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론적 사상에서 태동한 모방론



예술art은 그리스어로 기술craft이란 뜻의 테크네techne에 대한 라틴어 번역 아르스ars에서 유래했다.
테크네는 다양한 의미를 지닌 말이지만 현재 예술이란 뜻로 한정되었다.
테크네 본래의 의미는 경험에 근거하여 연마한 기능, 배우거나 관찰을 통해 익힌 기교, 배움의 방식, 그리고 일종의 인문학도 포함된다.
나무깎는 기술에서부터 나라를 통치하는 정치기술에 이르기까지 그 의미가 다양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언급한 인식episteme, 실천지pronesis, 지혜sophia, 이성nous, 테크네 중 하나를 말한다.1) 아리스토텔레스는 테크네를 제작poiesis의 영역에 속하는 의미로 사용했다.

테크네는 정해진 규칙 내에서 이성적으로 익히거나 연마하여 인공물을 생산해내는 것이다.
이성적이란 말은 올바른 동기나 자연의 보편성을 따라서 제작되었다는 뜻이다.
여기서 자연을 ‘생산하다’라는 뜻으로 받아들인 그리스인이 자연을 모델로 삼아 그와 유사한 것을 생산했음을 의미한다.
이렇게 보았을 때, 예술은 자연을 패러다임으로 삼고 자연이 정해주는 규칙 내에서 자연과 동일한 방법으로 인공물을 생산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의미로서의 예술이란 말은 고대 그리스인에게 없었다.
그들은 기술이란 말을 사용했으며 사물의 이미지를 모방mimesis하는 숙련된 방법을 뜻했다.5)
그리스어 미메시스는 라틴어로 이미타티오imitatio인데 어원이 불확실하다.
바카스 숭배의식 및 신비와 더불어 비롯했다는 설이 유력하며 이를 뒷받침하듯 모방의 의미로서의 미메시스는 사제가 행하는 숭배의식 무용, 음악, 노래 등을 가리켰다.
이 말은 기원전 5세기경 외면세계의 재생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데모크리토스Democritus(BC 460-370)는 예술이 자연을 모방한다면서 말했다.


“인간은 가장 중요한 기능을 동물에게서 배운다.
예컨대 거미로부터 천짜는 법을, 백조와 밤꾀꼬리로부터는 모방의 방식에 기초한 노래를 배운다.”


그리스인이 어떤 인공물이 아름답다고 판단하는 것은 그 인공물이 실재를 완벽하게 모방했거나 혹은 만족할 만큼 모방했음을 뜻했다.
어떤 인공물을 보고 경이롭다거나 훌륭하다고 감탄할 때 이는 그리스인에게 완벽하게 모방했다는 뜻과 같으므로 그러한 맥락에서 미적 판단을 내릴 수 있었다.
사람이 제작한 생산품을 각기의 원형이나 형상을 모방한 것으로 간주했으므로 플라톤Plato(428-348 BC)이 회화, 극시, 노래를 모방으로 간주한 것은 당연해 보인다.
중세 격언에 “아름다운 것과 완전한 것은 동일하다”라는 말이 있는데 그리스인의 미메시스 개념이 중세에까지 이어졌음을 알게 해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아상블라주



아상블라주Assemblage란 말은 1953년 장 뒤비페(1901~85)가 종이로 콜라주한 판에서 찍어낸 일련의 석판화에 붙인 명칭으로 입체주의 콜라주보다 더 많은 물질을 부착하는 작품을 지칭했다. 그는 1954년 이 명칭을 풀 먹인 딱딱한 종이, 나무토막, 스펀지 등의 여러 파편으로 작은 형상을 만드는 기법에도 확대 적용했다. 그는 콜라주는 1912년부터 1920년경까지 종합적 입체주의 시기에 피카소와 브라크가 풀로 붙여 제작한 작품에만 적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1954년 리브 고슈 화랑에서 신문, 벽돌, 금속조각 등 버려진 물질들을 쌓아 만든 소형작품들로 전시회를 열었다. 1956년 얇은 금속조각, 나뭇잎, 말린 꽃, 나비 날개 등이 결합된 채색된 캔버스에서 잘라낸 작은 조각들로 이루어진 아상블라주 전시회를 열었다. 뒤비페는 아름다움과 추함을 구분하는 어떤 가능성도 부정함으로써 1960년대 정크 아트와 팝아트가 나올 수 있는 미학적 조건을 마련했다.
정크 아트와 아상블라주를 명확하게 구분지을 수는 없는데, 정크 아트 예술가들은 종종 폐품 같은 것들을 조립하여 표현적인 구성물을 제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상블라주는 표현적인 목적을 위해 비미술적인 재료를 3차원의 조각적인 구성물 안에 모으거나 결합시키는 작업을 하는 예술가들을 위한 용어이다. 그들의 작업은 회화에 있어서 추상표현주의와 유사하게 취급되는 용접 조각에 대한 반발에서 나온 것이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표현적인 목적을 지녔기 때문에 표현적인 추상 조각의 제2 세대로 여겨진다. 아상블라주를 제작하는 많은 조각가들은 팝아트 정신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으며, 팝아트 전통에 속한 아상블라주는 버려진 물질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데 정크 아트와 구별되어야 한다.
아상블라주, 상황 미술, 환경 미술, 타블로 등의 용어는 분류를 목적으로 할 때는 비교적 느슨하게 사용되고 있으며, 사용하는 사람들마다 약간씩 다른 의미를 지니기도 한다. 어떤 분류 기준을 사용하든 간에 한 예술가의 작품은 여러 범주에 속하게 됨을 볼 수 있다. 여기에서 아상블라주는 여러 재료로 구성된 작품들과 다양한 오브제가 상자 같은 것에 모아져서 동시에 전시되는 타블로를 지칭하는 데 사용되었다. 아상블라주는 팝아트, 표현주의 미술, 정크 아트 혹은 펑크 아트의 범주에 속할 수도 있다. 이런 것들은 추상적일 수 있지만 사실적일 수도 있다.
아상블라주란 명칭은 1961년 뉴욕 모마에서 개최한 ‘아상블라주’ 전시회에서 채택되었다. 이 전시회에는 종합적 입체주의를 비롯하여 미래주의, 다다,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이 제작한 콜라주와 작은 구성작품, 마르셀 뒤샹의 레디메이드, 코넬의 상자 구성작품, 드 쿠닝, 엔리코 바이(이탈리아 화가), 머더웰, 라우센버그 등이 제작한 콜라주, 알베르토 부리의 거친 삼베를 부착한 그림, 네벨슨, 탱글리, 스탕키에비치, 장 크로티(스위스계 프랑스 화가로 뒤샹 여동생의 남편)의 조각작품, 세자르의 압축된 자동차 집적물, 키엔홀츠의 타블로 작품 등 다양한 양식과 화파를 폭넓게 보여주는 오브제 작품들이 전시되었다.(워홀 31, 54, 60, 뒤샹 279) 아상블라주라는 명칭이 이처럼 폭넓게 확대 해석되고, 공통된 특징이 거의 없는 별개의 다양한 오브제 작품들에 적용되자 상대적으로 이 명칭의 유용성은 감소했다.
윌리엄 세이츠는 새로운 예술로 부상한 아상블라주에 관해 정의했다.
“색을 칠하거나 드로잉하거나 깎거나 모방하기보다는 전적으로 조립하며, 전체 또는 부분적으로 이미 형태를 갖춘 물질이나 공장의 생산품 또는 예술적 재료가 아닌 것들을 예술품의 요소로 사용하는 구성예술을 말한다.”
‘아상블라주예술’ 전시회 이후 이 명칭은 점차 다양한 오브제들을 모아 상자 같은 것에 담아놓은 작품에만 보다 엄격하게 제학 적용되기에 이르렀다. 이를 두 가지로 분류하면 슈비터스의 콜라주 개념을 3차원으로 확장시킨 라우센버그의 콤바인회화와 뒤샹의 레디메이드 개념을 확장시킨 아르망의 집적작품이다.
쿠르트 슈비터스(1887~1948)의 작품은 당시 콜라주로 불리었지만 아상블라주의 선구적인 작품으로 볼 수 있다. 허버트 리드가 “콜라주의 최고 대가”라고 극찬한 슈비터스는 드레스덴 아카데미에서 수학하고, 초기에는 표현주의 양식으로 작업했지만 후에는 표현 자체가 미술의 주된 목적이 되는 것에 반대했다. 칸딘스키의 영향을 받았으며 1918년에 베를린의 슈투름 화랑에서 개인전을 열었다.(뒤샹 230) 입체주의 방법을 받아들여 그는 콜라주 작품을 주로 제작하면서 시를 콜라주 방법으로 쓰기도 했는데, 차라와 브르통의 자동주의와 견줄 만했다. 리드가 “제임스 조이스에 필적하는 시인”으로 묘사한 슈비터스는 시에서 동사를 명사로도 사용했으며, 이런 말장난은 뒤샹의 관심사이기도 해서 그는 동갑내기 뒤샹과 교류하기도 했다.
슈비터스는 1918년부터 버려진 물질들인 버스표, 담배껍질, 우표, 극장표, 잡지, 못, 머리카락, 낡은 상품 카탈로그, 끈 등을 사용하여 콜라주로 회화적 구성물로 구축했는데, 그의 작품은 서정적이며 시적 느낌을 주었다.(뒤샹 231) 제1차 세계대전 후 하노버에 정착한 그는 1919년에 <메르츠>를 창조했다. 이 제목은 우연히 발견된 것으로 상업편지에 써 있는 상업-민영 은행Commerz-und Privatsbank에서 가운데 글자 merz만 딴 것이다. 그는 닥치는 대로 수집한 종이들을 콜라주로 구성한 후 <메르츠 회화>라고 명명했다. 그는 미술을 전통적 소재와 기법으로부터 자유롭게 하고, 이상적 혹은 사회적 동기에서 표현을 추구하는 것으로부터 해방시키려고 했으며, 이런 시도로 도시 문명의 잔해를 이용하여 새롭고 독특한 형태의 콜라주를 구성했다.
슈비터스는 1923년부터 하노버에 있는 발트하우스슈트라 5번가의 자신의 집에 <메르츠 빌딩>(뒤샹 232)을 건축하기 시작했다. 1932년 창립 당시 그가 가입한 추상-창조 그룹의 잡지는 메르츠 빌딩 조형물 사진을 소개했다. 이 구성물은 점차 석고와 나무로 만들어진 뼈대를 이루게 되었고 내부는 미로와도 같았다. 슈비터스는 자신의 주위에서 일어나는 삶과 관련된 물건들을 건물 내부로 구성했다. 그것은 그 자신의 말대로 “입체주의 회화 또는 고딕 건축”을 연상시킬 만큼 날카로운 각도와 선명한 형상을 지닌 엄정한 의미의 건축물이 되었다. 그의 집은 1943년 연합군의 폭격에 의해 파괴되고 사라졌다. 그는 시인친구가 쓰다 버린 연필도 주워다 집안에 장식했고, 장 아르프의 아내 소피가 사용한 브래지어도 있었다. 그는 1923년부터 1932년까지 <메르츠>란 잡지를 간행하는 데 전력했다.
정규 미술교육을 받지 않았지만 낭만적 혹은 빅토리아풍의 옛 물건들이 담긴 ‘상자’ 작품으로 유명한 조셉 코넬(1903~73)은 버려진 물질들을 개인적인 상자 안에 배열하는 방법으로 물질들에서 시와 노래 그리고 향수를 찾아냈다.(워홀 52) 그의 ‘상자’는 구성주의의 형식적 엄격함과 초현실주의의 생동감 있는 환상이 조화를 이룬다. 코넬은 슈비터스와 마찬가지로 평범한 것에서 시를 만들어내는 재능을 시위했다. 그가 상자 안에 자신이 원하는 물질들을 적절하게 넣음으로써 물질들은 더 이상 원래의 물질이 아니라 시인이 선택한 물질이 되어 사람들에게 미학적 경험을 하게 했다. 그러나 슈비터스와 달리 폐기물이나 쓰레기가 아니라 한때 아름답고 소중했던 물건들의 파편에 매료되었으며, 이를 초현실주의 기법을 이용하여 불합리하게 병치시켜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코넬이 유리를 부착시킨 상자 안에 낯선 물질들을 배열하기 시작한 것은 1930년대 중반이었다. 초현실주의의 상투적인 개인적 꿈의 세계를 보여주는 그의 상자 안에는 오래된 사진, 지도, 때로는 르네상스 시대의 그림과 19세기 미국사람들의 그림도 들어 있었으며 깨진 유리조각, 코르크 공, 쇠 조각 등 다양한 물질들이 배열되었는데 그의 어린시절과 그에게 감동을 준 문학과 예술을 뜻했다. 상자 안에 잃어버린 어린시절과 그것을 그리워하는 꿈이 갇혀 있는 그의 작품은 사람들로 하여금 추억과 꿈을 상기하게 했다. 그가 사용한 물질은 팝 물질이었으므로 그를 팝아트의 선구자라고 말하는 평론가들도 있다. 1950년대 중반 물질들을 콜라주한 라우센버그와 존스도 코넬로부터 받은 영향을 부인하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본격적으로 아상블라주 작업을 한 리처드 스탕키에비치(1922~83)는 뉴욕 태생으로 한스 호프만의 학교에서 수학하고 파리의 페르낭 레제의 화실과 자드킨 조각 학교를 다닌 뒤 1950~51년 조각으로 전환했다. 스탕키에비치는 용접된 금속조각을 전문적으로 제작했으며, 뉴욕으로 돌아온 뒤 1950년대 초에는 자투리 금속조각들과 오래되고 낡은 기계류 등을 사용하여 조각 작품을 제작한 최초의 예술가 중 하나가 되었다.(워홀 53) 그는 1951년 어느 날 맨해튼에 있는 자신의 화실 뒷마당을 파다가 벽돌과 녹슨 쇠파이프를 발견했다. 그는 그것들을 한참 들여다보다가 용접하여 조각의 부분으로 사용했는데 아상블라주의 시작이었다. 도시의 사실주의 요소라 할 수 있는 이런 아상블라주는 도시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문명의 찌꺼기이다. 1951~52년에는 피카소와 콘잘레스의 전례를 따라서 미국의 대표적인 조각가 데이비드 스미스와 함께 녹슨 쇠 조각들을 용접했으며 이런 경험으로 버려진 쇠 조각들을 용접하여 조각을 제작하는 가능성을 시험하게 되었다. 이후의 작품은 순수하게 추상적인 구성으로 변했고, 1960년대에는 점차 밝고 서정적으로 진전되었다. 1970년대에는 다시 양식적 변화를 맞아 망치로 두들긴 원과 사각형의 강철들이 서로 맞물리는 추상 구성으로 전환했다. 1997년 4월과 5월 맨해튼에 있는 상업화랑 자브리스키에서 스탕키에비치 회고전이 열렸을 때 사람들은 그가 아상블라주의 선구자였음을 새삼 인식했다.
러시아계 미국 조각가 루이즈 네벨슨(1899~1988)은 1905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1929~30년 아트 스튜던츠 리그에서 본격적으로 미술공부를 했으며, 뮌헨에서 한스 호프만의 지도를 받았다. 그녀는 1950년대 말부터 제작하기 시작한 ‘조각된 벽’으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이것은 많은 상자와 칸막이들로 이루어진 벽 형태의 부조로, 상자와 칸막이들은 의자다리, 금속조각, 난간조각, 꼭대기 장식과 같은 일상의 사물, ‘발견된 오브제’들이 모여 추상적 형태를 이루었다. 이 구조물은 균일한 검정색, 후에는 흰색이나 황금색으로 채색되었는데, 형태의 우아함과 닫힌 형식의 진부함이 강한 대조를 보여준다. 1960년에 제작한 <결혼 예배당 IV>(워홀 54)은 수십 개의 나무상자들이 있는 벽으로 상자 안에는 수백 개의 물질들이 배열되어 있다. 그녀는 가구 일부를 잘라 사용하거나 폐허가 된 집에서 물질을 구하여 재료로 삼았다. <벽> 시리즈의 경우 주위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물질들이 각 상자 안에 가득 들어 있다. 그녀는 주위에 널려 있는 각종 작은 물질들을 배열하고 그것을 모두 동일한 색으로 칠하여 입체적 구성감각이 모두 제거되도록 했다. 수십 개의 나무상자들이 있는 벽을 제작하고 상자 안에는 수백 개의 물질을 배열했는데, 이런 작품들로 아상블라주와 환경조각의 기수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사회과학과 인문과학은 19세기 말까지 

 

 

사회과학과 인문과학은 19세기 말까지 정치와 사회를 연구하고 그것을 합리적인 조직으로, 따라서 심지어는 만들어낼 수 있는 조직으로 해석하기 시작했다.
이 분야의 가장 창조적인 정신 가운데 하나인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1864-1920)의 저작은, 비록 중국 문화와 인도 문화 같은 다른 문화들을 유럽이 설정한 근대성의 기준에 의해 연구하고 은연중에 평가하기는 했지만, 사회적·문화적 과정들에 대한 통찰에 있어 아직도 기념비적 업적으로 남아 있다.47)
사회사적 자료의 경험적 근거를 마련하고, 당대 사회의 문제들을 설명하는 데 부분적으로 성공했다는 점에서, ‘사회공학’에 관한 역사상 가장 이론적인 이러한 아이디어들은 이 세계를 현재의 곤경과 결함으로부터 해방시킬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 즉 사회주의적 정치가들과 사회민주주의 사상가들은 물론이고 다분히 전체주의적 성향의 인사들에게도 확실한 증거를 제공하는 것처럼 여겨졌다.
효과적인 관료 제도를 가진 근대국가는 합법적인 폭력 ― 사법과 처벌, 군대의 사용 ― 을 행사할 권리를 수중에 장악함으로써 사적 폭력을 대부분 제거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러한 국가는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감각을 상실한 민주주의 시대에 무슨 정책이든 시행하기 위한 고도의 정밀도구로 사용될 수도 있었다.


수많은 가능성을 지닌 유럽에서 1차 세계대전의 승전국과 패전국들 모두의 이기주의는 만족할 만한 균형, 즉 불만과 전쟁의 불씨가 제거된 국제질서를 만들어내지 못한 원인이 되었다.
대다수 국가에서는 다양한 집단의 얄팍한 이해관계 때문에 유권자들이 사회 전반, 특히 약자들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는 상황에 이를 수 있었고, 때로는 실제로 그런 상황에 도달하기도 했다.
이제 유럽의 대중은 아주 사소한 계기만 있어도, 비효율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전통적인 가치들과 결별하고, 보다 거창한 가치를 약속하는 다른 이념에 의지하는 데 ― 이것도 유럽적 전통의 일부였다 ― 열중했다.
그 결과 민주주의와 관용이 사라진 자리에 독재와 탄압이 들어섰다.
대체로 이러한 일은, 전통적으로 보다 위계적인 예전의 농촌사회를 얇은 베니어판처럼 덮고 있는 산업화와 교육과 민주주의가 상대적으로 뒤늦게 이루어진 나라들에서 보다 쉽게 일어났다.48)


지금도 그 작품들이 유럽 문화에 영감을 불어넣고 있는 숱한 음악가와 화가, 과학자와 작가들을 배출함으로써 19세기 말까지 여러 면에서 유럽의 가장 문명화된 나라들 가운데 하나였던 독일은 위에서 언급한 모든 전제조건들을 동시에 구비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이 독일에서 사상 가장 잔혹하고 효율적인 전체주의 체제인 ‘제3제국’과 ‘궁극적 해결책’이라고 불리는 유태인 말살정책이 탄생한 것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49)
이른바 홀로코스트 ― 이 말은 원래 유대교에서 신에게 동물을 통째로 구워 희생물로 바치는 제사를 뜻하므로, 엄청난 규모의 대량학살에는 맞지 않는다 ― 로 유럽 전역의 유태인뿐만 아니라 흑인과 집시, 동성애자, 정신질환자 등 수백만 명이 죽었다.
이러한 사람들은 모두 체제가 획일성과 절대 복종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 도살되었으며, ‘타자’로 낙인찍힐 수 있는 사람들 가운데서 희생자로 선택된 것이었다.
어떤 점에서 나치 독일의 지도자들은 1천여 년 동안 유럽 문화의 일부였던 ‘이방인들’에 대한 편견을 이용했지만50), 20세기에 그들은 이를 시행하기 위해 그들의 인종주의 이데올로기에 사이비 과학적 전문용어를 갖다 붙이는 동시에 선진 기술과 근대국가의 관료기구 같은 근대성의 도구들을 이용할 수 있었다.51)


그렇지만 이에 필적하는 전체주의적인 견해들이 다른 곳에서도 대두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인간과 사회에 대한 새로운 사상인 인본주의와 르네상스의 발상지인 이탈리아에서는 1920년대 초부터 파시스트 독재가 20여 년 간 지배했고, 무솔리니 시대의 막판에 가서이긴 하지만 인종주의 정책의 매력에 굴복하고 말았다.
또한 프랑스와 스페인에서도 분명한 전체주의적 경향에 뒤이어 희생양 이데올로기들이 나타났고, 때로는 프랑스와 다른 중유럽 국가들에서 보듯이 반유대주의의 모습으로 표면화되기도 했다.
벨기에와 영국, 네덜란드, 그리고 서유럽의 거의 모든 나라에서는, 중유럽과 동유럽에서와 마찬가지로 민주주의 원칙들을 거의 무시하거나 완전히 무시하는 강력한 지도체제를 옹호하는 집단들이 있었다.


요컨대, 유럽 전역에서 선·악의 가능성을 모두 가진 ‘근대성’의 복합 문화가 등장했고, 이것이야말로 어떻게 민주주의에서 독재가 탄생하고, 객관적으로 보면 역사상 가장 잘 교육받고 번영을 구가한 사회에서 전쟁과 대량학살이 자행되었는지를 설명하는 열쇠인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잭슨 폴록, 스텔라는 친지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잭슨 잭슨이 죽은 것은 충격이었고 … 그는 갔으며 우리는 그를 부를 수가 없습니다.
그의 인생은 끝났고 그는 편히 쉬고 있는데 우리는 그를 잊을 수가 없군요.


자식이 사망하고 2년이 채 안 된 1958년 4월 20일 스텔라는 아이오와 주에 있는 그레스톤 병원에서 타계했다.
병원에 기록된 사인은 다리에 피가 제대로 통하지 않아서였다지만 그녀의 장례식에서 폴록의 네 형들은 그녀가 음식 먹기를 거부하더니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말했다.
“잭슨이 사망하고 어머니는 더 살기를 거부했다”고 큰 형 찰스가 말했다.

얼마 후 리는 그림을 그리려고 했으나 폴록의 그림들이 걸려 있는 집, 폴록이 곧 술에 취한 채 나타날 것만 같은 상황에서 도저히 그림을 그릴 수가 없었다.
리는 뉴욕에 아파트를 얻고 그곳에서 2년 동안 지내면서 그림을 그렸다. 그 후 리는 폴록의 화실을 그녀의 화실로 사용하면서 살다가 1984년 6월 20일에 세상을 떠났다.
그 집은 지금 ‘폴록-크래스너 미술관’으로 지정되어 있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예술가들은 홀연히 이 땅을 떠나지만 예술은 흐르는 강물과 같아서 누구에 의해 멈추지는 않는다.
생존하는 예술가들은 그들이 이 땅을 떠날 때까지 예술을 실천한다.
폴록이 사망하던 해 1956년 12월 19일부터 다음해 2월 3일까지 모마에서 그의 회고전이 열렸으며 1967년 4월 5일부터 6월 4일에도 열렸다.
1960년대에 그는 20세기 미국회화의 가장 중요하고 영향력 있는 예술가로 인정되었고 그가 떠난 후에도 해마다 그의 크고 작은 전시들이 세계 곳곳에서 열리고 있다.

홀로 위대한 예술가로 남은 폴록의 위대한 적 드 쿠닝은 세계인으로부터 찬사를 받으면서 아직도 아흔세 살의 나이로 생존하고 있다.
그의 회고전이 1994년 워싱턴 국립 화랑과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에서 열렸으며, 1995년에는 런던의 테이트 갤러리에서 열렸다.

이 글을 마무리하는 1997년 2월에도 뉴욕 모마에서 그의 대규모 회고전이 열리고 있다.
1981년부터 드 쿠닝의 나이 여든세 살인 1987년까지 그린 그림들이 소개되고 있는데 그 이후에는 그림을 그리지 않고 있다.
말년에 그린 작품들은 선, 색, 형태의 잔치를 보여주는데 그의 색조는 엷어서 사람들의 민감한 감성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며, 회화의 가장 기본적인 문제에 대한 대가의 노련한 의견처럼 보인다.
액션 페인팅을 창조한 몇몇 예술가들 가운데 한 사람인 그의 그림에는 여전히 빠른 붓질은 남아 있지만 충동과 자극을 배제하면서 회화의 무거운 짐을 벗어버리고 유연한 자세로 생의 리듬만을 생각하는 것 같다.

우리의 폴록이 살아 있었다면 지금쯤 어떤 그림을 보여주고 있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아르테 포베라



이탈리아에서 발생한 아르테 포베라Arte Povera는 같은 시기에 미국에서 유행한 상황 미술과 개념 미술 및 일부 미니멀 아트와 유사한 미술 운동이다. 평론가 제르마노 첼란트가 1970년에 토리노 시립 뮤지엄에서 ‘아르테 포베라’ 전시회를 기획하면서 처음 이 명칭을 사용했다. 그는 이 운동에 대한 기초 책을 편집 간행했다. 아르테 포베라는 전통적인 미술 형식이나 도상의 사용을 거부하며 조직화되지 않은 해프닝을 이 미술의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는 표현 방식으로 보았다. 첼란트는 아르테 포베라에 관해 적었다.
“아르테 포베라는 주로 미술 매체의 물질적인 속성 및 미술 재료의 변하기 쉬운 성질과 관련이 있는, 근본적으로 반상업적이고, 불안정하며, 평범하고, 반형식적인 미술을 표방한다. 이는 실제의 재료들과 전체 현실에 대한 예술가들의 참여를 중시하며, 또 그런 현실을 비록 이해하기는 힘들다 하더라도 민감하고 지적이며 교묘하고도 사적인 강렬한 방식으로 해석해내려는 예술가들의 시도를 강조한다.”
레나토 바리리는 1971년 <오퍼스 인터내셔널 Opus International> 지에 기고한 글 ‘토리노 시립 뮤지엄전에 고나해’에서 적었다. “아르테 포베라는 도상을 거부하는 동시에 가장 관습적인 표현 방식이 되어온 물감을 칠한 캔버스도 거부한다. 대체로 아르테 포베라는 ‘산물’ 혹은 ‘작품’이라는 개념을 거부하고 제작과정을 거쳐 나온 결과 대신 작품이 되어가는 과정 자체를 제시한다.”
아르테 포베라의 대표적인 예술가는 미켈란젤로 피스톨레토, 마리오 체롤리, 마리오 메르츠 등으로 그들은 자연 그대로의 쓸모없는 재료로 미술작품을 제작했다. 비엘라 태생으로 토리노에서 공부한 후 1957년까지 미술품 복원가인 아버지의 조수로 일한 미켈란젤로 피스톨레토Michelangelo Pistoletto(1933~)는 아르테 포베라의 창시자 중 하나로 처음에는 뉴 리얼리즘 양식으로 그림을 그렸고 1962년에 시작한 ‘거울 회화’로 유명하다. 피스톨레토는 대체로 정지 동작의 실물 크기 인물 사진을 얇은 반투명지에 베긴 다음 윤곽선을 따라 인물을 오려내어 광택을 낸 얇은 강철판에 붙인 뒤 어두운 색조로 그림을 마무리하고 형상 주변의 관람자의 모습이 비칠 수 있는 위치에 철판을 놓았다. 이는 사진 이미지에 움직이는 관람자의 이미지를 끌어들여 그림 속에 관람자를 포함시키는 시도였다. 그는 지각의 두 단계, 즉 금속 표면에 비친 끊임없이 변화하는 그림자와 그림 속의 정적인 인물을 다루는 체계를 만들어내는 데 관심이 있다고 말했다.
1949~55년 로마 미술원에서 공부한 조각가 마리오 체롤리Mario Ceroli(1938~)는 포장 사자에서 얻은 거칠고 두꺼운 판자로 도시나 사람들의 이미지를 만드는 ‘사물-조각’을 시작했다. 1960년대 후반 아르테 포베라 경향을 좇아 거친 목재와 포장 상자로 전화기와 같은 공산품을 확대한 복제품을 조립했다. 또한 안과 겉을 모두 볼 수 있는 새장과 같은 구조물도 제작했다.
평론가 질로 도르플레스는 1970년 아르테 포베라에 관해 “서양 현대 미술사에서 플라스틱이나 금속 등 새로운 재료를 극도로 세련되게 사용한 경향에 대한 반작용으로 생겨난 최근의 경향”이라고 적었다. 그는 선구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그리스 예술가 블라시스 카니아리스Vlassis Caniaris(1928~)를 꼽았다. 아테네 태생으로 의학을 공부한 뒤 1955년 아테네 미술학교에서 미술 공부를 마친 카니아리스는 1956년 로마로 갔고, 1960년 파리에 정착했다. 1960년 낡고 찢어진 폴리에스테르 헝겊조각들로 이루어진 그의 전시회는 아르테 포베라를 예고했다. 1960년대 초 아테네 집들의 담벼락에 뉴 리얼리즘 양식으로 일련의 회화 시리즈를 제작했는데, 이는 그리스의 정치적 불안을 상징하는 정치성 짙은 선전문구들로 가득 차 있었다. 1967년 그리스로 돌아갔지만 정부의 강제수용소를 상징적으로 비난하는 내용의 선동적인 전시회로 인해 조국을 떠나야 했다. 1973년 외국 작가들과 관련된 연구 계획에 참가하기 위해 독일 학술 교환 서비스의 ‘배를린의 예술가들’ 프로그램에 초대되었으며, 1975년 ‘이주자들’이라고 명명된 ‘상황’ 전시회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1970년대에 아르테 포베라를 추구한 일부 예술가들이 정치적인 참여 미술을 지향하는 설치 작업으로 전환했는데 그 결과는 난해하고 모호한 것이 되고 말았다. 1980년 베른에서 열린 ‘논쟁과 통합’ 전시회는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 전시회 카탈로그의 서문에는 “이탈리아, 나아가 유럽의 지배적인 정치적, 문화적 상황에 대해 미술을 수단으로 한 예술가들의 반동이요 비판이며 응답인 이 전시회는 ‘강령’이자 ‘선언’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쓰여 있었다. 루치아노 파브로Luciano F뮤개(1936~)는 커다란 흰색 탁자보 위에 수많은 맑은 유리알들이 가득 들어 있는 거대한 유리잔을 전시했다. 이것은 전시 작품 중 유일하게 작품에 대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던 설치 작품으로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접시에 담아 내게 가져와라>라는 제목이 붙어 있었다. 수많은 유리알은 소크라테스로부터 파솔리니에 이르는 역사의 희생자들을 상징한 것으로 설명될 수 있다. 마리오 메르츠Mario Merz(1925~)는 덩굴다발, 기둥, 얇은 알루미늄 조각으로 포장한 흙, 가는 가죽끈, 맥주병, 네온관으로 만든 아치 등 갖가지 재료로 ‘공간-오브제’를 제작했다. 또 다른 빈 방에는 그리스 예술가 야니스 쿠넬리스가 고대 인물을 본뜬 두상을 배치해놓고 일정한 간격을 두고 불을 지펴 사방의 벽을 밝히고 있었고 그 불에서 그름 자국을 얻어내려고 천장 아래에 18개의 작은 금속판들을 설치했다.
피라이우스 태생으로 1956년 로마에 정착하여 아카데미에서 수학한 야니스 쿠넬리스Jannis Kounellis(1936~)는 그리스로는 거의 돌아가지 않았다. 초기에는 글자, 숫자, 기호를 스텔실 기법으로 찍어 그림을 그렸다. 1960년대 중반에 회화를 그만두고 1967년에는 아르테 포베라 운동에 가담했다. 쿠넬리스의 특징적인 작품은 여러 가지 재료와, 때로는 살아 있는 동물을 이용한 설치 작업이었다. ‘20세기 이탈리아 미술’ 전시회 카탈로그에는 쿠넬리스에 관해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비구상 계열의 네오-아방가르드 예술가들 중 가장 복합적이고 시적인 재능을 지닌 예술가로 꾸준히 서장하고 있으며, 1960년대와 1970년대의 미술에서 가장 중요한 작품을 제작한다. ... 쿠넬리스는 미술품, 심지어는 전시회에 대한 전통 개념에 도전함으로써 그 자신이 ‘무력한 양식’이라고 부른 것을 지속적으로 거부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