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을 보여주는 21세기 과학
레오 김 지음, 김광우 옮김 / 지와사랑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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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을 보여주는 21세기 과학』(知와 사랑): 역자 후기


제목: 형이상학의 부활

이 책을 번역하면서 나는 레오 김이 우리 존재의 궁극의 근거를 과학 지식을 바탕으로 한 형이상학의 논리로 부활시켰다는 깊은 인상을 받았다.

형이상학은 고대 그리스의 현인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확립되었다.
18세기의 철학자 이마누엘 칸트가 형이상학이 이론적 학문으로서 가능한가 하는 회의적인 태도를 취한 이래 진로가 불투명해지더니 1930년대에는 논리학이 부상하면서 철학 내에서 그 설 자리마저 잃었다.
형이상학의 대부분 명제들이 논리학자들에 의해 무의미한 것으로 치부되면서 한낱 조소거리가 되었다.
형이상학이 공격을 받은 주요인은 비논리적인 사유체계 때문인데, 입증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언어 과학으로서의 논리적 수순을 밟지 못했기 때문이다.
즉 타당성이 결여된 문법 구조 내에서 전개시킨 사유는 그 의미를 용인받지 못하는 것이다

형이상학은 제한된 영역에 관한 지식이 아니라 보편적ㆍ전체적 지식을 추구한다.
눈에 보이는 세계 배후에 있는 존재 근거로서 영원불멸의 실재를 탐구하는 것이다.
근대 과학이 특수 과학의 방법에 의해 실재의 인식만을 인정하게 되자 형이상학의 뿌리는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형이상학metaphysics은 말 그대로 과학physica 이후meta의 사유를 말한다.
그러므로 과학에 대한 충분한 지식이 없으면 다양한 영역들에 대한 지식을 기반으로 보편적ㆍ전체적 지식을 생산해낼 수 없다.
역자는 물리학자들의 견해에 관심가져왔는데, 21세기에는 물리학자뿐만 아니라 다양한 영역의 과학자들만이 형이상학을 되살릴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과학을 기반으로 우리의 궁극의 의문에 답을 줄 수 있는 사람들이 과학자들이다.
인간은 어디서 왔고, 누구이며, 어디로 가는 것일까? 다른 생물과 인간은 과연 다른 존재일까?
인간이 진화의 결과물에 불과하다면 도덕을 포함하여 우리가 중요시하는 가치들은 인간에게만 의미있을 뿐 절대적 가치는 상실하는 것일까?
우리의 마음과 정신이 실재를 인식할 능력이 있기는 하는 것일까?
이런 형이상학의 단골 메뉴들이 21세기 과학자들이 풀어야 할 숙제가 되었다.

레오 김은 과학과 영성, 혹은 과학과 형이상학에 다리를 놓았다.
철학에서 보면 과학의 지식으로 사유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은 것이며, 과학에서 보면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인간의 궁극의 의문들을 실은 수레를 영성, 혹은 형이상학이 끌게 한 것이다.
그는 과학의 한계를 잘 알고 있으며, 형이상학의 놀라운 발견도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
과학과 영성이 화합하지 못하면 우리가 우리의 의문들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는 안다.
여덟 살 때 가까운 친구 스탠리의 죽음에서 생명과 내세에 대한 의문이 생겼고, 그 후 과학자가 되어 암을 치료하는 신약을 개발하고 연구에 매진하면서 많은 암환자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고 생명과 내세에 관해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는 20세기의 과학 이론뿐만 아니라 21세기의 새로운 이론들도 두루 섭렵하여 우주의 창조와 생명의 기원에 관한 그 다음의 이야기, 즉 형이상학을 전개하고 있다.

그가 건설하는 다리는 동양의 종교와도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그의 저술을 통해 과학의 영역들을 두루 거친 뒤 무지개 너머에 있는 형이상학의 세계로 들어가게 된다.
특히 생명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게 된다.
시간이 환영이고, 우리의 자각이 환영이라서 실재에 대한 여태까지의 우리 인식의 근거가 무너지더라도 실재로서의 생명만큼은 얼마나 자유로운지 그리고 영원불멸하는지 알게 된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우주와 일체라는 인식에 도달하게 된다.
이런 인식은 과거에 영성에 매진한 소수에게만 가능한 일이었으나 레오 김은 모든 독자가 그런 큰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도록 매우 친절하게 한 걸음씩 이끈다.

그는 “우리가 어디서 왔고, 누구이며, 어디로 가는가?” 하는 궁극의 의문에 답을 찾기 위해 과학과 영성의 문턱을 넘나들며 어느 한편으로도 치우치지 않은 채 두 분야의 이점과 허점을 인정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숙원인 의문을 풀기 위해 두 분야의 불화를 서로 보완하는 방법으로 해결함으로써 그 답을 찾아냈다.

물론 그의 답은 과학의 입장에서 보면 미흡할 수 있으며 영성의 입장에서 보면 지나치게 과학에 의존한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그러나 역자의 입장에서 말하면 그는 최선을 다해 답을 제시했으며, 그의 답은 매우 설득력이 있다.
최소한 독자는 우리가 어디서 왔고, 누구이며,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본래 왔던 곳으로 돌아간다.
우리가 누구인가 하는 의문은 본래 왔던 곳으로 돌아갈 수 있는 우주의 영원한 실재라는 답으로 풀린다.
몸은 환영에 불과하여 죽음이란 환영의 의상을 벗어던지는 것이며, 그것의 정신은 본래 에너지의 산물이었으므로 영원히 우주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즉 죽음으로써 환영이 소멸되고 오히려 실재가 드러나는 것이다. 레오 김은 인류의 오래된 숙제에 대한 답을 성실한 태도로 직면했으며, 역자는 그의 답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이 책은 생명공학, 화학, 생물학, 물리학, 의학을 포함한 모든 과학 전공자는 물론 철학, 신학, 종교학 전공자 그리고 그 밖의 인문학과 예술과 관련된 사람들에게도 매우 유익하다.
인간은 환경의 동물이다.
우리의 환경은 태양계뿐만 아니라 우주 그리고 그 너머에 있는 거의 무한한 평행우주들이다.

이 책은 우리의 환경을 이해하고 우리를 지탱해주는 생명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 지식 외에도 희망을 심어준다.
저자는 암을 치료하듯 과학과 영성의 불화를 치료하기 위해 임상 실험적인 역작을 내놓았다.
과학과 영성이 기꺼이 손을 맞잡고 나아갈 수 있는 다리를 놓았다.
이 책을 번역하면서 역자는 구름 위에 놓인 다리를 건너면서 매우 들뜬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이 기분을 고스란히 독자들에게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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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오브리스트Hermann Obrist(1862-1927)>





뮌헨 유겐트슈틸의 전개에서 중추적 역할을 담당한 헤르만 오브리스트Hermann Obrist(1862-1927)는 스위스 출신 의사 아버지와 스코틀랜드 출신 귀족 어머니 사이에서 취리히 근교 킬히베르크Kilchberg에서 태어났다.
유년시절 자연의 현상과 힘을 느끼면서 식물과 동물을 관찰한 그는 하이델베르크Heidelberg에서 자연과학을 공부했다.
1886년 베를린에서 한 학기를 보내면서 미술에 뜻을 두게 되었으며 그때부터 조형예술 분야에서만 활동하게 되었다.
이듬해 영국과 스코틀랜드를 여행하면서 미술공예운동을 알게 되었으며, 카를스루에Karlsruhe의 공예학교에서 도자기를 공부했고 도자기작품으로 1889년 파리의 만국박람회에서 금메달을 수상했다.
그 후 조각으로 눈을 돌려 파리에 거주하다가 1892년 이후에는 피렌체에서 거주했다.
그곳에서 그는 자수예술의 토대를 만들었으며 2년 뒤 뮌헨으로 갔다.

오브리스트는 1896년 미술에서의 자연에 대한 추상적 접근방식을 보여주는 35점의 자수제품을 선보인 뒤 유명해졌다.
주목할 만한 작품은 태피스트리 <채찍선 Whiplash>이다.
오랫동안 그를 위해 수를 놓아준 베르트 루셰트Berthe Ruchet가 제작한 이 태피스트리의 요동치고 뒤틀린 형태는 이국적이며 해초를 연상시켰다.
이 작품은 새로운 응용미술의 탄생이라는 평을 들었다.
여기서 표현된 식물은 여러 해 살이 풀로 뿌리를 돼지가 잘 먹는다고 하여 소브레드라고 하는 시클라멘cyclemen으로 이 식물이 채찍질의 역동적인 양식화된 장식으로 변했다.
시클라멘이라는 표현대상은 창조된 자연을 의미하며 부분으로서 전체를 대표한다.
뿌리로부터 정교하게 갈라져 나온 가지, 수액이 흐르는 나무기둥, 고정되어 있는 꽃봉오리와 수술을 통해 식물의 존재뿐 아니라 생성 또한 존재한다.

오브리스트는 1897년 브루노 파울, 리하르트 리메르슈미트 등과 함께 뮌헨에 미술수공예연합공방의 설립했다.
이 공방은 미술가, 공예가, 디자이너들에게 작품을 전시, 판매할 기회를 주었다.
추상에 대한 그의 개념을 뮌헨에 와 있던 러시아 화가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1866-1944)가 받아들였다.
오브리스트는 자신의 글에서 자연 자체보다는 자연의 역동성이 미술의 주제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가 소장한 사진과 그 밖의 이미지들 중에는 달팽이의 엑스레이 사진과 원시미생물을 확대한 사진도 있었다.
물속에서 요동치는 우아하고 길며, 구불구불하고 선적인 해파리의 촉수보다 더욱 강렬하게 우리의 생생한 감정을 요동시키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그는 자신의 책에 있는 에른스트 하인리히 헤켈의 삽화에 대해 언급했는데, 헤켈은 오브리스트의 작품이 단순히 추상적 공상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오브리스트는 작품을 통해 인간, 신, 자연이 하나라는 일원론적 세계관을 구현했는데, 일원론은 신의 심오한 본질이나 행위에 관한 지식을 신비적 체험 혹은 특별한 계시에 의해 알게 되는 철학적, 종교적 지혜 및 지식을 표방한 신지학Theosophy처럼 19세기 말에 관심을 모은 신비적인 믿음이었다.
헬레나 페트로브나 블라바츠키Helena Petrovna Blavatsky(1831-91) 여사가 몇 명의 저명한 인사들과 함께 1875년 미국에 신지학협회를 창립한 뒤 널리 알려진 비의적 종교철학, 신지학은 미술계에서 인기를 끌었으며 고대의 신비적, 비의적 전통에 대한 관심을 되살리는 데 일조했다.
그녀는 1877년에 첫 번째 주요저서인 『베일을 벗은 아이시스 Isis Unveiled』를 출간했는데, 이 책에서 당시의 과학과 종교를 비판하고 신비적 체험과 교리가 영적 통찰과 권능을 얻을 수 있는 수단임을 주장했다.
<베일을 벗은 아이시스>는 주목을 끌었지만 신지학협회는 쇠퇴했다.
모든 실재를 단일한 통일체로 환원시키는 폭넓은 철학적 전통으로서의 일원론의 한 형태인 신지학은 직관이나 명상을 통해 접촉할 수 있는 영적 세계에 대한 믿음을 중시했으며 창조자와 피조물이 하나라는 믿음을 주창했다.
오브리스트는 헤켈과 <유겐트>의 편집장이며 오리엔탈리스트 게오르크 후트Georg Huth(1867-1906)와 함께 1904년에 유일의 궁극적인 존재, 원리, 개념, 방법 등을 생각하는 입장의 일원론주의Monism에 근거한 일원주의연맹Monist League 단체를 설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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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트 엔델August Endell(1871-1925)>





베를린 태생으로 유겐트슈틸의 중요한 건축가, 디자이너 아우구스트 엔델August Endell(1871-1925)은 1892년 베를린에서 뮌헨으로 이주하여 미학, 철학, 심리학을 공부한 뒤 헤르만 오브리스트의 격려로 미술과 건축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뮌헨의 여러 미술가들이 오브리스트의 영향을 크게 받았는데 엔델도 그들 중 하나였다.
엔델은 튀빙엔Tubingen에서 철학, 수학, 미학, 심리학을 공부한 뒤 건축과 공예로 전향했다.
그의 디자인과 삽화는 <판>에 실렸는데, 오브리스트의 영향을 보이는 추상적, 자연적 형태가 특징을 이루었다.
엔델은 그의 첫 번째 건축디자인인 뮌헨 폰 데어 탄 가에 있는 엘비라 사진작업실Elvira photographic studio(1897-98)을 위한 독특한 건물 정면과 실내장식으로 유명해졌는데, 건물 정면은 오브리스트가 이용한 것과 같은 생물형태에 토대를 둔 것으로 보이는 거칠고 추상적 석고장식으로 꾸며졌다.
연철로 된 내부의 계단도 환상적 형태로 장식되었으며 난간 기둥의 끝이 정교하게 제작되었다.
엘비라 사진작업실은 1944년에 많은 부분이 파괴되었고 이듬해에 철거되었다.
엔델은 1901년에 베를린으로 갔고 그곳에서 극장과 별장 및 시청 건물을 디자인했다.
1918년에는 미술과 공예 아카데미의 원장으로 오데르 강 연안에 있는 브레슬라우Breslau에 초빙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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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아르누보>





아르누보의 또 다른 중심지인 빈과 글래스고에서는 형태와 장식에서 기하학을 선호하는 경향을 나타냈다.
그곳에서는 파리와 낭시의 전형적인 아르누보에서 보이는 채찍선과 자연주의 조각과는 반대의 양상을 보여주었으므로 장식이 후퇴하는 듯 보였다.
요제프 호프만과 찰스 레니 매킨토시의 작품에 나타나는 기하는 장식이 배제되고 실용성만 고려되는 기능주의 디자인의 시작으로 간주되었지만, 이들의 기하가 단지 기능적인 것만은 아니라 장식적 근원을 암시하는 정교함과 우아함을 갖추었음을 오토 바그너가 디자인한 <디 자이트> 신문사 배송국에서 볼 수 있다.
빈과 글래스고에서 제작된 작품들에 나타난 유사성으로 인해 누가 누구에게 영향을 주었는가가 의문시되어왔다.

19세기의 산업혁명은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오스트리아에서도 공적 미술 취미를 저하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취미의 저하에 대한 반동으로 영국의 미술공예운동에 힘입어 빈 공방Wiener Werkstaette이 창설되고 기능주의의 최초 옹호자들 가운데 하나인 건축가 아돌프 로스Adolf Loos(1870-1933)의 운동이 일어났다.
20세기 초 근대건축 개척자들 가운데 한 사람인 로스는 브르노 태생으로 드레스덴에서 건축을 공부한 뒤 1893-96년 미국에 체류하면서 철골구조와 그 기능을 직접 표현함으로써 차단되지 않은 넓은 공간, 풍부한 채광을 실현한 루이스 헨리 설리번의 이론과 아카데미즘에 얽매이지 않고 금속을 건축재로 사용한 초기 시카고파에 자극을 받고, 귀국해서는 아르누보의 장식과 빈 분리파의 탐미적 경향을 비판했다.
그는 유명 일간지 <신자유 신문 Neue Freie Presse>에 전시에 관한 글을 연속적으로 기고하면서 현대 디자인에 내재된 철학은 모든 것을 전혀 다른 것으로 보이게 만드는 형세에 근거한다고 주장했다.
설리번과 오토 바그너로부터 유래한 실체의 개념을 배척하고 요소간의 상호작용이라는 견지에서 대상을 기능적으로 파악하는 기능주의Functionalism의 이론을 극단적으로 전개한 로스는 아르누보의 지나친 장식이 퇴락한 문화의 상징이며, 장식을 배제한 아름다움은 명석한 사고와 고도의 문명을 상징한다고 보았다.
20세기 초 10년 동안 로스의 작업은 빈에서 영향력을 거의 갖지 못했으나 1차 세계대전 직후 빈에 잠시 체류했던 발터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1883-1969)가 영향을 받았다.
건축을 사회적 요구와 공업기술을 밀접하게 연관시키는 데 기여한 그로피우스는 바이마르에 소재한 디자인 학교 바우하우스Bauhaus의 교장으로 재직(1919-28)했다.
그로피우스는 미술학교와 공예학교를 병합하여 1919년에 바우하우스를 설립했다.
바우하우스는 독일어로 ‘집을 짓는다’라는 독일어 Hausbau를 도치시킨 것이다.
주된 이념은 건축을 주축으로 삼고 미술과 기술을 종합하는 것이었다.

장식이 원시인과 범죄자들이 선호하는 야만적 현상이며, 불필요한 장식의 거부가 문명사회의 징표라고 로스가 역설했더라도 빈의 아르누보는 기능주의의 전조이기보다는 국제적 근대성에 대한 감각과 빈의 유구한 고전미술의 전통이 결합된 양식으로 보아야 한다.
세기말 빈의 문화적 보수주의는 동시대인들에게조차 전설적인 것이었다.
1900년경 유럽에서 네 번째로 큰 도시로 부상한 빈은 전등, 철도교통망 그리고 1900년경에 등장한 자동차 문화와 같은 근대의 모든 특징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빈은 틀에 박힌 예측 가능성과 융통성 없는 관료주의로 특징지어졌다.
미술가연맹Kunstlerhausgenossenschaft은 빈의 유일한 전시공간을 소유하고 있었는데, 전시위원회의 보수성으로 인해 진보적인 젊은 미술가들은 그 전시공간을 이용할 수 없었다.
이에 클림트는 요제프 마리아 올브리히, 콜로만 모저Koloman Moser(1868-1918), 요제프 호프만Josef Hoffmann(1870-1956) 등과 함께 1897년 4월 3일에 빈 분리파Secession(또는 Sezession)를 창설하고 회장에 선출되었다.
‘제체시온슈틸’이란 명칭은 빈 분리파전을 위해 올브리히가 설계한 분리파 건물에서 따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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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토 바그너 Otto Wagner(1841~1918)>




네덜란드의 건축가, 도시계획가 헨드리크 페트루스 베를라헤Hendrik Petrus Berlage(1856~1934)와 미국 현대 건축의 아버지로 불리는 헨리 홉선 리처드슨Henry Hobson Richardson(1838~86)과 마찬가지로 19세기의 양식 부흥 건축으로부터 벗어나는 데 공헌한 오토 바그너Otto Wagner(1841~1918)는 펜칭Penzing 태생으로 1857년에 빈 공과대학에서 공부한 뒤 베를린으로 가서 카를 프리드리히 싱켈Karl Friedrich Schinkel(1781-1841)의 사상에 접하게 되었는데, 싱켈은 비더마이어Biedermeier 양식과 더불어 19세기 고전주의를 드러낸 독일의 대표적인 건축가였다.
과거의 전통에 의존하면서도 19세기에 적합한 새로운 양식의 도래에 대한 싱켈의 예측을 바그너가 빈에서 실현했다.

바그너의 첫 번째 주택은 1886년 빈 교외에 세워졌으며, 그 주택은 거대한 열주가 세워진 정면과 우아한 양식의 정원을 갖추어 교외의 장대한 풍광을 반영했다.
1890년대에는 케른트너Karntner 가에 있는 백화점을 포함한 일련의 수수한 바로크 양식의 주택과 상업용 건물을 설계했으며, 유리와 철근 볼트, 그리고 대리석판으로 마감한 실내장식은 당시에는 보기 드문 단순함과 근엄함을 시위했다.

바그너는 1894년에 일련의 정거장과 도시를 가로지르는 교량들로 구성된 새로운 도시전차Stadtbahn 철도망설계 공모전에 당선되었다.
그리하여 주변의 환경과 조화를 이루도록 디자인한 역사주의 양식의 건물들이 세워졌다.
당시 바그너의 사무실에서 조수로 일한 올브리히가 작업했을 양식화된 해바라기 모티프와 선적 장식이 건물들에 생기를 부여했다.
도시전차 프로젝트는 당시 가장 유명했던 공공사업이었으므로 바그너의 작품은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졌다.
그는 조형예술학교Academy of Fine Arts 학생들을 위해 자신의 교수취임기념강의를 출판한 『현대 건축 Moderne Architektur』(1894)에서 미학적 입장을 밝혔으며 이 책은 20세기 현대건축의 청사진으로 읽힌다.
그는 “필요는 미술의 유일한 어머니 Artis sola domina necessitas”라는 원리를 주창했으며, 건축은 동시대의 사회적 요구에 부응하고 이를 표현할 적절한 형태를 탐구해야 하고, 과장되고 부적절한 장식을 피하고 양식부흥이라는 잘못된 요소도 버려야 한다고 했다.

사람들에게 경이롭게 받아들여진 작품은 1898년 빈자일레 가 38번지와 40번지에 소재하는 두 아파트로 뮌헨에서 유행하던 유겐트슈틸 장식으로 꾸며졌다.
두 건물은 고전건축과 장식어휘에서 선택된 다양한 요소들을 갖췄으며, 둘 모두에 장미꽃과 아칸서스 잎으로 장식된 벽면에 수평으로 돌출한 돌림띠cornice가 있다.
40번지의 다채색 정면은 위로 퍼져 올라가는 덩굴손과 꽃으로 덮였으며, 수천 개의 도자기타일로 이루어진 장식으로 인해 ‘마졸리카 하우스 Majolica House’라는 별칭을 얻었다.
마졸리카는 지중해의 미요르카 섬 상인이 에스파냐의 도자기를 이탈리아로 반입한 데서 이탈리아인이 명명한 호칭이다.
마욜리카Maiolica라고도 한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부터 사용된 마졸리카라는 명칭은 근동에서 발달한 밝게 채색된 유약을 입힌 도자기에서 유래한 명칭이다.
마졸리카 하우스 위쪽 창문에는 세로로 홈이 난 소용돌이 장식 위에 사자 마스크가 놓여있다.
38번지의 아파트는 황금 벽토로 장식되었고, 내부의 계단, 가구 그리고 아파트에 어울리는 도자기 스토브와 같은 마졸리카 설비는 바그너가 새로운 장식적 양식을 사용했음을 보여준다.
잎 무늬로 된 투조透彫장식과 부조浮彫장식 같은 실내디자인 요소들은 기하의 소멸과 빈 아르누보가 성취한 유기적 선의 등장을 알린다.
38번지 건물의 상층부에 깃털로 장식되고 꽃줄기를 늘어뜨린 원형장식이 있고, 건물 꼭대기에는 작은 여성 조각상이 올려져있다.
요제프 마리아 올브리히의 빈 분리파 건물과 마찬가지로 두 건물에서도 전통적 형태와 급진적 근대 장식이 결합되었다.
특히 유겐트슈틸 양식을 사용한 40번지 아파트 정면의 장식 이면에는 기본적으로 고전적 단순함이 존재한다.

바그너의 급진적인 작품은 <오스트리아 우체국 저축은행 Austrian Post Office Savings Bank>에서도 발견되지만 동시에 그의 근대성 옹호가 전통에 대한 완전한 거부가 아님을 알 수 있다.
강철로 된 아치 모양의 유리지붕, 간결한 세부 그리고 매우 단순한 형태가 돋보이는 은행의 중앙 홀에 대해 동시대 평론가들도 건축의 미래를 제시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우체국 저축은행이 완공된 1906년에 바그너는 65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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