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속의 늙은 아이들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차은정 옮김 / 민음사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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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적 혼란>만큼은 못했지만, 애트우드만의 상상력과 위트가 넘치는 단편집. ‘응급처치‘와 ‘조개껍데기사‘가 제일 재밌었다. 애트우드는 점점 홀로되고 쓸쓸해지는 것이 늙어가는 일이라고, 한줌 먼지가 되었거나 될 존재들의 늙은 인생을 담담하게, 때로 유쾌하게 그려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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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02 #시라는별 87

기러기
- 메리 올리버

착하지 않아도 돼.
참회하며 드넓은 사막을
무릎으로 건너지 않아도 돼.
그저 너의 몸이라는 여린 동물이
사랑하는 걸 사랑하게 하면 돼.
너의 절망을 말해봐, 그럼 나의 절망도 말해주지.
그러는 사이에도 세상은 돌아가지.
그러는 사이에도 태양과 투명한 조약돌 같은 비가
풍경을 가로질러 지나가지
초원들과 울창한 나무들,
산들과 강들 위로,
그러는 동안에도 기러기들은 맑고 푸른 하늘을 높이 날아
다시 집으로 향하지.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세상은 너의 상상에 맡겨져 있지,
저 기러기들처럼 거칠고 흥겨운 소리로 너에게 소리치지ㅡ
세상 만물이 이룬 가족 안에 네가 있음을
거듭거듭 알려주지.

2024년 갑진년 청룡의 해가 떠올랐다.
2023년 연말은 A형 독감으로 방콕했다. 몸이 살 만해졌는지 2024년 1월 1월 새벽, 그냥 눈이 떠졌다. 산에 갈 생각이 전혀 없었는데, 내 몸이 일어나 주섬주섬 옷을 챙겨입기 시작했다. 그렇게 집을 나서 먼 데 아닌 우리집 뒷산을 올랐다. 얼마만에 맡는 새벽 공기던지. 날이 그리 춥지 않고, 비록 옷은 벗었지만 나무들이 빽빽하고, 무엇보다 높은 아파트 건물들이 산을 둘러싼 형국이라 과연 해를 볼 수 있을까 의문이었다.

새해 첫 해를 보아도, 보지 않아도, 이 새해가 지난 해들과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는 건 모르지 않았다. 삶은 그냥 순간인 것 같다. 나는 다만, 그 새벽 순간 산을 오르고 싶었고 혹시라도 얼굴 내밀지 모를 해를 보고 싶었다.

운이 좋았다. 벌거벗은 나무들 사이로 저 멀리, 붉고 둥근 해가, 천천히, 감질나게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래, 먼 데 안 가고 내 집 뒷산에서 해를 보게 되다니, 청룡의 기운이 내게도 왔구만 뭐. 감사하지 뭐.

메리 올리버의 <기러기>가 떠올랐다.
지난해 가을 아이들과 함께한 귀촌체험에서 기러기떼가 찢어지는 울음소리와 함께 하늘을 수놓는 장관을 본 적이 있다. 기러기들의 울음소리는 메리 언니의 말처럼 ˝흥겨운˝지는 잘 모르겠지만, 진짜로 ˝거칠˝다. 그리고 엄청 시끄럽다. 참새들의 짹짹이 소녀들의 수다 같다면, 기러기들의 꽤액꽤액은 소년들의 아우성 같다.

2024년에도, 나는 ˝착하˝게, ˝참회하며˝ ˝무릎으로˝ 살지 않을 것이다. 다만 살 것이다. ˝내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누군지 모를, 무수한 외로운 이들과 함께. 거칠더라도, 흥겹게 살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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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4-01-02 1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오신 책읽기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꽤액꽤액은 오리 아닌가요? 기러기는 기럭기럭..

첫해를 보셨다니 부럽습니다. 전 그냥 잤다는..사진으로 대리만족 하겠습니다 ~!!

행복한책읽기 2024-01-05 01:06   좋아요 2 | URL
ㅋㅋㅋ 새파랑님 반가워요. 기러기는 기럭기럭 울지 않더라구요. 오리나 거위처럼 울던걸요. 잊지 않고 댓글 달아주어 고맙습니다. 올해는 어찌어찌 읽고 쓰기를 해보고 싶어요. 새파랑님도 새해 복많이많이 받으세요.^^

scott 2024-01-02 1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해피 뉴이어^^ 소식 전해 주셔셔 감사합니다 새해 복 마뉘 ^^

행복한책읽기 2024-01-05 01:07   좋아요 1 | URL
아, 우리 스콧님. 여전히 열심히 읽고 쓰고 계시겠죠. 반갑게 맞아주셔 고맙습니다. 새해 복많이많이 받으세요. ^^

페넬로페 2024-01-02 1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행복한책읽기님!
반가워요, 많이 많이~~
여전히 시를 좋아하시는군요.
새해 보신 청룡의 해 기운을 받아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길요^^

행복한책읽기 2024-01-05 01:09   좋아요 1 | URL
와, 페넬로페님. 저를 잊지 않고 반갑게 맞아주시다니. 넘 기쁩니다요. ㅋ 서재를 떠나 살다 보니, 서재 달인들은 어떻게 그렇게 계속 읽고 쓰는지 더 감탄하게 되었어요. 올해는 ‘시‘라도 올려보려 합니다. 페넬로페님도 새해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얄라알라 2024-01-03 0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행복한 책읽기님~~~~~~~
독감 바이러스는 떠나갔나요?

기운찬 행운의 새해 맞으시고 복 많이 받으시어요

행복한책읽기 2024-01-05 01:11   좋아요 2 | URL
와, 알라님. 바이러스 떠났습니다. 뒤도 안돌아보구요. ㅋ 알라님도 청룡의 기운 받아 건강하시고, 새해 복도 그득그득 챙기시기 바랍니다. 올해는 자주는 아니어도, 이따금 이렇게라도 뵙기를요. ^^
 

20230411 #시라는별 86

총독부에 다녀올게
- 이바라기 노리코

한국의 노인 중에는
지금도 화장실에 갈 때
유유히 일어나
˝총독부에 다녀올게˝
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던가
조선총독부에서 소환장이 오면
가지 않고는 못 버티던 시대
불가피한 사정
이를 배설과 연결 지은 해학과 신랄함

서울에서 버스를 탔을 때
시골에서 온 듯 보이는 할아버지가 앉아 있었다
두루마기를 입고
검은 갓을 쓴
소년이 그대로 자라 할아버지가 된 듯
순수 그 자체의 인상이었다
일본인 여럿이 일본어로 몇 마디 나누었을 때
노인의 얼굴에 공포와 혐오
스치는 것을 보았다
어떤 말보다도 강렬하게
일본이 한 짓을
그때 보았다


일본인 시인 이바라기 노리코는 이웃나라 한국의 글과 예술을 애정했다. 어린 시절 읽은 조선 민요의 소박함과 기지에 끌려, 조선의 자기와 그릇, 각종 불상과 민화도 섭렵해 나갔다. 이웃나라의 예술에 대한 사랑은 그 나라의 언어를 배우고자 하는 열망으로 이어졌다. 반백년을 살고 난 어느 날 남편을 잃고 이바라기 노리코는 이웃나라의 언어를 배우는 것으로 생의 빈 자리를 채워가기 시작했다. 한글 공부는 자연스레 그를 한국의 시인들에게 인도했다. 윤동주, 조병화, 신경림. 그들의 시를 읽는 것은 한국의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것이었다.

[아름다운 것들이 쓸모없어지는 시절은 전쟁과 함께 온다. 승리만이 모든 것인 세상에서 소소한 시, 그림, 책, 꽃, 낭만 같은 것들은 화염 속으로 사라진다. 이바라기 노리코가 소녀였을 때, 일본은 전쟁을 선포했다. 소녀는 헌책방에 숨어들어 새와 달과 사랑을 노래하던 천 년 전 시를 읽으며 살벌한 시대를 보냈다. 스무 살 되던 해, 그녀의 나라는 전쟁에서 졌다. 공습으로 불탄 긴자 거리를 터널터널 걸으며 그녀는 중얼거렸다. / 이런 멍청한 짓이 또 있을까 . . . . . . ] (정수윤 옮긴이의 글 중)

일본인 시인 이바라기 노리코는 인간이 인간을 총칼로 짓밟는 짓을 ˝멍청한 짓˝이라고 보았다. 그녀는 일본이 저지른 만행에 침묵하지 않고 ˝살아 있는 한 살아 있는 것들의 편이 되어˝(<이 실패에도 불구하고> 중), 그들 중 억압 받은 자들의 편이 되어, 그것을 넘어 억울하게 죽은 이들의 편이 되어, 시를 썼다.

<총독부에 다녀올게>는 역사 의식이 없는 시인이라면, 반성할 줄 모르는 시인이라면, 결코 쓸 수 없는 시가 아닐까. 일제시대를 산 소년은 자라 할아버지가 되었다. 해방 된 지 몇십 년이 흘렀음에도 버스 안에서 들려오는 몇 마디 일본어에도 노인의 얼굴은 ˝공포와 혐오˝로 일그러진다. 그 표정 속에서 ˝어떤 말보다도 강렬하게 / 일본이 한 짓을˝ 볼 줄 아는 시인. 일본인으로서의 죄의식을 이렇게 솔직하고도 시원하고도 간명하게 드러낼 줄 아는 시인이어서, 이바라기 노리코 시인이 마음에 든다. 1999년 출간된 시집 『기대지 않고』 저자 후기를 읽고 이 시인이 더욱 좋아졌다.

[어느 날, 내몽골에서 항공우편이 도착했다.
H라는 일본 청년이 보낸 편지였는데, ˝삼림지대 자원봉사 일로 일 년 동안 내몽골에서 지낼 예정인데 여기서 읽으려고 당신의 시집을 한 권 가지고 왔습니다.˝라고 쓰여 있었다. 물론 미지의 청년이고 추정 나이는 25세.
간결하지만 정감 있는 편지였다.
이런 젊은 사람도 있구나 싶어 놀랍기도 했고, 몽골의 천공에 펼쳐져 있을 수많은 별들을 상상하기도 했다.
삼십 년 지기 친구이자 편집자인 나카가와 미치코 씨가 새 시집을 내자고 강력하게 권했을 때도 좀처럼 결심이 서지 않았는데, 내몽골에서 온 한 통의 편지를 계기로 문득 여덟 번째 시집을 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시를 쓴다는 것은 무엇인가?‘ 라는 물음을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던져왔기 때문이다.
원고도 완성되기 전에 표지그림이 먼저 도착했다. 의자 그림이어서 초고에 있던 <기대지 않고>로 표제까지 정해져버렸다.
이번뿐만 아니라 항상 외부에서 다양한 힘이 작동해서 떠밀리듯 어떻게든 형태가 이루어져 왔다. 진심으로 감사하게 생각한다.
돌이켜보면, 인생 전체에서 나의 의지로 분명히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간 경험은, 손으로 꼽아 딱 다섯 번뿐이었다.] (1999년 가을, 이바라기 노리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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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9-29 22: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처음 가는 마을 봄날의책 세계시인선 3
이바라기 노리코 지음, 정수윤 옮김 / 봄날의책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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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04 #시라는별 85

벚꽃
- 이바라기 노리코

올해도 살아서
벚꽃을 보고 있습니다
사람은 한평생
몇 번이나 벚꽃을 볼까요
철들 무렵이 열 살이라고 한다면
아무리 많아도 칠십 번은 볼까
서른 번 마흔 번 보는 사람도 많겠지
너무 적네
그것보단 훨씬 더 많이 본다는 기분이 드는 건
선조의 시각도 섞여들고 더해지며
꽃 안개가 끼기 때문이겠죠
곱기도 요상하기도 선뜩하기도
종잡을 수 없는 꽃의 빛깔
꽃보라 사이를 휘청휘청 걷노라면
어느 한순간
더 많은 승려처럼 깨닫게 됩니다
죽음이야말로 자연스런 상태
삶은 사랑스런 신기루임을


<봄날의책> 세계시인선 시집을 작년부터 한 권씩 한 권씩 사서 읽어보고 있다. 이 세계시인선은 기획자의 발굴의 눈이 돋보인다. 듣도 보도 못한 못한 시인들이 대부분인데, 시집을 열면 어떻게 이런 시인을 전혀 몰랐을까, 어떻게 이런 시들을 이제야 읽게 되었을까 통탄하게 된다.

『처음 가는 마을』​ 은 <봄날의책> 세계시인선 세 번째 시집이다. 지은이 이바라기 노리코는 우리에겐 일제 강점기였던 1926년 태어나 2006년 세상을 떠났다. ˝사랑스런 신기루˝ 같은 이승의 삶을 80년 살아냈고, ˝철들 무렵˝부터 ˝곱기도 요상하기도 선뜩하기도˝ 한 벚꽃들을 ˝칠십 번˝을 본 후 눈을 감았다. 반백 년을 살고 나면 이바라기 노리코 시인이 ˝꽃보라 사이를˝를 걷다 얻은 저 깨달음, ,

[죽음이야말로 자연스런 상태
삶은 사랑스런 신기루임을]

이라는 진실을 온몸으로, 부르르, 느끼게 된다. 곱고 또 곱되 ˝선뜩하기도˝ 한 벚꽃 빛깔처럼 서늘한 진실이다. 올해는 날이 푹해 벚꽃이 일찍도 개화했다. 그 덕에 산수유,진달래, 매화꽃, 목련, 개나리, 벚꽃 등등의 온갖 꽃을 한 시기에 같이 보게 되는 호사를 누린다. 살아 봄꽃 잔치에 발을 디딜 수 있어 감사하다. 아직 ˝꽃보라 사이를˝ 허리 꼿꼿이 펴고 걸어다닐 수 있어 감사하다.

『처음 가는 마을』​ 에는 <벚꽃>보다 울림이 큰 시들이 많지만, 지금은 꽃들이 만개하는 4월이라, 그중 벚꽃이 유독 팝콘 터지듯 톡톡톡 꽃망울을 터뜨려 세상을 눈 온 것마냥 하얗게 물들이고 있어 이 시를 골랐다. 이바라기 노리코 시인은 좋은 시인이다. 윤동주 시인의 향기가 난다. 일본이 저지른 만행에 고개 숙이는 것을 넘어 고통 받은 이들을 대신해 그 잔혹함을 고발하고 그들을 위로할 줄 아는 시인이다. 이제라도 이바라기 노리코를 알게 돼 감사하다.

[그녀의 시에는, 명징한 주제를 되도록 쉽고 간결하게 표현하여 인간의 본질 근처를 단번에 찌르는 단호함이 있었다. 단순한 언어에 깊은 뜻을 담는 일, 어렵지 않은 시어로 강력한 의지를 드러내는 일, 그리하여 세상을 조금이라도 나은 쪽으로 가게 하는 일, 이것이 이바라기 노리코가 시인으로 살면서 숨을 거두는 그날까지 쉬지 않고 해온 작업이다.] (정수윤 옮긴이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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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쪽 바람
메리 올리버 지음, 민승남 옮김 / 마음산책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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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30 #시라는별 84

서쪽 바람 West Wind
- 메리 올리버 Mary Oliver

1
내생이라는 게 있다면, 나와 함께 갈래? 그때까지도? 우리가 무언가가 되어야 한다면, 함께인 게 좋겠지. 상상해봐! 작은 돌멩이 두 개, 갈매기 날개 아래 붙어 안개를 헤치고 날아가는 벼룩 두 마리! 아니면, 풀잎 열 장. 레이스로드 가장자리에 뒤엉켜 있는 인동덩굴 열 줄기! 해변자두! 겨울 숲으로 미끄러지듯 날아들어 먼지 빛깔 리기다소나무와 결합하여 아주 조그맣게

소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

소리 내는 눈송이들. 아니면, 바다 위로 내달리며 수면에 마맛자국 내고 래커 칠하는 회색의 빛, 비. 오전내 그리고 오후까지, 서쪽 바람의 젊음과 풍부함, 즐거움에서 나와 프로빈스타운의 지붕들을 탁탁 두드려대는 비.
.
.
(중략)

8
그 젊고 키 큰 영국 시인ㅡ곧 죽음을 맞이할 자, 작은 배 타고 푸른 연무를, 그다음엔 폭풍을, 그다음엔 선회하는 잿빛 파도의 문턱을 지나게 될 자ㅡ친구를 만나러 피사에 갔지. 친구를 만나 화창한 오후를 함께 보냈지. 나는 이 시인을 사랑하고, 그건 여기서든 저기서든 아무 의미도 없지만 내 마음속 정원과도 같지. 그러니 내 사랑은 자신에게 주는 선물. . . . . (중략)

10
어둠은 어둠다운 일을 하지

작디작은 날개를 지닌 무언가가
나무껍질의 엄지손가락 아래서 떨고 있어.

바다는 은빛 재킷을 입고 숨을 쉬어

밖에서는, 달빛 아래, 격자에 매달려,
꽃들이 피어나,
저마다 어려운 생각처럼 멋지게 펼쳐져.

그렇게 우리는 함께 어둠을 건너지.
.
.
(중략)

12
귀뚜라미는 사실 난로가 아니라 냉장고 밑 카펫 덤불을 찾아든 거였어. 위에서 울리는 위잉 소리와 친구 되었고, 거기서 밤낮으로 신의 가장 귀중한 선물이 나왔지. 온기. 특히 저녁때면 귀뚜라미는 행복해서 노래를 불렀어. 그리고 밤이 되면 냉장고 밑에서 기어 나왔어. 귀뚜라미는 매일 밤 마루 틈새에서 달콤한 부스러기를, 작고 통통한 씨앗을 발견할 수 있었지. 그렇게 희망에 익숙해져갔어.
.
.
(중략)

13
이제 바람이 전등을 흔들어
불빛 너울거리고
바깥에선 백만 개 별들이 빛나고 있어
이제 바다가 바람을 부르고

이제 바람은 물처럼 창문으로
마당으로 정원으로 긴 검은 하늘로 흘러가지

나, 바람이 휩쓸고 지나간 방에 앉아, 미소 지어.
나, 연필을 집었다가, 내려놓았다가, 다시 집어 들어.
나, 너를 생각하고 있어.
나, 늘 너를 생각해.


메리 올리버의 시집 『서쪽 바람』을 출간되지마자 구매해 놓고 띄엄띄엄 읽다 며칠 전 다 읽었다. 언제나 그렇듯 메리 언니의 시들은 편안해서 좋다. 시어들을 해체할 필요 없이, 숨은 뜻을 헤아릴 필요 없이, 그냥 받아들이게 되는 시.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는 시. 그러다 어느 순간 ‘아!‘하고 탄성을 지르게 되는 시. 나는 메리 올리버의 이런 편안함과 묵직함이 참 좋다.

이 시집의 표제작인 <서쪽 바람>은 13편의 시들로 이루어진 시집 속의 작은 시집 같은 시다. 형식이나 소재가 다양하지만 13편의 시들에서 내가 찾아낸 주제어는 ‘함께, 어둠, 사랑, 온기‘이다.

우리가 무언가가 되어야 한다면
함께인 게 좋겠지
. . .
그렇게 우리는 함께 어둠을 건너지.

나는 혼자 있음도 사랑하는 사람이지만, 살면 살수록 하나보다는 둘이, 둘보다는 셋이 , 셋보다는 여럿이 함께했을 때의 기운을 느껴가는 중이다. 물론 그 기운에는 스트레스도 섞여 있다. 그럼에도 ‘함께‘가 선사하는 어마무시한 그 ‘무엇‘은 경험해본 자들은 알 것이다.

메리 올리버는 이 시에 등장하는 ˝젊고 키 큰 영국 시인˝ 퍼시 비시 셸리를 평생 흠모했다고 한다. 이 시의 제목과 내용도 셸리의 <서풍에 부치는 노래>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셸리는 바다를 사랑한 시인이었다. 시간만 나면 배를 타고 ˝푸른 연무˝ 같은 바다에 둥둥 떠 있는 것을 즐겼다. 어느 폭풍우 치는 날, 셸리는 자신의 아이를 밴 메리 셸리의 만류를 뿌리치고 바다로 나갔다가, 자신이 사랑한 ˝잿빛 파도의 문턱˝을 넘어 바다에 묻혔다. 나는 엄마가 되기 전 셸리와 셸리의 시를 좋아했다. 엄마가 되고 난 후에는 뱃속 아이와 아내를 남겨두고 자기 만족을 위해 죽을 길로 나선 셸리를 더는 좋아할 수가 없었다. 다만 그의 시들은 여전히 사랑할 수밖에 없다.

셸리를 사랑한 메리 올리버는, 그 사랑이 아무런 의미도 없을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론 ˝내 마음속 정원과도˝ 같은 구실을 한다고, 그렇기에 사랑이란 ˝자신에게 주는 선물˝이라고 말한다. 사랑의 거름이 뿌려지는 ˝내 마음속 정원˝은 ˝온기˝와 ˝찰기˝로 따스해지고 끈끈해지리라. 그 따스함과 끈끈함을 ˝함께˝ 나누었을 때, 우리는 칠흑 같은 어둠도 거뜬히 함께 통과할 수 있다. 그런 뒤엔, ˝바람이 휩쓸고 지나간 방에˝ 홀로 앉아 미소 지을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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