정이 없는 섹스가 어떤 것인지 궁금하지만 그가 경험을 통해 이런 지식을 갖게 되었을 성 싶은데 별로 대단한 발견이라고 말할 수 없으며, 설령 발견이라고 하더라도 그까짓 것을 아는 데 무려 200년이 걸렸다니 금욕주의 철학의 발달은 너무 더디었다고 생각된다.

에피큐러스는 공리주의 철학자 벤탐Bentham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늘 지혜롭게 혹은 지혜롭지 않게 자신들의 즐거움을 추구한다고 믿었다.
그는 종교와 죽음이 두려움의 근원이라고 생각했는데 종교가 죽인을 불행한 것이라고 말했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으며, 혼은 몸과 함께 멸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근래 사람들에게 종교는 위안인데 그는 종교를 배척하면서 미신은 자연의 법칙을 방해하므로 재앙의 근원이 된다고 주장했으며 신이 사람의 삶을 간섭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시도했다.

에피큐러스는 신은 인간을 다스리는 불필요한 노동을 원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은 사람들로 하여금 두려움에 대한 짐을 덜어주었다.
그는 데모크리티우스의 이론을 받아들인 유물론주의자였기 때문에 데모크리투스와 마찬가지로 원자들은 늘 자연의 법칙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는데 최근 물리학자들에 의해 두 사람의 판단이 옳았음이 증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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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큐러스 학파 
 
그리스 철학에 관해 언급할 때 빠뜨릴 수 없는 두 학파는 스토익 학파와 에피큐러스 학파Epicureans이다.
스토익 학파의 창설자는 제노Zeno이고 에피큐러스 학파의 창설자는 에피큐러스Epicurus인데 두 사람 모두 같은 시기에 태어났고 아테네에 거주했으며 수년의 간격을 두고 각각 자신의 학교를 설립했다.
스토익 학파는 오래 존속했고 기원후 180년에 사망한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는 스토익이 자랑하는 대표적인 학자이다.
에피큐러스 학파를 먼저 살펴본 후 스토익에 관해 알아보기로 한다.

에피큐러스에 관해서는 기원후 3세기에 활동했던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우스Diogenes Laertius가 전한 바가 있는데 그가 전한 내용이란 것이 스토익 학파 사람들이 상대 학파의 지도자 에피큐러스를 비방하기 위해 퍼뜨린 유언비어였으므로 라에르티우스가 유언비어를 알리려고 기록으로 남겼는지, 아니면 자신도 유언비어에 동조했으므로 그런 내용을 남기려고 했는지 그의 의도를 정확하게 가늠할 수 없다.

전해오는 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도 포함된다.
에피큐러스의 어머니는 야바이꾼 여자 예언자였고, "그들은(스토익) 말하기를 에피큐러스는 어머니와 함께 가가호호 다니면서 속죄하는 기도문을 읽었으며 비참한 수도사에게 지급되는 돈을 얻으려고 아버지가 기초 과목을 가르칠 수 있도록 그를 도왔다."

베일리Bailey는 저서 <그리스의 유물론자들과 에피큐러스 The Greek Atomists and Epicurus>에서 "만약 그와 같은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에피큐러스는 어렸을 적 어머니를 따라 다니면서 어머니가 주문을 외는 것을 보고 미신을 증오하기 시작했을 것이고, 미신에 대한 증오는 현저하게 그의 가르침에 나타나 있다"고 적고 있다.
하지만 길버트 머레이는 저서 <다섯 단계 Five Stages>에서 에피큐러스는 어머니를 유난히 사랑했다고 기술했는데 그렇다면 베일리의 견해는 타당하지 않게 된다.

에피큐러스에 관해 분명하게 알려진 것은 그의 아버지는 피타고라스의 고향 사모스Samos 섬에 살던 가난한 그리스 해외 이주민이었고, 에피큐러스는 기원전 342~1년에 태어났는데 태어난 곳은 사모스였는지 애티카Attica였는지 알 수 없다.
그는 자신이 14살 때 철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고 했으며, 18살 때 아테네에 갔다고 했는데 그때 기원전 322년에는 알렉산도 대왕이 사망한 후라서 아테네는 사모스를 식민지화할 때였다.
그의 가족은 소아시아에 난민이 되었으며 그는 그곳으로 가서 가족을 재회했다.
타오스Taos에서 그는 최초의 유물론자로 알려진 데모크리투스Democritus의 추종자들 가운데 한 사람인 나우시파네스Nausiphanes로부터 철학을 수학했으며 기원전 311년에 자신의 학파를 결성했고 기원전 307년부터 타계한 270~01년까지 아테네에서 거주했다.

에피큐러스는 집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정원을 갖고 있었는데 정원에서 제자들을 가르쳤으며, 그의 세 형제는 개교 이래 그의 제자였고, 학교는 번성했으며, 노예와 매춘부들도 제자가 되기를 바랬다.
매춘부들이 모인 것을 빌미로 그를 시기한 적들은 그에 관한 나쁜 소문을 만들어 퍼뜨렸다.
그와 그를 따르던 제자들은 가난했으며 그들은 주로 빵과 물로 생활하면서 스스로 만족해 했다.
학교는 기부금에 의존해 운영되었는데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에피큐러스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치즈를 보내주면 향연을 베풀 때 사용하려고 하오."

그가 다른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네 자신과 네 자녀들을 위해서라도 우리의 거룩한 육신을 위해 기부를 하게."

에피큐러스는 평생 병에 시달렸는데 형연을 열 때나 겨우 치즈를 먹을 정도였으니 짐작컨대 병의 원인이 영양실조였던 것 같았다.
그가 거룩한 육신을 빵과 물로만 접대한 방법은 썩 훌륭한 방법은 못되었다.
그는 사람은 큰 고통 속에서도 행복을 느낄 수 있다고 주장했는데 그의 주장은 스토익 학파보다 설득력이 있었다.
그는 타계하기 며칠 전 환자의 몸으로 편지를 썼는데 자신은 행복하다고 주장했으며 제자들에게 자녀들을 잘 돌보라고 일렀다.
제자들은 그의 교리를 신경Creed처럼 배워야 했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그것들에 보태거나 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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