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원군은 경복궁을 중건하기 위해 원납전을
조선 후기에는 중국과 일본과는 달리 서양인이 직접 방문하면서 서양화를 소개한 것이 아니라 중국을 내왕하던 사행원 등을 매개로 간접적으로 알게 되었지만,
19세기 말엽에 이르러 흥선대원군 이하응(1820~98)의 하야에 뒤이어 문호가 개방되자 서양인을 통해 직접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당시 세계는 급변하고 있었다.
서구 열강은 18세기 말과 19세기 초에 산업혁명을 이룩한 후 자본주의 체제를 확립했고 19세기 중엽 이후에는 제국주의 체제로 이행했다.
제국주의 국가들은 값싼 원료산지와 넓은 상품시장을 확보하기 위해 아시아,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등지를 침략하여 식민지로 삼았다.
동북아시아도 예외는 아니었다.
미국은 일본, 중국과 불평등조약을 맺고 태평양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추구하면서 조선도 개국시키려고 했다.
미국 정부의 공식적인 지원이 없는 상태에서 감행되었지만 1866년 7월 제너럴 셔먼호가 열강 중 최초로 조선을 침략했다.
셔먼호는 대동강을 오르내리면서 조선 선박을 납치하고 식량과 물품을 약탈했고 선원 일부는 상륙하여 평양 주민을 살륙했다.
이에 격분한 평양 주민들은 평양 감영의 군사와 합세하여 셔먼호를 불태우고 선원들 모두 살해했다.
프랑스는 조선 정부가 프랑스인 신부 9명과 8천여 명의 천주교 신자들을 처형한 것을 빌미로 1866년 9월에 군대를 보내 전쟁을 도발했는데 이것이 병인양요이다.
프랑스군은 강화도를 점령한 후 프랑스인 신부들을 살해한 데 대한 배상금 지급과 책임자 처벌 및 통상조약 체결 등을 요구했다.
조선군은 프랑스군과 전투를 벌여 승리했지만 프랑스군은 퇴각하면서 강화도 주민들을 살륙하고 가종 군수물자와 보물, 그리고 귀중한 문화재 사고도서史庫圖書를 탈취해갔다.
한편 미국은 셔먼호사건 이후 청나라를 통해 이 사건의 책임자 처벌, 배상금 지급 및 통상조약의 체결을 요구했다.
청나라가 조선 내정에 간섭할 수 없다는 이유로 이를 거부하자 1871년 4월 조선을 침략했는데 이것이 신미양요이다.
조선군과 의용군부대는 강화도에서 미군을 격퇴했다.
대원군은 서구 열강의 침략을 물리치고 무너져가는 봉건체제를 수습하는 데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그는 경복궁을 중건하기 위해 원납전을 거둬 부민들의 원성을 샀으며 당백전當百錢·청전淸錢과 같은 악화를 발행하여 물가를 폭등시킴으로써 백성들의 생활을 어렵게 만들었다.
또 서원을 강제로 철폐하고 호포법을 실시함으로써 양반유생들의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결국 대원군은 양반유생들의 계속되는 상소운동으로 인해 정권에서 물러났고, 정권의 핵심을 차지한 것은 명성왕후의 집안 민씨일파였다.
민씨일파는 대원군 시기에 확대·정비했던 군사력을 유지·강화시키지 않아 밀려오는 제국주의 세력을 막아낼 수 없었다.
일본은 미국이 자기 나라를 무력으로 개항시킨 방식을 모방하여 1875년 운양호사건을 도발하고 이듬해 초에는 이 사건을 구실로 부산항에 군대를 불법상륙시켜 조선인을 약탈·살륙하고 개항을 요구했다.
조선에서는 개항해서는 안 된다는 척사위정론斥邪衛正論이 팽배했지만 개국통상을 해야 한다는 입장을 가진 사람들도 있었다.
특히 북학파 박지원의 손자로서 1873년 우의정에 오른 박규수는 제너럴 셔먼호사건과 신미양요를 경험하고 중국에 사신으로 다녀오면서 조선의 부국강병을 위해서는 서양의 문물을 수용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이런 개국통상론은 김옥균, 박영호 등 당시 세도가문 출신의 젊은 관료들과 일부 역관, 의관 등 중인층에게도 확산되었으며 마침내 조선은 1876년 2월 일본과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를 맺고 7월에 그 내용을 구체화한 조일수호조규부록과 잠정적 통상협정인 조일무역규칙을 조인했다.
이는 미국이 일본에 강요한 불평등조약보다 더욱 불리한 조항을 허용한 것으로 특히 무관세무역, 치외법권, 일본화폐 사용 등을 허용한 것은 조선 경제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조선은 일본의 경제침략에 무방비상태에 놓여졌다.
정부의 노력으로 1882년에 개정된 조일무역규칙에 수출입상품에 관세를 부과하는 조항이 신설되기는 했지만 그 후 대외조약의 불평등성은 강화되었다.
일본의 조선 침략은 일본 자본주의의 발전단계와 맞물리면서 추진되었다.
일본 자본주의의 경제침략은 청일전쟁 이전까지는 영국제 면제품을 상해에서 구입하여 조선으로 수출하고 조선으로부터 금·곡물을 수입해가는 정도였지만, 청일전쟁 이후 산업혁명을 추진하면서부터는 면제품을 중심으로 한 자국산 경공업제품을 수출하고 쌀을 비롯한 농산물을 대량 수입해갔다.
이에 따라 조선의 직물업자들이 몰락한 반면 일부 지주·상인들은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1895년 4월 러시아, 프랑스, 독일 등이 일본의 요동반도 점령을 좌절시킴으로써 일본의 약세가 드러나자 조선 정부는 러시아 세력을 끌어들여 일본의 간섭을 배제하려고 했다.
이에 일본은 세력을 만회하기 위해 1895년 10월 왕궁을 습격하여 명성왕후를 살해했는데 이것이 을미사변이다.
김홍집 내각은 일본인이 이 사건과 무관하다고 선언하며 일본을 옹호했다.
이에 전국 각지에서 반일의병운동이 일어났으며 1896년 2월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했고 개화파 정권은 무너졌다.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 후 조선에 대한 러시아의 영향력이 급속도로 강화되자 일본은 러시아와 타협을 통해 조선에서의 세력을 유지하려고 했으며 러시아도 일본과 정면 충돌을 원치 않았으므로 두 나라는 일단 타협했다.
1년 동안이나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러 있자 환궁을 요구하는 여론이 높아졌고 1897년 2월 고종은 경운궁으로 환궁했다.
8월에 연호를 건양建陽에서 광무光武로 바꾸고 10월에는 황제즉위식을 거행하면서 대한제국(1897~1910)의 수립을 선포했다.
이어 정부는 구본신참舊本新參을 내세워 군주권을 강화하면서 근대화를 추구하는 각종 행정·법률체계를 재편했다.
광무개혁에서 가장 중점을 둔 것은 왕권을 강화하는 것으로 1899년에 대한국구제大韓國國制를 공포하여 모든 통치권을 왕에게 집중시켰다.
정부는 자주적 근대화를 표방했지만 그에 필요한 재원을 가혹한 민중수탈로 메구려 했으며 왕권을 강화시키기 위해 독립협회운동 등을 억압했다.
따라서 광무개혁은 민중의 저항을 받았고 목표로 했던 부국강병도 이루지 못해 일본을 비롯한 열강의 정치적·경제적 침략을 막아내지 못했다.
그리하여 러일전쟁(1904~05) 이후 일본이 조선의 국권을 탈취해감에 따라 광무개혁은 죄절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