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움은 선으로 본 사람은 에피큐러스였다
 

즐거움은 선으로 본 사람은 에피큐러스였다.
그는 말했다.
"즐거움은 축복받은 인생의 시작이고 끝이다."
"내가 만약 맛의 즐거움과 사랑의 즐거움 그리고 듣고 보는 즐거움을 상실한다면 선을 상상할 수가 없다."

에피큐러스는 또 말했다.
"모든 선의 시작과 뿌리는 밥통의 즐거움이고 지혜와 문화조차 밥통과 관련이 있다."

여러분은 그렇다면 그의 철학과 향락주의Hedonism가 다를 게 무엇이며, 그는 왜 궁상맞게 영양실조에 걸려 자신의 밥통을 학대했느냐고 묻고 싶어 할 줄 안다.
그는 향락주의자들과 견해를 달리 했는데 동적Dynamic 즐거움과 정적Static 즐거움을 구분하면서 동적 즐거움은 궁극적으로 욕망한 바를 획득하므로써 이루어지는데 이런 욕망은 고통을 수반한다고 믿었다.
배고픔이 해결되면서 배고픔에 대한 만족은 동적 즐거움이고, 배고픔을 완전히 만족하는 것은 정적 즐거움이라는 것이 그의 구분이었다.

여러분은 식당에 동적 만족을 구하러 가는 것인지 정적 만족을 구하러 가는 것인지 먼저 자문할 수 있는데 이럴 경우 여러분은 자신이 향락주의자인지 에피큐러스를 추종하는 사람인지를 분별할 줄 알게 된다.
여하튼 그가 주장하는 바는 사람이 음식을 먹고 싶어서 먹게 되면 안 되고 절제있게 먹어야 정적 즐거움을 즐길 수 있다고 했는데 그는 실제적으로 즐거움을 찾았다기보다는 고통이 없기만을 바랬던 것이다.
빵과 물을 밥통의 허기진 고통을 덜려고 그는 먹었던 것 같았는데 금욕주의자가 음식을 밥통의 즐거움을 위해 먹었다고 주장한다면 그야말로 웃기지도 않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그러니까 그에게는 고통이 부재하는 상태가 바로 즐거운 상태이며 이런 상태를 현자의 고상한 덕으로 간주했다.

에피큐러스는 제자와 친구들에게 "문화의 모든 형태로부터 달아나라"고 주문했다.
그는 성적인 충동에 의해 섹스를 하는 것은 동적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단정하고 이런 섹스를 금했다.
그는 말했다.
"섹스는 인간에게 결코 선하지 못하며 만약 해가 안 된다면 다행한 일이다."

에피큐러스는 아이들을 무척 좋아했는데 그렇다면 그는 자신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들의 자녀들을 좋아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를 추종한 루크레티우스Lucretius(200년 후의 사람)는 열정으로부터 떠난 섹스는 해가 되지 않음을 발견했다.
열정이 없는 섹스가 어떤 것인지 궁금하지만 그가 경험을 통해 이런 지식을 갖게 되었을 성 싶은데 별로 대단한 발견이라고 말할 수 없으며, 설령 발견이라고 하더라도 그까짓 것을 아는 데 무려 200년이 걸렸다니 금욕주의 철학의 발달은 너무 더디었다고 생각된다.

에피큐러스는 공리주의 철학자 벤탐Bentham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늘 지혜롭게 혹은 지혜롭지 않게 자신들의 즐거움을 추구한다고 믿었다.
그는 종교와 죽음이 두려움의 근원이라고 생각했는데 종교가 죽인을 불행한 것이라고 말했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으며, 혼은 몸과 함께 멸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근래 사람들에게 종교는 위안인데 그는 종교를 배척하면서 미신은 자연의 법칙을 방해하므로 재앙의 근원이 된다고 주장했으며 신이 사람의 삶을 간섭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시도했다.

에피큐러스는 신은 인간을 다스리는 불필요한 노동을 원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은 사람들로 하여금 두려움에 대한 짐을 덜어주었다.
그는 데모크리티우스의 이론을 받아들인 유물론주의자였기 때문에 데모크리투스와 마찬가지로 원자들은 늘 자연의 법칙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는데 최근 물리학자들에 의해 두 사람의 판단이 옳았음이 증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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