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지호는 말했다.
서양화에 대한 논의는 18세기부터 있어 왔지만 본격적으로 진행된 것은 일제시기에서였다.
신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소개되던 서양화는 1920년대 후반이 되면서부터 예술가들 사이에서도 논의되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 고희동이 동경미술학교 양화과에서 서양화를 배우고 귀국한 1915년 이후 동경으로 유학하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났고 서화협회전(협전)과 조선미술전람회(선전)를 통해 화단이 양적·질적으로 확대되는 1920년대 후반이 되어서는 사조에 대한 관심도 커졌다.
그러나 서양미술에 대한 논의는 신문과 잡지를 통해 단편적으로 이루어졌을 뿐 저술·번역본·단행본 등의 출간은 없었다.
서양미술에 대한 정보와 지식은 일본 서적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서양미술의 사조와 이론에 대한 관심은 작가의 창작활동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으므로 일본 근대미술을 통해서만이 우리나라의 근대미술이 이해되고 정리될 수 있다.
이 시기에 서양화에 대한 관심은 주로 인상주의 그리고 그 후에 등장한 유럽의 여러 사조들이었지만 논의가 사조별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고 포괄적으로 신흥미술. 전위미술, 현대미술 등의 개념으로 이루어졌다.
이런 논의는 특히 일본 유학파 작가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인상주의에 대한 특기할 만한 논의는 1930년대 중반 오지호(1905~82), 김주경 등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인상주의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오지호는 동경미술학교의 후지시마 타케지의 제자로서 대상을 단순히 피사체가 아닌 대상 자체에서 발현되는 유기적 발광체로 간주함으로써 유럽 인상주의자들의 견해와 달리 했다.
그는 인상주의와 신인상주의 양식으로 그리면서 주변의 자연을 눈부신 장면으로 묘사했다.
1938년 『오지호·김주경 2인화집』에 수록된 ‘순수회화론’에 의하면 그는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는 인상주의 방법은 습기가 많고 비가 많이 오는 일본보다 건조하고 청명한 조선의 기후에 더 적당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젤을 세우고 그리면서 <사과나무 밭>을 그릴 때는 1938년 5월 8일부터 사흥 동안 계속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렸으며 작품이 완성되었을 때 잎이 지기 시작했다고 적었다.
오지호는 1938년 『오지호·김주경 2인화집』에 수록한 ‘순수회화론’에서 이렇게 말했다.
“회화는 빛의 예술이다.
태양에서 난 예술이다.
회화는 태양과 생명과의 관계, 태양과 생명과의 융합이다.
그것은 빛을 통하여 본 생명이요, 빛에 의하여 약동하는 생명의 자태다.
태양은 생명에게 절대적인 환희다.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은 태양의 빛과 열에 의하여 길러진다.
태양을 흠뻑 받아들이는 것은 곧 생을 향수하는 일이요, 태양을 기뻐하는 것은 곧 생을 기뻐하는 일이다.
태양에의 환희의 표현이 곧 회화다.”
오지호는 색채가 빛이 그랬던 것처럼 열에너지가 되어 관람자의 눈을 통해 음악보다도 더 지속적으로 쾌감을 느끼게 한다고 믿었으므로 순수회화는 인간의 희노애락을 직관적으로 표현하는 기능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에 의해 인상주의가 왜곡되고 변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