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니멀 아트




미니멀 아트는 추상표현주의의 몇몇 특징과 액션 페인팅에 대한 반작용으로 1950년대 미국을 중심으로 일어난 미술 경향을 말한다. 미니멀리즘이란 용어와 개념을 러시아계 미국 화가이며 이론가 존 그레이엄John Graham(1881~1961)이 1937년 <미술의 체계와 변증법 System and Dialectics of Art>에서 이미 사용했으며, 앞서 다비트 부를리우크는 1929년 듀덴싱 화랑에서 열린 그레이엄의 전시회 카탈로그 서문에 “미니멀리즘은 작업 수단의 최소화에서 비롯된 용어이다. ... 미니멀리즘 회화는 주제가 곧 회화 자체가 되는 순수하게 사실적인 것이다”라고 적었다.

정규 미술 교육을 받았는지 또는 어디서 배웠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레이엄이 쓴 글에 의하면 가보, 리시츠키, 다비트 부를리우크, 시인 마야코프스키와 같은 러시아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을 알고 있었고, 그의 초기 작품은 광선주의와 관련이 있다. 이후 말레비치, 칸딘스키와 마찬가지로 당시 유행하던 신지학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1920년 미국으로 이주했으며 미국 시민이 되었다. 뉴욕 화단에서 그의 영향력은 막강하여 모더니즘의 대변자라는 평을 들었고 미국 미술과 유럽의 아방가르드 미술을 연결시키는 교량적인 역할을 했다. 그레이엄은 미국에서 초현실주의의 자동주의 기법이 일반적으로 알려지기 전에 이미 이것을 언급했으며 미니멀리즘의 논리를 예견했다. 그는 <미술의 체계와 변증법>에서 신비철학, 신비주의, 현대 미술의 미학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상세하게 설명했다. 브를리우크는 미니멀리즘이 회화에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주었다면서 그레이엄을 선구자로 꼽았다.

현대 미술 운동의 동향을 설명하는 많은 용어들과 마찬가지로 미니멀 아트는 그 적용 범위가 매우 넓다. 영국 평론가 에드워드 루시-스미스는 <현대미술의 개념>(1974)에 기고한 ‘미니멀 아트’에서 이런 점을 강조하면서 적었다. “여기에서 논의된 모든 미술 운동 중에서 미니멀 아트는 가장 불분명하며, 가장 독립성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현대 미술을 통틀어 이보다 더 현대 미술의 전개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주제는 거의 없을 것이다." 미니멀 아트에는 두 가지 개념이 포함되어 있다. 첫째, 단일 색채로 균일하게 채색된 캔버스처럼 미니멀 작품은 거의 차별화 되지 않는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어서 예술가의 작업량은 최소한이 된다. 둘째, 작품이 뚜렷하게 차별화 되어도 예술가의 작업량은 최소한도에 머무르는데,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대량생산품이 작품의 구성 요소로 사용되어 이들이 서로 동일하거나 거의 동일하기 때문이다.

미니멀 아트란 명칭은 평론가 바버라 로즈가 1965년 <아트 인 아메리카> 10, 11월호에 기고한 논문 ‘ABC 아트’에서 사용했다. 미니멀 아트 중에서도 최소한의 내적 차별성을 지닌 한 부류에만 주목한 로즈는 1950년대에 일어난 새로운 감수성으로의 전환에 대해 언급하고 “공허하고 중립적이며 기계적인 비인격성을 지녀 앞서 등장한 낭만적이고 자전적인 추상표현주의 양식과 격심한 대조를 이룸으로써 관람자가 감정과 내용의 명백한 부재를 목격하고서 얼어붙도록 만드는” 미술에 대해 서술했다. 로즈는 새로운 종류의 미술이 독창성, 감상적이거나 표현적인 내용, 복잡성과 같은 전통적인 필요조건들을 의도적으로 폐기 처분했다고 지적했다. 
 

재즈 음악가이기도 한 프랑스 화가 클랭은 유럽의 네오-다다 운동의 주도자였으며 평론가 피에르 레스타니Pierre Restany(1930~)와 함께 누보 레알리즘 운동을 시작했다. 레스타니는 1960년에 누보 레알리슴 선언문을 발표했다. 클랭은 1946년에 이미 한 가지 색으로 균일하게 칠한 비대상 회화인 모노크롬을 작업했지만, 1950년에 런던에서 비공식적으로 전시되었고 1955년 살롱 데 레알리티 누벨에서는 거부당했다. 1956년 파리의 콜레트 알랑디 화랑에서 처음 전시되었다. 이 시기에 그는 자신이 ‘클랭의 국제적인 푸른색(IKB)’이라고 부른 독특한 푸른색을 사용하여 모노크롬 회화, 조각된 형상, 캔버스 위의 스폰지 부조를 제작한 ‘푸른색 시기’를 맞이했다. 
 

1959년 소르본 대학에서 행한 강연에서 클랭은 자신의 모노크롬 회화 이론은 색채에서 주관적인 감정을 제거함으로써 색채가 갖는 개성을 없애고 색채에 형이상학적 특징을 부여하고자 하는 하나의 시도라고 설명했으며, “그리고 내가 점차적으로 빗물질적인 상태에 이를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색채를 통해서였다”고 했다. 이 강연의 일부는 1973년 김펠 피스 화랑이 기획한 회고전 도록에 다시 실렸다. 클랭은 자신이 푸른색을 선호한 이유를 밝혔다.

“푸른색은 어떤 특징도 없으며, 특징이라는 한계를 초월하지만 다른 색채는 그렇지 않다. 다른 색채들은 거의 심리적인 의미로 확대 해석되는데, 열을 발산하는 것으로 미리 상정되는 붉은색을 예로 들 수 있다. 모든 색채는 심리적으로 물질적이거나 실체적인 개념을 연상시키지만, 푸른색은 바다와 하늘 정도만을 암시할 뿐이다.“ 
 

클랭은 1958년 흰색으로 칠해진 텅 빈 화랑을 보여준 <텅 빈 전시회>로 파리에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로버트 라우센버그는 1952년 전체적으로 흰색으로 된 일련의 작품들로 전시회를 열고 이어서 전체적으로 검정색으로 된 작품을 제작했다. 그는 찢기고 구겨진 신문이 붙어 있고 검정색 에나멜 물감으로 인해 표면이 불규칙적이고 전체가 검은 일련의 회화를 제작했다. 그는 미니멀리티를 실험한 최초의 화가 중 하나였다.

미니멀 아트라는 명칭은 기교를 감축하고 전통적인 미술의 방식을 거부하는 미술에 더 포괄적으로 적용되었다. 그래서 모리스 루이스는 종종 미니멀리즘의 선구자로 일컬어지는데, 이는 잭슨 폴록의 후기 작품에서 헬렌 프랭컨탤러로 이어진, 초벌칠 하지 않은 캔버스에 물감으로 얼룩을 만드는 기법을 루이스가 도입하면서 물감의 회화적인 사용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미니멀 조각가들로 토니 스미스, 칼 안드레, 로버트 모리스, 도널드 저드 등이 있다. 1933~36년 아트 스튜던츠 리그, 1937~38년에는 시카고의 뉴 바우하우스에서 수학한 토니 스미스Tony Smith(1912~80)는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건축현장 감독으로 견습생활을 했으며, 1940~60년까지 건축가로 활동했다. 1940년경 조각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여 1960년대 초에는 미니멀 아트 조각의 선구자 중 한 사람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스미스의 작품은 규모가 크고, 강철 또는 채색한 강철로 제작된 단순한 기하 형태들로 구성되었다. 그의 조각은 잘 들어맞는 모듈 단위체나 직사각형의 상자들로 구성되기도 했다. 이런 작품들은 표현성과 환영을 배제하고 미술작품을 오브제 그 자체로서 제시하고자 하는 미니멀 아트의 미학을 동시대의 어떤 작품보다도 명확하게 보여주었다.

브란쿠시 제자로 나무 조각을 시작으로 조각에 몰두한 칼 안드레Carl Andre(1935~)의 초기 작품에서 브란쿠시의 영향을 발견하기란 쉽다. 1960~64년 펜실베이니아 철도회사에서 일했으며, 그 경험으로 상호 교환이 가능한 규격화된 단위의 사용에 확신을 갖게 되었다. 1966년 뉴욕의 유태 미술관에서 열린 ‘기초적 구조’ 전시회에 선보인 그의 작품 <지렛대>는 139개의 내화 벽돌을 각각 분리시켜 일렬로 배열해놓은 것이다. 그의 작품은 미니멀 아트로 분류되며, 또한 그 중 일부는 시리얼 아트 및 체계적인 미술로 분류되기도 한다. 그는 스티로폼이나 벽돌, 시멘트 블록, 자성체 등 동일한 형태의 공업 재료들을 부착하거나 접합시키는 과정 없이 수학적인 일정한 체계에 따라 쌓아올려 작품을 제작했으며, 전시가 끝나면 작품은 해체되었다. 1965년경부터 간단한 수학 원리에 따라 직각의 격자 모양으로 작품을 바닥에 수평으로 배치했다. 또한 대지 미술도 시도하여 이 분야의 선구자로 꼽힌다. 
 

1948~51년 캔자스시티 대학, 캔자스시티 아트 인스티튜트, 샌프란시스코 아트 인스티튜트에서 수학한 후 로버트 모리스Robert Morris(1931~) 1953~55년에 오리건 주의 리드 칼리지에서 수학하고 1966년에는 헌터 칼리지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모리스는 미니멀 아트 주창자 중 가장 뛰어나며 자신의 의도를 명료하게 형상화한 예술가로 꼽힌다. 그는 부분들이 모여 전체를 구성하는 것을 거부하고 ‘비관계적 non-relational’ 혹은 ‘전체론적 holistic’인 미학을 표방했다. 1965년 뉴욕의 그린 화랑에서 기초적 구조 작품들을 전시했으며, 그후 부분과 내부 구조가 없는 기본적인 다면체와 같이 즉시 명시할 수 있는 단순한 오브제들을 발표하면서 기교를 거부하고 극도의 지적인 단순화를 추구했다.

모리스는 미니멀 아트에서 조각가이면서 이론가로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 그가 ‘단일한 형태 unitary forms’라고 명명한 기초적 구조 이론은 1966년 <아트 포럼> 2월호와 10월호에 기고한 논문 두 편에 자세히 서술되어 있으며 이 논문들은 1968년 그레고리 뱃콕이 엮은 <미니멀 아트>에 재수록되었다. 모리스가 용의주도하게 가장 쉽게 지각되고 이해되는 형태, 더욱 단순한 다면체를 사용한 것은 한편으로는 추상표현주의가 신봉하던 즉흥적이며 개성적인 표현에 대한 반발이었다. 동시에 그는 몬드리안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전통적인 원칙, 즉 미술작품은 부분들 사이의 관계로 이루어진 통일된 체계라는 입장에 반대한 것이다. 그러나 후기 작품에서는 모듈의 변화와 연속적인 반복을 점차 중시함에 따라 형태 그 자체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었다. 또한 모리스는 1960년대에 칼 안드레와 함께 예술가의 작업은 작업실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전통적인 사고 방식을 탈피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으며, 스튜디오나 화랑 같은 제한된 공간을 넘어 환경 속에서 미술품으로도 가능하도록 설계된 ‘현장 in situ' 조각작품 개념을 주창했다. 

미니멀 아트의 주도적인 인물이며 이론가인 도널드 저드Donald Judd(1928~94)는 1946~47년 한국에서 군복무를 마친 후 뉴욕의 아트 스튜던츠 리그와 컬럼비아 대학에서 공부했다. 1953년 컬럼비아 대학 철학과를 졸업하고 마이어 사피로의 지도를 받아 미술사학을 공부하여 1962년 석사학위를 받았다. 저드는 1959~65년 <아츠 매거진>의 미술비평가로 활동했다. 처음에는 화가로 출발했는데, 나중에 저드는 이 시기의 작품을 “불완전한 추상 half-baked abstractions”이라고 불렀다. 1960년대에는 표면의 질감을 강조한 단색조의 부조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1963년 그를 유명하게 만든 작품은 상자와 같은 똑같은 직사각형 형태를 벽에 설치된 사다리처럼 제작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것을 ‘특수한 오브제’라고 했으며, 1965년 <아츠 이어북 Arts Yearbook>에서 처음 출간한 ‘특수한 오브제’란 제목의 글에서 땅 위에 놓여진 이런 조각을 옹호했다. “실제 공간은 평편한 표면의 회화보다 본질적으로 더 강력하고 특별하다.” 처음에는 주로 나무로 작업했지만 1963~64년 뉴욕의 그린 화랑에서 열린 성공적인 전시회 이후 공업용으로 제조된 다양한 금속과 채색된 퍼스펙스를 이용하기 시작했다. 1970년 저드는 작품을 전시할 특별한 장소에 맞추어 작품을 제작하기 시작했고, 1972년에는 야외 작품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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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레아스 에카르트




조선 미의 특징에 관심이 많았던 독일인 안드레아스 에카르트Andreas Eckardt(1884~1971)는 마흔을 넘긴 나이인 1929년에 『조선 미술사 Geschichte der Koreanische Kunst』를 출간했다.
이 분야 최초의 책이 독일인에 의해서 쓰여진 것이다.
그는 조선의 조각, 회화, 도자기, 범종, 탑 등에 주관적인 판단을 내리면서 찬사를 보냈으며, “조선의 탑은 단순하며 소박하고 과장이 없다 The Korean pagoda is simple and primitive-sober”는 말로 조선 미를 표현했다.
조선인에게는 “예술에 대한 타고난 민족적 재능과 미적 심미안”이 있다고 칭찬하면서 그는 적었다.

“중국의 과장되고 이따금 왜곡된 모형이라든가, 일본의 너무도 감상적이며 판에 박은 듯한 모형과는 달리 조선은 극동에서 가장 아름다운, 아니 차라리 가장 고전적인 예술작품을 당당히 만들었다고 주장하는 것이 결코 과장이 아니다.”


그는 책 말미에 미술품에 나타난 평온함과 중용中庸을 들어 그 특징이 그리스 고전주의 미술품에서 발견하는 것과 일치한다고 찬탄했다.


“조선 미술의 고유한 특성은 이러하다.
품위와 장대함을 함께 갖춘 어떤 진지함, 이념의 숨결들의 현현顯現, 고전적이고 완벽하게 설계된 선線의 작품, 단순하고 겸양스럽고 절제된 형形의 해석, 그리고 이 같은 평온함과 중용은 그리스의 고전주의 미술에서 볼 수 있는 것들이다.”


에카르트는 1909년에 조선에 입국하여 20년 동안 체류하면서 1920년대 말에는 경성제대에서 동양문화를 강의했다.
그가 1931년 박사학위 논문으로 브라운슈바이크Braunschweig 대학에 제출한 것은 ‘한국의 교육제도 Das Schulwesen in Korea’였다.
그의 주저 『조선 미술사』가 출간된 1920년대 말에서 1930년대 초에 이르는 시기는 조선 미술사 연구의 태동기로서 오세창의 『근역서화징』(1928)이 정리되었고, 일본인 관학파인 세키노 다다시關野貞의 『조선 미술사』(1932)가 출간되었다.
에카르트가 『조선 미술사』를 쓰기 위해 참조한 문헌들은 유럽 미술사학의 전통을 기초로 한 중국학 연구자들의 저서였다.
연구자들 중 하나인 오토 큄멜Otto Kummel(1874~1952)의 경우 중국 미술 연구를 시작하기 전에 고대 문양사에 치중했는데, 당시 풍미했던 유럽 사조를 따른 것이다.
큄멜이 학술잡지 『동아시아지 Ostasiatische Zeitschrift』의 주간으로 있을 당시인 1912~33년에 에카르트가 그 잡지에 두 번이나 기고한 것으로 보아 그가 큄멜의 영향으로 그와 학문적 연구에 공통적인 방법론을 공유한 것으로 짐작된다.


『조선 미술사』를 집필하면서 에카르트는 회화, 조각, 공예 등의 장르를 분절적으로 이하기보다는 전체적인 특성을 살피면서 예술의 바탕을 이루는 삶의 구조부터 분석하여 “조선 민족에 있어서는 통일적인 삶의 이해가 자기의 위치를 확보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고 규정한 후 “궁전이나 커다란 공공건물, 의식 장소, 분묘 따위에서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의 작은 대상과 집안의 치장에 이르기까지” 이들 예술의 전체를 연결하는 통일적인 고리가 형성되어야 한다고 전제했다.
그리고는 “모든 예술 분야를 포괄하는 하나의 통일된 양식을 조선인도 동아시아인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고 결론지었다.


그가 조선 미술의 특징으로 꼽은 것은 자연감, 고전성, 소박성, 단순성 등이다.
그는 특히 도자기에서 이런 특징을 발견했는데 “조선 도자기의 가치는 중국이나 일본에서처럼 채색과 형태에서 과장하여 꾸미지 않고, 오히려 이런 제한 속에서 유약을 경이롭게도 부드럽게 발색시키며 형태를 놀랍도록 변화시키는 데 있다”고 상대적인 특징을 강조하면서 결국 도자기에서도 ‘평상시의 단순성 die gewohnte Einfachheit’과 조용함, 균제, 조화에 대한 자연감 등이 지배하고 있음을 지적했다.
그가 가장 대표적인 특징으로 꼽은 것은 단순성이었다. 이런 단순성을 그는 건축물의 구조적 요소, 탑과 조각 등에서도 발견했다.


그의 오류는 조선 말기의 화가 장승업을 초기의 화가로 다룬 것, 조선 화가를 소개하면서 정삼품正三品을 화가의 이름 혹은 호로 본 것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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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미켈란젤로


회화와 조각 그리고 드로잉에서 르네상스를 대표할 만한 미켈란젤로는 뒤늦게 시인으로도 알려졌다.
예술 전반에 걸친 그의 사고는 여러 가지 출처를 통해 잘 알려져 있다.
그가 쓴 편지 495편이 1623년에 발견되었고 대부분 가족이나 후원자에게 보낸 개인적인 내용이거나 작업에 관한 것들로 예술론을 알아내는 데는 아무런 도움이 안 되지만, 그가 쓴 시들은 예술에 관해 직접적으로 언급한 내용은 거의 없더라도 대부분 사랑을 주제로 한 것들이므로 미에 대한 사고를 추론하게 해준다.

미켈란젤로 자신이 직접 쓴 글 외에도 세 명의 당대인이 그에 관해 써놓은 자료가 남아 있다.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이 프란시스코 데 홀란다(1517~84)라는 포르투칼 화가로서 1538년 로마로 와서 미켈란젤로 주변에서 한동안 지낸 인물이다.
그는 1548년에 <고대 회화에 관한 대화편>을 썼는데 이것이 출간된 것은 1890~6년이며 영어로 번역된 것은 1928년이다.
그는 이 책에서 자신이 미켈란젤로라는 대가와 밀착되어 있었다는 점을 은근히 나타내어 자기 자신을 영광되게 하기 위해 쓴 흔적이 역력하다.
그의 저서는 자만심의 결과물이지만 미켈란젤로의 생애 중 전기작가들이 소흘히 다룬 시기에 관련된 것이므로 소중한 자료로 사용되고 있다.
당대에 출간된 두 번째 저술로는 바사리가 <미술가 열전>에 기록한 미켈란젤로의 전기이다.
이것은 1550년에 첫 풀간되었으며, 1568년 개정판에서는 거의 다시 썼다 싶을 정도로 수정 증보되었다.
이 책은 자료 제공면에서는 기대에 훨씬 못미치지만 미켈란젤로의 제작방법을 기술해놓고 있으며 아울러 그의 견해를 약간이나마 수록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미켈란젤로의 제자인 아스카니오 콘디비가 쓴 <미켈란젤로의 전기>는 1553년에 출간되었으며 셋 가운데 가장 중요한 자료로 꼽힌다.
미켈란젤로의 생애를 다룬 이 책은 바사리가 잘못해놓은 점들을 바로잡기 위해 씌여진 듯하다.
콘디비는 다소 고지식한 성격의 소유자이기는 하지만 미켈란젤로가 한 말과 사고를 기록하는 데 있어 바사리나 홀란다보다 훨씬 더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
울브리안 마르세즈에서 태어난 그는 1540년대 말부터 미켈란젤로의 조수로 활동했다.
콘디비가 미켈란젤로의 전기를 출간했을 때 미켈란젤로는 78살이었다.
미켈란젤로의 조상, 출생, 그리고 어린 시절에 관한 콘디비의 전기는 당시의 기록과 늙은 미켈란젤로의 어렴풋한 기억에 근거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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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으로 작품을 제작하기 보통이었다


르네상스 이전 예술가들은 대부분 하찮은 신분이었으며 그들의 기술은 좀 나은 숙련공 정도로 인정받았을 뿐이다.
출신성분이나 교육수준에서 길드의 소시민적 구성원들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농부, 이발사, 푸줏간집 자제들이 화가가 되는 건 예사로운 일이었다.
예술가 지망생들의 교육은 장인들과 마찬가지로 학교에서가 아니라 작업장에서, 이론적 수업을 통해서가 아니라 실질적 훈련을 통해서 이뤄졌다.
그들은 읽기, 쓰기, 셈본 등 기본 지식을 습득한 한 어린 나이에 장인의 문하에 들어가 여러 해 그 밑에서 기술을 습득했다.
르네상스 초기 중요한 예술가들의 작업장은 대체적으로 수공업적 조직을 벗어나지 못했지만 예술가마다 나름대로 독자적 교수법을 도입하고 있었다.
그래서 예술가 지망생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예술가의 작업장으로 편입되었고 유명한 예술가의 작업장에 지망생들이 몰리는 현상이 생겼다.
지망생들은 자신들의 값싼 노동력을 제공했고 예술가들은 값싼 노동력을 활용하려고 했을 뿐 훌륭한 교사가 되려고 하지는 않았다.

르네상스 초기 예술가들의 작업장은 여전히 석공조합이나 길드의 작업장이 지닌 공동체 의식에 의해 운영되고 있었다.
15세기 말까지 미술품을 제작하는 과정은 집단적이었는데, 특히 커다란 조각품을 제작하기 위해서는 많은 조수와 노동자들을 고용해야 했으므로 공장과도 같은 체제를 만들어야 했다.
기베르티가 피렌체 세례당 문을 제작할 때 스무여 명의 조수가 기용된 데서도 이런 점을 알 수 있다.
기를란다요가 커다란 벽화를 그릴 때도 많은 화가와 조수들이 그를 도왔다.
처음부터 완성시킬 때까지 혼자서 작업하면서 제자와 조수들의 노동과 기술이 필요하지 않다는 생각은 미켈란젤로에 의해서였다.
이런 점에서 보면 그는 최초의 현대적 예술가라 할 수 있다.

예술가들의 작업장은 규모에 따라 큰 사업이었다.
혼자 독자적으로 작업장을 운영할 수 없는 예술가들은 공동으로 운영하기도 했는데, 도나텔로와 미켈로조, 바르톨로메오와 알베르티넬리, 사르토와 프란치아비지오 등은 공동으로 운영했다.
예술가는 아니지만 미술품 제작을 사업으로 삼고 작업장을 운영한 사람들도 있었는데, 밀라노의 에반젤리스타 다 프레디스는 예술가들을 고용해 자신이 주문받은 작품을 제작하게 했으며 레오나르도도 그로부터 일감을 받아 제작한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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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응로의 사의적·서예적 추상

이응로는 1976년 서울 신세계 미술관에서 열린 개인전 카탈로그에 적었다.

"내가 그림을 시작한 것이 벌써 70년이 되었다. 그 지나온 70년을 되돌아보니 소년기의 자유자재했던시절을 제하고 약 10년을 주기로 하여 여섯 번으로 나뉘어 변화하였음을 발견하게 된다. 20대를 우리나라 전통의 동양화와 서예적 기법을 기초로 한 모방시기라 하면, 30대를 자연물체의 사실주의적 탐구시대, 40대를 반추상적 표현이라 할 수 있는 자연사실에 대한 사의적 표현, 그리고 50대에 유럽에 와서 추상화가 시작된다. 그로부터 오늘까지 다시 나누어 전기 10년을 ‘사의적 추상’이라 하면 후기 10년을 ‘서예적 추상’이라 이름지어 보겠다.”

그때로부터 1989년 86세로 타계할 때까지 한 차례 더 창작에 변화가 생겼으므로 모두 일곱 차례에 걸친 변화이다. 40대의 반추상에서부터 이응로의 감정 표현과 조절이 회화적 장점으로 나타났으며 오브제를 사의적으로 표현하고 자연의 기운을 역동적으로 다룬 점이 주목할 만하다. <분출>(1950)과 <산>(1954)은 자연의 기운에 대한 느낌을 표현하고 조절해 회화적 균형 혹은 구성을 창작한 것들로 장차 그릴 일련의 <문자추상>과 미학적 공통성이 있다.

그는 1958년 크리스마스 다음 날 프랑스로 향했으며 환경의 변화가 그로 하여금 창작의 태도를 바꾸게 만들었다. 유럽 미술의 본고장에서 종이콜라주paper collages와 앵포르멜Informel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종이콜라주는 조르주 브라크가 1912년 처음 발견한 방법으로 우연히 벽지를 파는 상점 앞을 지나다가 나무결처럼 생긴 벽지를 잘라 붙이면 환상의 효과가 생길 것이라고 생각했다. 종이콜라주는 종이를 풀로 붙인다는 뜻이며 브라크는 자신과 더불어 입체주의를 창안한 피카소와 함께 이 기교를 회화에 이용해 환상적 삼차원의 효과를 한층 높였다. 앵포르멜은 미셸 타피에Michel Tapie가 1940년대와 50년대 유럽 주요 화가들의 즉흥적 완전추상화에 붙인 명칭으로 영어로는 ‘형식이 없는 without form’이란 뜻이며 비형식주의Informailsm란 말로 통용되기도 한다. 하지만 앵포르멜은 단순히 형식을 무시한다는 의미보다는 좀더 넓은 의미로 서정적 추상lyrical abstraction을 말하며, 가벼운 붓질로 색을 칠해 불규칙한 얼룩을 남긴다고 해서 붙여진 명칭 타시즘Tachisme(프랑스어 타시tache는 얼룩blotch이란 뜻이다)과 동일한 양식이다. 특정한 주제가 없이 화면 전체를 하나의 구성으로 하는 올-오버 회화all-over painting를 <분출>을 통해 실험한 적이 있고, 또한 감정 표현과 조절을 통해 서정적 반추상을 추구해온 이응로에게 당시 유행한 앵포르멜 양식은 매우 친숙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그는 1960년에 여러 점의 <문자추상>을 그렸으며 한동안 이 주제에 집착했다. 캔버스에 종이를 잘라 구긴 다음 풀로 붙이고 그 위에 색을 칠한 것들로 대부분의 작품에 문자를 유추할 만한 형상이 없어 제목에서 문자란 말을 빼고 추상 혹은 구상으로 불러야 타당하다. 종이콜라주가 주는 입체감과 오십 후반에 이르도록 훈련해온 채색기술 그리고 올-오버 구성이 한데 어우러져 유행에 있어 프랑스 주요 화가들의 작품에 뒤지지 않았다. 종이콜라주의 부드러운 질적 장점을 십분 활용해 부조와 같은 입체감을 한껏 드러낸 완전추상 작품으로 1961~81년작 <문자추상>을 꼽을 수 있다. 대표작으로 꼽을 만한 이것은 <도시>(1970)와 <태양>(1972)과 관련 있으며 회화의 평면성에 갑갑함을 느끼고 좀더 자유로운 삼차원의 표현으로 나아가기 시작한 이정표가 된다. 그는 결국 입체적 표현을 위해 조각을 제작하기 시작했는데, <세 얼굴>(1964)과 <토템>(1964)은 이그러진 얼굴 그리고 풍상에 깍여 형상을 알아볼 수 없는 원시적 형태를 주제로 한 것이다. 창작 중심에 사람이 있다는 점이 특기할 만하며 사람은 그의 작품에서 다양한 형상들도 나타나다가 60년대 후반부터는 군상으로 큰 무리를 이룬다. 조각의 재료로 흙과 나무를 주로 사용했는데, 서정성을 나타내기에 매우 효과적인 재료이다. 이런 재료는 인간에게 가장 친근한 물질이라서 부드럽고 포근한 느낌을 주기 때문에 사람의 형상을 표현하기에 안성맞춤이다.

이응로의 감정 표현은 발산적이라서 다분히 서양적이지만 조절 방식은 부드러워 동양적이어서 과격하게 치우치지 않고 절제된다. 감정을 지나치게 과장하거나 절제하여 서정성이 떨어지고 진부한 조형에 머물고 만 작품들도 없지 않지만 일관성을 유지하며 그가 추구하려고 한 점은 젊었을 때부터 창안한 사의적·서예적 추상이며, 이는 이응로 미학의 근간을 이룬다. <문자추상>이란 제목으로 많은 작품을 제작했는데 문자적 커뮤니케이션을 위해서가 아니라 회화에서만 가능한 조형문법이며 이를 감정 표현의 수단으로 삼아 이응로 고유의 추상문법이 되게 했다. 그의 문법이란 다름 아닌 사의적·서예적 추상을 말한다. 흥미로운 점은 문자를 구상적 인간의 형상으로 변형시켜서 궁극적으로 인간 자체를 모티프로 삼은 점이다. 이렇게 하게 된 동기로 그는 1980년 5월의 광주민주화운동을 꼽았다.

1967년 ‘동베를린사건’에 연루되어 2년 반 동안 옥고를 치룬 적이 있는 그에게 민중운동은 감동을 주었고 77살의 노화가에게 마지막 창작 동기를 주었다. 그는 <군상>이란 제목으로 민중의 힘을 여러 점으로 표현했는데, 그의 역사관·정치관과 관련이 있다. 그는 1986년 동경도 미술관에서 초대전을 열었을 때 말했다.

“나의 그림은 추상적 표현이었으나, 1980년 5월의 광주사태가 있은 뒤로 좀 사람들에게 호소되는 구상적인 요소를 그림 속에 가져왔다. 2백 호의 화면에 수천 명 군중의 움직임을 그려넣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 그림을 보고 이내 광주를 연상하거나 서울의 학생데모라고 했다. 유럽 사람들은 반핵운동으로 보았지만, 양쪽 모두 나의 심정을 잘 파악해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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