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에 서양화를 주문하다
서양화와 관련해서 요시무네는 1722년 나가사키 행정관을 통해 일본으로서는 유일하게 서양이었던 네덜란드에 서양화를 주문했으며 유화 다섯 점이 1726년 일본에 도착했다.
이것들 중 두 점 공작 그림과 정물화는 1728년 에도의 나한사羅漢寺에 소장되었으므로 일반인이 감상할 수 있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일본에서는 네덜란드를 중심으로 하는 서양문화를 연구하는 학문 난학蘭學이 활성화되면서 서양화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일본인은 서양화가들이 과학적인 관망으로 대상을 음영과 원근법을 구사하여 객관적으로 묘사하면서 3차원의 대상을 2차원의 캔버스에 부피와 공간으로 입체적으로 나타내려는 데 몰두하고 있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동양화가들과는 달리 서양화가들은 실상을 사진처럼 정확하게 재현하는 기술을 연마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아키타 지방에서 유행한 서양화 추전난화秋田蘭畵의 대표적인 화가 사타게 쇼잔佐竹曙山(1748~85)은 1778년에 쓴 『화법강령畵法綱領』에서 “그림이란 모름지기 대상을 닮아야 한다”고 적었고,
에도 서민 출신으로 일본에서 처음 에칭을 제작한 시바 고칸司馬江漢(1747~1818)은 1799년에 쓴 『서양화담』에 적었다.
“서양 각국의 회화란 사진처럼 베껴내는 것이어서 우리와는 다른데 … 이에 대해 동양의 회화는 농담 표현으로 음양·요철·원근 등을 나타내면서 대상물의 정기를 담아내는 것이다.”
고칸은 스즈키 하루노부로부터 우키요에를 배운 뒤 사생화로 전환하여 히라가 겐나이와 교류하며 네덜란드 서적 등에서 힌트를 얻어 독자적인 동판 화법을 창시했다.
일본인은 서양화는 곧 사실화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으며 정확하게 묘사된 그림이 대상물 대신 전달과 보존의 수단이 된다는 걸 알게 되었다.
특히 박물도와 해부도의 경우 음영법과 원근법 기술을 익히지 못하면 정확하게 묘사할 수 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17세기 전반 막부의 금교 정책이 있었지만 서양의 사실주의 양식은 일본인에 의해 산발적으로 답습되었고 추전난화의 성행으로까지 이어졌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정확하게 묘사하려는 사실주의는 르네상스의 거장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의 전례를 따라 과학적 관망으로 원근, 비례, 명암으로 3차원적으로 묘사하는 것을 말한다.
회화는 빛에 의해 연출되었고 원근법 속에서 혹은 명확한 비례 안에서 형태들이 결합되었다.
17세기에 들어서서는 카라바조의 웅대한 인물상과 인위적인 빛의 사용은 과장된 방법으로 화가의 개성으로 나타나 이후 2세기에 걸쳐 유행했지만 사실주의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았다.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이런 경향은 일찍이 16세기 초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를 통해 프랑스에 알려졌으며 19세기 중반까지 서양의 보편적인 양식으로 답습되었다.
중국과 일본에 알려진 초기의 서양화는 이런 이탈리아와 프랑스 화풍의 사실주의 양식으로 그려진 것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