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거 전에 출판사에서 받아서 읽은 거 같은데 잊어버리고 두번 반해버렸네
가끔 친한 사람들에게 ‘사주타령’을 하면 의사가 과학적이지 못하다는 타박을 듣기 일쑤지만, 사주팔자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 하는 말이다. 명리학은 빅데이터를 토대로 한 인간의 성정(性情)과 기질(器質)에 대한 통계적 분석이다.5/296
아빠가 가장 작은 단어 무더기를 집어 들었다. 엄마는 어디로 가게 될까, 나는 추측해보려 했다. ‘너무 높은 곳도 아니고, 너무 낮은 곳도 아니고.’ 나는 속으로 노래 불렀다. 하지만 단어들을 내 손에 건네는 대신, 아빠는 벽난로를 향해 성큼성큼 세 걸음을 걸어가더니 불꽃 속으로 던져 넣었다. 세 장의 쪽지였다. 아빠의 손을 떠난 쪽지들은 열기를 타고 춤을 추며 각기 다른 안식처를 향해 날아갔다. ‘릴리’가 채 내려앉기도 전에 불타 오그라들기 시작하는 게 보였다. 나는 소리를 지르며 벽난로로 달려갔다. 아빠가 내 이름을 소리쳐 부르는 게 들렸다. 쪽지가 불길 속에서 뒤틀리고 있었다. 나는 구해내려고 손을 뻗었지만, 갈색 종이는 이미 숯 검댕으로, 거기 적혀 있던 글자들은 모두 흔적으로 변해버린 뒤였다. 겨울이 되어 빛이 바래고 바삭바삭해진 오크 나뭇잎을 잡듯 잡으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손가락으로 감싸자 그 단어는 부서져내렸다. 나는 영원히 그 순간 속에 갇혀 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아빠가 바람이 일 정도의 힘으로 나를 잡아챘다. 아빠는 나를 데리고 스크립토리엄 바깥으로 달려 나갔고, 눈 속에 내 손을 넣었다. 안 아파요. 아빠의 얼굴이 잿빛이라 나는 그렇게 말했지만, 손을 펴자 새까매진 단어 조각이 녹아내린 살갗에 눌어붙어 있었다.10/496
모든 인간은 근본적으로 자신이 고유한 의미를 지닌 존재라고 믿는다. 그러지 않으면 각자의 인생을 버텨내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김성수의 머릿속에서는, 그러한 믿음이 그저 자아의 기초가 되는 주춧돌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가장 중요한 핵심이었다. 물론 그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은 자신의 내면에 자리한 자기애와 이기심을 좀처럼 인정하지 않기 마련이어서, 그 스스로는 그런 사실을 의식하지도 못했다. 교양 교육을 잘 받은 현대인으로서, 그에겐 자신만의 도덕률이 있었고, 별 어려움 없이 이를 준수하는 스스로에게 매우 만족했다. 말하자면, 그는 한국의 독립 자체에는 찬성했지만, 국내에서 자체적으로 발생하는 행동주의 운동이라면 그 어떤 형태이든 반대했다. (사회적 변화는 위에서부터 시작해 아래로 내려올 뿐이며, 이를 위한 유일한 방법은 미합중국을 향해 한국을 해방해 달라고 애원하는 것밖에 없다고 그는 믿었다.) 작은 땅의 야수들(리커버 특별판) 중에서20%
친구들과 함께 있을 때면 그는 일본의 압제에 대해 적절한 비판을 토로하며 그 자신의 유려한 웅변과 입 속에 맴도는 일제 담배의 부드러운 맛을 동시에 즐겼다. 그는 육체적으로, 재정적으로, 때로는 감정적으로도 상당히 빠져들어 가는 연애들을 여유롭게 지속해 나가곤 했지만, 자신의 아내 앞에서까지 그러한 일들을 버젓이 과시하여 굳이 불필요한 수치를 안겨줄 만큼 천박하지는 않았다. 한마디로, 한 해에 거의 20만 원씩 벌어들이는 저명한 지주 가문의 외동아들로 태어난 그 남자의 도덕관념과 인격은 그와 비슷한 삶의 조건을 지닌 다른 한국 남자들에 비해 딱히 나쁘다고 할 수는 없었다. 작은 땅의 야수들(리커버 특별판) 중에서20%
흑단처럼 검은 머리카락은 물결치는 가리비 모양으로 이마에 붙이고 목 뒤로 감아올려 서양식으로 꾸민 모습이었다. 꽃 자수를 놓은 비단 가죽신 대신 백인 여자들만 착용하는 앙증맞은 명주 스타킹 위로 발등 끈을 조이는 구두를 신은 그는 은실의 사촌인 예단이었다. 가까운 친구들과 구애자들 사이에서는 ‘단이’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그가 이곳에 온 건 월향을 경성으로 데려가기 위해서였다. 그러면 지난 일은 모두 잊고 새 출발을 할 수 있으리라는 명목이었지만, 은실이 그처럼 월향을 멀리 떠나보내는 진짜 이유는 하야시가 월향의 임신 사실을 발견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라는 걸 모두가 알았다. 16%
영구는 은화 두 닢을 발견하고는 즉시 제 주머니에 넣었지만, 은가락지와 담뱃갑은 양손에 하나씩 들어 보였다. "돈은 마음대로 가져. 하지만 그 물건 두 개는 안 돼." 정호가 말했다. 그의 심장이 쿵쿵 뛰고 있었다. "그건 돌려줘." "내가 미쳤냐? 이걸 돌려주게?" 영구가 코웃음을 쳤다. "부자들이나 갖는 물건이잖아. 너 이거 훔쳤냐? 훔쳤지?" "아버지가 죽기 전에 남겨주신 물건이야." 정확히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베개 아래서 찾아낸 것들이지만, 정호는 결국 그게 그거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아버지의 유일한 아들이자 후계자이니까. 값어치가 나가서가 아니라, 아버지의 유품이기 때문에 그 물건들은 정호의 것이었다. 작은 땅의 야수들(리커버 특별판) 중에서19%
정말 오랜만에 딱 내 취향의 이야기들을 접했다. 물론 다 긍정하며 읽은 건 아니지만. 동시대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이어서 논문과 책을 다 따라 읽을 수 있었다면 좋겠다 싶다. 벤야민처럼 설령 그랬다 해도 읽을 수 없었겠지만. 바르부르크 관련 책들을 쭉 읽어봐야겠다.가르강시아와 팡타그뤼엘이 문득 떠올랐는데 ㅋㅋㅋ 이걸 못외워서 가르강 팡타지아 머시기라고 말했다. 요즘은 그렇게 말들이 안떠올라ㅋㅋㅋ다리가 다 나으면 학교에 찾아가 자료를 더 봐야겠다. 학교 다니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