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102 #시라는별 87
기러기
- 메리 올리버
착하지 않아도 돼.
참회하며 드넓은 사막을
무릎으로 건너지 않아도 돼.
그저 너의 몸이라는 여린 동물이
사랑하는 걸 사랑하게 하면 돼.
너의 절망을 말해봐, 그럼 나의 절망도 말해주지.
그러는 사이에도 세상은 돌아가지.
그러는 사이에도 태양과 투명한 조약돌 같은 비가
풍경을 가로질러 지나가지
초원들과 울창한 나무들,
산들과 강들 위로,
그러는 동안에도 기러기들은 맑고 푸른 하늘을 높이 날아
다시 집으로 향하지.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세상은 너의 상상에 맡겨져 있지,
저 기러기들처럼 거칠고 흥겨운 소리로 너에게 소리치지ㅡ
세상 만물이 이룬 가족 안에 네가 있음을
거듭거듭 알려주지.
2024년 갑진년 청룡의 해가 떠올랐다.
2023년 연말은 A형 독감으로 방콕했다. 몸이 살 만해졌는지 2024년 1월 1월 새벽, 그냥 눈이 떠졌다. 산에 갈 생각이 전혀 없었는데, 내 몸이 일어나 주섬주섬 옷을 챙겨입기 시작했다. 그렇게 집을 나서 먼 데 아닌 우리집 뒷산을 올랐다. 얼마만에 맡는 새벽 공기던지. 날이 그리 춥지 않고, 비록 옷은 벗었지만 나무들이 빽빽하고, 무엇보다 높은 아파트 건물들이 산을 둘러싼 형국이라 과연 해를 볼 수 있을까 의문이었다.
새해 첫 해를 보아도, 보지 않아도, 이 새해가 지난 해들과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는 건 모르지 않았다. 삶은 그냥 순간인 것 같다. 나는 다만, 그 새벽 순간 산을 오르고 싶었고 혹시라도 얼굴 내밀지 모를 해를 보고 싶었다.
운이 좋았다. 벌거벗은 나무들 사이로 저 멀리, 붉고 둥근 해가, 천천히, 감질나게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래, 먼 데 안 가고 내 집 뒷산에서 해를 보게 되다니, 청룡의 기운이 내게도 왔구만 뭐. 감사하지 뭐.
메리 올리버의 <기러기>가 떠올랐다.
지난해 가을 아이들과 함께한 귀촌체험에서 기러기떼가 찢어지는 울음소리와 함께 하늘을 수놓는 장관을 본 적이 있다. 기러기들의 울음소리는 메리 언니의 말처럼 ˝흥겨운˝지는 잘 모르겠지만, 진짜로 ˝거칠˝다. 그리고 엄청 시끄럽다. 참새들의 짹짹이 소녀들의 수다 같다면, 기러기들의 꽤액꽤액은 소년들의 아우성 같다.
2024년에도, 나는 ˝착하˝게, ˝참회하며˝ ˝무릎으로˝ 살지 않을 것이다. 다만 살 것이다. ˝내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누군지 모를, 무수한 외로운 이들과 함께. 거칠더라도, 흥겹게 살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