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혁명의 뒷이야기

 
프랑스 대혁명의 밑거름이 된 루소의 사상 

 

18세기 중반까지 유럽 사람들이 군주의 압정에 시달리면서도 군주제 자체를 반대하지 못한 이유는 군주를 신격화한 아주 오래된 관습때문이었다.
가장 지성적으로 발달한 철학자, 예술가 계층조차도 정치적으로 온건한 태도를 취하면서 군주제를 지지했다.
관습보다는 이성을 중시한 장 자크 루소는 일찍이 전제군주에 반대하고 철학자들이 부패했다면서 그들과 거리를 두었다.
그는 <학문과 예술을 위한 논문>으로 1750년 디종 아카데미로부터 최우수상을 받았는데 학문과 예술을 회복하는 것으로 도덕을 정화시킬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다룬 것이다.
그는 논문에서 특히 예술과 문학을 공격하면서 이 분야의 사람들이 부자와 권력자들의 사슬에 묶인 노예가 되었고 정치적으로 이용당하는 도구가 되었다고 비난했다.
루소는 자신의 주장을 유럽의 모든 군주제에 적용했다.
그의 논문은 발표 후 특히 3년 동안 과격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좀더 진전시키면서 돈을 목적으로 하는 군대체제를 비판했으며 국민의용군의 조직을 옹호했다.
이 시기에 루소는 음악에도 관심이 많아 디드로와 달랑베르가 편집한 <백과사전>에 음악에 관한 이론을 실었다.
1752년에 오페라 <동네 점쟁이>를 작곡했고 이 작품은 처음으로 퐁텐블로 궁에서 소개되었으며 매우 성공적이었다.
이튿날 루소는 루이 15세에게 장려금을 받기로 되어 있었지만 거부했다.
그의 작품은 이탈리아에서도 소개되는 등 매우 대중적이었지만, 프랑스 음악과 전제주의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1753년 경찰의 감시대상이 되었다.
그해 루소는 디종 아카데미가 제시한 문제, 인간 불평등의 기원과 이것이 자연법에 따른 것인지에 관한 논문을 통해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피력하였다.
그는 <인간 불평등의 기원에 관한 논문>(1755)에서 인간의 자연적 상태를 가정하면서 인간의 타고난 능력이 동일하지 않더라도 평등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동물과 마찬가지로 인간도 서로가 서로를 피했으며 각각 떨어져 살았기 때문에 인간이 인간에게 종속되는 일은 없었다는 논리를 폈다.
루소에 의하면 지리적 지각 변동으로 인해 인간이 함께 모여 살았는데 이것이 여러 신화에 인간의 '황금기 golden age'로 설명되어 있으며, 인간은 원시사회를 이루면서 사랑, 우정, 노래, 춤의 즐거움과 질투, 증오, 전쟁의 고통 등의 감정을 겪으면서 선과 악을 배우게 되었다는 것이다.
철과 밀의 발견이 인간 진화의 세 번째 단계가 되었으며 인간은 자신의 재산의 필요성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
루소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철과 밀이 인간을 문명화시켰고 또한 인간의 종족을 파멸시켰다. ...
땅을 경작하면서부터 필수적으로 계층이 생겨났고 ...
재산을 상속하는 경우가 허다해지고 이윽고 세상 전체에까지 만연되어 서로가 서로의 땅에 경계를 만들고 상대방의 땅을 빼앗게 되고 ...
미성숙된 사회는 가공할 만한 전쟁을 야기시켰다."
루소는 전쟁의 시기에 지주들이 자신들의 재산을 보호하는 법을 제정한 것으로 보았다.
루소는 원시사회에서의 자연적인 인간 평등을 회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지만 디드로의 요청으로 <백과사전>에 기고하였고, 1755년에 따로 발표한 <시민론: 경제 정치를 위한 논문>에서 사회적 불평등으로 빚어진 불의를 최소화하는 방법을 모색했다. 그는 세 가지를 제안했다.
1. 정치적 권리와 의무의 평등, 즉 부유층이 어떤 사람의 자유나 삶을 침해할 수 없는 '일반 의지 general will'를 존중할 것.
2. 국가를 위한 계발의 의미에서, 그리고 고대 스파르타에서와 같은 준엄한 도덕을 위해 모든 아이에게 공공교육을 시킬 것.
3. 상속재산과 사치품에 부과하는 세금과 공공재산의 자원을 혼용해 경제적, 금융적 체계를 만들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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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화에 대한 자크 루이 다비드의 열정

 

자크 루이 다비드는 1748년 8월 30일 파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문에서는 프리메이슨Freemasons(중세 석공의 숙련공 조합원)과 건축가가 속속 배출되었다.
다비드의 아버지 루이 모리스는 귀족들이 사용하는 브레이드, 리본, 레이스, 주름장식 등을 제조하는 사업을 했다.
어머니 마리 제네비에브 부롱은 벽돌공이며 건축업자의 딸이었다.
루이 모리스는 사업이 번창하자 당시 새롭게 부상한 철 도매업에도 투자했다.
그는 돈을 주고 말단 공무원직을 샀는데 18세기 프랑스에서는 흔한 일이었다.
루이 모리스는 이런 품위를 갖추는 생활에 매우 만족해 했다.
그는 1757년 12월 2일 칼바도스를 여행하던 중 피스톨 결투로 31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왜 결투를 하게 되었는지에 관해서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9살에 아버지를 여윈 다비드는 외삼촌 프랑수아 부롱과 이모부 자크-프랑수아의 보살핌을 받고 자랐는데 보호자 두 사람 모두 목수, 건축가, 건설업자였다.
부롱가는 18세기 후반 파리의 급격한 건설붐을 타고 많은 돈을 벌었다.
다비드는 기숙사가 딸린 학교에 보내졌고 마지막 학년을 쾨트르-나시옹 대학에서 마쳤다. 학문적으로 명문인 이 대학은 라틴어를 완전하게 구사하도록 가르쳤고 그리스사와 로마사를 중점적으로 가르쳤다.
다비드는 우수한 학생이었으므로 고대사와 영웅들에 관해 충분히 배워 알고 있었지만 학자로서의 자질은 없었다.
훗날 그는 모교를 두 번 방문할 일이 있었는데 한 번은 1796년 죄인의 몸으로 갇힐 때 감옥으로 사용되었고 다음은 10년이 지난 후 영예로운 아카데미 회원으로서 방문했는데 그 시기 이 대학은 프랑스 아카데미의 온상이었다.
어머니는 다비드가 군인이 되어 가문을 빛내주기를 바랐고 보호자인 외삼촌과 이모부는 건축가가 되기를 바랐지만 보통의 부르주아 출신 젊은이답지 않게 그는 하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다비드는 훗날 자신에 관해 적었는데 자신을 삼인칭으로 지칭한 것이 흥미롭다.
"그는 아주 어렸을 적부터 드로잉에 열심이었다. ...
회화에 대한 열정은 가족들의 반대에 비례해서 더욱 더 커졌는데 가족들은 화가가 되는 걸 반대했지만 그는 드로잉을 마스터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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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락주의를 좀 더 진전시킨 조지 산타야나


미술품을 평가하는 방법 가운데 쾌락주의Hedonism란 것이 있는데 이는 감상자의 즐거움·만족 혹은 취미에 따른 평가를 말한다.
이는 직접적인 방법으로 심리적 요소들에 근거하는데 고대 그리스인은 장님이 아름다운 그림을 즐길 수 없고 귀머거리가 아름다운 음악을 즐길 수 없듯 아름다운 것은 시각과 청각, 즉 고도한 감각을 즐겁게 해준다고 믿었다.
쾌락주의를 쾌이론Pleasure theory이라고 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자연주의와 철학을 기반으로 구성된 이 이론은 오랜 역사를 갖고 있으며, 즐거움에 긍정적 가치를 두고 고통이나 즐거움을 제공하지 못하는 미술품들에는 부정적 가치를 매긴다.
쾌락주의를 좀 더 진전시킨 것이 시인이며, 평론가이고, 철학자이면서 에세이 작가 조지 산타야나George Santayana(1863-1952)의 이설인데 자연주의에 근거한 것이다.
스페인계 아메리칸인 그는 1896년에 『미의 지각 The Sense of Beauty』을 발간했는데 미의 재료, 형태, 표현을 다룬 이제는 고전이 되었다.
그는 말했다.46-4)
미에 대한 우리의 사랑의 가정된 무관심이 그것의 또 다른 성격이 되는 것을 종종 본질적인 것 - 그것의 보편성 - 으로 간주되었다.
감각들의 쾌에는 내게 쾌를 주는 어떤 것에라도 다른 이에게 쾌를 주는 그것의 능력에 관한 주장이 없다는 독단주의가 없다고 알려졌다.
하지만 내가 어떤 것을 아름답다고 판단할 때 나의 판단은 그것이 그 자체 아름답거나 혹은 (같은 말이지만 더욱 비판적으로 표현해서) 그것이 반드시 모든 이에게 아름다울 것임을 의미한다.
이 주의에 의하면 보편성을 주장하는 것이 미학의 본질로서 미적 지각을 만드는 것은 감각이기보다는 판단이라는 것이다.
모든 미적 지침들은 불가능할 것이며, 우리가 우리의 판단에서 역설적인 보편성을 인정하지 않는 한 변덕스럽고 주관적인 모든 비평주의의 철학적 함축들을 우리는 계속해서 발전시킬 것이다.
산타야나는 미에 대한 보편성의 주장을 당연히 부정확한 것으로 간주했는데 미적 문제들에 관해 우리에게는 동의된 바기 없기 때문이다.
산타야나는 미를 우리의 감각을 자극해서 궁극적으로 지각하게 만드는 독자적인 존재로 보지 않고 하나의 가치로 보았다.
그는 “미는 하나의 가치로서 그것은 실제 사물이나 관계에 대한 지각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의지에 의한 그리고 감식력 있는 본능의 감성과 애정이다.
하나의 오브제가 어느 누구에게도 쾌를 제공할 수 없다면 그것은 아름다울 수 없다”고 했다.
산타야나는 미는 지각 안에서 존재하지만 달리 존재하지는 않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므로 지각되지 않은 미는 느끼지 않은 쾌로서 모순되는 것으로 보았다.
그에게 미는 미술품의 특징으로서 감성적인 요소이며 쾌였다.
그는 미술품들이 제공하는 대부분의 쾌를 오브제의 지각으로부터 쉽게 구분하고 나눌 수 있다고 보고 “오브제는 반드시 미각이나 삼킨 포도주처럼 혹은 쾌가 생기기 전 사용되고 작동된 특정한 장기organ에 적용되어야 한다.
따라서 응집력은 쾌와 다른 지각의 요소들 사이에 근소하다;
쾌는 지각으로부터 시간 안에서 나뉘어지거나 다른 장기에 집중하며, 결과적으로 단번에 오브제의 특성이 아니라 효과로 알게 된다”고 또한 『미의 지각』에 적었다.
미의 재료에 관한 산타야나의 견해는 다음과 같다.
심미적 미Sensuous beauty는 가장 위대하거나 가장 중요한 요소는 아니더라도 가장 원시적이며, 근본적이고, 또한 가장 객관적이다.
… 취미가 자연발생적일 때 취미는 늘 지각들로 시작된다.
정직성을 상실하고 속물적인 야망이 대치될 때 나쁜 취미가 생긴다.
그것의 본질은 미적 가치들에 대한 비미적 대치이다.
그는 순수지각에서 미의 재료를 파악하는 것을 거의 사람의 본능으로 보았다.
그의 이론은 예술을 인본주의로 정초하는 것이며, 크로체Benedetto Croce(1866-1952)가 분명하게 거부했던 주장 속에 제시된 환경의 맥락 속으로 예술을 편입시키는 데 있었다.
산타야나는 각 요소가 가치를 지니지 않거나 조금 지닌 그런 혼용된 요소들로부터 미적 즐거움이 생길 때 미적 형태가 생긴다고 했다.
예를 들면 트라이앵글은 각기의 선들이 죽었을 때 관심거리가 되며, 음악의 화음은 각기의 음이 구별된 그 이상으로 만족을 줄 수 있다.
그는 두 종류의 형태에 관해 언급했는데 디자인과 패턴이었다.
디자인의 기능은 단조로움monotony 혹은 미적 피로aesthetic fatigue를 피하는데 이러는 가운데 대비, 테마, 변화의 미적 원리들이나 규칙들이 생긴다.
테마와 변화는 단조로움을 피할 때 더욱 효과적이며 음악에서 이런 경우를 흔히 보는데 흥미로운 테마나 모티프는 리듬이나 한 소절의 변화와 더불어 반복된다.
이런 변화와 함께 테미는 흥미를 잃지 않게 하는 가운데 수없이 반복될 수 있다.
대비와 테마 그리고 변화는 상호 협력할 수 있으며 음악에서 세 부분을 구성하는 것이 보통이다.
패턴의 구성적 기능은 단조로움을 피하는 디자인의 기능과 같이 혼란을 피한다.
산타야나는 미의 재료들과 형태 외에도 상징에서의 표현을 중요하게 간주했는데 상징은 의미를 나타내는 미적 요소였다.
모든 언어가 상징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문학이야말로 표현예술의 극치를 이룬다.
미술에서도 의미는 매우 중요하고 종교화의 경우 의미가 감성의 미학으로 깊게 스며들게 하며 비극의 경우 매우 효과적으로 나타나며 카타르시스가 이를 말해준다.
문학은 정녕 쾌락주의의 또 다른 형식인 것이다.
쾌락주의보다는 덜 통속적인 감응적sympathetic으로 미술품을 평가하는 방법이 있다.
매력적이고 기쁘게 하며 즐거움과 감탄을 일으키는 것들에 감응하는 것이다.
크로체는 감응적인 것을 즐거움을 주는 이미지 혹은 재현 그 이상이 아니라면서47) 쾌락주의와 감응미학 모두에 반대했다.
그에게 예술의 특징은 표현이었다.
예술을 표현으로 정의하는 것은 19세기 이전에는 거의 그 징후를 찾아보기 힘들다.
파트리치F. Patrizi(1529-97)가 『시론 Della Poetica』(1586)에서 표현이 시인의 관심거리가 아님을 말할 때 이 용어를 사용하였다.
표현을 예술의 정의로 사용한 사람들은 크로체와 그의 추종자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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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우의 <다비드의 야심과 나폴레옹의 꿈> 중에서 

 유럽에서 가장 큰 국가 프랑스

 
1860년에 외젠 들라크루아는 말했다.
"다비드는 회화와 조각에 있어서 모던 학파의 아버지였다. 그는 건축에서도 개혁을 꾀했으며 일상용 가구에서조차 개혁을 해냈다."
모던 학파가 다비드에게서 비롯했다는 최대의 찬사이다.
다비드의 <황제와 황후의 대관식>을 보기 위해 매년 많은 사람이 루브르 뮤지엄을 향한다.
루브르에서 다비드의 작품보다 더 많은 사랑을 차지하는 작품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뿐이다.
열정적인 동시에 조울증적인 다비드의 기질은 모든 그의 작품에 속속들이 배어 있으며 이는 그의 고유한 양식이 되었다.
자신의 개인적인 복잡한 느낌을 시각적으로 미묘하면서도 매우 적절하게 묘사해내는 데 있어 다비드는 달인이었다.
궁정 수석화가가 되는 것이 회화에 입문한 후부터 그의 유일한 꿈이었고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정치에 깊숙히 관여했으며 결국 꿈을 이루어냈지만 나폴레옹이 퇴위하자 '화단의 나폴레옹'으로 군림했던 그도 자의 반 타의 반 망명의 길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다비드와 나폴레옹 모두 조국을 등지고 이국에서 세상을 떠났다.
자크 루이 다비드가 태어날 무렵 프랑스는 정치적, 사회적으로 불안정한 상태가 극에 달해 곧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
정부는 누적된 재정적자를 해결하기 위해 전쟁을 선택할 수박에 없었다.
유럽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프랑스는 유럽의 나라들 가운데 가장 번영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1780년 당시 프랑스 인구는 2천 5백만에 육박했고 파리 시민은 65만으로 가장 큰 도시였다.
참고로 주변 나라들의 인구를 보면 러시아가 2천 4백만, 이탈리아 1천 7백만, 스페인 1천만, 영국 9백만, 프러시아 8맥 60만, 오스트리아 790만, 아일랜드 4백만, 벨기에 220만, 포르투칼 210만, 스웨덴 2백만, 네덜란드 190만, 스위스 140만, 덴마크 80만, 노르웨이 70만이었다.
당시 빈부 격차가 극심했으며 가문, 명예, 땅의 소유가 사람들의 사회적 지위와 계급을 결정지웠다.
사회계급은 삼등분되어 있었으며, 성직자가 13만, 귀족이 40만, 나머지가 평민이었고, 평민은 혹독한 법의 지배를 받았으며 죄의 심판은 그들에게 가혹했다.
정부의 무능으로 군사적 침략을 받았고 전쟁의 패배가 재정을 악화시켰으며 국고를 충당하기 위해 세금을 올리자 가난한 사람들은 한층 더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야 했다.
경제적으로 프랑스는 영국에 비해 매우 빈곤했다.
이 시기에 정치적, 사회적으로 급격한 변화가 일어났는데 은행가. 금융업자, 변호사, 돈 많은 상인들인 부르주아 계급이 자신들의 축적된 부를 이용해서 사회적 지위와 권력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기존의 귀족과 연합하거나 왕가에 영향력을 행사해 정치적 지위를 차지했다.
이런 혼란과 횡포에 맞서 불평등을 고발하고 왕권과 종교적 전통에 반발한 철학자와 작가들이 있었는데 장 자크 루소, 볼테르, 드니 디드로 세 사람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계몽주의의 파도를 타고 이들의 영향은 프랑스에서 뿐 아니라 국외에서도 매우 컸다.
디드로와 장 르 롱드는 1751~80년 사이 35권의 방대한 분량의 <백과사전>을 출간했는데 인류의 모든 지식을 집약한 것으로 프랑스의 사회적, 기술적 현대화의 청사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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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군은 경복궁을 중건하기 위해 원납전을


조선 후기에는 중국과 일본과는 달리 서양인이 직접 방문하면서 서양화를 소개한 것이 아니라 중국을 내왕하던 사행원 등을 매개로 간접적으로 알게 되었지만,
19세기 말엽에 이르러 흥선대원군 이하응(1820~98)의 하야에 뒤이어 문호가 개방되자 서양인을 통해 직접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당시 세계는 급변하고 있었다.
서구 열강은 18세기 말과 19세기 초에 산업혁명을 이룩한 후 자본주의 체제를 확립했고 19세기 중엽 이후에는 제국주의 체제로 이행했다.
제국주의 국가들은 값싼 원료산지와 넓은 상품시장을 확보하기 위해 아시아,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등지를 침략하여 식민지로 삼았다.
동북아시아도 예외는 아니었다.
미국은 일본, 중국과 불평등조약을 맺고 태평양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추구하면서 조선도 개국시키려고 했다.
미국 정부의 공식적인 지원이 없는 상태에서 감행되었지만 1866년 7월 제너럴 셔먼호가 열강 중 최초로 조선을 침략했다.
셔먼호는 대동강을 오르내리면서 조선 선박을 납치하고 식량과 물품을 약탈했고 선원 일부는 상륙하여 평양 주민을 살륙했다.
이에 격분한 평양 주민들은 평양 감영의 군사와 합세하여 셔먼호를 불태우고 선원들 모두 살해했다.
프랑스는 조선 정부가 프랑스인 신부 9명과 8천여 명의 천주교 신자들을 처형한 것을 빌미로 1866년 9월에 군대를 보내 전쟁을 도발했는데 이것이 병인양요이다.
프랑스군은 강화도를 점령한 후 프랑스인 신부들을 살해한 데 대한 배상금 지급과 책임자 처벌 및 통상조약 체결 등을 요구했다.
조선군은 프랑스군과 전투를 벌여 승리했지만 프랑스군은 퇴각하면서 강화도 주민들을 살륙하고 가종 군수물자와 보물, 그리고 귀중한 문화재 사고도서史庫圖書를 탈취해갔다.
한편 미국은 셔먼호사건 이후 청나라를 통해 이 사건의 책임자 처벌, 배상금 지급 및 통상조약의 체결을 요구했다.
청나라가 조선 내정에 간섭할 수 없다는 이유로 이를 거부하자 1871년 4월 조선을 침략했는데 이것이 신미양요이다.
조선군과 의용군부대는 강화도에서 미군을 격퇴했다.
대원군은 서구 열강의 침략을 물리치고 무너져가는 봉건체제를 수습하는 데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그는 경복궁을 중건하기 위해 원납전을 거둬 부민들의 원성을 샀으며 당백전當百錢·청전淸錢과 같은 악화를 발행하여 물가를 폭등시킴으로써 백성들의 생활을 어렵게 만들었다.
또 서원을 강제로 철폐하고 호포법을 실시함으로써 양반유생들의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결국 대원군은 양반유생들의 계속되는 상소운동으로 인해 정권에서 물러났고, 정권의 핵심을 차지한 것은 명성왕후의 집안 민씨일파였다.
민씨일파는 대원군 시기에 확대·정비했던 군사력을 유지·강화시키지 않아 밀려오는 제국주의 세력을 막아낼 수 없었다.
일본은 미국이 자기 나라를 무력으로 개항시킨 방식을 모방하여 1875년 운양호사건을 도발하고 이듬해 초에는 이 사건을 구실로 부산항에 군대를 불법상륙시켜 조선인을 약탈·살륙하고 개항을 요구했다.
조선에서는 개항해서는 안 된다는 척사위정론斥邪衛正論이 팽배했지만 개국통상을 해야 한다는 입장을 가진 사람들도 있었다.
특히 북학파 박지원의 손자로서 1873년 우의정에 오른 박규수는 제너럴 셔먼호사건과 신미양요를 경험하고 중국에 사신으로 다녀오면서 조선의 부국강병을 위해서는 서양의 문물을 수용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이런 개국통상론은 김옥균, 박영호 등 당시 세도가문 출신의 젊은 관료들과 일부 역관, 의관 등 중인층에게도 확산되었으며 마침내 조선은 1876년 2월 일본과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를 맺고 7월에 그 내용을 구체화한 조일수호조규부록과 잠정적 통상협정인 조일무역규칙을 조인했다.
이는 미국이 일본에 강요한 불평등조약보다 더욱 불리한 조항을 허용한 것으로 특히 무관세무역, 치외법권, 일본화폐 사용 등을 허용한 것은 조선 경제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조선은 일본의 경제침략에 무방비상태에 놓여졌다.
정부의 노력으로 1882년에 개정된 조일무역규칙에 수출입상품에 관세를 부과하는 조항이 신설되기는 했지만 그 후 대외조약의 불평등성은 강화되었다.
일본의 조선 침략은 일본 자본주의의 발전단계와 맞물리면서 추진되었다.
일본 자본주의의 경제침략은 청일전쟁 이전까지는 영국제 면제품을 상해에서 구입하여 조선으로 수출하고 조선으로부터 금·곡물을 수입해가는 정도였지만, 청일전쟁 이후 산업혁명을 추진하면서부터는 면제품을 중심으로 한 자국산 경공업제품을 수출하고 쌀을 비롯한 농산물을 대량 수입해갔다.
이에 따라 조선의 직물업자들이 몰락한 반면 일부 지주·상인들은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1895년 4월 러시아, 프랑스, 독일 등이 일본의 요동반도 점령을 좌절시킴으로써 일본의 약세가 드러나자 조선 정부는 러시아 세력을 끌어들여 일본의 간섭을 배제하려고 했다.
이에 일본은 세력을 만회하기 위해 1895년 10월 왕궁을 습격하여 명성왕후를 살해했는데 이것이 을미사변이다.
김홍집 내각은 일본인이 이 사건과 무관하다고 선언하며 일본을 옹호했다.
이에 전국 각지에서 반일의병운동이 일어났으며 1896년 2월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했고 개화파 정권은 무너졌다.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 후 조선에 대한 러시아의 영향력이 급속도로 강화되자 일본은 러시아와 타협을 통해 조선에서의 세력을 유지하려고 했으며 러시아도 일본과 정면 충돌을 원치 않았으므로 두 나라는 일단 타협했다.
1년 동안이나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러 있자 환궁을 요구하는 여론이 높아졌고 1897년 2월 고종은 경운궁으로 환궁했다.
8월에 연호를 건양建陽에서 광무光武로 바꾸고 10월에는 황제즉위식을 거행하면서 대한제국(1897~1910)의 수립을 선포했다.
이어 정부는 구본신참舊本新參을 내세워 군주권을 강화하면서 근대화를 추구하는 각종 행정·법률체계를 재편했다.
광무개혁에서 가장 중점을 둔 것은 왕권을 강화하는 것으로 1899년에 대한국구제大韓國國制를 공포하여 모든 통치권을 왕에게 집중시켰다.
정부는 자주적 근대화를 표방했지만 그에 필요한 재원을 가혹한 민중수탈로 메구려 했으며 왕권을 강화시키기 위해 독립협회운동 등을 억압했다.
따라서 광무개혁은 민중의 저항을 받았고 목표로 했던 부국강병도 이루지 못해 일본을 비롯한 열강의 정치적·경제적 침략을 막아내지 못했다.
그리하여 러일전쟁(1904~05) 이후 일본이 조선의 국권을 탈취해감에 따라 광무개혁은 죄절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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