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연출디자인의 원류 프레데릭 J.키슬러
야마구치 가쓰히로 지음, 김명환 옮김 / 미술문화 / 2000년 3월
평점 :
품절


키슬러는 만년에 이르러 영화 상영을 위해 

<공간연출 디자인의 원류>(도서출판 미술문화) 중에서

앞서 키슬러와 뒤샹의 공통분모로 거론한 두 가지 컨셉도 인간과 환경의 상호관련성에 주목하여 살펴보면 보다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인간이 주어진 육체적 조건에 따라 사물을 본다는 것은, 말하자면 있는 그대로의 장치를 보는 것과 같다.
사람은 두 개의 눈을 갖고 있기 때문에 무언가를 본다는 것은 사이를 두고 열려 있는 두 개의 구멍을 통해 외부환경을 들여다보는 것이 된다.
그러나 이 같은 상황에서 어떤 사실을 본다는 것은 외부환경과 그곳에 존재하고 있는 그 밖의 사람들의 시선에 의해 방해받을 수밖에 없다.
이 같은 상황에서 사물을 본다는 것은 마치 공중에 매달린 채로 자신이 가지고 있는 ‘보기 위한 장치’를 움직이는 것과 같이 불안정한 것이다.

이와는 달리 ‘들여다본다’는 것은 외부환경이나 타인의 눈으로부터 일단은 자신을 차단시키고 사물을 보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벽에 뚫린 구멍을 통해 사물을 본다는 것은 보고 있는 자신이 놓인 환경과 보는 대상물의 환경을 차단시키는 것이 된다.
‘들여다본다’는 것은 항상 보는 사람 개인의 시각적 세계를 보호해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인간이 어떤 환경 속에서 사물을 본다는 행위는 먼저 ‘공중에 매달린 채 바라보는’ 방법과 ‘들여다본다’는 방법이라는 두 가지 극단적인 상황을 왕래하는 것일 것이다.

뒤샹과 키슬러, 그들이 보여준 인간의 ‘본다’는 사실에 관한 끊임없는 탐구.
그리고 그것을 집요하리만큼 작품을 통해 구체화하고자 했던 태도.
그 배경에는 20세기에 발생한 기술적 발전과 그로 인해 파생된 시각세계의 확장을 들 수 있다.
키슬러는 만년에 이르러 영화 상영을 위해 하늘의 구름을 이용하는 방법을 생각했다.
모홀리-나기가 빛의 스펙터클을 구상한 바와 같이 키슬러도 외부환경 전체를 이용한 영상 프로젝션을 생각했던 것이다.8)

키슬러의 발상은 영상을 공중에 매다는 것과 같다.
이것은 20세기 초 유럽이 꿈꾸었던 ‘예술적 축제’를 구체화하는 아이디어이기도 하다.
키슬러는 그의 생애 마지막까지 이 같은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예술과 기술의 새로운 접목가능성을 추구하고 있는 메사추세스 공과대학(MIT)에서 시각예술 탐구를 계속하고 있는 오토 피네가 최근 기획한 프로젝트 센터 빔(Center Beam)에서 증기로 만든 구름에의 영사, 홀로그래피, 레이져 빔 등을 이용한 3차원 영상을 실험했다.
이것도 키슬러가 꿈꾸었던 시각적 축제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또한 키슬러의 영향을 받은 인물 중 한 사람으로 키슬러와 같은 비인 출신의 건축가 센트 프로이언을 들 수 있다.
프로이언은 3차원 영상인 홀로그래피를 이용한 <환영적 건축 Visionary Architecture>(1971)를 제안했다.
이것은 의식의 실체화라고 할 수 있는 건축을 홀로그래피라는 허상형식을 빌어 존재시키려는 의도를 지닌 것으로, 이것도 ‘공중에 매달린 건축’ 또는 ‘시각 상(視覺上)의 건축’에 대한 제안이라 할 수 있다.
이것도 키슬러가 생각했던 ‘비전 머신(Vision Machine)’의 연장선상에 존재하는 시각적 축제공간의 실례이다.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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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우의 <폴록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모든 일간신문과 주요 잡지들이 잭슨 폴록의 갑작스런 사망을 일제히 보도했다.
『뉴욕 타임즈』는 첫 페이지에 보도했고, 『뉴스 위크』는 트랜지션(transition) 난에서 알렸으며 『타임』은 ‘현대회화의 기병에 대한 놀라운 소식’이란 제목으로, 『라이프』 는 ‘반항하던 예술가의 비극적 종말’이라는 제목으로 보도했다.
리는 8월 13일 뉴욕에 도착하여 장례식을 서둘러 준비했다.
제임스 브룩스가 장례식에 입고 갈 짙은 색 양복이 없다고 리에게 말하자 리는 폴록의 옷 한 벌을 그에게 주었다.
리는 아주 침착했는데 이웃들이 와서 위로하려고 하자 오히려 그들을 위로할 정도였다.
이웃의 로드 말로는 그가 리에게 갔을 때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 있었는데, 리는 그를 보더니 “아무 말도 말아요”라면서 자신을 안아주었다고 했다.

토마스 하트 벤턴과 리타는 그 소식을 일요일 오후에 들었다.
그때 그들은 칠마크에 있는 집 현관에 앉아 있었다.
그 지역에서 여름을 보내고 있던 허먼 체리와 드 쿠닝이 소식을 전하기 위해 벤턴에게로 갔는데 벤턴은 두 사람을 안으로 안내하여 앉기를 권했지만 누구도 앉으려고 하지 않았다.
드 쿠닝은 벤턴에게 비행기를 타고 가서 폴록의 장례식에 참석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물었는데 벤턴은 머리를 저으면서 “난 그 꼴을 볼 수가 없다”고 말했다.
그에게는 대단한 충격이었음을 드 쿠닝은 알 수 있었다.

폴록의 장례식이 1956년 8월 15일 수요일 무교단주의 스프링스 교회에서 목사 조지 니콜슨에 의해 집례되었다.
폴록의 몸에 상처가 너무 많았으므로 관 뚜껑은 열지 않았다.
리는 그린버그에게 폴록을 위한 송덕문을 읽어줄 것을 부탁했으나 그는 거절했다.
죄 없는 소녀를 죽게 했는데 어떻게 폴록을 칭찬할 수 있겠느냐고 말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라고 했다.
리는 “토니를 불러와요! 바니(바넷 뉴먼)를 불러요!”라고 말했지만 그린버그말고는 폴록을 칭찬할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아는 예술가들은 아무도 감히 송덕문을 읽으려고 하지 않았다.

리는 폴록의 가족들과 함께 앉기를 거부하고 앞줄에 혼자 앉았고 가족들은 뒷줄에 앉았다.
폴록의 어머니 스텔라가 리를 포옹하려고 하자 리는 그녀를 밀어내면서 “잭슨이 당신을 필요로 할 때 당신은 어디에 있었어요?”라고 말했다.
장례식에 참석했던 사람들은 리가 어쩌면 그렇게 슬퍼하지 않느냐고 의아해 했으며 어떤 사람은 그녀의 감정표현은 “수수께끼와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장례식에서 가장 슬피 울었던 사람은 여든한 살의 노모 스텔라였다.

장례식에는 약 200명 가량이 참석했다. 폴록의 유해는 리가 사두었던 ‘푸른 강’ 묘지에 안장되었는데, 그곳에서도 리는 가족들과 떨어진 채 앞줄에 홀로 서 있었으며 드 쿠닝과 다른 예술가들은 흙으로 관을 덮을 때까지 그곳에 서 있었다.
며칠 후 이웃에 살던 포터가 폴록의 뒷마당에 있는 커다란 바위를 그의 무덤으로 옮기려 하자 리는 그것보다 더 커야 한다고 하면서 이스트 햄프턴 쓰레기장에서 40톤 크기의 돌을 운반하여 폴록의 관이 무너지지 않게 그 옆에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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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 뿌리는 사람



빈센트 반 고흐는 1888년 2월 20일 프랑스 남쪽 끝 아를로 갔다. 파리에서 일 년 반 지내면서 파리의 화가들과 불화했고 일본 회화의 영향을 받아 남쪽의 빛이 더욱 찬란한 곳에서 창작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아를에 도착하고 얼마 되지 않아 안톤 모베의 타계소식을 들었다. 반 고흐는 헤이그에서 한때 모베로부터 수학했는데, 헤이그 화파를 이끈 주요 인물 중 하나인 모베는 프랑스 화가 밀레와 코로로부터 영향을 받아 꾸밈 없는 진솔한 주제 예를 들면 해변의 모래언덕, 강변의 낮은 풀밭, 바닷가 등을 작은 크기로 그리면서 밝고 은빛색을 즐겨 사용했다. 그의 진지함과 조심스러운 태도는 반 고흐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었다. 그의 아내의 사촌이었던 반 고흐는 모베의 가르침을 받았으며 특히 밀레에 대한 영향을 받게 되었다. 반 고흐는 그때부터 밀레의 작품을 모사하기 시작했으며 특히 씨 뿌리는 사람에 관해 강한 집착을 보였다.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장-프랑수아 밀레는 초기에 전통적인 신화와 일화, 그리고 인물화를 그렸다. 그는 전원의 장면들을 그리고부터 이러 장르에 집착했으며 농부 화가로 명성을 얻게 되었다. 전원에서의 농부들의 우수적인 장면들을 강조했으며, 들에서 작업하는 사람들의 노동을 감상적으로 표현했다. 평론가들은 그를 사회주의자라고 불렀지만 그는 정치적이기보다는 미학적으로 전원의 생활을 주제로 삼아 농부들의 삶에서 숭고함을 느낄 수 있도록 노동의 신성함을 강조했다. 1849년에 바르비종에 안주했으며 말년에는 그곳 바르비종 화파의 리더이자 가까운 친구 테오도르 루소의 영향을 받아 순수 풍경화를 그렸다. 밀레는 가난 속에서 생활했으며 오십이 된 1860년대에야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가 남긴 많은 드로잉들에서 그의 재능을 발견할 수 있다. 반 고흐 외에도 조르주 쇠라와 카미유 피사로가 멜레의 작품을 매우 좋아했다.
모베의 타계소식은 반 고흐로 하여금 초자연주의에 대해 관심을 갖게 만들었고 그의 죽음으로 촉발된 죽음과 영원에 대한 사고가 결국 <씨 뿌리는 사람>의 상징주의로 나타났다. 1888년 6월 몇 주 동안 그는 이 작품에 전념하면서 베르나르에게 보낸 편지에 <씨 뿌리는 사람>은 자신이 “갈망하던 영원”에 대한 시각적 표현이며, 이런 문제는 1850년대 네덜란드의 신학적 최대 이유였음을 지적했다.
반 고흐는 1888년 6월 중순 <해질녘 씨 뿌리는 사람>을 그리면서 밀레의 <씨 뿌리는 사람>을 현대화된 형태로 변형시키면서 자신이 존경해마지 않는 들라크루아의 종교화에 사용된 대비채색법을 응용했다. 밀레의 주제에 들라크루아의 암시적 색을 응용했다. 또한 태양과 태양의 빛남을 주로 노란색으로 묘사하고 들에는 보색인 보라색을 주로 사용하면서 물감이 캔버스에 거칠게 남아 있도록 두텁게 칠했다. 옥수수를 모두 뽑은 후 씨를 뿌리는 게 상식인데 그는 옥수수를 뽑지도 않은 밭에 씨 뿌리는 사람을 그려넣었다. 그러니까 씨 뿌리는 사람은 실재 모습이 아니라 밀레의 <씨 뿌리는 사람>이 의도적으로 여기에 삽입된 것이다. 그는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 이 작품에 관해 적었다.
“이제 막 일주일 동안 작열하는 태양 아래서 작업을 마쳤다. 옥수수 밭과 풍경, 그리고 씨 뿌리는 사람을 그렸다. 경작하는 들판, 지평선까지 보랏빛이 뭉실뭉실한 밭에 파란색과 흰색으로 씨 뿌리는 사람을 그렸다. 타작한 후의 옥수수 밭을 지평선에 닿도록 했다. 지평선 끝에 작열하는 노란 태양과 노란 하늘을 그려넣었다. 그림에서 색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단다.”
반 고흐는 화가가 자연과 알 수 없는 영원 사이에서 중재자가 될 수 있으며, 이런 점에서 현대 신학에 일익을 담당할 수 있다고 보았으며, 신성 전체를 환기시키는 특권과도 같은 신성한 힘이 화가에게 주어졌다고 생각했다. 자연의 모든 것이 말하는 것처럼 느꼈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그는 회화에서의 표현적 힘을 가장 중요한 요소로 꼽았다. 그 자신은 자연에서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있고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왜 모든 사람이 보고 느끼지 못하는지 이해할 수 없는데, 자연 혹은 신은 귀와 눈을 가진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이해할 수 있게 한다”고 적었다. 그는 화가로서 행복을 느끼는 이유가 자신이 본 것을 표현할 수 있고 표현하자마자 자연과 조화를 이룰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런 말은 그의 작품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반 고흐가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 것은 회화를 통해 사람들을 교화할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목사였기 때문에 그도 가업을 이어받아 사람들을 교화시키는 삶을 살려고 했다. 하지만 고등학교를 제대로 졸업하지 못한 그는 신학교 입학시험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도저히 합격할 수 없음을 알고 포기했다. 렘브란트의 성화를 본 그는 화가가 되어서도 복음을 전할 수 있다고 판단해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화가는 목사에 비해 전혀 다른 직업처럼 보이지만 사람들을 교화시킨다는 의미에서 볼 때는 동일한 직업이었다. 반 고흐의 작품은 이런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
아를에서 그는 <씨 뿌리는 사람>을 그리는 데 전념했는데, “갈망하는 영원”과 “사후의 세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며 자연과 영원 사이에 교량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작품으로 표현하려고 했다. 그는 “요람에서의 어린 아이와 같은 눈으로 바라보면 영원이 눈에 보인다”고 했다. 자연에 대한 이런 그의 사고가 나타난 <씨 뿌리는 사람>은 자연 안에서 “이상과 추상”으로부터 “가능성과 진실”을 구분하려는 그의 노력의 첫 결실로 이해할 수 있다.
반 고흐는 6월에 그린 <해질녘 씨 뿌리는 사람>에 대한 구성을 달리 해서 10월에 다시 그렸다. 그는 동일한 제목으로 달리 구성했는데, 배경을 보면 알필레와 폐허가 된 몽마주르 대수도원이 바라보이는 곳임을 알 수 있다. 씨 뿌리는 사람은 반 고흐의 말로 “작고 불분명하다.” 이 작품에는 상징적 의미를 시사하는 요소가 없고 열심히 공을 들여 그렸다는 것만 알 수 있다. 야외에서 그리면서 신속하고 자신감을 갖고 인상주의 방법으로 그렸음을 알 수 있다.
<씨 뿌리는 사람>은 들에 있는 한 농부의 모습이 아니라 상징적인 이미지이다. 이는 그가 해석한 예수 그리스도이기도 하다. 이 작품을 그릴 때 밀레의 농부와 들라크루아의 그리스도의 모습에서 영향을 받았다. 그는 들라크루아의 그리스도에서 원형으로 빛나는 후광에 감동하면서 “색 자체가 상징적 언어로 말을 하는 것” 같다고 했다. 그는 레몬과 같은 밝은 노란색을 보고 해와 달의 무리처럼 보인다고 했다. 들라크루아의 노란색은 그에게 매우 강렬하게 느껴졌으며 하늘의 별처럼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낯설고 매력적이라고 감탄했다. 반 고흐는 그리스도의 빛나는 후광의 효과를 씨 뿌리는 사람의 머리 뒤에 빛을 발하는 태양으로 대신했다. 그는 테오에게 들라크루아의 그리스도의 역할을 <씨 뿌리는 사람>에 적용하겠다고 적었으며, 베르나르에게 보낸 여러 통의 편지에서도 종교화에 관해 언급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역할을 “거룩한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미학적 힘으로까지 확대 해석했으며 “창조 행위”의 힘을 가졌기 때문에 가장 위대한 예술가라고 믿었다. 예수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로 설교했는데, 반 고흐는 예수 자신을 “순수한 창조력”을 가진 씨 뿌리는 사람으로 현대적 상징으로 묘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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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표현주의



신표현주의Neo-Expressionism는 신야수주의 혹은 격렬하고 거친 회화에 붙인 명칭으로 프랑스에서는 자유구상Figuration Libre, 이탈리아에서는 트랜스아방가르드Transavantgarde로 불렸다. 이탈리아어로 ‘아방가르드를 넘어선’이란 뜻의 트란스아반구아르디아transavanguardia를 번역한 말이다. 신표현주의와 동의어로 사용되며 더 넓은 의미로 진보적 경향을 보여주는 미술을 말한다. 런던의 왕립 아카데미에서 열린 ‘20세기의 미국 미술’ 전시회(1993)의 카탈로그에 수록된 글에서 이 용어를 만들어낸 아킬레 보니토 올리바는 신표현주의의 줄리언 슈나벌 등을 “뜨거운 트랜스아방가르드” 예술가로 네오-지오Neo-Geometric Conceptualism의 제프 쿤스 등을 “차가운 트랜스아방가르드” 예술가로 분류했다. 네오-지오는 신기하적 개념주의를 줄인 말로 1980년대 중반 뉴욕에서 다양한 양식과 매체를 사용하여 신표현주의의 주정주의에 반발한 미국 예술가 그룹의 작품을 일컬은 명칭이다.
신표현주의는 1970년대 말에 나타난 회화 운동으로 재료를 처리하는 거친 방식이나 강렬한 감정적 주관성을 특징으로 하며, 작품의 크기가 크고 짧은 시간에 제작되고, 때로는 키퍼의 경우 지푸라기를 부착하고, 슈나벌의 경우 깨진 도자기를 캔버스에 직접 부착했다. 보통 구상적이며 폭력과 죽음을 모티프로 하는 경우가 많지만 이미지는 때때로 진동하는 표면 효과에 흡수된다. 신표현주의는 1980년대 초 많은 대규모 전시회를 통해 확고한 위치를 점했는데 1981년 런던의 왕립 아카데미에서 열린 ‘회화에 있어서 새로운 정신’ 전시회가 대표적인 예이다. 이 운동은 1970년대의 ‘무엇이든 사용 가능하다 anything goes’는 태도로 좀더 전통적인 형태로의 회귀를 의미했다. 이런 경향은 화상이나 콜렉터들에게는 환영을 받았지만 평론가들의 반응은 엇갈렸다. 슈나벌을 선두로 몇몇 신표현주의 예술가들은 부와 명성을 얻었지만 많은 평론가들은 그들의 작품이 관습적인 기법을 모두 무시하고 일부러 형편없게 만들었다고 혹평했다. 실제로 ‘나쁜 회화 Bad Painting’란 제목으로 1978년 뉴욕의 신현대 뮤지엄에서 전시회가 열렸으며, ‘나쁜 회화’란 용어는 이런 맥락의 신표현주의 작품 일부에 적용되었다. 펑크 아트와 ‘어리석은 회화 Stupid Painting’란 용어들은 ‘나쁜 회화’를 대신할 만한 했다.
뉴욕의 브루클린 태생으로 휴스턴 대학을 1972년에 졸업한 줄리언 슈나벌Julian Schnabel(1951~)은 1976년 휴스턴 현대 뮤지엄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1979년 뉴욕의 메리 분 화랑에서 연 두 번의 전시회를 통해 주목할 만한 성공을 거두었으며 1980년대에는 화단의 가장 인기 있는 작가로 급부상했다. 1982년에 세계 주요 현대 뮤지엄 중 하나인 암스테르담 시립 뮤지엄에서 회고전을 열었고, 언론은 슈나벌을 화가라기보다는 대중적 스타로 다루는 일이 종종 있었다. 슈나벌의 작품은 규모가 크고 신표현주의적 경향을 띠고 있다. 그는 카페트, 벨벳과 같은 특이한 재료 위에 그리기도 했으며 깨진 도자기로 표면을 덮거나 다른 삼차원적 물체와 통합시키기도 했다. 때때로 캔버스 틀 자체가 중앙으로 돌출되어 삼차원적 효과를 내는 경우도 있었다. 슈나벌은 자신의 작품에 관해 말했다. “나의 작품은 나 자신에 대한 것보다는 세상에 관한 나의 생각을 담고 있다. 나는 어떤 감정적 상태, 사람들이 실제로 몰입할 수 있는 상태를 목표로 한다.”
많은 평론가들이 그의 작품을 반겼지만 1970년부터 <타임> 지의 평론가로 활약하는 로버트 휴스Robert Hughes(1938~)는 “슈나벌의 작품을 그림이라고 하는 것은 실베스터 스탤론이 기름기 흐르는 가슴 근육의 움직임을 연기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고 혹평했다. 슈나벌의 엄청난 작품 가격은 내재적 가치보다는 언론의 과대 광고와 작품의 투자가치 때문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1990년의 한 경매에서 슈나벌의 작품에 대해 단 한건의 입찰도 시도되지 않자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박수를 쳤다. 1983년에 조각을 시작했고, 낙서 화가 장 미셀 바스키아에 관한 영화 <바스키아>(1996)를 감독했다. 현재 영화감독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 밖에도 미국 신표현주의자들로 로버트 쿠시너Robert Kushner(1949~), 데이비드 샐리David Salle(1952~) 등이 있다. 쿠시너는 신표현주의 외에도 신장식주의New Decorativeness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는데, 신장식주의는 추상, 구상 혹은 이 둘을 혼합한 복잡한 패턴을 밝게 채색한 회화를 지향한 운동으로 1970년대 중반 뉴욕에서 발생했다. 이런 패턴과 장식 운동은 미니멀 아트의 엄격한 비인격성에 대한 반동이었으며, 장식 미술은 미술에 인간적인 성격을 부여하므로 순수 미술보다는 열등한 것으로 인식되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옹호했다. 이 운동에 참여한 예술가들은 대부분 여성이었지만 몇몇 남성이 가세했으며 쿠시너와 조각가 네드 스미스Ned Smith(1948~)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신표현주의는 미국 외에도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번성했고 독일의 신표현주의자들은 종종 ‘새롭고 거친 사람들 Neue Wilden’로 불렸다. 신표현주의의 대표적인 인물 게오르크 바젤리츠Georg Baselitz(1938~)는 화가, 판화가, 소묘가, 조각가로 동베를린에서 공부했지만, 1956년 서베를린으로 이주하여 그곳의 아카데미에서 수학했다. 이때부터 본래의 성인 케른Kern 대신에 태어난 곳의 지명을 이름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1960년대에 일부러 거칠고 조야한 그림을 그려 논쟁의 대상이 되었으며 이런 회화를 통해 신표현주의의 선구자 중 하나가 되었다. 이런 작품들 중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은 <만취>(1962~63)로 이를 <엉망이 되어 가는 밤>으로도 불린다. 이 작품은 커다란 성기를 가진 남성을 보여주는데, 에드워드 루시-스미스는 이 작품이 자화상으로 추측했다. 1963년 이 작품이 처음 베를린에서 소개되었을 때 경찰이 압수했다. 1969년부터 이미지의 위아래를 거꾸로 그리기 시작하여 더욱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조너선 파인버그는 저서 <1940년 이후의 미술>(1995)에서 바젤리츠의 “위아래를 뒤바꾼 거꾸로 된 회화”를 “주제에 대한 관심을 약화시켜 표현적인 표면으로 관심의 초점을 돌리려는 장치”라고 했다. 대니얼 휠러는 저서 <20세기 중반 이후의 미술>(1991)에서 바젤리츠의 색채에 대해 “보기 드물게 충만하고 원숙한 색채”라고 격찬했으며, 그의 작품이 “풍부하나 문제가 있는 과거를 창조적으로 끌어안음으로써 다시 하나로 통합된 문화를 제시하는 르네상스적 기품과 현존”을 보여준다고 했다. 이와는 반대로 로버트 휴스는 바젤리츠를 “평범한데도 불구하고 너무 지나치게 높이 평가된 예술가의 전형적인 예”라고 평가했다.
법학을 공부하고 간헐적으로 회화 교육을 받은 안젤름 키퍼Anselm Kiefer(1945~)는 화가이며 조각가 호르스트 안테스Horst Antes(1936~), 요제프 보이스Joseph Beuys(1921~86)와 함께 공부하기도 했다. 키퍼는 초기에 개념 미술 작업을 하면서 나치식 경례를 하는 자화상 사진 연작을 제작하기도 했다. 그러나 회화로 전향하면서 신표현주의의 대표적인 주자로서 두각을 나타냈다. 그의 작품은 물감이 두텁게 칠해진 거대한 캔버스로 종종 밀짚과 같은 물질이 첨가되기도 했으며 페인트와 피가 함께 섞이기도 했다. 독일의 역사와 북유럽의 신화를 다루었고 독일의 최근 역사와 화해하려는 시도를 보였다. 1987년 로버트 휴스는 기퍼에 관해 “대서양 양편을 통털어 그의 세대에 가장 위대한 화가 ... 지난 10년 동안 상징적 시각의 명백한 위대함을 보여준 몇 안 되는 시각예술가 중 하나”로 꼽았다. 그러나 “내적인 문제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허무주의적인 공허감”을 나타냈다고 혹평한 평론가도 있다.
바델리츠와 키퍼 외에도 독일 신표현주의자들로 라이너 페팅Rainer Fetting(1949~), 외르크 임멘도르프Jorg Immendorf(1945~), 베른트 코베를링Bernd Koberling(1938~), 마르쿠스 뤼페르츠Markus Lupertz(1941~), A. R. 펭크A. R. Penck(랄프 빙클러Ralf Winkler, 1939~) 등이 있다. 이탈리아에서는 산드로 키아, 프란체스코 클레멘테Francesco Clemente(1952~), 밈모 팔라디노Mimmo Paladino(1948~) 등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피렌체 태생으로 프렌체 아카데미에서 공부한 산드로 키아Sandro Chia(1946~)는 1970년대 초에 개념 미술과 퍼포먼스를 시도했으나 1975년 회화로 복귀했으며, 1970년대 말에는 대가들의 작품을 패러디하여 영웅적인 상황을 흉내낸 장면을 설정하고 팽팽한 근육의 인물들을 등장시키는 독특한 양식을 구축하여 동시대 이탈리아 화가들 가운데 가장 잘 알려졌다. <작업 중인 용감한 소년>(1981)은 대표적인 작품이다. 로버트 휴스는 키아의 작품에 나타난 형상에 대해 “고전 조각에서 유래한 것 같은 자세로 바람을 가르면서 석탄을 운반하는 여성스러운 인부들”이라고 적었다. 키아는 또한 회화와 유사한 성격의 조각작품을 제작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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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잭슨! 잭슨! 잭슨!” 

김광우의 <폴록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잠에서 깨자 폴록은 두 여자에게 차에 타라고 말하면서 집으로 가겠다고 선언했다.
에디스는 여전히 승차를 거부했다.
“그녀는 죽을까봐 겁이 나 불안해서 울고 있었던 거예요”라고 루스가 나중에 말했다.
에디스는 그 차를 타면 저승으로 갈 것임을 예감했던 것 같은데 왜 앙탈을 부려서라도 자신의 운명을 바꾸지 못했을까.
“그녀를 이 차에 타게 해!”라고 폴록은 루스에게 명령하면서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아무데도 안 간다”고 소리쳤다.
그녀는 에디스를 달래 차에 타라고 종용했다.
에디스는 “하지만 루스, 잭슨은 취해 있어. 난 그가 운전하는 차를 탈 수가 없어”라고 말했으며, 루스는 “아냐, 취한 게 아냐. 그는 괜찮아”라고 말하면서 “우리는 집에 갈 수 있어. 약속하마. 이리로 와! 자, 타라니까!”라고 그녀의 등을 밀었다.

에디스가 뒷좌석에 타자마자 화가 난 폴록은 올드스 모빌의 액셀레이터를 힘껏 밟으며 마지막 주행을 시작했다.
에디스는 반동으로 뒤로 넘어졌고 차는 로케트처럼 달렸다.
에디스는 그만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몇 분 만에 차는 집으로 향하는 파이어플레이스 로드에 미끄러지듯이 이르렀다.
에디스는 “차 세워요. 난 내리겠어요!”라고 비명을 질렀는데 그 차는 이제 집으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저승을 향해 달리고 있었으므로 누구도 세울 수가 없었다.
오히려 그녀의 비명은 폴록이 더욱 세게 액셀레이터를 밟게 했다.

루스는 뒤를 보면서 “에디스, 흥분하지 마. 괜찮다니까”라고 그녀를 달랬지만 차가 무서운 속력으로 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공포감에 젖어 더 이상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루스에게는 차가 하늘을 날 듯이만 느껴졌다.
에디스는 울면서 “난 내리겠어! 난 내리겠어! 차 세워줘요!”라고 소리치며 일어서려고 시도했지만 바람의 저항에 못 이겨 그만 주저앉고 말았다.

왼쪽으로 약간 돌아가는 커브 길이 앞에 보였다.
폴록은 여기서는 으례 속력을 줄였는데 이번에는 그러지 않았다.
도로 커브에는 요철을 만들어 차의 속력을 줄이도록 경고하고 있었는데 속도를 줄이지 않을 경우에는 타이어가 튀어 오르게 되어 있었다.
폴록의 차는 무거운 체중으로 그것들을 치고 도로 중앙에 있는 크라운을 넘어가 앞바퀴가 그것에 닿았으며, 길 건너편으로 쏠리다가 다시 크라운을 쳤다.
차는 계속해서 춤을 추듯이 도로의 가장자리를 이리 치고 저리 치면서 시속 육칠십 마일로 질주했다.
에디스는 뒷좌석에서 머리를 아래로 처박고 운명을 기다리고만 있었고 루스는 앞좌석에 앉아 ‘이것이구나! 이제 일이 벌어졌구나! 나는 죽는구나!’라고 생각하면서 체념하고 있었다.
옆을 보니 폴록은 얼어붙은 듯이 앉아 있었다.
차는 시계 반대방향으로 돌면서 6미터를 더 나가다가 뒤집어졌다.
차가 뒤집어지면서 에디스는 차에 깔렸다.
폴록과 루스는 앞좌석에서 튕겨져나와 나무들이 있는 곳으로 나가떨어졌다.
루스만이 안전하게 떨어져서 살아남았다.

다음날 아침 아홉 시 파리에 있는 폴 젠킨스의 아파트에 전화벨이 울렸다.
그때 리는 방 건너편 발코니에 앉아 있었다.
그린버그의 전화를 받은 젠킨스가 리에게로 가서 소식을 전하려는데 리는 벌써 알고 있었다.
그 소식은 다른 사람을 통해 벌써 대서양을 건너 리에게 전해졌던 것이다.
“잭슨이 죽었어”라고 리가 먼저 젠킨스에게 말했다.
그리고 리는 비명을 질렀는데 그것은 원시적이고 가슴을 찌르는 비명으로서 마치 상처 입은 동물의 비명소리와도 같았다.
젠킨스는 그때를 잊을 수가 없다고 말했다.

리는 자신의 몸을 벽으로 내던졌고 젠킨스는 “그녀가 자신을 해하려고 한다”고 생각했으며, 순간적으로 리가 발코니에서 떨어져 폴록의 뒤를 따르는 것이 아닌가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아냐, 잭슨!”, “잭슨! 잭슨! 잭슨!”이라고 소리치면서 그가 죽음으로부터 살아오기를 요구하는 것 같았다.
리는 폭포와 같은 눈물을 흘리면서 계속 “잭슨, 잭슨, 잭슨”이라고만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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