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우성과 반도총후미술전
1937년 이후 일제는 조선민족을 말살하기 위해 황국신민화皇國臣民化 정책을 추진하면서 내선일체內鮮一體의 구호를 내걸었는데 조선 민중에게 천황숭배사상을 주입시켜 정신적으로 일본인으로 만들어 전쟁에 끌어들이기 위해서였다.
천황의 충성스러운 백성으로서의 맹세를 아침저녁으로 외는 이른바 ‘황국신민의 서사’를 제정·시행했으며 민중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내선일체의 상징으로 부여신궁을 건설하는 한편 일면일신사一面一神社의 원칙을 세워 산간벽지에까지 신사를 짓고 각 가정에는 신붕神朋을 설치하게 하여 참배를 강요했다.
또한 황국신민의 서사誓詞라는 것을 만들어 일상생활에서 외우도록 강요했으며 조선어 사용을 금지했다.
1942년에는 조선어 연구단체인 조선어학회까지 강제로 해산하고 관계자를 투옥·학살했다.
또 1940년에는 이름까지 일본식으로 바꾸도록 한 창씨개명을 강요했다.
한편 이 과정에서 친일파가 대거 이용되었다.
대한제국 말기에 형성되기 시작한 친일파는 강제합병 이후 대개 총독부 관료가 되거나 중추원 등에 편입되었다.
1920년대에는 일제의 민족분열정책에 동조하며 참정권 청원을 주장한 민원식 등 친일지주·매판자본가들이 친일파로 전락했다.
그런가 하면 자치운동 등 타협적 경향을 보인 민족개량주의자들 사이에서도 친일적 경향이 확산되었다.
1930년대 전반기에 민중운동이 고양되고 주일전쟁 이후 일제의 파쇼적 탄압이 강화되자 이에 위협을 느낀 민족개량주의자의 상당수가 친일파로 전락했으며 전향하는 사회주의자도 많았다.
수양동우회사건을 계기로 이광수와 주요한 등이 친일을 서약했으며 뒤이어 청구구락부의 윤치호와 장덕수, 흥업구락부의 신흥우 등도 전향했다.
이들은 민중에게 독립은 불가능한 것이며 조선인은 일본을 맹주로 하는 대동아공영권에 참가하여 정치적 지위를 향상하는 데 만족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일제의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했다.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에 김성수, 윤치호, 최린, 김활란 등이 이사로 활동했고 문화위원으로 백철, 유진오, 홍난파 등이, 여성부위원으로 송금선, 이숙종 등이 활동했다.
전선사상보국연맹에는 유억겸, 박영희, 장덕수, 김한경 등이 참여했으며 종교계에서는 양주삼(감리교), 홍택기(장로회) 등이 대표적인 친일파로 활동했다.
문학 분야에서는 내선일체를 겨냥한 일본어 국민문학이 제창되었으며 그 활동단체로 1939년 조선문인협회 등이 결성되었다.
여기에 이광수, 최남선, 주요한, 유진오, 박희도, 김동환, 최재서 등이 참여하여 활발한 친일문학 활동을 벌였다.
미술에서도 친일행각이 이루어졌는데 1940년에 결성된 문인서도연구회에는 화필보국畵筆報國, 내선유지의 단합이라는 명목으로 한규복, 김용진, 고희동, 정병조, 안종원 등이 출품했으며, 1942년 10월에는 조선남화연맹전을 열어 전람회 수익금을 전부 국방에 헌납했다.
여기에 참가한 작가들은 윤희순, 노수현, 백윤문, 배렴(1911~68), 박승무(1893~1980), 이상범, 이용우(1902~52), 이한복(1897~1940), 이응로, 이승만, 고희동, 허백련, 김은호, 허건, 김용진, 김기창 등이었다.
조선남화연맹전이 열리고 불과 한 달 후인 11월에는 조선미술가협회가 주최하고 총독부 정보과와 국민총력조선연맹이 후원한 소위 반도총후미술전이라는 강요된 전람회가 열렸고 선전 심사위원 김은호, 이상범은 위원에 추대되었으며 선전의 추천작가 김기창, 김인승, 심형구도 초대작가로 지목되어 출품해야 했다.
반도총후미술전은 1942년부터 1944년까지 3회 계속되었다.
전람회기는 해마다 11월 초순이었고, 장소는 신세계백화점 전신인 삼월오복점, 충무로 입구의 삼중정, 그리고 화신백화점이었다.
장우성은 자신도 반도총후미술전에 출품하라는 통지를 받았는데, 유난히 시국색을 강조하는 작품을 요구했으므로 화가들은 어떤 그림을 그려야 할지 부심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삼수화를 그려도 군인이 배낭을 짊어지고 걸어가는 모습을 삽입해야 하고 농가의 사립문에도 일장기를 꽂아야 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고 술회했다.
장우성은 그런 식으로 그리는 것이 싫어 <부동명성왕 상>(화단 풍상 112)을 모작했는데, 부동명왕이 대일여래大日如來가 일체의 악마, 번뇌를 항복시키기 위해 정의의 화신으로 오른손에 항마降魔의 검, 왼손에는 오라를 쥔 채 큰 불꽃 속에서 버티고 앉아 있는 모습이었다.
약 60호의 이 작품을 트럭의 일반 화물 위에 싣고 서울로 가는 도중 소나기가 쏟아져 작품이 망가졌다.
그는 이런 사유를 글로 서서 반도총후미술전 사무국에 제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