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킹 이야기

 
나는 한때 물리학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물리학이 나로 하여금 우주관뿐 아니라 역사관 그리고 철학에까지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호킹이 자서전적으로 쓴 글을 전에 번역해두었던 것이 책장을 정리하다가 튀어나왔길래 소개할까 합니다.
혹시 이런 연재에 관심이 있는 분들이 있다면 연재의 폭을 확대할까도 생각중입니다.
호킹은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아인슈타인 이후 가장 유명한 물리학자로 존경을 받고 있습니다.
나는(호킹) 1942년 1월 8일에 Oxford에서 태어났습니다. 할아버지는 부유한 농부로서 많은 농장을 사들였다가 경제공황 때 파산하셨지만 아버지를 옥스포드 의대에 진학시킬 수는 있었습니다.
저의 어머니는 스코틀랜드 태생으로 가정학 의사의 일곱 자녀들 중 둘째로 태어나셨습니다.
어머니는 옥스포드 대학에서 공부하신 후 여러 가지 일을 하시다가 비서가 되었고 이런 이유로 아버지를 만나게 되셨습니다.
우리 가족은 런던의 북쪽 하이게잇Highgate에서 거주했습니다.
내 여동생 메리Mary는 나보다 18개월 후에 태어났고 메리는 나중에 의사가 되었습니다.
나의 또 다른 여동생 필리파Phillippa는 5년 후 태어났으며 남동생 에드워드Edward는 내가 14살 때 태어났는데 공부하기를 싫어했습니다.
아버지는 하이게잇에 있는 가늘고 기다란 빅토리안 양식의 집을 구입하셨는데 2차세계대전 중이어서 집이 쌀 때였습니다.
독일 전투기들이 런던을 폭격하면서 우리집 몇집 건너에도 포탄을 떨어뜨렸습니다.
우리는 폭격을 피해 피신했지만 아버지는 집에 그냥 남아계셨는데 집이 무사했습니다.
그 집을 아버지가 위독하실 때인 1985년에 팔았고 아버지는 이듬해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아버지는 내가 당신의 모교인 옥스포드 대학에 진학하기를 바라셨으므로 나는 1959년 3월 옥스퍼드 대학에서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자격시험을 쳤고 며칠 후 장학금을 지급하겠다는 통지를 받았습니다.
그때 내 나이 17살이었으며 다른 학생들은 대부분 군복무를 마친 후였기 때문에 나보다는 나이가 훨씬 많아습니다.
옥스포드 대학을 졸업하면서 나는 이론물리학의 두 갈래 길에서 어디로 갈 것인지 고심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기초 미분자들보다는 우주론cosmology에 더 관심이 많았는데 그 이유는 이 분야에는 아인슈타인의 잘 정의된 일반 상대성 이론General Theory of Relativity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옥스포드 대학에는 우주론에 유능한 물리학자가 없었으며 캠브리지 대학에는 잘 알려진 학자 프레드 호일Fred Hoyle이 계셨습니다.
나는 호일의 지도 아래 캠브리지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성취하기로 결심했습니다.
하지만 내가 캠브리지 대학에 진학했을 때 나의 지도교수는 호일이 아니라 데니스 시아마Denis Sciama였고 나는 그분에 관해 들은 바가 없었습니다.
호일은 외국 여행을 자주 하셨으므로 어차피 그분의 지도를 받기는 어려웠을 테고 나는 시아마의 아이디어들에 더러 동조하지는 않았지만 그분은 내게 늘 자극을 주셨던 좋은 교수였습니다.
내가 옥스포드 대학에 재학할 때 수학을 별로 공부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이론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으며 따라서 공부에 별 진전이 없었습니다.
캠브리지 대학원에 입학하고 얼마 안 돼 나는 ALS(Amyotrophic Lateral Sclerosis 혹은 Motor Neurone Disease(운동신경병)라고도 함)라는 증세를 가졌다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처음에 나는 병원측으로부터 진전이 있기 때문에 별로 염려할 필요가 없다는 말을 들었고, 나는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이론을 이해하기 시작했으며 공부에 진전이 있었습니다.
내게 ALS의 증세가 나타날 무렵 나는 제인 윌드Jane Wilde를 알게 되었고,
그녀를 사랑했으므로 그녀와 결혼하여 과학자로서 일생을 살기로 결심했으며,
과학자들과 창녀들은 모두 자신들이 즐기는 일에 대한 보상을 받는 사람들이란 말이 있습니다.
나는 생계를 위해 카이우스Caius 대학에 급여를 받는 연구원으로 받아들여졌고,
나와 제인은 1965년 7월에 결혼했으며,
우리는 서폴크Suffolk로 신혼여행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뉴욕 북쪽에 있는 코넬 대학에서 일반 상대성 이론을 가르치는 과목을 여름학기에 수강했는데 과목은 좋았지만 기숙사에 아이들까지 묵었으므로 너무 시끄러워 실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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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비드의 야심과 나폴레옹의 꿈 The Great Couples 4
김광우 지음 / 미술문화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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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영웅의 꿈에 날개를 그려넣다

 
김광우의 <다비드의 야심과 나폴레옹의 꿈>

화가, 영웅의 꿈에 날개를 그려넣다.

프랑스 혁명의 광풍 속에 영웅으로 떠오른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1804년 12월 2일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자신의 머리에 스스로 왕관을 쓰고 아내 조제핀에게 직접 관을 씌우는 대관식을 거행하며 황제가 됐다.
자크 루이 다비드는 이 역사적 순간을 가로 9.9m, 세로 6.69m의 거대한 화폭에 담아냈다. 이 '황제와 황후의 대관식'(1805~1807)에는 꼭두각시로 앉아 있는 교황 앞에서 이미 왕관을 쓴 나폴레옹이 조제핀에게 씌울 또 하나의 관을 높이 들고 당당히 서 있는 극적인 장면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
평민 출신으로 26세에 치안사령관이라는 막강한 권좌에 올라 프랑스 군대의 실질적인 최고 권력자가 된 나폴레옹은 1797년 12월 10일 이탈리아 원정의 승리를 축하하는 연회에서 다비드를 만났다. 당대 최고의 권력자와 당대 최고의 화가는 서로 만나고 싶어했고, 이때부터 다비드는 나폴레옹과 그의 영광을 화폭에 담았다. '생 베르나르 고갯길을 지나는 보나파르트(1800~1801), '서재에서의 나폴레옹'(1812), 그리고 '황제와 황후의 대관식', '역사적 배경 속에서 화가들의 삶과 작품을 재조명한 연작을 내놓고 있는 저자는 나폴레옹의 시대 속에서 다비드의 의미와 가치를 재평가한다.
황제는 대관식이 끝난 후 다비드에게 '황제 최고의 황가'라는 영예를 수여했고, 다비드는 그의 그림을 통해 나포레옹을 역사 속에 영원히 기억되는 영웅으로 만들었다. 다비드는 1750~1830년 유럽에 널리 유행한 신고전주의 미술을 대표하는 화가였다. 고대 그리스인이 추구한 이상과 이미지들을 부활시켜 단순한 형태와 색채로 웅장한 분위기를 연출한 다비드의 신고전주의적 화풍은 보는 이에게 강렬한 인상과 메시지를 전달한다는 점에서 정치적 선전을 위해 대단히 효과적이었다.
저자는 "다비드의 뛰어난 기교와 신고전주의 양식의 특징인 단순성과 명료함은 서양미술사에 있어 신고전주의를 완성했다는 칭찬을 받지만, 내용에 있어서는 다분히 정치 선전적이었고 관람자를 오도하는 것이었다"고 냉정한 평가를 내린다.
// 03.09.20 동아일보 김형찬 기자

프랑스 혁명은 황제 나폴레옹을 낳았고, 나폴레옹은 화단의 권력자 다비드를 낳았다.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다비드 작 '황제와 황후의 대관식'은 '모나리자' 다음으로 인기를 갖고 있지만 정작 화가 자신에 대해 알려진 바는 많지 않았다. 저자는 객관적인지 기회주의자인지, 또 나폴레옹이 시대의 영웅인지 전쟁의 영웅인지 독자 스스로 판단하게 한다. 분명한 것은 프랑스 혁명, 나폴레옹, 다비드 이 셋의 관계를 이바지하지 못하면 그 중 어느 하나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미술사에 대한 좀 더 포괄적이고 합리적인 이해를 위해 기획된 '위대한 커플(Great couples)'시리즈 네 번째 책으로 충분한 컬러도판이 이해를 돕는다.
// 03.09.20 경향신문 이상주 기자

영웅의 정치와 화가의 미술이 보여주는 운명적인 만남의 모습. 자신의 모습이 그려진 그림을 좋아했고 미술이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는 데 효과적이라고 인식한 나폴레옹과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는 데 적절했던 다비드의 삶을 보여준다.
// 03.09.20 세계일보


화단의 나폴레옹 다비드
그는 기회주의자인가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유화 <황제와 황후의 대관식>은 루브르에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 다음으로 많은 사랑을 받는 작품이다. 세로 6.3m, 가로 9.8m의 이 대작은 나폴레옹 황제 당시 궁정 수석화가였던 자크 루이 다비드가 그린 것으로 나폴레옹이 그 앞에 양손을 모은 채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황후 조제핀에게 관을 씌워주기 위해 두 손으로 관을 높이 쳐드는 장면을 담고 있다. 19세기 초 신고전주의 개척자 다비드 그는 화단의 '나폴레옹'으로 프랑스 화단에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나폴레옹이 실각한 뒤에는 부뤼셀로 망명하는 등 나폴레옹과 같은 인생 곡선을 그린 인물이다.
'다비드의 야심과 나폴레옹의 꿈'(김광우지음, 미술문화 펴냄)은 나폴레옹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는 다비드의 일생과 그의 작품들을 소개한다. 미술비평가인 저자는 다비드의 어둡고 외로웠던 어린시절 로마 유학, 소승인 조제프 마리 비엥 개빈 해밀턴을 만나 신고전주의로 자리잡기까지의 과정, 나폴레옹과 만남, '황제의 제1화가'로서의 절정기, 나폴레옹 몰락에 따른 벨기에 망명과 사망등을 연대순으로 다룬다.
다비드를 이야기하려면 신고전주의를 빼놓을 수 없다. 1750년에 시작돼 1830년까지 유럽에 널리 유행한 신고전주의는 고대의 미술, 특히 고대 그리스 미술을 규범으로 삼아 단순한 형태와 색을 추구한 것이 특징이다. 꾸밈이 없고 기하학적인 이 시기의 작품들은 르네상스의 마지막 거추장스러운 양식인 바로크의 로코코 양식을 의도적으로 피했다. 저자는 신고전주의에 대한 설명과 함께 프랑스 혁명기의 정치, 경제적 혼란상을 적나라하게 그린다. 다비드는 나폴레옹의 요청으로 그의 초상을 여러 점 그렸다. 그러나 그 작품들은 순수한 미학적 동기에서 그렸다기보다는 정치적 목적에 봉사하는 것이었다. 그런 만큼 적잖은 사실들이 왜곡됐다. 다비드의 뛰어난 기교와 단순하고 명료한 양식은 서양미술사에 있어서 신고전주의를 완성했다는 평가를 받지만 내용면에서는 다분히 정치선전적이었다는 비난도 면치 못한다. 다비드는 천재화가인가 기회주의자인가. 해답도 없고 유효기간도 없는 의문이다.

<대한매일 02.09.17 김종면기자>


김광우의 The Great Couples 4
<<다비드의 야심과 나폴레옹의 꿈>>
이제 막 출고되어 언론에서 먼저 주목하고 있습니다.
좋은 책은 누가봐도 좋은 책이니까요... ^^


9월 15일 KBS 930뉴스 '눈에 띄는 신간'
나폴레옹의 전속 화가이자 프랑스 화단의 황제였던 다비드의 평전입니다. 화가의 전기인 동시에 시대의 영웅과 화가의 교분을 통해 본 프랑스 혁명사이기도 합니다...KBS뉴스 신성범입니다.


9월 15일 '호남신문'
미술비평가 김광우씨 '다비드의 야심과 나폴레옹의 꿈'
나폴레옹 시절 궁정화가 다비드 삶과 작품
나폴레옹 황제 당시 궁전수석화가였던 루이 다비드(1748~1825)의 작품세계와 인생을 엮은 책이 나왔다.
미술비평가 김광우가 펴낸 '다비드의 야심과 나폴레옹의 꿈(미술문화)'
19세기초 프랑스 화단에 황제로 군림했던 신고전주의의 개척자 다비드는 나폴레옹과 운명을 함께한다. 그는 현재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돼 있는 '황제와 황후의 대관식을 그린 작가로 예술,정치적으로 프랑스 화단에 영향력을 행사했고 나폴레옹 실각 후에는 부뤼셀로 망명했다.
책은 어둡고 외로웠던 어린시절, 로마 유학, 스승인 조제프 마리 비엥과 개빈 해밀턴과 만남으로 신고전주의자로 자리잡기까지. 정치와 인연, 나폴레옹과 만남, '황제 최고의 화가'로서의 절정기, 나폴레옹 몰락에 따른 벨기에 망명과 사망 등을 연대순으로 기술했다.
신고전주의 전반에 대한 해설과 함께 프랑스 혁명기의 정치, 경제적 혼란상을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는 이 책은 특히 다비드의 예술성 못지 않게 정치적 성향을 집중 부각시키고 있다.
나폴레옹의 초상화를 여러점 남긴 그는 순수 미학적 동기에서 그렸다기보다는 정치적 목적에 부합되게 그려진 것들이 상당수를 차지한다. 다비드의 뛰어난 기교와단순하고 명료한 양식은 서양미술사에 있어서 신고전주의를 완성했다는 평가를 받지만 내용면에서는 다분히 정치선전적이었고 관람자를 오도하고 있다는 비난을 사고 있는 것은 이 때문. 책은 다비드에 대한 풀리지 않는 질문 '천재화가인가 기회주의자인가'에 대해 묻고 있다. / 정윤희 기자


9월 16일 '서울 경제'
무수히 살롱전에서 탈락했으나 나폴레옹에 의해 최고의 화가로 선임된 프랑스의 화가 다비드의 일대기. 19세기초 프랑스 화단의 '황제'로 군림했던 다비드는 신고전주의의 개척자로서 르네상스 이후 가장 인기 있는 화가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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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폭압적 무단통치에 분노하며


제국주의의 상징물로서의 조선총독부 석조건물이 세워진 것은 1926년이었다.
조선 왕조의 심장부인 경복궁 바로 앞에 건립한 총독부 건물은 장소의 상징적 위치로 보나 서구적 르네상스 양식의 위압적인 외형에서 일제의 탐욕과 지배성을 드러냈다.
일제의 폭압적 무단통치에 분노하며 저항하는 민심이 고조되자 종교계의 지도급 인사들을 중심으로 3·1운동이 계획되었다.
이들은 우드로우 윌슨Woodrow Wilson의 민족자결주의에 고무되어 일어난 상해, 미주, 동경 등지의 독립운동 소식을 듣고 나서 독립선언식과 만세시위를 논의했다.
3·1운동은 고종의 인산일인 3월 1일 정오 서울을 비롯하여 평양, 진남포, 안주, 의주, 선천, 원산 등지에서 동시에 일어났다.
민족대표들은 서울에 있는 음식점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일제 관헌에 자수했다.
파고다 공원에서는 학생들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했고 군중은 독립만세의 함성을 외치며 시위대열을 이루었다.
독립선언식은 대중의 반일감정이 자연발생적으로 폭발하는 만세시위운동으로 확산되었다.
학생들은 3·1운동의 후속조치로 제2의 시위를 계획하고 3월 5일 서울역 광장에서 이를 실행했다.
3월 상순 이후 주로 대도시에서 전개되던 만세시위는 각 지방의 중소도시와 농촌으로 확산되어 갔다.
운동은 5월까지 지속되었으며 특히 3월 하순에서 4월 상순 사이에는 동시다발적이고 격렬한 투쟁양상을 보여 운동이 최고조에 달했다.
그러나 3·1운동은 일제의 잔인한 탄압으로 독립쟁취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고 무단통치로 인해 운동을 지도할 조직이 거의 없어 실패로 돌아갔다.
민족대표들이 국제정세를 지나치게 낙관하여 청원주의적 방식을 채택했을 뿐 아니라 투항적 태도를 취함으로써 민중의 투쟁을 끝까지 이끌지 못한 것도 실패의 원인이었다.
3·1운동 이전에 마르크스·레닌주의 혁명이론의 영향을 받은 급진적 지식인들에 기반을 둔 조직이 한국에는 없었다.
3·1운동 자체가 공산주의의 도래를 촉진한 것은 아니었지만 새로운 이데올로기들이 한국으로 유입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1920년대 초반 국내운동을 주도한 것은 부르주아 민족주의자들이었다.
3·1운동이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신지식층은 다시 한말과 1910년대를 풍미했던 ‘선실력양성론’으로 돌아가 이른바 문화운동을 전개했다.
총독부가 소위 문화정치라 불리는 새롭고 다소 온건한 정책을 썼기 때문에 가능했다.
부르주아 민족주의자들은 1923년부터 물산장려운동을 벌였는데
“내 살림 내 것으로!”라는 구호를 내건 이 운동은 한때 상당한 기세를 올려 토산품 애용이라는 측면에서는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다.
이런 문화운동은 신문화 건설과 실력양성을 민족운동의 일차적 과제로 내세움으로써 결국 민족운동을 탈정치화시키고 말았다.
1920년대에 들어서 사회주의 사상은 민족해방운동의 새로운 이념적 지주로서 급격하게 수용되었다.
국내 일부 지식층이 이 사상을 식민지의 민족문제와 계급문제를 동시에 해결할 수 있는 이념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사회주의 사상은 본격적으로 수용될 수 있었다.
이리하여 1925년경 세 개의 이질적인 단체들 서울파(상해파), 화요회(이르크츠크파), 북풍회(일본에서 귀국한 학생그룹)가 생겼는데,
이들 세 단체는 분파적 차이와 상호 적대감을 가진 채 한국의 사회주의를 대표했다.
이르크츠크파는 이르크츠크 주변에 정착한 러시아 국적의 한국인 일파에서 유래한 것으로 그 일파는 볼세비키와 접촉하면서 1918년 1월 22일에 이르크츠크 공산당의 한국인 분파를 형성했다.
이 단체의 지도자가 남만춘이었다.
이 단체는 여러 도시에 몇 개의 지부를 설치하고 각 지역 대표를 지명했다.
1919년 9월 5일 이 단체는 당파를 조직하고 전로한인공산당All-Russian Korean Communist Party라 명명했으며 후에 이르크츠크파로 알려졌다.
세 단체는 사회주의를 선전했으며 불만에 찬 대중에게 용기를 주어 다양한 조직들로 결합시키려고 했다.
사회주의운동의 기반이 확대됨에 따라 1924년에 조선노농총동맹과 조선청년총동맹 등 전국적인 대중운동단체가 결성되었다.
이런 대중운동단체와 사상단체들을 기반으로 하여 1925년 4월 김재봉을 책임비서로 하는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가 비밀리에 조직되었으며, 두 단체는 곧 코민테른에 대표를 보내 정식 승인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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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학이 18세기에 위기를 맞은 것은


미가 비례 및 조화로운 배열에 있다는 또는 미의 객관성, 합리성, 수적 특이성, 형이상학적 이론들의 창조자인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예술론이 무려 이천 년 이상 군림해 왔는데 이성과 경험의 마찰로 위기를 맞았다.
이런 위기는 사람들의 취미가 변한 데 그 원인이 있었으며, 후기 바로크와 낭만주의 예술 및 문학의 등장도 한몫을 했다.
타타르키비츠는 위기의 뿌리를 “철학과 예술 양쪽 모두, 즉 경험론 철학과 낭만주의 예술에서 찾을 수 있다.
동일한 경향이 여러 나라에서 전개되었으나 특히 영국의 심리학자들과 철학적 경향의 저널리스트들 그리고 독일의 철학자들과 낭만주의 이전 작가들에 집중되었다”5)고 보았다.
영국인은 경험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는데 경험을 통해 미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부분들의 특별한 비례나 배열에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았다.
“낭만주의자들은 한층 더 나아가서, 미는 실제로 규칙성의 배제, 즉 활력, 생생함, 충만함뿐만 아니라 비례와는 거의 관계가 없는 감정의 표현에 있다”6)고 타타르키비츠는 주장했다.
미학이 18세기에 위기를 맞은 것은 두 부류의 비평가들에 의해서였다.
한편으로는 미를 이론화하는 일이 불가하다는 주장을 편 페트라르카F. Petrarch XII(1304-74)의 영향을 받은 라이프니츠 및 몽테스키와 같은 철학자들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영국인에 의한 객관주의적 개념에 반하는 미는 단지 주관적 인상일 뿐이라는 공격이었다.
라이프니츠는 감성적 지각이 감각적 쾌로 인도될 수 있고, 감각적 쾌는 ‘지적’ 쾌와 나란히 그 권리를 가진다고 보았다.
그에 의하면 진리는 이 감성적 지각에 따라서도 경험되고, 그러므로 해서 이로부터 ‘느껴진 진리’라는 미의 정의가 연역될 수 있다.
미가 사물에 내재해 있는 특성이 아니라 관람자의 정신에 있는 지각이라는 것이 라이프니츠 및 몽테스키와 같은 철학자들의 대체적 주장이었다.
허치슨Francis Hutcheson(1694-1746)은 말했다.
미라는 용어는 우리 안에서 일어난 관념이다. … 미는 어떤 정신의 지각을 나타낸다”고 했고, 흄은 “미는 사물들 자체에서는 아무 특성이 없다. 미란 사물들을 관조하는 정신 속에 존재하며, 각 정신은 서로 다른 미를 지각한다. … 미는 개념상 어떤 지각자와 관련이 있다.
이를 확대 해석하면 상이한 문화권에서는 상이한 미를 지각한다고 할 수 있는데 가령 산수화에 익숙한 한국인이 네덜란드 작가의 작품을 대할 때 네덜란드인이 지각하는 미의 개념으로 그 작품을 대하는 것이 아니라 산수화에서 익힌 미의 개념으로 그 작품을 바라보게 된다.
네덜란드 문화의 요소가 나타난 작품을 대하면서 어쩌면 혼동과 매혹을 느끼며 동시에 적개심을 느끼면서 당혹해 할 수 있고, 불가해한 요소로 인해 혐오감을 갖고 미적 판단을 내리기 어려울 경우도 있을 것이다.
이는 미의 개념이 지각자에게 있다는 말이 그럴 듯해 보이지만 지각은 각기 문화에 따라 같지 않기 때문에 보편적인 의미의 지각자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한다.
미가 주관적이고, 상대적이며, 관례의 문제로 보는 것이 타당하며 보편적인 언어로 정의되어지지 않는다.
한 마디로 정의되지 않는 미의 개념을 보편화하기 위해 고대로부터 이원론이 제기되었다.
이는 인간이 생각해내기 가장 쉬운 방법이다.
하지만 제3의 가능성, 즉 둘 다 아닐 수 있다는 점이다.
소크라테스는 미 자체와 목적을 위한 미로 이분했고, 플라톤은 실제미와 추상미로 이분했으며, 스토아학파는 물질미와 정신미로 이분했다.
“그 밖에도 이시도르Isidor of Seville(560-636경)가 구분한 영혼미decus와 육체미decor, 그로시테스트Robert Grosseteste(1175-1253)가 구분한 수적미in numero와 우아미in grazia, 비텔로Vitelo(13세기경)(및 알하젠Alhazen(965-1038))가 구분한 단순한 파악으로부터의 미ex comprebensione simplici와 익숙함에 근거하는 미consuetudo fecit pulchritudinem, 르네상스가 구분한 미bellezza와 우아grazia, 매너리스트의 적합미와 정묘, 바로크(부우르D. Bouhours(1628-1702))의 숭고와 풍미agrement 등이 있다.”7)
17세기 말로 가면 이런 이분법 혹은 그 이상의 구분이 더욱 활발해지는데 타타르키비츠는 “빼로Charles Perrault(1628-1703)는 임의적 미beaute arbitraire와 확실한 미beaute convaincante를 구분지었고, 이브 마리 앙드레Andre는 본질미와 자연미, 즉 장엄le grand과 우아le gracieux를 구분지었으며, 고전주의자 떼스뜰랭H. Testelin(1616-95)은 실용미, 편의미, 희귀미, 진기미를 구분할 것을 제의했다.
18세기에 이루어졌던 구분들 중에서는 우아미abnmutig, 괴려미prachtig, 격렬미feuerig에 대한 줄쩌Johann Georg Sulzer(1720-79)의 분석이나 미를 소박한 것과 감성적인 것으로 구분하고자 했던 실러의 제의가 언급될 수 있다.
괴테도 완전하게 만들려고는 하지 않았으나 미의 여러 종류 및 그와 관련된 가치들을 장황하게 나열한 적이 있었다”8)고 적었다.
독자들은 위에 열거한 미에 대한 이분법 혹은 그 이상의 구분에 어리둥절할 것이다.
누가 어떻게 구분했는지 일일이 기억할 필요는 없고 다만 한 가지 알아야 할 점은 미는 정의하려고 하면 할 수록 정의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고전 미학이 위기에 직면했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쉽게 무너뜨리지 못하고 미의 다양한 해석으로 그 주위를 맴돌았을 뿐이다.
이런 시도가 18세기에 와서 결실을 맺었는데 숭고에 대한 감정을 인식한 것이다.
롱기누스Longinus(213-273)는 『숭고에 관하여 Peri hypsous』9)에서 연설에서의 숭고성은 망각할 수 없는 것, 저항할 수 없는 것으로 많은 성찰을 야기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숭고에 관하여』는 1674년 니콜라스 브왈로-데프레오에 의해 『숭고와 경이에 대한 소론 Traite du sublime et du merveilleux』이란 제목으로 번역되어 알려지기 시작했다.
브왈로는 숭고한 것들로 매력있고 즐거움을 주며 황홀하게 만드는 대단한 것, 찬탄할 만한 것, 놀랄 만한 것을 꼽았다.
중요한 점은 숭고와 대단한 것은 서로 혼합되어 미가 된다는 것이다.
숭고를 미의 한 변종으로 취급한 이들이 많았으나 애디슨J. Addison(1672-1719)을 비롯해 버크와 칸트 등 대다수에게는 숭고가 미에 대조되는 하나의 독특한 가치로 인식되었다.
18세기 일부 미학자들은 숭고를 아예 미보다 높은 위치에 두려고까지 했다.
숭고에 의해 미는 사람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났다.
고전미학은 더 이상 관심거리가 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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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의 또다른 의미들

 
4. 낭만주의는 고전주의의 특징인 형식과 조화의 추구와는 대조를 이루는 것으로 하나의 의식적인 무정형성이다. 보로위는 이렇게 적었다. "무정형성은 낭만적 예술론의 기본 특징이다. ... 그것은 무형을 추구하는 것이며 형식의 통일성과 조화를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것이다." 이를 달리 말하면 낭만주의는 형식에 대한 내용의 우위이며 '어떻게'보다는 '무엇'이 더 중요하다.
5. 낭만주의는 이미 기성화된 공식들에 대한 반란이다. 말하자면 낭만주의는 이미 인정된 규칙, 원리, 비법, 규범, 관례 등을 무시하고 전복시키는 것이다. 이를 달리 말하면 낭만주의는 문학과 예술에서의 프로테스탄티즘이다.
6. 낭만주의는 문학과 예술에 있어서 자유주의이다. 이 정의는 뛰어난 낭만주의 작가들 중 한 사인 빅토르 위고가 주장한 것이다.
7. 낭만주의는 "영혼이 자신을 낳은 사회에 대해 일으키는 반란이다." 이 정의는 브르조조프스키의 것이다. 그는 자신의 견해를 비유적으로 이렇게 정립하기도 했다. "낭만주의는 뿌리에 대한 꽃의 반란이다."
8. 낭만주의는 문학과 예술에 있어 개인주의이다. 낭만주의는 모든 사람에게 스스로의 영감과 취미에 따라 쓰고 그리고 작곡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한다.
9. 낭만주의는 문학과 예술에 있어서의 주관주의이다.
"낭만적이라 함은 주관적이란 말이다"라고 프랑스 비평가 빼꽁이 쓴 바 있는데,
이 정의는 초기 낭만주의자들이 받아들였음직 하다.
10. 브로진스키는 "낭만주의는 대상으로부터 무한으로 솟아오르는 것이다"라고 했는데,
그는 이런 근거에서 낭만적인 것과 고전적인 것을 구별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렇게 이해되어진 낭만주의는 블레이크에게 다음과 같은 아름다운 시구에서 시적 표현을 얻었다. "네 손 안에 무한함을 지녀라."
11. 낭만주의는 형식이나 내용을 선택할 때 예술에 대한 어떤 규제도 거부하는 것이다.
어떤 것이라도 주제가 될 수 있다.
감각의 세계와 초월적인 세계, 꿈과 환상뿐 아니라 실재, 숭고한 것과 기괴한 것 등 아무것이라도 괜찮다는 것이다.
그리고 삶이 그러하듯 아무것이나 뒤섞여도 무방하다.
이는 빅토르 위고가 자신의 드라마 <크롬웰 Cromwell>의 서문에서 자신의 낭만적인 강령을 정립했던 방식이다.
12. 낭만주의는 차이의 인식, 즉 사물 및 예술의 다양성을 인식하는 것이다.
세상에는 수많은 형식들이 있으며 고전적인 전통에도 불구하고 하나하나의 형식이 더 훌륭하다.
미국의 철학자 러브조이는 저서 <사상사론 Essays on the History of Ideas>(1948)에서 낭만적 태도를 다양론이라 칭하고 이를 고전주의자의 균일론에 대립시켰다.
그는 낭만주의자들이 "다양성의 본질적인 가치"를 발견해냈다고 주장했다.
낭만주의자들이 예술적인 탁월성을 깨닫게 된 것은 바로 다양성에서 그랬다는 것이다.
13. 낭만주의는 자연의 모방이다.
왜냐하면 자연은 다양하고 규격화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연과 동화해야만 예술이 규격화에서 탈피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낭만주의자들은 사실주의, 자연적인 것을 옹호하는 입장에 서서 거기에서 고전주의들의 관례, 도식주의, 인위성 등으로부터 구제되려고 했다.
14. 낭만주의자들에게는 현실이 진정한 존재와는 다르게 하찮고 중요하지 않은 것이었다.
예술은 현실을 단념하는 것으로부터 발생한다고 낭만주의의 선구자들 중 한 사람인 바켄로더는 주장했다.
현실의 가치를 부정하는 데서부터 예술이 나온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는 말하자면 낭만주의는 인간이 세계와 겪는 갈등이라는 것이다.
미키비츠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로 하여금 죽음의 대지 높이 날아올라
환상의 천상계로 향하게 하라.

그에게 낭만주의는 과거, 오랜 옛날로의 비상이었다.
특히 현대와 거리가 먼 중세로 날아가는 것이었다.
15. 낭만주의의 특징은 일정한 종류의 현실, 즉 활력있고 역동적이며 그림같이 생생한 현실이다.
고전주의자들이 찬양하는 정적인 조상용 예술과는 대조적으로 낭만주의는 역동적이며 맹렬하고 생생하며 예사스럽지 않은 것 - 고요하고 균형잡혀 있으며 잘 통제되고 정돈되며 통상적인 것을 넘어서는 광희를 찬미하는 것이다.
16. 낭만적인 작업은 조화로운 미를 목표로 삼는 것이 아니고 어떤 강력한 작용, 사람들에게 미치는 강력한 효과, 즉 사람들을 뒤흔들어놓는 것을 목표로 삼는 작업이다.
그러므로 작품은 아름답기보다는 흥미 있고 자극적이며 동요하게 만드는 편이 더 중요하다.
17. 사실 예술의 주요 범주는 조화가 아니라 갈등이다.
이는 인간사회 못지 않게 인간의 영혼에서도 그러하기 때문에 인간의 예술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타타르키비츠는 이상의 17가지에 8가지를 더한 정의들을 언급하면서 이 모든 정의들은 다양하지만 어느 면에서 서로 관련이 있음을 지적했는데
우선 낭만주의가 고전주의의 반대임을 지적했다.
그는 다양한 정의들에서 낭만적인 미를 다음과 같이 종합적으로 요약했다.
강력한 열정의 미, 상상력의 미, 시적인 것의 미, 서정적인 것의 미, 형식이나 규칙에 종속되지 않는 정신적이고 무정형인 미, 이상야릇함, 무한함, 심오함, 신비, 상징, 다양성의 미, 힘, 갈등, 고통의 미일 뿐 아니라 환상, 소원함, 그림처럼 생생함의 미, 강력한 효과의 미 등등.
낭만주의는 이상과 같은 정의들에서 보듯 양식의 문제가 아니라 정신의 문제였음을 알 수 있다.
양식으로 미술사를 편집하고 가르치려는 사람들에게 낭만주의는 매우 난해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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