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세계 백화점 정기간행물에 기고한 글입니다.
루벤스와 렘브란트
피터 폴 루벤스(1577~1640)와 렘브란트(1606~69)는 17세기 서양 회화에서 가장 빼어나며 루벤스는 렘브란트보다 29살 많다.
두 사람 모두 63해의 생애를 살았다.
루벤스는 플랑드르의 최고 화가였고 렘브란트는 네덜란드의 최고 화가였다.
네덜란드는 ‘낮은 땅’, ‘저지대’란 뜻을 지니며 실제로 국토의 27%가 바다보다 낮은 지역이다.
네덜란드를 홀랜드라고도 하는데 본래 북부의 주 명칭이었으나 이 주와 이 주의 수도 암스테르담이 이 나라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으므로 홀랜드로 혹은 화란으로도 불리운다.
더치Dutch는 네덜란드의 또 다른 영어식 표기이다.
1830년 벨기에가 독립하기 전까지만 해도 네덜란드는 오늘날의 벨기에 지역을 포함하고 있었다.
벨기에는 옛날 남부 네덜란드로 불렸고 플랑드르, 브라반트, 안트베르펜 등은 모두 옛날 남부 네덜란드의 주 또는 도시였다.
루벤스가 활동한 남부 네덜란드는 지리적, 역사적으로 프랑스 문화와 가톨릭의 영향 하에 있었으며 렘브란트의 무대가 된 북부 네덜란드는 대체로 독일 문화와 개신교의 영향 하에 있었다.
오늘날 네덜란드와 벨기에를 구분하는 언어적, 문화적 차이는 이런 역사적 배경에서 비롯되었다.
루벤스는 23살 때에 이탈리아로 가서 2년 동안 체류했으며, 1603년 에스파냐를 방문한 후 1604년 다시 이탈리아로 가서 1608년까지 지내면서 고대 회화를 연구했는데, 미켈란젤로의 조각과 프레스코, 티치아노, 틴토레토, 코레조 등의 작품을 모사하면서 영향을 받았다.
그는 1608년에 귀향했는데 당시 안트베르펜은 국제적 상업 중심지로서의 위상을 거의 상실했지만 에스파냐 지배 하의 플랑드르에서 반종교개혁의 본거지가 되었다.
많은 유명 화가들이 이 도시로 몰려들었고 이런 상황에서 루벤스는 자신의 사회적 지위와 화가로서의 명성으로 곧 지도적인 위치에 올랐다.
그는 1609년에 오스트리아의 알브레히트 대공과 그의 아내인 에스파냐 왕녀 이사벨라의 궁정화가가 되었고, 같은 해에 안트베르펜의 인문주의자인 얀 브란트의 딸 이사벨라를 아내로 맞았다.(루벤스 18)
자신과 자신의 젊은 아내의 모습을 그린 자화상은 루벤스 생애의 개인적인 측면을 보여준다.
루벤스의 작품은 단숨에 그린 것처럼 보이지만 스케일이 큰 그의 그림은 부분들을 정확히 계산해서 전체를 구성한 것으로 많은 습작 끝에 이루어진 결과물이며 구성이 복잡하더라도 관람자에게는 그 내용이 간단명료하면서 매우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이것이 바로 루벤스의 장점이다.(열린 143)
<동방박사들의 경배>의 구성에는 두 개의 중요한 건축학적 요소가 있는데 왼편 뒤에 있는 원주와 오른편에 있는 마굿간의 들보이다.
두 요소가 그림에서 다른 요소들을 구성하는 받침대 역할을 한다.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 모두 이 두 요소 때문에 정확하면서도 분명한 자기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
동방의 현자 세 사람은 왕들로 낙타를 타고 와서 구세주를 알현한다.
루벤스는 왕들을 활기에 넘친 모습으로 묘사하면서 특히 왼쪽의 노인을 관람자를 향해 바라보도록 했다.
그가 등장인물들의 위치 배치에 고심했음을 유화 스케치(열린 144)에서 알 수 있다.
그는 유화 스케치를 통해 그림을 가장 효과적으로 연출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했으며, 스케치를 그림을 주문한 의뢰인에게 보여주면서 의견을 청취했고, 때로는 제자들의 교육을 위해 사용했다.
<동방박사들의 경배>에서 성모 마리아의 제스처는 유화 스케치에서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스케치에서는 마리아가 왕들을 영접이라도 하듯 몸을 앞으로 구부리고 있지만, 성모의 품위에 맞지 않고 작품 전체의 긴장감에도 어울리지 않아 최종적인 그림에서는 훨씬 편안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절묘하게 자신의 몸을 오른편으로 돌림으로써 마리아의 모습은 뒤의 건축물과 한층 더 잘 어울린다.
아기 구세주는 마리아와 반대편으로 몸을 돌림으로써 역동적인 조화를 이룬다.
아기가 어머니와 왕들 사이에서 교량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다.
유화 스케치 외에도 루벤스는 큰 그림을 그릴 때면 상당 양의 연습 및 예비 스케치를 했다.(열린 145)
머리, 손, 인물에 관해 연구를 한 다음 이런 것들을 캔버스에 어떻게 위치시켜 구성해야 할 것인가를 궁리했다.
최종 단계에서 그는 조수와 제자들에게 일감을 나눠주어 자신이 여러 방면에서 재능 있는 역동적인 연출가임을 시위했다.
아내 이사벨라가 1626년에 죽자 루벤스는 1630년 16살의 엘레나 푸르망과 결혼했다.
그녀는 루벤스 작품의 모델이 되었으며, 특히 루벤스의 후기 작품에서 초상화뿐 아니라 다양한 작품에서 성녀, 여신의 모습으로 등장했다.
루벤스의 천재성은 회화의 모든 분야를 망라한다.
오늘날은 그의 완성작보다 유화 스케치를, 스케치보다 소묘를 높게 평가하며, 그의 위대함을 소묘에서 찾으려는 경향이 있다.
그는 붓과 목탄으로 정확하고 완벽한 소묘를 구사했는데, 이는 보다 큰 화면에서도 막힘없이 활력에 넘치는 붓놀림으로 그릴 수 있도록 했다.
그의 천재성은 밝은 색채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는 티치아노와 틴토레토로부터 받은 영향이지만, 초기 플랑드르 회화에서도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다.
원색과 보색을 병치하는 루벤스의 방법은 19세기 프랑스에서 발생한 것보다 앞선다.
오늘날 벨기에를 제외하면 루벤스의 위대한 종교화 대부분이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미술관에서는 작품의 진정한 의미가 사라져버리고 만다.
<동방박사들의 경배>와 같은 작품은 미술관보다는 성당에 걸려 있어야 그의 위대함을 더욱 드러낼 수 있다.
렘브란트는 레이덴 대학을 몇 달 다니다가 1620년 무렵 회화를 배우기 위해 대학을 떠난 후 1624년 암스테르담의 피테르 라스트만 문하에서 6개월 동안 공부했는데, 이 기간은 그의 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렘브란트는 1625년경부터 레이덴에서 독립 화가로 출발했으며 이 시기에 사용한 신선한 녹색, 황색, 보라색 등의 색채는 라스트만으로부터 받은 영향이었다.
그가 1632년까지 레이덴에서 제작한 작품 대부분은 종교적, 우의적 주제로서 당시 네덜란드 젊은 화가들에게는 매우 드문 경우였다.
대부분의 네덜란드 화가들은 주변의 사람이나 사물을 그리는 데 전념했지만 렘브란트는 전 생애 동안 종교화와 역사화를 계속해서 그렸다.
또한 약 100점의 자화상 시리즈도 레이덴 시절부터 시작된 것이다.
그의 자화상을 보면 옷차림도 군인에서 화가, 거지에서 신사까지 각양각색이다.(렘브란트 5, 6)
다양한 옷차림에 비해 얼굴은 한결같은 모습이며 시간의 흐름에 따른 변화만이 있을 뿐이다.
따라서 그의 자화상들은 우리로 하여금 그의 얼굴을 연구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1630년경에 그린 초기 자화상들은 주로 얼굴부분을 보여준다.
그 얼굴은 때로는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때로는 밝게 비추어지며, 때로는 차분하지만 때로는 감정을 그대로 드러낸다.(렘브란트 7)
가장 고심해서 그린 자화상에서도 그는 밝은 빛과 무척이나 조심스레 변조시킨 빛으로 얼굴을 표현하는 데 정성을 기울였다.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 때부터 그는 얼굴 묘사를 위한 세밀한 기법을 개발했다.
세월이 지나면서 작품의 주제도 다양해졌지만 얼굴을 묘사하는 독특한 기법은 거의 달라지지 않았다.
그는 조그맣고 뻣뻣한 붓과 점성이 강한 도료를 사용하여 윤기가 흐르는 피부에 땀구멍까지 묘사했으며, 이마와 볼은 거의 흰색으로 밝게 칠하고 코는 좀더 선명하고 밝은 색을 사용함으로써 얼굴의 삼차원적 윤곽이 드러나게 했다.
한편 코와 볼에 덧칠해진 불그스레한 기운과 전반적으로 노란빛이 감도는 하얀 살갗은 살아 있는 조직처럼 느껴진다.
또한 거무스레한 홍채와 흰색으로 처리된 눈꺼풀 때문에 눈동자는 더욱 반짝거리며 반쯤 그림자에 덮인 눈은 생동감이 느껴진다.(렘브란트 2, 3)
자화상은 풍부한 상상력과 고도의 기법이 결합되어 있어 관람자의 눈길을 끈다.
뒤러와 루벤스는 렘브란트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지만, 시대에 따라 변하는 자화상 작업은 그림으로 표현한 자서전 시대의 막을 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렘브란트가 자화상을 그리면서 자신의 모습을 그 시대의 철학자들과 비슷하게 표현했지만 자화상에서 철학적 사상을 발견하기는 힘들다.
내면의 성찰로 그렸든 주문을 받아 그렸든 그는 자화상을 다른 사람들에게 팔거나 선물로 주었다.
영국 귀족은 찰스 1세에게 렘브란트가 초기에 그린 자화상을 선물했으며 후기의 자화상은 피렌체의 레오폴도 데 메디치의 미술품 전시실에서 거장들의 자화상과 나란히 전시되기도 했다.
화려한 의상과 독창적인 포즈 때문에 혹은 인간의 감정과 열정을 적절히 묘사해낸 데 매료되어 그의 자화상을 찾는 콜렉터도 적지 않았다.(렘브란트 10)
얼굴에 대한 렘브란트의 관심은 1630년경 시작된 에칭 판화 자화상 연작에서도 확연히 드러난다.(렘브란트 11, 12)
연작에서 그는 여러 형태의 가면을 쓴 것처럼 다양한 감정 표현을 시도했다.
이런 실험은 당시의 데생 방식을 잘 보여준다.
실제로 그가 남긴 자화상 데생 모음집에서도 비슷한 방식이 확인된다.
그로부터 거의 반세기 후인 1678년, 렘브란트의 제자 반 호흐스트라텐은 자화상 그리는 기법을 상세하게 설명한 <고등 회화교육 입문>이란 소책자를 발간했다.
스승의 가르침을 충실하게 전달하면서, 그는 화가들에게 거울을 들여다보며 온갖 표정을 시험해보고 거기에 비친 모습을 데생함으로써 내면의 감정을 묘사하라고 충고했다.
렘브란트가 여러 장 찍을 수 있는 에칭 기법을 사용한 데서 자신의 작품을 널리 유포시키려는 의지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렘브란트는 화가의 길로 들어선 초기부터 타계할 때까지 에칭을 통해 인간의 얼굴 표정을 포착해내는 능력과 얼굴에 대한 광범위한 지식을 매혹적인 예술로 승화시키는 능력을 세상에 알릴 수 있었다.
그가 자신의 얼굴을 오랫동안 연구하면서 표정에 중점을 두었으므로 다른 인물이 등장하는 작품에서도 늘 얼굴에 초점을 두었다.
초상화는 물론이고 성서 및 고전을 주제로 한 그림과 풍속화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힘이 넘치는 포즈와 몸짓 그리고 조화를 이루면서 얼굴이 쉽게 잊혀지지 않는 인물들로 창조되었다.
형식을 무시하고 신속하게 그린 작품에서도 그는 얼굴과 몸짓에서 개개인의 특징을 최대한 살리려고 노력했다.
렘브란트의 천재성은 그의 막대한 작품에 정통해야 비로소 이해가 된다.
그는 600여 점의 회화, 300여 점의 에칭, 2,000여 점의 드로잉을 남겼다.
1851년 들라크루아는 렘브란트가 언젠가는 라파엘로보다 더 높이 평가받을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그의 말은 50년이 채 지나기 전에 사실로 나타났다.
렘브란트의 독창적인 업적은 네덜란드 화가들의 전통 속에 전해졌지만 그의 제자들 대부분은 후에 통속적으로 기울면서 스승의 엄격한 규범을 포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