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서화를 겸전한 조선의 마지막 문인화가 안중식
안중식은 1861년 8월 28일 서울에서 성균관 생원을 지낸 진사 안홍술의 5남 5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고 열세 살 때 부모를 여의었다.
그의 본명은 종식이고 중년 때 중식으로 사용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글과 그림에 흥미와 재능을 나타냈는데 1906~07년 그에게서 묵화를 배운 고희동은 스승에 관해 “유시부터 그림에 조예가 깊어서 자연히 일가를 성하였다”고 했다.
그는 당시 명성을 떨치던 장승업에게서 많은 감화와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되는데 안중식의 신선도, 노안도, 기명절지 등에서 장승업의 화풍이 보인다.
그는 장승업을 직접 찾아간 적도 있다. 이 시기에 조선 화단은 중국 화풍 추종과 창의성 없는 산수도, 신선도, 화조도 등에 머물고 있었고 당대의 거장 장승업의 신선도와 고사 인물도에서도 중국 화풍의 방작이 발견된다.
1910년대 이전의 안중식 작품 역시 관념적 전통 기법과 형식적 화제로 한정되어 있었다.
장승업이 타계하고 서울 화단에서는 조석진과 안중식이 가장 부각된 존재가 되었다.
안중식은 1891년 중국을 여행하면서 상해 등지에서 중국 서화가와 교류했으며 1899년 세 번째 중국을 여행한 후 일본으로 가 경도와 기부 등지에서 2년 동안 체류했다.
1906년에는 민족자존을 위한 대한자강회에 창립회원으로 참여했으며 이듬해에 어린이용 교과서 『유년필독』을 편찬했다.
그는 자신의 안일을 위해 나중에 친일파 거두가 된 이완용에게 아부하며 <붕새 鵬鳥>를 그려 그에게 바치는 비열함을 보였다.
운필이 호방하고 대범하게 발휘된 걸작이다. 바다 한가운데 솟은 바위에 부딪쳐 부서지며 넘실거리는 파도와 물거품은 속도감이 느껴진다.
바위 위에 위풍당당하게 올라서서 바다를 내려다보는 붕새를 힘찬 필치와 먹색의 강한 농담으로 묘사하면서 파필破筆과 파묵破墨의 파격적으로 병용했다.
날개짓 하려는 몸짓과 예리한 눈초리와 부리의 묘사 그리고 발톱에서 긴장감을 느낄 수 있다.
상단에 충분한 공간을 둔 것은 붕새가 곧 날게 될 전설의 9만리장천을 배경삼은 것이다.
장자의 <소요유편 逍遙遊篇>에 등장하는 붕새는 북해에 살던 곤鯤이라는 물고기의 변신으로 한 번 날개를 치면 대번에 9만리를 날아간다는 상상의 큰 새이다.
화가의 낙관은 없지만 필치의 특출한 역량으로 안중식의 작품이 분명하다.
화가가 낙관을 하지 못한 것은 이 그림이 임금의 하사품용으로 의뢰된 것이기 때문이다.
당시 학부대신이었던 이재곤이 칙명을 받들어 화면 위의 공간에 써서 밝힌 대로 이 작품은 고종황제가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에게 하사하도록 그려진 것으로 최대로 축복을 담은 제시를 이재곤이 써넣은 것으로 추정된다.
2년 뒤 한일합방이라는 매국의 주요 역할을 하게 되는 이완용을 어이없게도 붕새로 비긴 제시는 이런 내용이다.
만리 천공을 빨리 날아 운구雲衢(벼슬길)에서 빙빙 돈다.
현존하는 그의 작품 대다수는 1910년대에 그려진 것이며 화면에 적힌 행서체의 제시로서 그가 한시에 정통했고 서예가이기도 했음을 보여준다.
그의 산수화에서 청록색 기법과 선명하게 현실감을 강조한 채색부여의 독자풍은 여러 형태로 자유롭게 전개되는데, 부분적으로 수묵담채의 표현과 조화시키거나 절충시킨 수법이면서 작품에 따라 역점을 달리 하기 때문이다.
<봉래선경 蓬萊僊境>은 ‘신선들이 사는 봉래산의 선경’을 화제로 삼은 그림으로 절승한 경개를 세필로 구사하면서 수묵담채의 기법으로 산령과 암석의 윗부분에만 농담미濃淡美를 조절한 청록색조를 적절히 첨부하여 한결 생생하게 현실감이 돋보이도록 했다.
주봉을 비롯한 모든 산형과 암석 등의 표현은 그의 전형적인 작품에 의한 것이며, 수묵담채 수법으로 시종된 노송은 다른 청록산수화에서 늘 그렇게 도입되는 정형이다.
중경과 근경의 노송 뒤로 흐르게 한 서운의 장식적 곡선은 고전적인 수법이다.
흔히 곁들어지는 선인仙人의 점경點景 혹은 특정 고사의 인물이 등장하지 않는 대신 하단 물가에 거불이가 세 마리 기어 다니고 중경의 서운 부분에 두 마리 학이 나르고 있다.
옛 사람들이 상상한 선경의 봉래산 주제에 어울리게 장생을 상징하는 거북과 학을 조화시켰다.
거북과 학을 곁들인 그의 또 다른 선경산수화로 <귀학장년 龜鶴長年>이 있다.
전서체篆書體로 공들여 쓴 ‘봉래선경’ 화제와 역시 반듯하게 해서체楷書體로 쓴 화가 이름 사이의 비단 바탕이 칼로 오려져 나갔는데, 거기에는 이 그림을 위촉하여 받아간 사람의 이름과 제작경위가 써져 있었을 것이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 부분이 잘려 나가 화면에 상처가 되었다.
안중식은 시서화詩書畵를 겸전한 조선의 마지막 문인화가였다.
그러나 그와 조석진은 근대에 속한 화가가 못되었고 구태의연한 중국풍 낡은 그림을 그리는 데 그쳤다.
고희동은 훗날 “중국인 화가의 입내 나는 찌끼”라는 말로 두 사람의 전근대적인 태도를 비판했다.
안중식은 1919년 11월 2일 경기도 시흥에서 타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