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로네의 오르피즘 영향




클레의 창작에 원천적인 영감을 준 것이 로베르 들로네Robert Delaunay(1885~1941)의 오르피즘Orphism이다.
오르피즘이란 명칭은 1912~13년에 발표한 들로네의 작품을 설명하기 위해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가 붙인 명칭으로 시인은 오르피즘은 비재현적 색채 추상으로 이해하고 저서 <입체주의 화가들 Les Peintres cubistes>(1913)에서 가시적인 영역으로부터 빌려온 요소가 아닌, 전적으로 예술가 자신이 창조한 요소들로 이루어진 새로운 구조를 나타낸 미술이라고 했다.
아폴리네르는 오르피즘에 낭만적인 의미를 부여했으며 이런 점이 클레와 마케와 같은 표현주의자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들로네는 색채를 점차 형태에서 분리시켜 주제가 없는 회화를 창조했는데 완전추상이었다.


클레는 들로네의 작품에 매료되어 1912년 파리에 갔을 때 그의 작업실을 방문하고 그곳에서 <창문>을 보고 당대의 가장 혁신적인 작품이라고 감탄했다.
클레는 들로네를 가리켜서 “우리 시대의 가장 탁월한 예술가들 가운데 하나”라고 적으며 들로네의 논문 <빛에 관하여 On Light>를 독일어로 번역했다.
들로네는 1906년 신인상주의와 외젠 슈브뢸의 색채 이론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으며 이후 계속 중심 모티프가 될 색채 이론의 미적 응용에 대한 연구에 착수했다.
쇠라의 점묘주의로부터 파생된 분할주의 기법을 채택하는 대신 대조되는 인접한 색채들 사이의 상호작용에 관심을 기울였고 특히 색채 공간의 분할을 위한 빛의 효과, 색채와 움직임의 상호연결을 탐구했다.


색채의 체계적 사용을 통해 과학적으로 색채를 물질화시켰으므로 쇠라의 작품은 비구상은 아니더라도 방식만큼은 추상적이었다.
그는 거의 수학적 구조를 통해 색채를 물리적으로 다루면서 조형적 조화를 꾀했다.
들로네는 <자서전>(1924)에서 적었다.

"회화는 자체의 수단과 법칙을 가져야 한다.
아폴리네르가 기술한 대로 ‘빛의 열매’인 색은 화가의 물질적 수단이며 언어인 것이다.
결국 화가는 물질적 요소들의 도움으로 작업하게 되고 모든 요소는 의지에 의해 전체적으로 다루어져야 한다.
양의 조절이 가능한 색채는 화면에 분배된다.
화면은 작업을 통해 유일한 참조가 되며 비판과 향유의 대상으로서의 색채 또한 색채들끼리 또 다른 척도를 자아낸다."


클레는 색과 평면적 구조로 구성하는 추상 회화를 제작하기 시작했는데 색채 형태들 사이의 리드미컬한 상호작용을 미적으로 적용한 들로네의 영향이며 <꽃 침대>(1913)가 그 예이다.
미묘한 색조의 변화가 리드미컬한 효과를 낸다. 들로네와 만남은 선에 대한 연구에 몰두해온 클레로 하여금 색에 대해 더욱 더 관심을 갖게 만드는 계기를 마련해주었고, 색채 형태 회화로 들어서게 되었으며, 파리의 모더니즘에 가까워지게 되었는데, 파리의 모더니즘은 국제적으로 가장 수준 높은 미술이었다.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을 보고 빛이 합리적인 방법으로 형상을 만든다는 것을 안 클레는 색채와 명암이 선과는 전혀 다른 성질을 지니고 있음을 알았고, 색채를 검은색과 흰색 사이의 숱한 농담의 위계로 보고 색조를 무게로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는 명암의 증감을 통해 무게를 조절하여 화면의 통일과 균형을 이룰 수 있다고 믿었다.
1910년 이전에 쓴 일기에서 색에 관한 세심한 관찰과 명암의 증감을 다루는 현명한 방법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아직 화가가 될 능력이 없다고 자탄한 것을 보면 색에 대한 관심이 얼마나 컸고 또한 많은 실험을 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아프리카의 여러 곳을 방문하면서 발견한 색채는 그의 화면 구성에 변화를 일으켰고 칸딘스키의 자유롭고 즉흥적인 창작은 들로네의 색채 대비와 더불어 그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들로네의 영향은 1914년 초에 그린 그림들에서 현저하게 나타났는데 <무제>가 그 예이다.
색면을 격자 모양으로 배열하는 구성이 그에게 창작의 자유를 느끼게 해주었다.
이런 색면의 격자 모양을 입체주의자들인 피카소와 브라크 그리고 오르피스트 들로네가 사용했는데, 그들은 공간과 오브제를 부순 후 회화적 목적으로 새롭게 재구성하기 위한 방안으로 이런 양식을 사용한 것이지만 클레는 시각적 대상인 오브제를 부수고 재구성하려는 의도에서가 아니라 단순히 평편한 구성을 위해 사용한 것이 다르다.
평편한 정사각형 색면으로 구성하는 방법을 이 시기에 몇몇 유럽 화가들이 구사하고 있었다.
러시아 화가 말레비치가 1913~14년에 평편한 절대주의Suprematism 추상화를 제작했다.
유럽에서 구성주의가 발생하는 데 크게 기여한 절대주의를 추구하는 이유를 말레비치는 저서 <비대상 세계 The Non-Objective World>(1959)에서 자연의 외양을 재현하고 이상화하는 것을 거부하고 순수한 예술적 감정이나 비대상적 감수성을 표현하기 위해서이며, “현실과 유사한 것, 이상화된 이미지가 더 이상 필요 없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런 추상화는 순수 예술적 감정을 위한 것으로 작가의 감정이나 태도를 배격하려는 것이다.
말레비치가 추구한 미학은 칸딘스키와 클레의 색면 구성에도 적용된다.
다만 클레는 이를 회화의 한 가능성으로만 간주했을 뿐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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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지호는 말했다.




서양화에 대한 논의는 18세기부터 있어 왔지만 본격적으로 진행된 것은 일제시기에서였다.
신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소개되던 서양화는 1920년대 후반이 되면서부터 예술가들 사이에서도 논의되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 고희동이 동경미술학교 양화과에서 서양화를 배우고 귀국한 1915년 이후 동경으로 유학하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났고 서화협회전(협전)과 조선미술전람회(선전)를 통해 화단이 양적·질적으로 확대되는 1920년대 후반이 되어서는 사조에 대한 관심도 커졌다.
그러나 서양미술에 대한 논의는 신문과 잡지를 통해 단편적으로 이루어졌을 뿐 저술·번역본·단행본 등의 출간은 없었다.
서양미술에 대한 정보와 지식은 일본 서적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서양미술의 사조와 이론에 대한 관심은 작가의 창작활동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으므로 일본 근대미술을 통해서만이 우리나라의 근대미술이 이해되고 정리될 수 있다.


이 시기에 서양화에 대한 관심은 주로 인상주의 그리고 그 후에 등장한 유럽의 여러 사조들이었지만 논의가 사조별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고 포괄적으로 신흥미술. 전위미술, 현대미술 등의 개념으로 이루어졌다.
이런 논의는 특히 일본 유학파 작가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인상주의에 대한 특기할 만한 논의는 1930년대 중반 오지호(1905~82), 김주경 등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인상주의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오지호는 동경미술학교의 후지시마 타케지의 제자로서 대상을 단순히 피사체가 아닌 대상 자체에서 발현되는 유기적 발광체로 간주함으로써 유럽 인상주의자들의 견해와 달리 했다.
그는 인상주의와 신인상주의 양식으로 그리면서 주변의 자연을 눈부신 장면으로 묘사했다.
1938년 『오지호·김주경 2인화집』에 수록된 ‘순수회화론’에 의하면 그는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는 인상주의 방법은 습기가 많고 비가 많이 오는 일본보다 건조하고 청명한 조선의 기후에 더 적당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젤을 세우고 그리면서 <사과나무 밭>을 그릴 때는 1938년 5월 8일부터 사흥 동안 계속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렸으며 작품이 완성되었을 때 잎이 지기 시작했다고 적었다.


오지호는 1938년 『오지호·김주경 2인화집』에 수록한 ‘순수회화론’에서 이렇게 말했다.

“회화는 빛의 예술이다.
태양에서 난 예술이다.
회화는 태양과 생명과의 관계, 태양과 생명과의 융합이다.
그것은 빛을 통하여 본 생명이요, 빛에 의하여 약동하는 생명의 자태다.
태양은 생명에게 절대적인 환희다.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은 태양의 빛과 열에 의하여 길러진다.
태양을 흠뻑 받아들이는 것은 곧 생을 향수하는 일이요, 태양을 기뻐하는 것은 곧 생을 기뻐하는 일이다.
태양에의 환희의 표현이 곧 회화다.”


오지호는 색채가 빛이 그랬던 것처럼 열에너지가 되어 관람자의 눈을 통해 음악보다도 더 지속적으로 쾌감을 느끼게 한다고 믿었으므로 순수회화는 인간의 희노애락을 직관적으로 표현하는 기능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에 의해 인상주의가 왜곡되고 변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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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우성과 반도총후미술전




1937년 이후 일제는 조선민족을 말살하기 위해 황국신민화皇國臣民化 정책을 추진하면서 내선일체內鮮一體의 구호를 내걸었는데 조선 민중에게 천황숭배사상을 주입시켜 정신적으로 일본인으로 만들어 전쟁에 끌어들이기 위해서였다.
천황의 충성스러운 백성으로서의 맹세를 아침저녁으로 외는 이른바 ‘황국신민의 서사’를 제정·시행했으며 민중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내선일체의 상징으로 부여신궁을 건설하는 한편 일면일신사一面一神社의 원칙을 세워 산간벽지에까지 신사를 짓고 각 가정에는 신붕神朋을 설치하게 하여 참배를 강요했다.
또한 황국신민의 서사誓詞라는 것을 만들어 일상생활에서 외우도록 강요했으며 조선어 사용을 금지했다.
1942년에는 조선어 연구단체인 조선어학회까지 강제로 해산하고 관계자를 투옥·학살했다.
또 1940년에는 이름까지 일본식으로 바꾸도록 한 창씨개명을 강요했다.


한편 이 과정에서 친일파가 대거 이용되었다.
대한제국 말기에 형성되기 시작한 친일파는 강제합병 이후 대개 총독부 관료가 되거나 중추원 등에 편입되었다.
1920년대에는 일제의 민족분열정책에 동조하며 참정권 청원을 주장한 민원식 등 친일지주·매판자본가들이 친일파로 전락했다.
그런가 하면 자치운동 등 타협적 경향을 보인 민족개량주의자들 사이에서도 친일적 경향이 확산되었다.
1930년대 전반기에 민중운동이 고양되고 주일전쟁 이후 일제의 파쇼적 탄압이 강화되자 이에 위협을 느낀 민족개량주의자의 상당수가 친일파로 전락했으며 전향하는 사회주의자도 많았다.
수양동우회사건을 계기로 이광수와 주요한 등이 친일을 서약했으며 뒤이어 청구구락부의 윤치호와 장덕수, 흥업구락부의 신흥우 등도 전향했다.
이들은 민중에게 독립은 불가능한 것이며 조선인은 일본을 맹주로 하는 대동아공영권에 참가하여 정치적 지위를 향상하는 데 만족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일제의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했다.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에 김성수, 윤치호, 최린, 김활란 등이 이사로 활동했고 문화위원으로 백철, 유진오, 홍난파 등이, 여성부위원으로 송금선, 이숙종 등이 활동했다.
전선사상보국연맹에는 유억겸, 박영희, 장덕수, 김한경 등이 참여했으며 종교계에서는 양주삼(감리교), 홍택기(장로회) 등이 대표적인 친일파로 활동했다.


문학 분야에서는 내선일체를 겨냥한 일본어 국민문학이 제창되었으며 그 활동단체로 1939년 조선문인협회 등이 결성되었다.
여기에 이광수, 최남선, 주요한, 유진오, 박희도, 김동환, 최재서 등이 참여하여 활발한 친일문학 활동을 벌였다.
미술에서도 친일행각이 이루어졌는데 1940년에 결성된 문인서도연구회에는 화필보국畵筆報國, 내선유지의 단합이라는 명목으로 한규복, 김용진, 고희동, 정병조, 안종원 등이 출품했으며, 1942년 10월에는 조선남화연맹전을 열어 전람회 수익금을 전부 국방에 헌납했다.
여기에 참가한 작가들은 윤희순, 노수현, 백윤문, 배렴(1911~68), 박승무(1893~1980), 이상범, 이용우(1902~52), 이한복(1897~1940), 이응로, 이승만, 고희동, 허백련, 김은호, 허건, 김용진, 김기창 등이었다.
조선남화연맹전이 열리고 불과 한 달 후인 11월에는 조선미술가협회가 주최하고 총독부 정보과와 국민총력조선연맹이 후원한 소위 반도총후미술전이라는 강요된 전람회가 열렸고 선전 심사위원 김은호, 이상범은 위원에 추대되었으며 선전의 추천작가 김기창, 김인승, 심형구도 초대작가로 지목되어 출품해야 했다.
반도총후미술전은 1942년부터 1944년까지 3회 계속되었다.
전람회기는 해마다 11월 초순이었고, 장소는 신세계백화점 전신인 삼월오복점, 충무로 입구의 삼중정, 그리고 화신백화점이었다.


장우성은 자신도 반도총후미술전에 출품하라는 통지를 받았는데, 유난히 시국색을 강조하는 작품을 요구했으므로 화가들은 어떤 그림을 그려야 할지 부심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삼수화를 그려도 군인이 배낭을 짊어지고 걸어가는 모습을 삽입해야 하고 농가의 사립문에도 일장기를 꽂아야 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고 술회했다.
장우성은 그런 식으로 그리는 것이 싫어 <부동명성왕 상>(화단 풍상 112)을 모작했는데, 부동명왕이 대일여래大日如來가 일체의 악마, 번뇌를 항복시키기 위해 정의의 화신으로 오른손에 항마降魔의 검, 왼손에는 오라를 쥔 채 큰 불꽃 속에서 버티고 앉아 있는 모습이었다.
약 60호의 이 작품을 트럭의 일반 화물 위에 싣고 서울로 가는 도중 소나기가 쏟아져 작품이 망가졌다.
그는 이런 사유를 글로 서서 반도총후미술전 사무국에 제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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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튜 바니Matthew Barney(1967-)와 제프 쿤스Jeff Koons(1955-)






Matthew Barney(1967-)와 Jeff Koons(1955-)에 관해 질문했는데, 두 사람을 비교한다면 바니는 어른이고 쿤스는 아이라고 생각합니다.
주식중개인이었던 쿤스는 미술을 상상력의 산물로 얼마든지 조작 가능하다고 보는데 그런 예술가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이미 한물 간 Pop과 ready made를 다양한 방법으로 재생하는 작업으로 개성적인 상상력의 산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작품이 매우 가볍고, 선동적이며, 에로틱하고, 15세 소년 소녀들이 선호하기에 적당한 류의 작품입니다.
웬만하면 환호하고 소리를 지르며 몰켜다니는 그런 15세 소년 소녀들이 좋아하는 류의 작품이라고 생각됩니다.
대중가수로 비유하면 쿤스가 남진이라면 바니는 나훈아 혹은 조용필일 거라고 생각됩니다.
남진보다는 나훈아와 조용필이 한 수 위지요.


쿤스가 대중적으로 인기가 있는 건 사실이지만 유능한 예술가는 아닙니다.
문제는 유능하지는 않지만 대중적으로 인기가 있는 예술가들이 현재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1970년대 이후 미술에는 조예가 깊지 않지만 부유한 중산층이 늘고 그들이 미술에 자신들의 취향을 반영하면서 생겨난 풍조라고 생각됩니다.
소위 말하는 포플리즘이지요.
우리나라에도 이런 현상이 두드러지지만 언론의 관심을 받으며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유능하지 않은 예술가들이 많지 않습니까?
서양에서도 마찬가지이지요.
그런 예술가들에 빌붙는 무능한 평론가들에 의해 그들은 자신들이 유능한 예술가라고 생각합니다.
베스트셀러의 책이 우수한 책이 아니듯이,
관객동원 최고의 영화가 우수한 영화가 아니듯이,
언론에 자주 오르내리는 예술가가 우수한 예술가가 아닌 경우가 허다한 것이 현재의 문화적 문제라고 생각됩니다.
이런 예를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작가가 바로 쿤스입니다.

과거에는 엘리트가 문화를 주도했지만 오늘날에는 대중의 인기에 의해 문화가 양산되고 있습니다.
대중이 선호하는 문화는 바람직하지만 아직은 대중의 판단력이 미숙하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 같습니다.
미국에서 지각 있는 평론가들, 특히 콜럼버스 대학 계열의 앨리트 평론가들은 쿤스를 혹평하지만 그들의 소리는 소수의 소리가 되어 큰 효과를 내지 못합니다.
쿤스는 전시적이고 대중이 선호하는 작품을 제작하기 때문에 대중이 그를 옹호하고 있습니다.
일종의 유행으로 보아야겠지요.
그는 곧 잊혀지는 작가가 될 것이며 그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의학도 출신의 바니는 매우 사려 깊은 작품을 제작합니다.
그가 제작한 영화를 보지는 못했지만 단장의 사진으로 소개된 것을 보면 재능 있는 예술가라고 생각됩니다.
그가 27살 때 제작했다는 <크리매티스 4>에서의 당나귀 귀를 한 사람의 모습은 매우 인상적입니다.
조각을 보더라도 매우 사변적이며 심리적이고 미묘한 느낌을 창출합니다.
쿤스의 작품이 남진의 <저 푸른 초원 위에>와 같다면, 쓸데없이 흥겨운 듯 신나게 그러나 가볍게 불러대는 남진의 노래와 같다면,
바니의 작품은 조용필의 <킬리만자로의 표범>과 같습니다.
내가 조용필의 노래 제목을 제대로 적은 것입니까?
그의 작품에는 고독이 있고 고뇌가 있으며 문화적 비평이 있습니다.

점수를 매긴다면 바니는 A 학점이고 쿤스는 F 학점입니다.

하지만 대중의 지지도는 쿤스에게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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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서화를 겸전한 조선의 마지막 문인화가 안중식






안중식은 1861년 8월 28일 서울에서 성균관 생원을 지낸 진사 안홍술의 5남 5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고 열세 살 때 부모를 여의었다.
그의 본명은 종식이고 중년 때 중식으로 사용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글과 그림에 흥미와 재능을 나타냈는데 1906~07년 그에게서 묵화를 배운 고희동은 스승에 관해 “유시부터 그림에 조예가 깊어서 자연히 일가를 성하였다”고 했다.
그는 당시 명성을 떨치던 장승업에게서 많은 감화와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되는데 안중식의 신선도, 노안도, 기명절지 등에서 장승업의 화풍이 보인다.
그는 장승업을 직접 찾아간 적도 있다. 이 시기에 조선 화단은 중국 화풍 추종과 창의성 없는 산수도, 신선도, 화조도 등에 머물고 있었고 당대의 거장 장승업의 신선도와 고사 인물도에서도 중국 화풍의 방작이 발견된다.
1910년대 이전의 안중식 작품 역시 관념적 전통 기법과 형식적 화제로 한정되어 있었다.


장승업이 타계하고 서울 화단에서는 조석진과 안중식이 가장 부각된 존재가 되었다.
안중식은 1891년 중국을 여행하면서 상해 등지에서 중국 서화가와 교류했으며 1899년 세 번째 중국을 여행한 후 일본으로 가 경도와 기부 등지에서 2년 동안 체류했다.
1906년에는 민족자존을 위한 대한자강회에 창립회원으로 참여했으며 이듬해에 어린이용 교과서 『유년필독』을 편찬했다.
그는 자신의 안일을 위해 나중에 친일파 거두가 된 이완용에게 아부하며 <붕새 鵬鳥>를 그려 그에게 바치는 비열함을 보였다.
운필이 호방하고 대범하게 발휘된 걸작이다. 바다 한가운데 솟은 바위에 부딪쳐 부서지며 넘실거리는 파도와 물거품은 속도감이 느껴진다.
바위 위에 위풍당당하게 올라서서 바다를 내려다보는 붕새를 힘찬 필치와 먹색의 강한 농담으로 묘사하면서 파필破筆과 파묵破墨의 파격적으로 병용했다.
날개짓 하려는 몸짓과 예리한 눈초리와 부리의 묘사 그리고 발톱에서 긴장감을 느낄 수 있다.


상단에 충분한 공간을 둔 것은 붕새가 곧 날게 될 전설의 9만리장천을 배경삼은 것이다.
장자의 <소요유편 逍遙遊篇>에 등장하는 붕새는 북해에 살던 곤鯤이라는 물고기의 변신으로 한 번 날개를 치면 대번에 9만리를 날아간다는 상상의 큰 새이다.
화가의 낙관은 없지만 필치의 특출한 역량으로 안중식의 작품이 분명하다.
화가가 낙관을 하지 못한 것은 이 그림이 임금의 하사품용으로 의뢰된 것이기 때문이다.
당시 학부대신이었던 이재곤이 칙명을 받들어 화면 위의 공간에 써서 밝힌 대로 이 작품은 고종황제가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에게 하사하도록 그려진 것으로 최대로 축복을 담은 제시를 이재곤이 써넣은 것으로 추정된다.
2년 뒤 한일합방이라는 매국의 주요 역할을 하게 되는 이완용을 어이없게도 붕새로 비긴 제시는 이런 내용이다.


만리 천공을 빨리 날아 운구雲衢(벼슬길)에서 빙빙 돈다.


현존하는 그의 작품 대다수는 1910년대에 그려진 것이며 화면에 적힌 행서체의 제시로서 그가 한시에 정통했고 서예가이기도 했음을 보여준다.
그의 산수화에서 청록색 기법과 선명하게 현실감을 강조한 채색부여의 독자풍은 여러 형태로 자유롭게 전개되는데, 부분적으로 수묵담채의 표현과 조화시키거나 절충시킨 수법이면서 작품에 따라 역점을 달리 하기 때문이다.
<봉래선경 蓬萊僊境>은 ‘신선들이 사는 봉래산의 선경’을 화제로 삼은 그림으로 절승한 경개를 세필로 구사하면서 수묵담채의 기법으로 산령과 암석의 윗부분에만 농담미濃淡美를 조절한 청록색조를 적절히 첨부하여 한결 생생하게 현실감이 돋보이도록 했다.
주봉을 비롯한 모든 산형과 암석 등의 표현은 그의 전형적인 작품에 의한 것이며, 수묵담채 수법으로 시종된 노송은 다른 청록산수화에서 늘 그렇게 도입되는 정형이다.
중경과 근경의 노송 뒤로 흐르게 한 서운의 장식적 곡선은 고전적인 수법이다.


흔히 곁들어지는 선인仙人의 점경點景 혹은 특정 고사의 인물이 등장하지 않는 대신 하단 물가에 거불이가 세 마리 기어 다니고 중경의 서운 부분에 두 마리 학이 나르고 있다.
옛 사람들이 상상한 선경의 봉래산 주제에 어울리게 장생을 상징하는 거북과 학을 조화시켰다.
거북과 학을 곁들인 그의 또 다른 선경산수화로 <귀학장년 龜鶴長年>이 있다.
전서체篆書體로 공들여 쓴 ‘봉래선경’ 화제와 역시 반듯하게 해서체楷書體로 쓴 화가 이름 사이의 비단 바탕이 칼로 오려져 나갔는데, 거기에는 이 그림을 위촉하여 받아간 사람의 이름과 제작경위가 써져 있었을 것이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 부분이 잘려 나가 화면에 상처가 되었다.


안중식은 시서화詩書畵를 겸전한 조선의 마지막 문인화가였다.
그러나 그와 조석진은 근대에 속한 화가가 못되었고 구태의연한 중국풍 낡은 그림을 그리는 데 그쳤다.
고희동은 훗날 “중국인 화가의 입내 나는 찌끼”라는 말로 두 사람의 전근대적인 태도를 비판했다.
안중식은 1919년 11월 2일 경기도 시흥에서 타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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