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의 폭압적 무단통치에 분노하며
제국주의의 상징물로서의 조선총독부 석조건물이 세워진 것은 1926년이었다.
조선 왕조의 심장부인 경복궁 바로 앞에 건립한 총독부 건물은 장소의 상징적 위치로 보나 서구적 르네상스 양식의 위압적인 외형에서 일제의 탐욕과 지배성을 드러냈다.
일제의 폭압적 무단통치에 분노하며 저항하는 민심이 고조되자 종교계의 지도급 인사들을 중심으로 3·1운동이 계획되었다.
이들은 우드로우 윌슨Woodrow Wilson의 민족자결주의에 고무되어 일어난 상해, 미주, 동경 등지의 독립운동 소식을 듣고 나서 독립선언식과 만세시위를 논의했다.
3·1운동은 고종의 인산일인 3월 1일 정오 서울을 비롯하여 평양, 진남포, 안주, 의주, 선천, 원산 등지에서 동시에 일어났다.
민족대표들은 서울에 있는 음식점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일제 관헌에 자수했다.
파고다 공원에서는 학생들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했고 군중은 독립만세의 함성을 외치며 시위대열을 이루었다.
독립선언식은 대중의 반일감정이 자연발생적으로 폭발하는 만세시위운동으로 확산되었다.
학생들은 3·1운동의 후속조치로 제2의 시위를 계획하고 3월 5일 서울역 광장에서 이를 실행했다.
3월 상순 이후 주로 대도시에서 전개되던 만세시위는 각 지방의 중소도시와 농촌으로 확산되어 갔다.
운동은 5월까지 지속되었으며 특히 3월 하순에서 4월 상순 사이에는 동시다발적이고 격렬한 투쟁양상을 보여 운동이 최고조에 달했다.
그러나 3·1운동은 일제의 잔인한 탄압으로 독립쟁취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고 무단통치로 인해 운동을 지도할 조직이 거의 없어 실패로 돌아갔다.
민족대표들이 국제정세를 지나치게 낙관하여 청원주의적 방식을 채택했을 뿐 아니라 투항적 태도를 취함으로써 민중의 투쟁을 끝까지 이끌지 못한 것도 실패의 원인이었다.
3·1운동 이전에 마르크스·레닌주의 혁명이론의 영향을 받은 급진적 지식인들에 기반을 둔 조직이 한국에는 없었다.
3·1운동 자체가 공산주의의 도래를 촉진한 것은 아니었지만 새로운 이데올로기들이 한국으로 유입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1920년대 초반 국내운동을 주도한 것은 부르주아 민족주의자들이었다.
3·1운동이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신지식층은 다시 한말과 1910년대를 풍미했던 ‘선실력양성론’으로 돌아가 이른바 문화운동을 전개했다.
총독부가 소위 문화정치라 불리는 새롭고 다소 온건한 정책을 썼기 때문에 가능했다.
부르주아 민족주의자들은 1923년부터 물산장려운동을 벌였는데
“내 살림 내 것으로!”라는 구호를 내건 이 운동은 한때 상당한 기세를 올려 토산품 애용이라는 측면에서는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다.
이런 문화운동은 신문화 건설과 실력양성을 민족운동의 일차적 과제로 내세움으로써 결국 민족운동을 탈정치화시키고 말았다.
1920년대에 들어서 사회주의 사상은 민족해방운동의 새로운 이념적 지주로서 급격하게 수용되었다.
국내 일부 지식층이 이 사상을 식민지의 민족문제와 계급문제를 동시에 해결할 수 있는 이념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사회주의 사상은 본격적으로 수용될 수 있었다.
이리하여 1925년경 세 개의 이질적인 단체들 서울파(상해파), 화요회(이르크츠크파), 북풍회(일본에서 귀국한 학생그룹)가 생겼는데,
이들 세 단체는 분파적 차이와 상호 적대감을 가진 채 한국의 사회주의를 대표했다.
이르크츠크파는 이르크츠크 주변에 정착한 러시아 국적의 한국인 일파에서 유래한 것으로 그 일파는 볼세비키와 접촉하면서 1918년 1월 22일에 이르크츠크 공산당의 한국인 분파를 형성했다.
이 단체의 지도자가 남만춘이었다.
이 단체는 여러 도시에 몇 개의 지부를 설치하고 각 지역 대표를 지명했다.
1919년 9월 5일 이 단체는 당파를 조직하고 전로한인공산당All-Russian Korean Communist Party라 명명했으며 후에 이르크츠크파로 알려졌다.
세 단체는 사회주의를 선전했으며 불만에 찬 대중에게 용기를 주어 다양한 조직들로 결합시키려고 했다.
사회주의운동의 기반이 확대됨에 따라 1924년에 조선노농총동맹과 조선청년총동맹 등 전국적인 대중운동단체가 결성되었다.
이런 대중운동단체와 사상단체들을 기반으로 하여 1925년 4월 김재봉을 책임비서로 하는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가 비밀리에 조직되었으며, 두 단체는 곧 코민테른에 대표를 보내 정식 승인을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