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네의 손과 모네의 눈 The Great Couples 1
김광우 지음 / 미술문화 / 2002년 12월
평점 :
품절


모네의 ‘진정한 전투지역’, 살롱전


모네는 에트레타의 기후와 그곳의 절경을 이루는 벼랑과 강한 바닷바람을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까치>에는 어려운 가운데서도 가족과 함께 하는 순간의 행복감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흰색의 심포니가 이루어진 그림에서 검정색의 작은 까치가 매우 인상적인데 장차 그릴 인상주의 그림을 예고하는 것 같습니다.

모네가 1868-69년 겨울 에트레타에서 카미유와 장과 함께 행복을 맛보면서 그린 것이 특별한 점심식사의 장면 <오찬>입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처지에 있었음에도 230×150cm 크기로 그린 것을 보면 야망을 갖고 그렸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장은 이제 한 살 반이 되었습니다.
어머니와 아이가 앉은 테이블이 빛으로 인해 관람자의 시선을 끕니다.
테이블 위에 신문 『르 피가로』가 놓여 있는데 아직 펴서 읽지 않은 상태입니다.
초대된 손님은 아직 자리에 앉지 않은 채 창문에 몸을 기대고 장갑을 벗으려고 합니다.
점심식사는 아직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손님은 친구 혹은 친척으로도 보이지 않아 불편한 상태로 그냥 서 있는 것이 여간 어색하지 않으며 하녀의 동작도 불분명헤서 모네의 연출이 사려깊지 못했음을 봅니다.

이 무렵 모네는 캔버스도 없고 물감도 떨어져 그림을 그릴 수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같은 시기에 그린 <붉은 망토>는 <오찬>에 비하면 전혀 다른 방법으로 그려진 것으로 모네가 그렸을까 하고 의심이 될 정도입니다.

모네는 1869년 6월에 파리 서쪽 센 강변의 작은 마을 생미셸에서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가 경제적으로 어려운 처지에 있다는 말을 전해 들은 가난한 르누아르가 부모의 집에 있는 음식물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두 사람은 1869년 6월과 10월 사이에 그르누예르 근처 유원지의 ‘떠 있는 카페’로 유명한 곳으로 가서 이젤을 나란히 하고 작업했습니다.
그르누예르란 말은 ‘개구리 연못’이란 뜻으로 사람들이 수영도 하고 보트도 즐길 수 있는 곳으로 식사를 하고 유희하기에 좋은 곳이었습니다.
이곳에서의 두 사람의 작업에서 인상주의 풍경화 기법이 나타났는데 붓질이 짧아졌고 긴급한 인상이 가벼운 붓질로 영롱하게 나타났습니다.
과거 풍경화 개념으로 보면 두 사람의 풍경화는 완성된 것이라기보다는 스케치처럼 보입니다.

인상주의 양식을 한 마디로 규정해서 모든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적용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상주의는 한 가지 양식을 사용한 화가들의 유행이 아니라 전통에 반발한 다양한 개성을 가진 화가들의 자유로운 연대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각기 다양한 사고 방식을 강조했으며 이런 사고 방식의 일부가 후에 미술사학자들에 의해서 인상주의 운동의 특징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엄격히 말하면 모네를 제외하고 생애의 한 시기에서만 인상주의의 특징을 보인 화가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인상주의의 주된 방향은 르누아르가 도입한 검은 그림자, 윤곽선을 배제한 무지개 색채, 색을 점으로 혹은 분할하는 기법에 의해서 이루어졌습니다.
풍경화는 모네의 작품을 통해 본 대로 실재의 장면을 재현하고 물감을 이용해 사물이 지닌 색을 살리면서 밝은 태양 광선 아래의 활기찬 정경으로 재창조하는 시도에 의해 그려진 것입니다.
그림자는 회색이나 검은 색이 아니라 대상의 보색으로 칠해졌습니다.
윤곽선의 배제로 대상의 형상이 불명료해졌고 인상주의 그림은 빛과 대기의 회화가 되었습니다.
이런 변화는 바르비종파 화가인 디아즈 드 라 페냐와의 우연한 만남에서 영향을 받은 르누아르에 의해 1860년대 말에 도입되었습니다.
1870년대 초 피사로가 이것을 처음으로, 이어서 모네와 시슬레가 받아들였습니다.


모네의 경우 이런 종류의 인상주의 그림을 그린 것이 처음이 아니었고 <베네쿠르의 강>에서 이미 토막난 붓질로 순간의 느낌을 표현한 적이 있습니다.
그는 세세한 묘사를 무시하고 단지 외곽선만을 그린 후 빛에 의한 색질의 달라짐을 통해 자연의 변화를 기록했습니다.
그는 색을 섞어 사용하기보다는 순수한 색을 그대로 사용하면서 붓질을 더욱 짧게 했는데 색의 진동을 나타내기 위해서였습니다.
모네는 살롱전을 ‘진정한 전투지역’이라고 말해 왔으므로 이곳에서 그린 그림과 <오찬>을 1870년 봄 살롱전에 출품했지만 낙선하고 말았습니다.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