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키요에의 시원


18세기까지만 해도 막부와 봉건귀족의 에도코로繪所는 카노파狩野派로 구성되어 있었다.
카노 탄유狩野探幽와 그의 형제들의 직계 계승자들인 4왕조(분파)의 화가들이 쇼군 가문의 비호를 받고 있는 오쿠에시라는 화실의 주도권을 잡고 있었으며 이들은 각각 살고 있던 에도 지역의 명칭에 따라 카지바시, 코비키쵸, 나카바시, 그리고 하마쵸라고 불렀다.
이 밖에도 카노파의 자손들과 제자들은 대대로 오모테에시表繪師라는 어용화사御用畵師로 채용되었으며 또 다른 무리의 카노 화가들은 무사계급을 위해 일했다.
그리고 지방 번주들이 계속해서 자신들의 화실을 주도하기 원한 것도 카노파 화가들이었다.
이런 현상을 카노파의 독점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이 체제 하의 화가들은 획일화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회화 양식을 바꾼다거나 기법을 개량할 수 없었고, 3세기 동안 쇼군의 거처를 장식하거나 다른 어용장식화 제작을 위해 조상들, 특히 탄유에 의해 성립된 본보기를 그대로 흉내냈을 뿐이다.
또한 그들은 옛 미술품의 감정을 의뢰받기도 했다.
그들의 유일한 장점은 19세기 화가들에게 전통 회화 기법을 충실히 전승시키는 것이었다.
산라쿠山樂의 손자이며 일본의 바사리Vasari로 불리는 카노 에이노狩野永納(1631~97)를 비롯한 이 화파의 몇몇 문인화가들은 귀중한 역사 기록과 화가들의 전기 외에도 지금은 사라진 옛 그림들의 모사본을 남겼다.


현존하는 것들 대부분은 무명화가들이 그린 발랄하고 매력적인 여러 유형의 여인들을 최신 유행의 의상을 한 모습이다.
기녀, 무희, 유나湯女라고 불리는 정조 관념이 해이한 대중목욕탕 종업원들이 이런 회화에서 주요 모델이 되었으며,
이중 가장 독창적인 예가 아타미熱海 미술관 소재 <유나>로 여섯 명의 유나들이 코소데라고 하는 가느다란 띠와 화려한 짧은 팔 키모노로 한껏 차려입고 뽐내듯이 거리를 활보하는 모습이다.
이 무명화가가 사용한 기법은 이전의 어느 기법에도 전혀 의존하지 않은 것이다.
서민들의 일상생활과 쾌락을 표현하는 데 적절한 새로운 양식이 생겨났고 이는 17세기 중반에 완숙 단계로 접어들었다.
이런 작품들은 우키요에浮世繪의 시원이 된다.
이 용어는 1681년 이전에는 문헌에 나타나지 않는다.


우키요浮世라는 말은 중국 육조시대 문학에서 처음으로 인간, 인세人世의 뜻으로 사용되었고 송대의 문학에 이르러서는 세상 일이 허무하고 뜬구름처럼 일정하지 않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일본에서도 1681년경 이하라 사이카쿠井原西鶴의 『우키요 조시 浮世草子』라는 대중소설이 출간되어 역시 문학에서 먼저 이 용어가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불교에서는 근심 많은 세상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우키요에 외에도 우키요 가사(우산), 우키요 보시(모자) 등 에도 시대에 유행한 물건들에도 적용되었다.


17세기부터 목판화가 현저하게 증가한 출판물의 삽화로 많이 이용되었다.
풍속화의 발전과 목판화 기법의 개량이 표현을 위한 양식 발전에 계기가 된 것이다.
에도의 출판업자 히시카와 모로노부菱川師宣(1618~94)에 의해 그때가지 본문에 종속되던 삽화는 예술적 독립을 누리게 되었다.
모로노부는 자신이 1677년 이후에 출판한 1303종의 그림책繪本에서 그림이 글씨보다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도록 만들었고, 이전 삽화가들이 지켜온 전통적인 무기명에 반기를 들어 자랑스럽게 자신의 이름을 써넣었다.
이들 그림책들 중 많은 부분이 요사와라吉原 지역의 유흥가에서 일어난 남녀 관계를 묘사한 것이다.(일본화 216)
이런 이유로 당대 사람들은 이런 회화를 둥둥 떠 있는 세상의 그림이란 의미로 우키요에라고 불렀다.
모로노부가 성공한 이유는 그의 양식이 매혹적이었기 때문이다.
판화 제작의 최신 기술의 이점을 최대한으로 이용하여 육필화肉筆畵에 비해 조금도 떨어지지 않는 수준의 판화를 생산했기 때문이다.
새로운 양식과 기법은 일본 판화 초창기 전성기부터 1765년까지 급속도로 발달했다.


쿄호亨保 연간(1716~36)에 이르러 화가 겸 출판업자 오쿠무라 마사노부에 의해 창안된 것으로 추정되는 더욱 진보된 새로운 기법이 대중의 관심을 끌었는데, 빨간색, 노란색, 녹색, 보라색 등 여러 가지 색이 판화에 사용되었으나 늘 붓으로 직접 채색되었다.
이 새로운 양식은 붉은색을 대치한 보다 아름다운 장미빛 홍색(베니)의 이름을 따라 베니에紅繪라 불리었다.
출판업자와 화가들은 목판화를 사용하여 채색을 가하는 방법을 계속해서 연구하면서 중국 다색 판화의 기법, 특히 화려하게 장식된 서예용 색지 제조법을 참작하여 몇 가지 색 홍, 청 등을 가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각 색채는 각각 다른 목판으로 가해졌으며 이들 목판들은 표식見當에 의해서 완벽하게 들어맞도록 했다.
이 기법은 약 20년 동안 유행했고 여기에 보라색과 노란색을 첨가함으로써 차차 다색 판화 기법의 완성 단계로 이르는 길이 열렸다.
약 1세기 동안의 점진적인 발달을 거쳐 일본 판화는 니시키에錦繪라고 불리는 다색 판화에서 기법적 그리고 미적 완성을 이룩할 수 있었다.


이 당시 에도는 조용한 평화를 누리고 있었으며 시민은 수준 높은 생활에 걸맞는 우아함과 세련미의 이상을 한껏 추구할 수 있었다.
서양화에 대한 관심이 다시 생긴 건 1720년 막부 8대 장군 도쿠가와 요시무네德川吉宗가 기독교 이외의 양서洋書에 대해 내렸던 금지 조치를 완화시키고부터였다.
요시무네 시대吉宗時代(1716~36)에 지금의 동경인 에도는 상업적으로 발전했고 전국의 산물을 에도로 보내기 위한 총집결지의 역할을 한 소위 ‘천하의 부엌’으로 불린 오사카에는 유통과 제조업이 성행했다.
막부 재정의 재건에 앞장을 선 요시무네는 시대의 요구에 부합하는 정책을 폈는데 예를 들면 1720년 그는 “약물의 가격이 비싸므로 빈민은 이를 구할 방도가 없어서 한심하게 질병으로 넘어지는 일이 많음을 개탄하여 이들 빈민을 구제한다”는 취지로 막부로 하여금 일본 국내에 자생하는 약초 채취를 행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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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에 서양화를 주문하다


서양화와 관련해서 요시무네는 1722년 나가사키 행정관을 통해 일본으로서는 유일하게 서양이었던 네덜란드에 서양화를 주문했으며 유화 다섯 점이 1726년 일본에 도착했다.
이것들 중 두 점 공작 그림과 정물화는 1728년 에도의 나한사羅漢寺에 소장되었으므로 일반인이 감상할 수 있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일본에서는 네덜란드를 중심으로 하는 서양문화를 연구하는 학문 난학蘭學이 활성화되면서 서양화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일본인은 서양화가들이 과학적인 관망으로 대상을 음영과 원근법을 구사하여 객관적으로 묘사하면서 3차원의 대상을 2차원의 캔버스에 부피와 공간으로 입체적으로 나타내려는 데 몰두하고 있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동양화가들과는 달리 서양화가들은 실상을 사진처럼 정확하게 재현하는 기술을 연마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아키타 지방에서 유행한 서양화 추전난화秋田蘭畵의 대표적인 화가 사타게 쇼잔佐竹曙山(1748~85)은 1778년에 쓴 『화법강령畵法綱領』에서 “그림이란 모름지기 대상을 닮아야 한다”고 적었고,
에도 서민 출신으로 일본에서 처음 에칭을 제작한 시바 고칸司馬江漢(1747~1818)은 1799년에 쓴 『서양화담』에 적었다.

“서양 각국의 회화란 사진처럼 베껴내는 것이어서 우리와는 다른데 … 이에 대해 동양의 회화는 농담 표현으로 음양·요철·원근 등을 나타내면서 대상물의 정기를 담아내는 것이다.”

고칸은 스즈키 하루노부로부터 우키요에를 배운 뒤 사생화로 전환하여 히라가 겐나이와 교류하며 네덜란드 서적 등에서 힌트를 얻어 독자적인 동판 화법을 창시했다.
일본인은 서양화는 곧 사실화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으며 정확하게 묘사된 그림이 대상물 대신 전달과 보존의 수단이 된다는 걸 알게 되었다.
특히 박물도와 해부도의 경우 음영법과 원근법 기술을 익히지 못하면 정확하게 묘사할 수 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17세기 전반 막부의 금교 정책이 있었지만 서양의 사실주의 양식은 일본인에 의해 산발적으로 답습되었고 추전난화의 성행으로까지 이어졌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정확하게 묘사하려는 사실주의는 르네상스의 거장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의 전례를 따라 과학적 관망으로 원근, 비례, 명암으로 3차원적으로 묘사하는 것을 말한다.
회화는 빛에 의해 연출되었고 원근법 속에서 혹은 명확한 비례 안에서 형태들이 결합되었다.
17세기에 들어서서는 카라바조의 웅대한 인물상과 인위적인 빛의 사용은 과장된 방법으로 화가의 개성으로 나타나 이후 2세기에 걸쳐 유행했지만 사실주의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았다.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이런 경향은 일찍이 16세기 초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를 통해 프랑스에 알려졌으며 19세기 중반까지 서양의 보편적인 양식으로 답습되었다.
중국과 일본에 알려진 초기의 서양화는 이런 이탈리아와 프랑스 화풍의 사실주의 양식으로 그려진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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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심스러운 세상이란 뜻의 우키요에


원근법perspective이란 용어는 라틴어 perspectiva에서 유래하며, 로마의 철학자 보이티우스(?~524)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술을 번역할 때 기하학의 한 분야를 나타내는 그리스어 ‘광학’의 번역어로 채택한 것이다.
15세기에는 고정시킨 시점에서 투명한 평면 위에 나타나는 장면을 들여다보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이때부터 라틴어로 ‘구축적 원근법’ 또는 ‘회화 원근법’으로 불리게 되었고, 이전의 과학, 즉 광학을 가리키는 ‘보편적 원근법’ 또는 ‘시각 원근법’과 구별되었다.
중앙소실원근법에서 회화가 그려지는 면은 화가와 대상 사이에 수직으로 세워진 투명한 화면으로 보고 그 평면상에서 화가는 단일하게 고정된 시점에서 대상의 윤곽을 보이는 그대로 그리는 것이다.
적절하게 채색된 이상적인 경우를 생각하면 이런 방법으로 그려진 회화는 정해진 위치에서 한쪽 눈으로 보았을 때, 실제의 광경을 창을 통해 바라보는 듯한 환영을 만들어낸다.


서양화의 영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난 것이 우키요에의 풍속화에 나타난 투시원근법이다.
서양 양식에 의한 일본 풍경화는 앞서 언급한 대로 우키에의 판화에서 시작되었다.
에도 시대 중에서도 덴나天和 연간(1681~84)에 새로운 미술 용어로 정착하게 된 우키요란 말은 우세憂世, 즉 근심스러운 세상이란 뜻이다.
덴나 연간에 이하라 사이카쿠井原西鶴에 의해 우키요 소시라는 새로운 소설 형식이 시작되었고 또한 우키요 그림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고바야시 다다시小林忠은 『우키요에의 미』(1984)에서 우키요憂世란 말은 ‘잠시 동안만 머물 현세라면 조금 들뜬 기분으로 마음 편히 살자’는 사고 방식이 생기면서 그 뜻이 ‘근심스러운 세상’이란 뜻에서 현재의 세태와 풍속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며 현재 양식 혹은 호색적 당세풍이란 의미를 내포하는 우키요浮世라는 말로 바뀌게 되었다면서,
그렇기 때문에 모든 우키요 화가들은 늘 시대를 앞서 가는 첨단의 풍속과 유행하는 화제에 관해 왕성한 호기심을 보이며 그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했던 것이라고 주장했다.
우키요에 연구가 요시다 에이지吉田映二는 『우키요의 담의 浮世繪談義』의 항목 ‘우키요에와 신문’에서 우키요에에서 다룬 소재를 신문의 지면 구성과 연관시켜 설명하는 가운데 그 시사성과 주제의 폭이 넓어 정치, 국제, 경제, 문예, 종교, 연예, 여성, 가정, 어린이, 오락, 스포츠, 사회 등에 관해 그림을 그렸다고 적었다.


이런 의미에서 우키요, 곧 세련된 욕망의 발산처는 유곽遊里과 가부키歌舞伎 등을 공연하던 극장 거리가 있는 유흥가였다.
에도 시대의 이런 유흥가 풍속을 바탕으로 미술, 문학, 예능 분야에서 풍요로운 결실이 맺어졌다.
이 중에서 우키요에는 가장 큰 결실이다.
호색에 치우친 우키요의 가장 극단적인 그림이 남녀의 유희를 주제로 한 마쿠라에枕繪, 곧 춘화春畵이다.
우키요에는 당시 에도 그림으로 불리었는데, 에도 특산의 미술품으로 가격이 적당하여 여행자의 선물용으로 매우 인기가 있었다.


자칭 우키에 네모토라고 칭한 오쿠무라 마사노부奧村政信로 대표되는 우키에의 초기작은 대부분 극장의 무대를 그린 것과 넓은 대청을 그린 것들이다.
그에게는 회화의 모티프는 같지만 별도로 한 치수 작은 사이즈, 즉 이 그림의 염가판을 출판업자 오쿠무라야 겐로쿠를 통해 제작한 것을 <료고쿠바시 유스즈미 우키에곤겐 兩國橋夕見大浮繪根元>(유키요에 154)이란 제목을 붙여 우키에라는 새로운 장르의 개척자라는 공을 스스로 과시했다.
이 작품은 마사노부의 우키에 작품 중 최고의 완성도를 보인 걸작이다.
료고쿠바시의 서쪽 기슭에 있는 한 요정의 2층에서 벌어진 피서 풍경이 다양한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
오른쪽 방에서는 샤미센과 피리소리에 맞춰 춤판이 벌어지고 있으며 그 중 삿갓을 쓴 남자가 온몸에 달빛을 받으며 장지 위에 그림자를 남겼다.
화면 중앙에는 비스듬히 기대 누운 손님 옆에 기녀가 있고, 기녀가 따른 술잔을 받으려고 하며, 왼편에서는 젊은 남녀가 쌍륙을 즐기고 있다.
이들 뒤로 기둥에 기대어 망연한 표정을 짓는 남자의 모습도 보인다.


실내의 묘사에서는 어느 정도 원근법을 응용하는 데 성공한 마사노부였지만 의지할 만한 직선이 없는 요정 뒤로 펼쳐진 야외 풍경에서는 전혀 손을 쓸 수 없는 종래의 부감 구도로 파악하고 있어 료고쿠바시 주변 풍경이 그야말로 위로 떠올라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내와 실외를 서양과 동양의 두 가지 화법을 혼용하여 사용한 결과로 생긴 위화감이 오히려 아 작품에 불가사의한 매력을 부여했다.
강에는 불꽃을 뿜는 지붕달린 소형 유람선 야가타부네屋形船가 떠 있고 강기슭 가까이에는 기원을 위해 목욕재계하는 사람들이 있다.
에도 시민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여름철 피서 풍물이 하나도 빠짐없이 묘사된 그림이다.
전반적으로 갈색과 황색 외에 연한 먹물로 채색되어 화면 전체에 차분한 안정감을 주며 부분적으로 연지와 보라 등으로 연하게 채색되어 부드럽게 정돈된 느낌을 준다. 보존 상태는 거의 완벽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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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주의와 사실주의와의 관계


자연주의와 사실주의와
피터 스크라인Peter Skrine과 릴리안 푸르스트Lilian Furst 공저 『자연주의Naturalism』(1971)에 ‘자연주의와 사실주의와의 관계’란 항목의 글이 있는데,
19세기 서양에서 일어난 자연주의와 사실주의의 관계에 관한 내용이지만 서양화와 동양화 모두에 해당하는 내용이다.

“사실주의자들과 자연주의자들에게 공통되는 점은, 예술이란 근본적으로 외적 진실의 모사적·객관적 재현이라는 기본 신념이다.
이런 신념은 그들로 하여금 소재로서 가까운 주변에 깔려 있는 범상한 것들을 선택하게 했으며 또한 기교에 있어서는 비개인성impersonality의 이상을 예찬하게 했다. …
자연주의는 바로 이러한 모사적 사실주의의 일반적 경향으로부터 자라난 것이다.
여러 가지 점에서 자연주의는 사실주의의 강화된 형태이다. …
이 둘의 진정한 차이는 보다 심원한 곳에 놓여 있다.
즉 사실주의의 초연한 중립적 태도에 어떤 특수한 인간관을 부과하는 것이 자연주의의 근본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자연주의자들은 사실주의의 근본 취지를 갈고 다듬고 강화시켰을 뿐 아니라,
자연주의를 사실주의와는 달리 하나의 분명한 교리로 만들어준 중요한 새로운 요소들을 부가한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자연주의는 사실주의보다 더욱 구체적이며 동시에 더욱 한정적이다. …
그리하여 자연주의자들은 과학적 사상에 깊이 고취된 하나의 철학을 거쳐 여러 분야의 과학으로부터 그들의 작품에 표현하고자 하는 명확한 인간의 개념을 추출해낸 것이다.
그들의 생물학적·철학적 가정은 그들을 선입견 없는 객관적인 태도를 취하는 사실주의자들과 구분시켜준다.
왜냐하면 인생을 관찰하는 데 있어서 자연주의자들은 이미 어떠한 패턴을 예상하기 때문이다.”


서양화의 음영법과 원근법 외에도 중국화의 자연주의 전통도 오쿄에게 영향을 주었다.
일본의 외부세계와의 유일한 통로 나가사키를 통해 17세기부터 서양화와 중국화가 일본으로 들어왔다.
1644년 명승 이츠넨逸然(1601~68)이 일본에 와서 세운 선종禪宗의 한 파인 오바쿠라는 새로운 선종파가 나가사키의 화교들에 의해 일본에 소개되었다.
오바쿠 선사들의 초상화는 얼굴 묘사에서 철저한 사실주의를 보이는 특이한 양식으로 제작되었다.
키타 겐키喜多元規와 같은 일본 화가가 이 표본을 따랐으며 여기에 기독교 선교사들에 의해 일본에 반입된 서양화 양식이 가미되었다.
그 자신 아마추어 화가인 이츠넨은 나가사키파인 관화파官畵派 화가들에게 크게 영향을 행사했으며 이들의 회화는 사물의 세밀한 부분까지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것이 특징이다.
일본 화가들은 세부 묘사와 빈틈 없는 필법, 그리고 화사한 색채를 좋아했으며,
유히態斐라고 알려진 쿠마시로 슛코態代繡江(1712~72)와 같은 추종자를 낳았고,
오쿄도 어느 정도 영향을 받았다.


오쿄가 1760년대에 그린 <기원사도祇園社圖>를 보면 대로변의 상점들이 점차 축소되어 가는 원근법이 적용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또한 시점이 낮게 설정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요소는 과거 일본화와 우키요에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획기적인 것이다.
모든 사물이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어 그가 정확하게 관찰했음이 분명하다.
인물과 신사 입구의 두 기둥에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어 빛에 의한 음영도 놓치지 않았다.
사실적 요소로 구성되고 넓은 공간을 보여주는 그의 회화의 매력은 조화로운 색채와 필묵의 선염에 있다.
형이상학적 추상이나 대담한 형식이 전혀 개입되지 않고 이해하기 쉬운 그의 회화는 쿄토와 오사카 대중의 허세부리지 않는 평범한 취향에 완벽하게 부합된다.


엠만인円滿院 대사찰의 문주門主 유죠祐常 법친왕法親王의 관대한 비호와 그 자신의 노력의 결과로 오쿄는 사물에 대한 객과적 관찰에 기초한 독특한 양식을 이룩했다.
1770-76년에 제작한 동경의 국립박물관과 니시무라 가西村家 소재 몇 권의 노트와 사생회첩寫生繪帖들을 보면 그가 동·식물을 정확하게 관찰했음을 보여준다.
인물화 중에는 누드로 스케치한 것을 그 위에 채색한 것도 있다.


오쿄의 후기 작품, 특히 대화면의 구성은 진부하고 정기가 없어 보일 정도로 구도가 너무 명료하고 내용이 결여되어 있다.
그의 걸작품의 생기 있는 면모는 적어도 애써 이룩한 사실적 묘사의 정확성이 아니며 용필의 재주와 섬세하게 나부끼듯 움직이는 선으로부터 폭넓게 휩쓰는 듯한 필획에 이르기까지 필선의 다양성에 있다.
1765년작 <설송도 雪松圖>는 젊은 시절 작품에서 볼 수 있는 즉흥성과 숙달된 기법을 뽐내는 작품이다.
엷은 금채로 강조된 배경에 단순한 필묵의 효과로 비단의 흰색 바탕은 나무둥치와 땅 위에 덮인 눈의 역할을 하며 신선함, 부드러움, 가벼움 등의 촉감을 십분 느낄 수 있다.
침엽은 신속한 필선으로 묘사되었으며 먹의 농담으로 나무둥치와 가지가 입체적으로 표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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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계 백화점 정기간행물에 기고한 글입니다.

20세기 미술의 쌍둥이 아버지, 마티스와 피카소


어떤 사람이 마티스에게 그와 피카소의 차이를 묻자 마티스가 말했다.

“당신은 사과와 배가 무엇이 다르냐고 묻고 있소. 둘 다 자연의 것이오.”

두 사람의 상이한 점을 묻는 건 적절하지 않다.
두 사람 모두 한 세기마다 출현 가능한 천재 예술가일 뿐이다.
해서 명민한 학자는 우열을 가릴 수 없는 두 사람을 묶어서 ཐ세기 미술의 쌍둥이 아버지'라 부른다.
20세기 전반 50년 동안 미술 발전은 두 사람의 독자적 창조성에 의해 크게 좌우되었다.
두 사람은 반세기 동안 일어난 대부분의 혁명적 변화의 원인이었으며 빼어난 기초 소묘 능력, 시각적 독창성과 구상 능력은 보편적으로 인정받았다.


피카소가 열두 살 손위의 마티스를 처음 만난 건 1906년이었다.
두 사람의 작품을 콜렉트하던 미국인 여류 작가 거트루드 스타인의 만찬 초대석에서였다.
스타인은 젊은 예술가들 중에서 두 사람이 가장 재능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은 만나기 전 서로의 작품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존중했으며 만남을 계기로 작품을 교환하기도 했다.


1900년 경제적으로 어려워 미터당 얼마간의 수당을 받고 그랑 팔래의 장식벽화를 그리기도 하고 고된 일을 하면서 가족을 부양하던 마티스는 반 고흐의 소묘 2점, 고갱과 세잔의 유화를 각각 한 점씩 갖고 있었지만 팔지 않았다.
이들 세 사람은 그에게 영향을 준 화가들이다.
마티스는 특히 고갱의 영향을 받아 리드미컬한 선적 페턴과 단색의 평편한 색면을 표현적으로 구성하는 독자적 양식을 발전시키면서 20세기 초 몇 년 동안 자신만의 장식적, 표현적 추상 양식을 완성했다.
이런 양식의 결정체가 모던 아트에서 지표가 되는 두 점의 걸작 <사치, 평온, 쾌락>과 <생의 기쁨>이다.
전자는 1905년 살롱 데 쟁데팡당에 전시되었는데 신인상주의 화가 시냐크가 구입했고, 후자는 1906년에 전시되었으며 스타인의 남동생 리오가 구입했다.


마티스는 귀스타브 모로의 아틀리에에서 만난 마르케, 망갱, 카무앵과 함께 작업했고, 이 그룹에 뒤피, 프리에스, 브라크, 드랭, 블라맹크, 장 퓌, 그리고 반 동겐이 참여했다.
이들은 나이 많은 마티스를 ‘박사님’이라고 부르면서 따랐다.
이들의 작품이 1905년 살롱 도톤에서 소개되었고 이듬해 살롱 데 쟁데팡당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야수’란 명칭은 1905년 <질 블라스 Gil Blas>지에 실린 평론가 루이 보셀의 1905년 살롱 도톤에 대한 비평문에서 비롯되었다.
보셀은 야수주의 회화들 가운데 함께 전시된 르네상스 양식의 조각 한 점을 보고 평했다.

“이 흉상의 순수성은 순수한 색채의 소란 가운데서 놀라움으로 다가온다. 그것은 마치 야수들에 둘러싸인 도나텔로와 같다.”

야수란 명칭에는 당시 평론가와 미술품 감식가들 사이에서 지배적이던 견해, 즉 야수주의 회화는 유능하고 재능은 풍부하지만 균형 감각을 상실한 채 제멋대로 날뛰는 화가들의 그림이라는 시각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야수주의는 체계적으로 벌인 프랑스의 표현주의의 출발이 되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입체주의란 용어 또한 보셀에 의해 유래된 것이다.
보셀은 1909년 5월 25일 칸바일러 화랑에서 1908년 11월 14일에 열린 조르주 브라크의 회화 전시회를 평가하면서 ‘입체'와 ‘기이한 입체’란 단어를 처음 사용했다.
브라크는 1907년 살롱 도톤에 출품하려고 했지만 주최측으로부터 거부당하자 칸바일러가 이듬해 개인전을 열어주었다.
도톤에서 배척당했을 때 보셀이 마티스에게 브라크가 가져온 그림이 어떻게 생긴 것이냐고 묻자 마티스는 종이에 입방체를 그린 후 이런 식으로 그린 것들이라고 했다.
야수주의와 입체주의가 보셀의 비아냥거린 말에서 유래한 것은 흥미롭다.
피카소는 야수주의 작품에 감명을 받았지만 그들의 장식적이고 표현적인 채색방법을 따르지는 않았다.


흑인시대로 불리는 1907~09년에 피카소는 형태의 분석과 단순화에 몰두했고 세잔과 흑인 조각에 대한 연구에서 방향을 잡아 독자적인 노선을 추구했다.
이 시기의 탐색이 낳은 결실이 <아비뇽의 아가씨들>이다.
이 작품은 형태를 다룸에 있어 야수주의자들이 색채를 다룬 것에 비견될 만큼 격렬하게 전통적인 인상주의에 반발하고 있다.
당시 마티스와 드랭을 위시해서 미술사학자들조차 이 작품을 이해하지 못했으며 1937년까지 대중에게 공개되지 못했다.
그러나 현재 평론가들은 이 작품을 피카소 개인의 획기적인 성취일 뿐만 아니라 모던 아트 발전에 있어 가장 중요한 사건이자 입체주의의 탄생을 예고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1910~16년 피카소는 입체주의 발전을 위해 브라크와 공동으로 작업했는데 브라크의 말대로 두 사람은 로프로 한데 묶인 등반가로서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어 이 시기에 제작된 작품들은 서명도 없고 어느 것이 피카소의 것이고 어느 것이 브라크의 것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입체주의는 초기의 분석적 입체주의와 1912년 무렵부터의 종합적 입체주의로 나눠지는데, 종합적 입체주의 시기에 콜라주, 파피에 콜레와 같은 기법들이 부수적으로 도입되고 실제 요소들이 회화 구조 속에 편입되었다.
콜라주collage는 기존의 이미지를 ‘가위로 자르고 풀로 붙여’ 결합하는 방법을 말한다. ‘풀로 붙이다’는 의미의 프랑스어 coller에서 나온 말이다.
파피에는 종이란 뜻으로 파피에 콜레는 종이를 풀로 붙이는 것을 말한다.
피카소와 브라크는 신문지 조각 같은 실제 사물을 그림에 부착했는데 부착된 사물은 본래의 기능을 유지하는 동시에 그림 속의 가상 이미지가 되어야 하는 이중적 역할을 수행했다.
입체주의는 낭만주의적인 주정주의나 눈으로 본 이미지의 정확한 재현을 추구한 인상주의 기법 모두와 반대되는 일종의 개념 미술에 대한 탐구였다.
또한 20세기에 가장 널리 영향을 미친 미학적 운동으로 평가되어 왔으며 미술품은 외적 현실의 반영이나 단순한 이미지가 아니라 그 자체로 하나의 사물이라는 개념을 확고하게 확립시켰다.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1869~1954)

라카토캉브레시 태생의 마티스는 1887~88년 파리에서 법률가의 자격을 취득한 뒤 생캉탱의 법률사무소에서 서기로 재직하다가 1890년에 그림을 시작했고 이듬해에는 법률 관계 일을 그만두고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아카데미 쥘리앙에서 아카데미 화가 부그로의 지도를 받았지만 1892년 자신의 취향에 맞는 귀스타브 모로의 지도를 받기 위해 에콜 데 보자르로 옮겼다.
1900년에는 조각을 공부하기 시작하여 틈틈이 제작했는데 4점의 부조 <등 Back>이 유명하다.
대규모 조각 전시회가 그가 타계하기 한 해 전인 1953년에 런던과 뉴욕에서 열렸다.
1947년부터 파리 국립 현대 미술관은 그의 대표작들을 수집하기 시작했고, 1952년 라카토캉브레시에 마티스 미술관이 건립되었다.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1881~1973)

에콜 드 파리를 대표하는 스페인 미술가 피카소는 어려서부터 말라가에서 소묘 교사로 재직한 아버지로부터 회화를 배웠다.
피카소는 1891~95년에 코루냐에서, 1895~1904년에는 주로 바르셀로나에서 작업했으며, 1900년 처음 파리를 방문했고, 1904년까지 파리와 바르셀로나를 왕래하다가 1904년 파리에 정착했다.
청색시대로 알려진 1901~04년에는 주로 조형적이고 재현적인 형태에 대한 관심과 스페인 전통의 정서적인 테마를 작품 속에서 결합시켰으며, 대부분 빈곤함이나 사회의 낙오자를 테마로 다루었는데 다소 감상적이며 우울한 분위기가 지배적이다.
이 시기의 작품에는 차가운 공기 같은 청색조가 주조를 이룬다.
1905년부터 2,3년 동안은 장밋빛시대로 알려졌다.
푸른 색조 대신 분홍색과 회색이 주로 사용되었고 분위기가 사뭇 부드러워졌다.
곡예사와 무희를 주로 그렸고 특히 어릿광대를 많이 그렸다.
1966년 전립선 수술을 받았고 이듬해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소묘와 에칭에 몰두했는데 특히 에로틱한 테마를 다룬 347점의 에칭 연작이 유명하다.
피카소는 1973년 4월 8일 다수의 작품과 전시회 계획을 뒤로 한 채 독감에 의한 심장 쇠약으로 92살로 영면했다.


마티스 2, <사치, 평온, 쾌락>, 1904
마티스는 1904년 모파상이 아름다운 글로 묘사한 작은 항구 생 트로페에서 작업했다.
이것은 그가 친구 시냐크의 점묘법의 영향을 받아 그린 것이다. 점묘법이란 붓을 세워 점을 찍듯이 찍어 그리는 채색법을 말한다.

마티스 1, <댄스>, 1909
마티스는 이 주제의 그림을 두 점 그렸는데 이것이 첫 번째 그린 것이다.

마티스 3, <자화상>, 1906

마티스, <모자를 쓴 여인>, 1905 뒤샹 27
이 그림은 마티스가 아내의 초상을 그린 것이다.
성격이 강한 아내는 여자 모자 상점을 운영하면서 경제적으로 남편을 도왔다.
평론가 카미유 모클레르는 <르 피가로>지에 이 그림에 관해 비평하면서 이 작품의 출품은 “서커스의 야수 우리에 던져진 크리스천 처녀와도 같은 운명에 처할 것이다”라고 적었다.

마티스 5, <왕의 슬픔>, 1952
마티스 6, <꿈>, 1940

피카소 8, <자화상 Self-Portrait>, 1907, Prague National Gallery
피카소는 1912년에 콜라주에 전념했다. 그가 사용한 나무, 벽, 장작, 태피스트리 가장자리의 장식을 모방한 종이는 대상과는 아무 상관없이 색채를 그림에 끌어들였다.
형태의 조화를, 나아가서는 그림의 조화를 깨뜨리는 평면 조각을 풀로 붙이는 방법을 통해 공간이 재구성되었다.


피카소, <아비뇽의 아가씨들 Les Demoiselles d'Avignon>, 1907, The Museum of Modern Art, New York
마티스는 이 그림을 보고 “26살의 스페인 화가가 회화에 손상을 입혔다”고 말했지만 나중에는 그의 창조성을 인정해주었다.
이 작품은 피카소의 바르셀로나 시절에 대한 추억이 담긴 것으로 그는 바리오 고티코의 사창가인 아비뇽 거리의 한 유곽 입구에 서있는 창녀들을 그린 것이다.
피카소의 대변인이자 옹호자인 시인 아폴리네르도 이 작품을 가리켜 “철학적 유곽”이란 표현을 사용하며 이 작품에 비난이 쏟아지게 한 요인은 작품을 구성하는 전체적인 원시성이라고 지적했다.
예리한 칼로 살을 도려낸 듯한 인체, 여인들의 시선, 엄청나게 큰 발과 젖가슴, 이런 것들이 서양 미술에서 유례가 없는 잔인성과 야만성을 풍긴다.
피카소가 처음에 그린 크로키를 보면 창녀들 한가운데 선원 한 사람과 손에 해골을 든 외과의사가 그려져 있다.
그 후 지나치게 교훈적이며 상징주의에 빠질 것을 염려한 그는 구성을 바꾸어 다섯 여인으로 한정했다.
그가 파리의 인류학 박물관에서 아프리카 전통 미술을 발견한 후 2월과 7월의 두 시기에 걸쳐 집중적으로 완성시킨 작품이다. 굵은 테두리가 있는 눈과 두터운 턱은 흑인 조각에서 인용한 것들이다.

피카소 5, <독서하는 여인 Woman Reading>, 1939, Christie
피카소 6, <여인의 반신상 Woman's Bust>, 1965, Christie
피카소 7, <독서하는 여인 Reading>, 1932, Picasso Museum, Par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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