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스듬히 누운 누드  

 

(교수신문에 기고한 글입니다.)


서양미술에서 비스듬히 누운 누드는 흔한 주제이다.
서 있는 누드와 앉아 있는 누드에 비하면 비스듬히 누운 누드는 에로틱하게 나타나날 수밖에 없고 요염한 여인의 모습을 묘사한 작품은 대개 비스듬히 누운 누드이다.
누워서 몸을 비틀어야 요염한 자세가 되기 때문이다.


여인의 누드를 에로틱하게 표현하는 것은 베네치아의 전통이었다.
베네치아 화파는 조형적 형태를 중시한 피렌체 화파와는 달리 색채를 중시했다.
초기 르네상스 시대에 베네치아의 뛰어난 화가는 자코포 벨리니였고, 아들 젠틸레 벨리니, 조반니 벨리니와 사위 만테냐의 작품 구성은 대부분 그에게서 유래한다.
이들 중 가장 재능 있는 화가는 조반니 벨리니(1430?~1516)이며 인물과 풍경, 빛과 공간의 조화로 회화에 기여했다.
조반니의 문하에 조르조네(본명은 조르조 바르바렐리, 1476/8~1510)와 티치아노(1488/90~1576)가 있었고, 특히 조르조네의 차분한 색조, 빛, 대기 표현의 효과는 베네치아 회화에 전환점을 마련했는데,
색채, 분위기, 비례를 이용하여 인물과 풍경이 한 덩어리처럼 일체가 되는 새로운 기법을 창조했다.
그렇지만 서명과 제작연도를 적은 작품이 한 점도 남아 있지 않아 미술사에서 차지하는 조르조네의 위치에는 논쟁의 여지가 많다.
게다가 32~34살에 병으로 요절한 후 작업실에 미완성으로 남아 있던 많은 작품을 젊은 티치아노를 비롯한 제자들이 완성했기 때문에 더욱 혼란스럽다.


티치아노가 완성시킨 조르조네의 <풍경 속의 잠자는 비너스>(조르조네 219, 218, 221)는 현실 세계와는 동떨어진 전원에서의 시적 혹은 이상적인 모습이다.
비너스를 잠든 모습으로 묘사한 화가가 과거에 없었으므로 미술사학자들은 조르조네가 16세기에 새로운 신화적 주제를 창조했다고 말한다.
조르조네는 1499년 베네치아에서 발간된 <히프네로토마키아 폴리필리 Hypnerotomachia Poliphili>에서 비스듬히 누운 비너스 목판화를 보고 영감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스와 로마 미술에서 비너스가 비스듬히 누워 잠든 모습을 발견할 수 없으며 고대 문헌에도 잠든 비너스에 대한 언급이 없다.
그러나 최후의 로마 시인 클라우디안이 399년 두 친구의 결혼을 위한 축시에서 잠든 여신을 언급한 적이 있다.
축시를 청년과 처녀들이 신부의 방 앞에서 노래로 부르는 것은 고대로부터 내려온 관습이었다.
비너스와 큐피드는 후기 라틴 문학에서 의인화한 사랑으로 결혼 축시에 종종 등장하게 되었다.
문헌상으로는 잠든 비너스는 클라우디안으로부터 비롯했으나 회화로 출현하게 된 것은 조르조네에 의해서였다.


티치아노는 1535~40년에 <주피터와 안티오페>(미술사 티치아노 65)를 그렸는데, 사티로스의 형상을 한 주피터가 왕의 딸 안티오페에게 다가가는 장면이다.
안티오페는 주피터로부터 쌍둥이를 낳게 된다.
티치아노는 1574년 필리프 2세의 비서관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작품을 가리켜 “풍경과 사티로스를 배경으로 벌거벗은 여인”이라고 했다.
이 작품이 프라도 궁전에 오랫동안 장식되어 있었기 때문에 <프라도의 비너스>라고도 한다.
<풍경 속의 잠자는 비너스>를 완성시킨 경험이 있는 티치아노는 조르조네와는 달리 신화 속에 비스듬히 누운 비너스를 삽입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베네치아 미술의 최고 전성기를 주도한 티치아노는 벨리니의 문하에서 수학하면서 스승보다는 조르조네의 서정적 양식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조르조네가 1510년에 죽고 스승 벨리니가 1516년에 타계하자 티치아노는 베네치아 공화국의 공식화가에 임명되었으며, 이런 과정에서 조르조네의 지배적인 영향에서 점차 벗어나게 되었고 자신만의 독자적 기법을 형성하게 되었다.
1530년을 기점으로 그의 양식에 큰 변화가 일어났는데 이전의 활기 넘치는 표현이 좀더 억제된 명상적인 색조로 달라졌으며 구도에서도 대담함이 감소되었다.
1530년대에 그의 명성은 전 유럽으로 확산되었다.


이탈리아 제후들에게 인기가 있었던 티치아노는 우르비노 공작 프란체스코 마리아 델라 로베레와 그의 부인 초상을 그렸다.
프란체스코의 성격은 매우 거칠고 급했으며 추기경을 맨손으로 때려죽인 적도 있다.
베니스에 궁전을 갖고 있었고 1538년 10월에 죽었는데 독살된 것으로 알려졌다.
티치아노는 공작의 아들 귀도발도 델라 로베레를 위해 <우르비노의 비너스>(마네 83-58)를 그렸는데,
<풍경 속의 잠자는 비너스>와 거의 동일한 포즈를 취하고 있지만 조르조네의 시적 분위기는 좀더 직접적인 관능 면에서의 호소력으로 대체되었다.
티치아노는 여인의 오른손에 비너스를 상징하는 장미를 들게 했다.
누드는 아름다움의 이상을 반영한 것이며 성기 르네상스의 전형적인 에로틱한 모습이다.
여인의 이마가 넓은 것은 당시 드문 경우이다.
이탈리아 대부분의 여인은 검정색인데 금발이라서 여인이 당시 최신 유행을 따랐음을 알 수 있다.


이 그림을 그릴 때 귀도발도의 나이는 25살이었고 티치아노는 그의 나이에 두 배가량 되었다.
귀도발도는 이 작품이 자신의 애인을 그린 것이라서 소중하게 보관했다고 전하지만 일설에 의하면 티치아노가 자신의 애인을 그린 것이라고 한다.
19세기에는 그림의 모델이 귀도발도의 어머니 엘레오노라는 유머가 떠돌았고 티치아노가 그린 그녀의 초상과 닮았으므로 유머는 신빙성이 있었다.
그러나 세 가지 설 모두 증명되지는 않았다.


<우르비노의 비너스>는 신고전주의자이며 동시에 낭만주의자 앵그르(1780~1867)에게 영감을 주어 1814년에 <그랑드 오달리스크>(마네 83-59)를 그리게 했다.
오달리스크는 터키 황제의 후궁을 말한다.
앵그르의 낭만적 정신은 초기에 유복한 사람들의 주문을 받아 그린 초상화에 나타났고, 초상화는 정교한 선의 아름다움과 표현력 있는 윤곽으로, 형태를 나타내는 기능을 넘어서 그것 자체로서의 관능적인 아름다움을 지녔다.
이는 앵그르의 생애 전반에서 회화의 본질을 이루는 양식이 된다.
로마대상을 수상하여 정부의 장학금으로 로마에서 유학할 때 그가 가장 선호한 주제는 여인의 누드였다.
1814년에 그린 <그랑드 오달리스크>에서 이탈리아의 영향이 두드러짐을 본다.
이 작품에 감동한 피카소는 1907년에 <앵그르의 그랑드 오달리스크를 모사>(미술사 앵그르 9)했다.


비스듬히 누운 여인의 누드는 마네에게도 중요한 모티프가 되어 1863년에 <올랭피아>(마네 82)를 그렸다.
이 작품은 1865년의 살롱전에 소개된 후 문제작으로 스캔들을 일으켰는데, <올랭피아>를 사람들은 “고양이와 함께 한 비너스”라고 했다.
마네는 결혼식을 올리기 위해 네덜란드로 떠나기 전 <우르비노의 비너스>에서 영감을 받아 그렸다.
그는 1856년 이탈리아를 두 번째 여행할 때 우피치 뮤지엄에서 <우르비노의 비너스>를 모사했다.
그는 티치아노의 작품을 새롭게 해석하면서 여신을 상징하는 비너스 대신 모델을 침대에 누이고 옆에 흑인 하녀를 세웠다.
모델은 그가 선호한 빅토린 뫼랑이고 올랭피아는 당시 화류계의 흔한 이름이었다.
뫼랑의 발끝에 보일 듯 말 듯 고양이를 묘사했는데 에로틱한 분위기가 고양이로 인해 한껏 고조되었다.
<우르비노의 비너스>에서의 잠든 개를 고양이로 대체한 것이다.
고양이는 프랑스어로 여자의 음부를 뜻한다.
보들레르의 시 “왕비의 발아래서 발기하고 있는 고양이처럼”이란 구절에서 영감을 받았는지도 모른다.


올랭피아란 이름의 역사적인 인물 중 올랭피아 말다치니 팜필리가 있으며 마네가 이 여인을 염두에 둔 것 같다.
교황 인노켄티우스 10세 동생의 미망인이던 이 여인은 교황의 애인이 되어 권력을 행사했다.
벨라스케스는 1649년 로마에 머물 때 이 교황의 초상을 그린 것으로 유명한데 올랭피아의 초상도 그렸다.
마네는 이 작품에 관심이 많았다.
당시 교황과 올랭피아와의 관계는 오늘날보다 훨씬 널리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었다.
<올랭피아>에는 고야의 <벌거벗은 마하>(미술사) 그리고 앵그르의 <그랑드 오달리스크>, <노예와 함께 있는 오달리스크>(마네 10)의 요소도 혼용되어 있다.
에드가 드가가 지적한 대로 마네는 다양한 데서 영감을 얻었으며 그런 요소들을 자신의 작품에서 구성 요소가 되게 했다.


<올랭피아>에 대한 혹평이 극에 달한 1865년 마네는 보들레르의 위로를 받고 싶어 브뤼셀에 있는 그에게 솔직한 평가를 해달라는 편지를 보냈고 시인은 용기를 북돋아주었다.


“자네가 훌륭한 화가임을 내 입으로 선언하네.
사람들이 자네를 조롱한다고 괴로워하는군.
명심해야 할 점은 이런 경우를 자네가 처음 당하는 게 아니라는 것일세.
자네가 스스로를 샤토브리앙 혹은 바그너보다 위대하다고 여기는 것이 아니라면, 그들도 한때 자네처럼 조롱당했다는 사실을 기억하기 바라네.
그들이 사람들의 조롱을 견디지 못해 죽었나?
그렇지 않네.
자네가 자신을 지나치게 과대평가할까봐 하는 말인데, 샤토브리앙과 바그너는 자네보다 위대했으며, 자기 분야에서 최고였고, 그들의 시대는 지금보다 훨씬 나빴다네.
자네는 ‘낡은 시대의 최고”일 뿐이라네.“


폴 세잔은 <올랭피아>에서 영감을 받아 <현대판 올랭피아>(1869~70)(마네 88-61)를 그렸다.
세잔은 마네에 대한 경쟁심이 대단했고, 1873~74년에 다시 <현대판 올랭피아>(마네 62)를 그린 것으로 봐서 <올랭피아>에 대한 강박관념이 있었던 것 같다.
그가 마네의 작품을 패러디한 것인지 아니면 그에게 경의를 표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는 마네를 만나고 있었으며 존경했다.
비평가 루이 르루아는 <르 사리바리>에 다음과 같이 기고했다.


“자네는 이런 시간에 나더러 <현대판 올랭피아>에 관해 말하라는 건가?
쪼그리고 누운 추악한 여자의 몸에서 흑인 하녀가 베일을 걷어내는 광경을 넋을 잃고 쳐다보는 저 한심한 친구!
혹시 자네는 마네의 <올랭피아>를 기억하는가?
그 작품은 세잔이란 자의 작품에 비하면 데생, 정확도, 마무리 등이 탁월한 걸작이지.”(1874년 4월 25일)


래리 리버스는 1970년에 <나는 검은 얼굴의 올랭피아를 좋아한다>(워홀 40)를 제작했는데, 올랭피아 앞에 흑인여인의 누드를 나란히 그려 넣어 새삼 충격을 주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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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네의 손과 모네의 눈 The Great Couples 1
김광우 지음 / 미술문화 / 2002년 12월
평점 :
품절


모네의 ‘진정한 전투지역’, 살롱전


모네는 에트레타의 기후와 그곳의 절경을 이루는 벼랑과 강한 바닷바람을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까치>에는 어려운 가운데서도 가족과 함께 하는 순간의 행복감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흰색의 심포니가 이루어진 그림에서 검정색의 작은 까치가 매우 인상적인데 장차 그릴 인상주의 그림을 예고하는 것 같습니다.

모네가 1868-69년 겨울 에트레타에서 카미유와 장과 함께 행복을 맛보면서 그린 것이 특별한 점심식사의 장면 <오찬>입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처지에 있었음에도 230×150cm 크기로 그린 것을 보면 야망을 갖고 그렸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장은 이제 한 살 반이 되었습니다.
어머니와 아이가 앉은 테이블이 빛으로 인해 관람자의 시선을 끕니다.
테이블 위에 신문 『르 피가로』가 놓여 있는데 아직 펴서 읽지 않은 상태입니다.
초대된 손님은 아직 자리에 앉지 않은 채 창문에 몸을 기대고 장갑을 벗으려고 합니다.
점심식사는 아직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손님은 친구 혹은 친척으로도 보이지 않아 불편한 상태로 그냥 서 있는 것이 여간 어색하지 않으며 하녀의 동작도 불분명헤서 모네의 연출이 사려깊지 못했음을 봅니다.

이 무렵 모네는 캔버스도 없고 물감도 떨어져 그림을 그릴 수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같은 시기에 그린 <붉은 망토>는 <오찬>에 비하면 전혀 다른 방법으로 그려진 것으로 모네가 그렸을까 하고 의심이 될 정도입니다.

모네는 1869년 6월에 파리 서쪽 센 강변의 작은 마을 생미셸에서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가 경제적으로 어려운 처지에 있다는 말을 전해 들은 가난한 르누아르가 부모의 집에 있는 음식물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두 사람은 1869년 6월과 10월 사이에 그르누예르 근처 유원지의 ‘떠 있는 카페’로 유명한 곳으로 가서 이젤을 나란히 하고 작업했습니다.
그르누예르란 말은 ‘개구리 연못’이란 뜻으로 사람들이 수영도 하고 보트도 즐길 수 있는 곳으로 식사를 하고 유희하기에 좋은 곳이었습니다.
이곳에서의 두 사람의 작업에서 인상주의 풍경화 기법이 나타났는데 붓질이 짧아졌고 긴급한 인상이 가벼운 붓질로 영롱하게 나타났습니다.
과거 풍경화 개념으로 보면 두 사람의 풍경화는 완성된 것이라기보다는 스케치처럼 보입니다.

인상주의 양식을 한 마디로 규정해서 모든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적용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상주의는 한 가지 양식을 사용한 화가들의 유행이 아니라 전통에 반발한 다양한 개성을 가진 화가들의 자유로운 연대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각기 다양한 사고 방식을 강조했으며 이런 사고 방식의 일부가 후에 미술사학자들에 의해서 인상주의 운동의 특징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엄격히 말하면 모네를 제외하고 생애의 한 시기에서만 인상주의의 특징을 보인 화가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인상주의의 주된 방향은 르누아르가 도입한 검은 그림자, 윤곽선을 배제한 무지개 색채, 색을 점으로 혹은 분할하는 기법에 의해서 이루어졌습니다.
풍경화는 모네의 작품을 통해 본 대로 실재의 장면을 재현하고 물감을 이용해 사물이 지닌 색을 살리면서 밝은 태양 광선 아래의 활기찬 정경으로 재창조하는 시도에 의해 그려진 것입니다.
그림자는 회색이나 검은 색이 아니라 대상의 보색으로 칠해졌습니다.
윤곽선의 배제로 대상의 형상이 불명료해졌고 인상주의 그림은 빛과 대기의 회화가 되었습니다.
이런 변화는 바르비종파 화가인 디아즈 드 라 페냐와의 우연한 만남에서 영향을 받은 르누아르에 의해 1860년대 말에 도입되었습니다.
1870년대 초 피사로가 이것을 처음으로, 이어서 모네와 시슬레가 받아들였습니다.


모네의 경우 이런 종류의 인상주의 그림을 그린 것이 처음이 아니었고 <베네쿠르의 강>에서 이미 토막난 붓질로 순간의 느낌을 표현한 적이 있습니다.
그는 세세한 묘사를 무시하고 단지 외곽선만을 그린 후 빛에 의한 색질의 달라짐을 통해 자연의 변화를 기록했습니다.
그는 색을 섞어 사용하기보다는 순수한 색을 그대로 사용하면서 붓질을 더욱 짧게 했는데 색의 진동을 나타내기 위해서였습니다.
모네는 살롱전을 ‘진정한 전투지역’이라고 말해 왔으므로 이곳에서 그린 그림과 <오찬>을 1870년 봄 살롱전에 출품했지만 낙선하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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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계 백화점 정기간행물에 기고한 글입니다.


루벤스와 렘브란트

피터 폴 루벤스(1577~1640)와 렘브란트(1606~69)는 17세기 서양 회화에서 가장 빼어나며 루벤스는 렘브란트보다 29살 많다.
두 사람 모두 63해의 생애를 살았다.
루벤스는 플랑드르의 최고 화가였고 렘브란트는 네덜란드의 최고 화가였다.
네덜란드는 ‘낮은 땅’, ‘저지대’란 뜻을 지니며 실제로 국토의 27%가 바다보다 낮은 지역이다.
네덜란드를 홀랜드라고도 하는데 본래 북부의 주 명칭이었으나 이 주와 이 주의 수도 암스테르담이 이 나라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으므로 홀랜드로 혹은 화란으로도 불리운다.
더치Dutch는 네덜란드의 또 다른 영어식 표기이다.
1830년 벨기에가 독립하기 전까지만 해도 네덜란드는 오늘날의 벨기에 지역을 포함하고 있었다.
벨기에는 옛날 남부 네덜란드로 불렸고 플랑드르, 브라반트, 안트베르펜 등은 모두 옛날 남부 네덜란드의 주 또는 도시였다.
루벤스가 활동한 남부 네덜란드는 지리적, 역사적으로 프랑스 문화와 가톨릭의 영향 하에 있었으며 렘브란트의 무대가 된 북부 네덜란드는 대체로 독일 문화와 개신교의 영향 하에 있었다.
오늘날 네덜란드와 벨기에를 구분하는 언어적, 문화적 차이는 이런 역사적 배경에서 비롯되었다.

루벤스는 23살 때에 이탈리아로 가서 2년 동안 체류했으며, 1603년 에스파냐를 방문한 후 1604년 다시 이탈리아로 가서 1608년까지 지내면서 고대 회화를 연구했는데, 미켈란젤로의 조각과 프레스코, 티치아노, 틴토레토, 코레조 등의 작품을 모사하면서 영향을 받았다.
그는 1608년에 귀향했는데 당시 안트베르펜은 국제적 상업 중심지로서의 위상을 거의 상실했지만 에스파냐 지배 하의 플랑드르에서 반종교개혁의 본거지가 되었다.
많은 유명 화가들이 이 도시로 몰려들었고 이런 상황에서 루벤스는 자신의 사회적 지위와 화가로서의 명성으로 곧 지도적인 위치에 올랐다.
그는 1609년에 오스트리아의 알브레히트 대공과 그의 아내인 에스파냐 왕녀 이사벨라의 궁정화가가 되었고, 같은 해에 안트베르펜의 인문주의자인 얀 브란트의 딸 이사벨라를 아내로 맞았다.(루벤스 18)
자신과 자신의 젊은 아내의 모습을 그린 자화상은 루벤스 생애의 개인적인 측면을 보여준다.

루벤스의 작품은 단숨에 그린 것처럼 보이지만 스케일이 큰 그의 그림은 부분들을 정확히 계산해서 전체를 구성한 것으로 많은 습작 끝에 이루어진 결과물이며 구성이 복잡하더라도 관람자에게는 그 내용이 간단명료하면서 매우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이것이 바로 루벤스의 장점이다.(열린 143)
<동방박사들의 경배>의 구성에는 두 개의 중요한 건축학적 요소가 있는데 왼편 뒤에 있는 원주와 오른편에 있는 마굿간의 들보이다.
두 요소가 그림에서 다른 요소들을 구성하는 받침대 역할을 한다.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 모두 이 두 요소 때문에 정확하면서도 분명한 자기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
동방의 현자 세 사람은 왕들로 낙타를 타고 와서 구세주를 알현한다.
루벤스는 왕들을 활기에 넘친 모습으로 묘사하면서 특히 왼쪽의 노인을 관람자를 향해 바라보도록 했다.
그가 등장인물들의 위치 배치에 고심했음을 유화 스케치(열린 144)에서 알 수 있다.
그는 유화 스케치를 통해 그림을 가장 효과적으로 연출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했으며, 스케치를 그림을 주문한 의뢰인에게 보여주면서 의견을 청취했고, 때로는 제자들의 교육을 위해 사용했다.

<동방박사들의 경배>에서 성모 마리아의 제스처는 유화 스케치에서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스케치에서는 마리아가 왕들을 영접이라도 하듯 몸을 앞으로 구부리고 있지만, 성모의 품위에 맞지 않고 작품 전체의 긴장감에도 어울리지 않아 최종적인 그림에서는 훨씬 편안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절묘하게 자신의 몸을 오른편으로 돌림으로써 마리아의 모습은 뒤의 건축물과 한층 더 잘 어울린다.
아기 구세주는 마리아와 반대편으로 몸을 돌림으로써 역동적인 조화를 이룬다.
아기가 어머니와 왕들 사이에서 교량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다.
유화 스케치 외에도 루벤스는 큰 그림을 그릴 때면 상당 양의 연습 및 예비 스케치를 했다.(열린 145)
머리, 손, 인물에 관해 연구를 한 다음 이런 것들을 캔버스에 어떻게 위치시켜 구성해야 할 것인가를 궁리했다.
최종 단계에서 그는 조수와 제자들에게 일감을 나눠주어 자신이 여러 방면에서 재능 있는 역동적인 연출가임을 시위했다.

아내 이사벨라가 1626년에 죽자 루벤스는 1630년 16살의 엘레나 푸르망과 결혼했다.
그녀는 루벤스 작품의 모델이 되었으며, 특히 루벤스의 후기 작품에서 초상화뿐 아니라 다양한 작품에서 성녀, 여신의 모습으로 등장했다.
루벤스의 천재성은 회화의 모든 분야를 망라한다.
오늘날은 그의 완성작보다 유화 스케치를, 스케치보다 소묘를 높게 평가하며, 그의 위대함을 소묘에서 찾으려는 경향이 있다.
그는 붓과 목탄으로 정확하고 완벽한 소묘를 구사했는데, 이는 보다 큰 화면에서도 막힘없이 활력에 넘치는 붓놀림으로 그릴 수 있도록 했다.
그의 천재성은 밝은 색채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는 티치아노와 틴토레토로부터 받은 영향이지만, 초기 플랑드르 회화에서도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다.
원색과 보색을 병치하는 루벤스의 방법은 19세기 프랑스에서 발생한 것보다 앞선다.
오늘날 벨기에를 제외하면 루벤스의 위대한 종교화 대부분이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미술관에서는 작품의 진정한 의미가 사라져버리고 만다.
<동방박사들의 경배>와 같은 작품은 미술관보다는 성당에 걸려 있어야 그의 위대함을 더욱 드러낼 수 있다.

렘브란트는 레이덴 대학을 몇 달 다니다가 1620년 무렵 회화를 배우기 위해 대학을 떠난 후 1624년 암스테르담의 피테르 라스트만 문하에서 6개월 동안 공부했는데, 이 기간은 그의 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렘브란트는 1625년경부터 레이덴에서 독립 화가로 출발했으며 이 시기에 사용한 신선한 녹색, 황색, 보라색 등의 색채는 라스트만으로부터 받은 영향이었다.
그가 1632년까지 레이덴에서 제작한 작품 대부분은 종교적, 우의적 주제로서 당시 네덜란드 젊은 화가들에게는 매우 드문 경우였다.
대부분의 네덜란드 화가들은 주변의 사람이나 사물을 그리는 데 전념했지만 렘브란트는 전 생애 동안 종교화와 역사화를 계속해서 그렸다.
또한 약 100점의 자화상 시리즈도 레이덴 시절부터 시작된 것이다.

그의 자화상을 보면 옷차림도 군인에서 화가, 거지에서 신사까지 각양각색이다.(렘브란트 5, 6)
다양한 옷차림에 비해 얼굴은 한결같은 모습이며 시간의 흐름에 따른 변화만이 있을 뿐이다.
따라서 그의 자화상들은 우리로 하여금 그의 얼굴을 연구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1630년경에 그린 초기 자화상들은 주로 얼굴부분을 보여준다.
그 얼굴은 때로는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때로는 밝게 비추어지며, 때로는 차분하지만 때로는 감정을 그대로 드러낸다.(렘브란트 7)
가장 고심해서 그린 자화상에서도 그는 밝은 빛과 무척이나 조심스레 변조시킨 빛으로 얼굴을 표현하는 데 정성을 기울였다.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 때부터 그는 얼굴 묘사를 위한 세밀한 기법을 개발했다.
세월이 지나면서 작품의 주제도 다양해졌지만 얼굴을 묘사하는 독특한 기법은 거의 달라지지 않았다.
그는 조그맣고 뻣뻣한 붓과 점성이 강한 도료를 사용하여 윤기가 흐르는 피부에 땀구멍까지 묘사했으며, 이마와 볼은 거의 흰색으로 밝게 칠하고 코는 좀더 선명하고 밝은 색을 사용함으로써 얼굴의 삼차원적 윤곽이 드러나게 했다.
한편 코와 볼에 덧칠해진 불그스레한 기운과 전반적으로 노란빛이 감도는 하얀 살갗은 살아 있는 조직처럼 느껴진다.
또한 거무스레한 홍채와 흰색으로 처리된 눈꺼풀 때문에 눈동자는 더욱 반짝거리며 반쯤 그림자에 덮인 눈은 생동감이 느껴진다.(렘브란트 2, 3)
자화상은 풍부한 상상력과 고도의 기법이 결합되어 있어 관람자의 눈길을 끈다.
뒤러와 루벤스는 렘브란트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지만, 시대에 따라 변하는 자화상 작업은 그림으로 표현한 자서전 시대의 막을 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렘브란트가 자화상을 그리면서 자신의 모습을 그 시대의 철학자들과 비슷하게 표현했지만 자화상에서 철학적 사상을 발견하기는 힘들다.
내면의 성찰로 그렸든 주문을 받아 그렸든 그는 자화상을 다른 사람들에게 팔거나 선물로 주었다.
영국 귀족은 찰스 1세에게 렘브란트가 초기에 그린 자화상을 선물했으며 후기의 자화상은 피렌체의 레오폴도 데 메디치의 미술품 전시실에서 거장들의 자화상과 나란히 전시되기도 했다.
화려한 의상과 독창적인 포즈 때문에 혹은 인간의 감정과 열정을 적절히 묘사해낸 데 매료되어 그의 자화상을 찾는 콜렉터도 적지 않았다.(렘브란트 10)

얼굴에 대한 렘브란트의 관심은 1630년경 시작된 에칭 판화 자화상 연작에서도 확연히 드러난다.(렘브란트 11, 12)
연작에서 그는 여러 형태의 가면을 쓴 것처럼 다양한 감정 표현을 시도했다.
이런 실험은 당시의 데생 방식을 잘 보여준다.
실제로 그가 남긴 자화상 데생 모음집에서도 비슷한 방식이 확인된다.
그로부터 거의 반세기 후인 1678년, 렘브란트의 제자 반 호흐스트라텐은 자화상 그리는 기법을 상세하게 설명한 <고등 회화교육 입문>이란 소책자를 발간했다.
스승의 가르침을 충실하게 전달하면서, 그는 화가들에게 거울을 들여다보며 온갖 표정을 시험해보고 거기에 비친 모습을 데생함으로써 내면의 감정을 묘사하라고 충고했다.
렘브란트가 여러 장 찍을 수 있는 에칭 기법을 사용한 데서 자신의 작품을 널리 유포시키려는 의지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렘브란트는 화가의 길로 들어선 초기부터 타계할 때까지 에칭을 통해 인간의 얼굴 표정을 포착해내는 능력과 얼굴에 대한 광범위한 지식을 매혹적인 예술로 승화시키는 능력을 세상에 알릴 수 있었다.
그가 자신의 얼굴을 오랫동안 연구하면서 표정에 중점을 두었으므로 다른 인물이 등장하는 작품에서도 늘 얼굴에 초점을 두었다.
초상화는 물론이고 성서 및 고전을 주제로 한 그림과 풍속화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힘이 넘치는 포즈와 몸짓 그리고 조화를 이루면서 얼굴이 쉽게 잊혀지지 않는 인물들로 창조되었다.
형식을 무시하고 신속하게 그린 작품에서도 그는 얼굴과 몸짓에서 개개인의 특징을 최대한 살리려고 노력했다.

렘브란트의 천재성은 그의 막대한 작품에 정통해야 비로소 이해가 된다.
그는 600여 점의 회화, 300여 점의 에칭, 2,000여 점의 드로잉을 남겼다.
1851년 들라크루아는 렘브란트가 언젠가는 라파엘로보다 더 높이 평가받을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그의 말은 50년이 채 지나기 전에 사실로 나타났다.
렘브란트의 독창적인 업적은 네덜란드 화가들의 전통 속에 전해졌지만 그의 제자들 대부분은 후에 통속적으로 기울면서 스승의 엄격한 규범을 포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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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과 필연의 차이


세상에는 우연도 있고 필연도 있다.
우연은 의지의 결과이고 필연은 의도의 결과라는 생각이 든다.
우연 중에 가장 놀랄 만한 건 복권에 당첨되는 것일 게다.
확률로 보더라도 당첨은 우연의 결과이지 의도에 의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복권을 사려는 의지가 놀라운 우연의 결과를 빚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우연이 의지의 결과라고 하는 것은 의지마저 없으면 우연은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미국 커미디언의 말이 생각난다.
어떤 사람이 부자가 되게 해달라고 신에게 간절히 그리고 매일 빌었다고 한다.
그러자 어느날 신이 말하기를 복권이라도 사야 도와줄 수 있지 않겠는냐고 했다.
우연이 신의 소행이라면 그 우연을 바라는 의지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난 과거에 많은 것들을 우연에 의해 발생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어느 시점에서 대부분이 필연의 결과라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그렇게 생각하게 된 건 영화적 과거에 대한 회상에 의해서이다.
한 남자 혹은 한 여자의 일대기적인 영화를 예를 들어 그 영화를 두 번 보게 되면 처음에는 그 주인공의 삶이 많은 부분 우연에 의해 이루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다시 그 영화를 볼 때는 우연으로 본 사건들이 필연적이었음을 이해하게 된다.
즉 미래의 관점에서 '지나간 현재'를 바라보게 되면,
현재 내가 고민하고 결정하는 사항이나 양자택일한 사항도 필연의 과정임을 알 수 있게 된다.
우리가 지금 '지나간 현재'에 위치해 있다고 생각하는 건 운명론적이다.
운명론은 고대 그리스인으로부터 시작해서 우리가 부인하기 어려운 사실로 받아들여진다.
자신의 의지가 강한 사람일수록 운명론이나 예정론에 반발한다.
나도 한때 그런 것들은 패배의식이 낳은 결과라고 생각하고 용납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나온 과거의 발자취를 더듬으면 내게 일어난 지난 모든 사건들이 필연적이었다고 생각된다.

우연과 필연은 어떻게 다른가?

버스 안에서 맞은편에 앉은 사람을 바라보고 그 사람과 눈이 마주치는 건 우연의 결과이다.
내 주변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둘러본 결과로 그곳에 앉아 있는 20대 중반의 매력 있는 여자를 바라보게 된 것은 우연이다.
버스를 타기 전 내가 생각하는 매력을 갖춘 여자를 만나기를 바란다는 의도를 가졌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단순히 그쪽을 바라보려는 의지만 갖게 된 것이고 바라보니 그 여자가 매력적이라고 판단하게 된 것이다.

그때 옆에 앉았던 친구가 말한다.
"재 예쁘지 않니?"
"예쁘다."
"꼬셔야지."

이는 실제로 있었던 대화이다.
뉴욕에서 아주 오랜만에 중학교 동창을 만나 그와 함께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을 향하는 버스 안에서 나눈 대화이다.
그 친구는 컬럼비아 대학에 재학 중이었고 매력 있는 여자는 컬럼비아 대학 근처 버스정류장에서 우리가 탄 버스에 올랐다.
그 친구가 "꼬셔야지"라고 말한 건 그 여자가 그곳에서 버스를 탄 것으로 미루어 컬럼비아 대학에 재학 중일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기 때문이다.
얼마 가다가 그 여자는 내렸고 우리는 더 멀리에 있는 뮤지엄으로 갔다.

그 후 친구가 자기 아파트에서 연 파티에 초대했을 때 난 그곳에서 버스에 탔던 그 여자를 만났다.
친구가 꼬신 것이다.
몇 해 후 두 사람이 결혼할 때 난 그 여자에게 금목걸이를 선물로 주었다.
두 사람은 현재 서울에 살고 있고 친구의 아내를 볼 때면 버스에서 처음 본 모습이 떠오른다.

그날 친구가 그 여자를 본 것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었다.
단지 바라보려는 의지만 갖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꼬시려는 의도를 가졌기 때문이다.
지금 난 의지와 의도라는 개념으로 우연과 필연을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매일매일 의지를 강요당하며 살고 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어디를 갈까 무엇을 살까 등등의 구체적인 결정을 내려야만 한다.
이리로 갈까 저리로 갈까 서점으로 갈까 전시회에 갈까 추억이 있는 덕수궁을 산책할까 등등 행위를 하기 위한 선택을 해야만 한다.
이런 결정과 선택은 의지에 의해 이루어진다.

한편 의도는 계획을 세우는 걸 의미한다.
내가 원하는 대로 되어지도록 혹은 사건이 내게 유리하게 발생되도록 고의적인 계획을 세우는 걸 의미한다.
이는 의도를 가지는 순간 그 이후에 벌어지는 모든 사건이 필연이란 뜻이다.
물론 원래의 계획대로 일이 되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 결과는 마찬가지로 필연인데 도중에라도 계획을 수정했기 때문이다.
의도를 완전히 놓지 않는 한 필연을 막을 수는 없다.

그리고 의도는 언어로 설명되어야 한다.
"예쁘다"는 의도에 대한 설명이 아니지만 "꼬셔야지"는 의도에 대한 설명이다.
꼬시겠다는 의도가 생기니까 그 친구는 컬럼비아 대학 캠퍼스를 잃어버린 물건을 찾듯이 샅샅이 뒤졌고 그 여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 친구는 우연을 가장하고 접근했을 것이고,
그 여자는 그를 우연히 알게 되었다고 생각하겠지만,
이건 매우 계획적이었다.

난 과거에 만난 사람들 그리고 현재 만나고 있는 사람들을 머리에 떠올리면서 그들을 알게 된 것이 필연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그리고 앞으로 만나게 될 사람들도 필연적이라고 생각한다.
과거와는 달리 단순한 의지만으로 행동하지 않게 되다보니 그 어느 시점부터 내게 발생하는 모든 사건들을 필연의 결과로 이해가 된다.

비극으로 끝나는 영화일수록 그 영화를 다시 보게 되면 주인공과 그 주인공과 관련된 사람들이 우연히 만난 것이 아니라 필연에 의해서였다는 걸 알게 된다.
시한부 인생을 살고 말 사람을 사랑하게 된 것도,
내게 큰 상처를 입힐 사람을 만나게 된 것도,
헤어지게 될 사람을 만난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낸 것도,
상처의 아픔으로 몸서리쳤던 것도,
헤어진 사람을 끝내 기억 속에서 지울 수 없는 것이 나로 하여금 또 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그동안 보고 느끼지 못했던 새로운 세상을 살게 했다면 이는 필연적인 나의 성숙일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눈으로만 세상을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
끊임없이 다른 사람의 눈을 통해 세상을 바라볼 줄 아는 지혜를 가져야만 한다.
난 많은 예술가들의 삶을 통해 그들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경험을 했다.
난 세상이 넓을 뿐만 아니라 세상이 아주 많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현재에도 내가 모르는 세상이 아주 많다는 걸 시인한다.
내가 현재의 나로 살아온 것이 필연이란 생각을 떨칠 수 없다.
우연히 어떤 상황 속에 내던져지는 일은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과거에는 의도와 의지를 분간하지 못해 많은 사건들이 우연의 결과인 줄로만 알았다.
세상에는 우연이 많다고 생각했는데 대부분 필연에 의한 것들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필연의 존재를 믿고 필연에 의해 사건이 발생한다고 믿게 되니 무엇을 의도할 때 원하는 바를 미리 계획할 때 조심스러워진다.
그 결과를 조심스럽게 따져보게 된다.
쉽게 판단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Pull game에서 일단 흰 당구공을 힘껏 치게 되면 9개의 공들이 이리저리 튀며 흩어진다.
9개의 공이 제각기 갈대로 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들의 향방은 이미 흰 공이 다가갈 때 정해진다.
돌일킬 수 없게 예정대로 혹은 필연적으로 흩어지게 된다.
하나의 작은 결정조차도 다양한 결과를 초래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신중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연을 고대하거나 우연을 믿지 않게 되었다.
내가 복권을 사지 않는 이유는 우연의 확률이 너무 적어서 마음에 둘 필요조차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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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만찬


프랑스 왕 샤를 8세(1483~98년 재위)는 1494년 9월 아펜니노 산맥을 넘어 이탈리아로 진입해 나폴리를 프랑스령으로 만들고자 했다.
피렌체의 통치자 피에로 메디치는 피렌체를 구하기 위해 사르자나에서 샤를을 만났지만,
결과는 피렌체의 가장 중요한 재산인 피사와 렉혼, 그리고 서쪽에 있는 피렌체의 모든 요새들을 전쟁기간 중 프랑스에 내주어 나폴리 원정의 길을 터주었으며 20만 플로린(약 60억 원)을 내놓기로 약속했다.
이런 전시 상황이 전개될 때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밀라노에 머물고 있었다.
피렌체와 달리 1495년의 밀라노는 일시적이지만 정치적으로 평화스러웠고 이때 밀라노의 통치자 루도비코가 레오나르도에게 <최후의 만찬>과 <예수의 수난>을 주문했다.
<최후의 만찬>은 현재 밀라노의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체 수도원 식당에 보존되어 있다.


루도비코는 이 도미니크회 수도원을 좋아하여 종종 와서 명상에 잠기곤 했으며 자신과 아내 비트리스, 가족이 이곳에 묻히기를 소원했다.
따라서 그는 1465년경 대성당의 건축가 구이니포르테 솔라리로 하여금 성가대석과 앱스를 부수게 하고, 브라만테에게 건물을 확장 완공하도록 했다.
열여섯 개의 아치형 천장으로 돔을 떠받치는 거대한 입방체와도 같은 설교단은 1495년 당시 공사중이었고 2년 후에나 완공되었다.
루도비코는 롬바르드 화가 몬토파르노에게 식당 북쪽 벽에 <십자가 처형>을 의뢰했고, 레오나르도에게는 반대쪽 벽에 8.8m 길이의 <최후의 만찬>을 의뢰했다.
레오나르도는 <최후의 만찬>을 그리기로 하고 매년 2천 두카트를 받았다.


<최후의 만찬>은 예수가 자신이 체포될 것을 알고 마지막으로 유월절을 기념하는 만찬을 제자들과 함께 하는 장면이다.
수도원 식당에 이런 주제의 그림을 장식하는 것은 일반적인 전통이었다.
식당은 일시적인 세계와 영원한 세계가 만나는 곳으로 예수가 “내가 너희와 늘 함께 할 것이다”라고 하신 말씀이 생생하게 기억되는 곳이며 수도승들은 식사 때마다 이 그림을 보면서 자신들의 소임을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
괴테는 레오나르도가 “접는 방식대로 접혀진 테이블 커버, 양쪽 가장자리에 수를 놓은 모양, 빛의 줄무늬”고 그대로 재현했으며 수도승들이 사용하는 접시와 유리잔까지도 똑같이 재현했다고 적었다.


레오나르도는 실제 식당공간을 화면 공간으로 삼았으며 배경을 미술사에서 가장 독창적인 구성 중 하나인 현혹적인 건축물로 구성하여 관람자가 깊은 인상을 받도록 했다.
이 작품의 배경을 위해 드로잉한 종이에는 팔각형 속에 원이 들어 있다.
원은 식당바닥과 지붕의 중앙에 위치하여 이 작품의 비밀스러운 기하를 결정짓는 역할을 한다.
즉 원의 중심은 그림의 소실점으로 예수의 얼굴을 그 위에 표현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예수를 부각시킬 수 있엇던 것이다.
수학적이며 완벽한 기하적 대칭의 구성을 선택했다.
중심 인물 예수를 부각시키기 위해 배경을 보조수단으로 삼았다.
뵐플린은 <르네상스 미술>에서 레오나르도가 피할 수 없는 식탁의 선 하나만을 유지한 점을 중요하게 여기면서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새로운 방식으로 간주했으며,
예수의 몸짓과 모습에 고요하고도 위대한 요소가 있음을 지적했고,
이를 15세기 화가들의 작품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새로운 특징으로 꼽았다.


레오나르도는 회화를 ‘침묵의 시’라고 했다.
그는 성서에 기록된 이야기를 모델들의 몸짓, 태도, 얼굴에 나타난 성격의 특징으로 하여 침묵 속에 전하려고 했으며 그의 의도는 매우 효과적이었다.
그는 모델들의 행동을 연출에 의한 것처럼 표현하여 각각의 개성이 나타나도록 구성했다.


“이제 막 포도주를 마신 사람은 고개를 왼쪽으로 돌려 말하는 사람을 쳐다본다.
손가락을 쭉 편 사람은 옆에 있는 사람을 가리키고 있다.
지칭된 사람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놀라워서 귀가 오른쪽 어깨에 닿을 정도로 고개를 숙인다.
손가락을 펴서 옆사람 얼굴 아래에 댄 사람은 그의 귀에 대고 속삭인다.”


레오나르도는 모델들의 귀와 입을 중시하며, 손을 화자의 반응과 언어에 대한 설명으로 표현했으므로 우리는 그림에서 놀라움, 회의심, 두려움, 성냄, 부인, 혐의 등을 읽어낼 수 있다.
의심이 많은 도마는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키면서 “대체 누가 선생님을 팔아넘길 수 있겠느냐”며 놀라워하고,
빌립보는 일어서서 발생할 일에 대해 유감을 나타내며,
바르톨로메오도 벌떡 일어나 아무것도 모르는 베드로에게 누구냐고 묻는다.
나머지 제자들은 어찌된 영문인지를 물으며 놀라거나 더러는 화를 내며 자신들의 무죄와 신실함을 주장한다.
제자들과는 달리 예수는 차분한 모습이며 예수의 오른편에 앉아 예수와 유사한 의상을 한 제자 요한은 눈을 지그시 감고 고개를 숙인 채 그리스도의 운명이 정해졌음을 이해하고 있는 듯하다.
요한 옆의 얼굴이 검은 유다가 앉아 있고 그의 손이 그릇에 거의 닿을 듯하다.


시뇨렐리, 안드레아 델 카스타뇨, 기를란다요 등 15세기 화가들은 부패한 인간상으로 대표되는 유다를 묘사할 때 테이블 반대편, 관람자에게 등을 돌린 모습으로 그렸다.
그러나 레오나르도는 이런 식의 규칙을 무시하고 모든 제자를 세 명씩 네 그룹으로 나누어 나란히 함게 앉게 했다.
유다를 다른 제자들과 함께 나란히 그린 것은 레오나르도가 처음으로 후대 화가들은 더이상 유다를 예수 반대편에 따로 그리지 않게 되었다.


레오나르도는 <최후의 만찬>에 등장하는 예수 제자들의 얼굴을 밀라노 거리의 행인들을 관찰하여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예수의 얼굴은 모르타로의 추기경 측근인 공작 조반니를 모델로 했고 손은 파르마의 알렉산드로의 것을 모델로 한 것으로 전해진다.
바사리와 지랄디에 의하면 1497년경 레오나르도는 열한 명의 제자와 유다의 몸을 그렸지만 유다의 머리만 남겨놓은 채 일 년이 넘도록 완성시키지 않자 수도원측이 루도비코에게 불평했다.
루도비코가 레오나르도를 불러 불편한 심기를 전하자 레오나르도는 수도원 신부들은 예술에 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을 뿐 아니라 화가는 노동자처럼 작업하지 않는다면서 변명했다.


“전하, 유다의 머리만 완성되지 않았음을 알고 계실 것입니다.
유다는 모두가 알고 있듯이 소문난 악한이기에 그의 사악함에 걸맞는 얼굴이어야 합니다.
저는 이것을 찾느라 거의 일 년 동안 전하도 아시는 것처럼 흉포한 자들이 득실거리는 보르게토로 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제가 생각하고 있는 그런 악한의 얼굴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얼굴을 찾기만 하면 그날로 완성할 수 있습니다.
저의 연구가 결실을 맺지 못하고 있다면 전하께 저를 모함한 자가 바로 유다에 합당할 터인즉 그 자의 얼굴을 대신 그려놓겠습니다.”


레오나르도의 <최후의 만찬>은 불후의 명작이 되었다.
렘브란트는 레오나르도의 양식으로 <최후의 만찬>을 드로잉하면서 그에 대한 존경심을 표했다.
앤디 워홀은 타계하기 한 해 전인 1986년 초 화상으로부터 레오나르도의 <최후의 만찬>을 그릴 것을 주문받았다.
그는 붓에서 물감이 흘러내리도록 색을 칠했으며, 실크스크린으로 뜰 때에는 한 번에 여섯 차례나 색을 사용하여 뜨기도 했다.
워홀의 <최후의 만찬>은 레오나르도의 원작이 있는 밀라노로 우송되었고 전시회에 참석하기 위해 그도 이듬해 1월 22일 밀라노로 갔다.
전시회는 성공적이어서 약 3천 명이 관람했으며 카메라맨들은 그림을 필름에 담느라고 분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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