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세계 백화점 정기간행물에 기고한 글입니다.
20세기 미술의 쌍둥이 아버지, 마티스와 피카소
어떤 사람이 마티스에게 그와 피카소의 차이를 묻자 마티스가 말했다.
“당신은 사과와 배가 무엇이 다르냐고 묻고 있소. 둘 다 자연의 것이오.”
두 사람의 상이한 점을 묻는 건 적절하지 않다.
두 사람 모두 한 세기마다 출현 가능한 천재 예술가일 뿐이다.
해서 명민한 학자는 우열을 가릴 수 없는 두 사람을 묶어서 ཐ세기 미술의 쌍둥이 아버지'라 부른다.
20세기 전반 50년 동안 미술 발전은 두 사람의 독자적 창조성에 의해 크게 좌우되었다.
두 사람은 반세기 동안 일어난 대부분의 혁명적 변화의 원인이었으며 빼어난 기초 소묘 능력, 시각적 독창성과 구상 능력은 보편적으로 인정받았다.
피카소가 열두 살 손위의 마티스를 처음 만난 건 1906년이었다.
두 사람의 작품을 콜렉트하던 미국인 여류 작가 거트루드 스타인의 만찬 초대석에서였다.
스타인은 젊은 예술가들 중에서 두 사람이 가장 재능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은 만나기 전 서로의 작품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존중했으며 만남을 계기로 작품을 교환하기도 했다.
1900년 경제적으로 어려워 미터당 얼마간의 수당을 받고 그랑 팔래의 장식벽화를 그리기도 하고 고된 일을 하면서 가족을 부양하던 마티스는 반 고흐의 소묘 2점, 고갱과 세잔의 유화를 각각 한 점씩 갖고 있었지만 팔지 않았다.
이들 세 사람은 그에게 영향을 준 화가들이다.
마티스는 특히 고갱의 영향을 받아 리드미컬한 선적 페턴과 단색의 평편한 색면을 표현적으로 구성하는 독자적 양식을 발전시키면서 20세기 초 몇 년 동안 자신만의 장식적, 표현적 추상 양식을 완성했다.
이런 양식의 결정체가 모던 아트에서 지표가 되는 두 점의 걸작 <사치, 평온, 쾌락>과 <생의 기쁨>이다.
전자는 1905년 살롱 데 쟁데팡당에 전시되었는데 신인상주의 화가 시냐크가 구입했고, 후자는 1906년에 전시되었으며 스타인의 남동생 리오가 구입했다.
마티스는 귀스타브 모로의 아틀리에에서 만난 마르케, 망갱, 카무앵과 함께 작업했고, 이 그룹에 뒤피, 프리에스, 브라크, 드랭, 블라맹크, 장 퓌, 그리고 반 동겐이 참여했다.
이들은 나이 많은 마티스를 ‘박사님’이라고 부르면서 따랐다.
이들의 작품이 1905년 살롱 도톤에서 소개되었고 이듬해 살롱 데 쟁데팡당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야수’란 명칭은 1905년 <질 블라스 Gil Blas>지에 실린 평론가 루이 보셀의 1905년 살롱 도톤에 대한 비평문에서 비롯되었다.
보셀은 야수주의 회화들 가운데 함께 전시된 르네상스 양식의 조각 한 점을 보고 평했다.
“이 흉상의 순수성은 순수한 색채의 소란 가운데서 놀라움으로 다가온다. 그것은 마치 야수들에 둘러싸인 도나텔로와 같다.”
야수란 명칭에는 당시 평론가와 미술품 감식가들 사이에서 지배적이던 견해, 즉 야수주의 회화는 유능하고 재능은 풍부하지만 균형 감각을 상실한 채 제멋대로 날뛰는 화가들의 그림이라는 시각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야수주의는 체계적으로 벌인 프랑스의 표현주의의 출발이 되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입체주의란 용어 또한 보셀에 의해 유래된 것이다.
보셀은 1909년 5월 25일 칸바일러 화랑에서 1908년 11월 14일에 열린 조르주 브라크의 회화 전시회를 평가하면서 ‘입체'와 ‘기이한 입체’란 단어를 처음 사용했다.
브라크는 1907년 살롱 도톤에 출품하려고 했지만 주최측으로부터 거부당하자 칸바일러가 이듬해 개인전을 열어주었다.
도톤에서 배척당했을 때 보셀이 마티스에게 브라크가 가져온 그림이 어떻게 생긴 것이냐고 묻자 마티스는 종이에 입방체를 그린 후 이런 식으로 그린 것들이라고 했다.
야수주의와 입체주의가 보셀의 비아냥거린 말에서 유래한 것은 흥미롭다.
피카소는 야수주의 작품에 감명을 받았지만 그들의 장식적이고 표현적인 채색방법을 따르지는 않았다.
흑인시대로 불리는 1907~09년에 피카소는 형태의 분석과 단순화에 몰두했고 세잔과 흑인 조각에 대한 연구에서 방향을 잡아 독자적인 노선을 추구했다.
이 시기의 탐색이 낳은 결실이 <아비뇽의 아가씨들>이다.
이 작품은 형태를 다룸에 있어 야수주의자들이 색채를 다룬 것에 비견될 만큼 격렬하게 전통적인 인상주의에 반발하고 있다.
당시 마티스와 드랭을 위시해서 미술사학자들조차 이 작품을 이해하지 못했으며 1937년까지 대중에게 공개되지 못했다.
그러나 현재 평론가들은 이 작품을 피카소 개인의 획기적인 성취일 뿐만 아니라 모던 아트 발전에 있어 가장 중요한 사건이자 입체주의의 탄생을 예고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1910~16년 피카소는 입체주의 발전을 위해 브라크와 공동으로 작업했는데 브라크의 말대로 두 사람은 로프로 한데 묶인 등반가로서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어 이 시기에 제작된 작품들은 서명도 없고 어느 것이 피카소의 것이고 어느 것이 브라크의 것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입체주의는 초기의 분석적 입체주의와 1912년 무렵부터의 종합적 입체주의로 나눠지는데, 종합적 입체주의 시기에 콜라주, 파피에 콜레와 같은 기법들이 부수적으로 도입되고 실제 요소들이 회화 구조 속에 편입되었다.
콜라주collage는 기존의 이미지를 ‘가위로 자르고 풀로 붙여’ 결합하는 방법을 말한다. ‘풀로 붙이다’는 의미의 프랑스어 coller에서 나온 말이다.
파피에는 종이란 뜻으로 파피에 콜레는 종이를 풀로 붙이는 것을 말한다.
피카소와 브라크는 신문지 조각 같은 실제 사물을 그림에 부착했는데 부착된 사물은 본래의 기능을 유지하는 동시에 그림 속의 가상 이미지가 되어야 하는 이중적 역할을 수행했다.
입체주의는 낭만주의적인 주정주의나 눈으로 본 이미지의 정확한 재현을 추구한 인상주의 기법 모두와 반대되는 일종의 개념 미술에 대한 탐구였다.
또한 20세기에 가장 널리 영향을 미친 미학적 운동으로 평가되어 왔으며 미술품은 외적 현실의 반영이나 단순한 이미지가 아니라 그 자체로 하나의 사물이라는 개념을 확고하게 확립시켰다.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1869~1954)
라카토캉브레시 태생의 마티스는 1887~88년 파리에서 법률가의 자격을 취득한 뒤 생캉탱의 법률사무소에서 서기로 재직하다가 1890년에 그림을 시작했고 이듬해에는 법률 관계 일을 그만두고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아카데미 쥘리앙에서 아카데미 화가 부그로의 지도를 받았지만 1892년 자신의 취향에 맞는 귀스타브 모로의 지도를 받기 위해 에콜 데 보자르로 옮겼다.
1900년에는 조각을 공부하기 시작하여 틈틈이 제작했는데 4점의 부조 <등 Back>이 유명하다.
대규모 조각 전시회가 그가 타계하기 한 해 전인 1953년에 런던과 뉴욕에서 열렸다.
1947년부터 파리 국립 현대 미술관은 그의 대표작들을 수집하기 시작했고, 1952년 라카토캉브레시에 마티스 미술관이 건립되었다.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1881~1973)
에콜 드 파리를 대표하는 스페인 미술가 피카소는 어려서부터 말라가에서 소묘 교사로 재직한 아버지로부터 회화를 배웠다.
피카소는 1891~95년에 코루냐에서, 1895~1904년에는 주로 바르셀로나에서 작업했으며, 1900년 처음 파리를 방문했고, 1904년까지 파리와 바르셀로나를 왕래하다가 1904년 파리에 정착했다.
청색시대로 알려진 1901~04년에는 주로 조형적이고 재현적인 형태에 대한 관심과 스페인 전통의 정서적인 테마를 작품 속에서 결합시켰으며, 대부분 빈곤함이나 사회의 낙오자를 테마로 다루었는데 다소 감상적이며 우울한 분위기가 지배적이다.
이 시기의 작품에는 차가운 공기 같은 청색조가 주조를 이룬다.
1905년부터 2,3년 동안은 장밋빛시대로 알려졌다.
푸른 색조 대신 분홍색과 회색이 주로 사용되었고 분위기가 사뭇 부드러워졌다.
곡예사와 무희를 주로 그렸고 특히 어릿광대를 많이 그렸다.
1966년 전립선 수술을 받았고 이듬해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소묘와 에칭에 몰두했는데 특히 에로틱한 테마를 다룬 347점의 에칭 연작이 유명하다.
피카소는 1973년 4월 8일 다수의 작품과 전시회 계획을 뒤로 한 채 독감에 의한 심장 쇠약으로 92살로 영면했다.
마티스 2, <사치, 평온, 쾌락>, 1904
마티스는 1904년 모파상이 아름다운 글로 묘사한 작은 항구 생 트로페에서 작업했다.
이것은 그가 친구 시냐크의 점묘법의 영향을 받아 그린 것이다. 점묘법이란 붓을 세워 점을 찍듯이 찍어 그리는 채색법을 말한다.
마티스 1, <댄스>, 1909
마티스는 이 주제의 그림을 두 점 그렸는데 이것이 첫 번째 그린 것이다.
마티스 3, <자화상>, 1906
마티스, <모자를 쓴 여인>, 1905 뒤샹 27
이 그림은 마티스가 아내의 초상을 그린 것이다.
성격이 강한 아내는 여자 모자 상점을 운영하면서 경제적으로 남편을 도왔다.
평론가 카미유 모클레르는 <르 피가로>지에 이 그림에 관해 비평하면서 이 작품의 출품은 “서커스의 야수 우리에 던져진 크리스천 처녀와도 같은 운명에 처할 것이다”라고 적었다.
마티스 5, <왕의 슬픔>, 1952
마티스 6, <꿈>, 1940
피카소 8, <자화상 Self-Portrait>, 1907, Prague National Gallery
피카소는 1912년에 콜라주에 전념했다. 그가 사용한 나무, 벽, 장작, 태피스트리 가장자리의 장식을 모방한 종이는 대상과는 아무 상관없이 색채를 그림에 끌어들였다.
형태의 조화를, 나아가서는 그림의 조화를 깨뜨리는 평면 조각을 풀로 붙이는 방법을 통해 공간이 재구성되었다.
피카소, <아비뇽의 아가씨들 Les Demoiselles d'Avignon>, 1907, The Museum of Modern Art, New York
마티스는 이 그림을 보고 “26살의 스페인 화가가 회화에 손상을 입혔다”고 말했지만 나중에는 그의 창조성을 인정해주었다.
이 작품은 피카소의 바르셀로나 시절에 대한 추억이 담긴 것으로 그는 바리오 고티코의 사창가인 아비뇽 거리의 한 유곽 입구에 서있는 창녀들을 그린 것이다.
피카소의 대변인이자 옹호자인 시인 아폴리네르도 이 작품을 가리켜 “철학적 유곽”이란 표현을 사용하며 이 작품에 비난이 쏟아지게 한 요인은 작품을 구성하는 전체적인 원시성이라고 지적했다.
예리한 칼로 살을 도려낸 듯한 인체, 여인들의 시선, 엄청나게 큰 발과 젖가슴, 이런 것들이 서양 미술에서 유례가 없는 잔인성과 야만성을 풍긴다.
피카소가 처음에 그린 크로키를 보면 창녀들 한가운데 선원 한 사람과 손에 해골을 든 외과의사가 그려져 있다.
그 후 지나치게 교훈적이며 상징주의에 빠질 것을 염려한 그는 구성을 바꾸어 다섯 여인으로 한정했다.
그가 파리의 인류학 박물관에서 아프리카 전통 미술을 발견한 후 2월과 7월의 두 시기에 걸쳐 집중적으로 완성시킨 작품이다. 굵은 테두리가 있는 눈과 두터운 턱은 흑인 조각에서 인용한 것들이다.
피카소 5, <독서하는 여인 Woman Reading>, 1939, Christie
피카소 6, <여인의 반신상 Woman's Bust>, 1965, Christie
피카소 7, <독서하는 여인 Reading>, 1932, Picasso Museum, Pari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