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우의 <마네의 손과 모네의 눈>(미술문화) 중에서
인상주의 두 대가 마네와 모네의 우정
브라보, 모네! 고맙다, 마네!
마네와 모네의 이름이 비슷해서 우리에게 한 쌍으로 기억되며 어떤 작품이 마네의 것인지 모네의 것인지 혼돈스러울 때가 있다.
두 사람을 구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마네는 인물화의 화가, 모네는 풍경화의 화가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다만 우리를 혼란에 빠뜨리는 요인이 하나 있는데 마네가 그린 풍경화가 모네의 것과 유사하고 모네가 그린 인물화가 마네의 것을 보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하는 것으로 이 점만 바로 잡는다면 우리 모두 ‘마네와 모네의 전문가’가 될 수 있다.
이런 혼란은 두 사람의 우정이 돈독했고 서로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1832년에 태어난 마네는 모네보다 8살이 많지만 모두 동시대를 풍미한 프랑스의 대표적인 화가들이었다.
부유한 집안 출신 마네는 한 스승 아래서 6년 이상 수학하고 외국을 여행하며 견문을 넓히는 좋은 조건에서 화가로 출발했지만, 가난한 상인의 아들 모네는 스스로 회화를 익히며 역경을 해쳐나가는 불리한 조건에서 화가로 출발했다.
불리한 조건에서 성공했다는 점에서 우리는 모네에게 더 점수를 줄 수 있지만, 작품을 통해 당시 부르주아의 삶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부잣집 아들의 역할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될 것이다.
무엇보다도 고마운 건 가난한 모네에게 여러 차례 돈을 꿔주며 용기를 불어넣어 준 마네의 우정이다.
정상에 먼저 올라 명성을 독차지하려는 이기심이 그때나 지금이나 화가들에게 있는데, 친구를 부축해서 함께 정상에 올랐다는 데서 마네의 고상한 인격은 회화와는 별개로 본받을 만하다.
일찌감치 국전에 입선하고 언론을 통해 문인들의 호평을 받으며 작품을 비싸게 팔 수 있었던 마네는 부르주아답게 유명한 제단사가 지은 전통 양복을 입고 다녔지만, 가난한 후배 화가들과 함께 카페에서 어울리면서 맏형노릇을 했다.
당시 파리의 화단은 작았고 몇몇 카페에 가면 재능 있는 화가들을 만날 수 있었다.
젊은 화가들은 카페에 정기적으로 모여 등용의 문인 국전에 관해 주로 대화하면서 새로운 회화 경향에 관해 의견을 나누었는데, 모네, 세잔, 르누아르, 바지유, 팡탱-라투르, 그리고 미국에서 유학 온 휘슬러 등이 자주 모인 카페는 바티뇰 불바드에 있는 게르부아였다.
이 카페 가까운 곳에 마네의 아파트가 있었고 마네는 부모 몰래 그곳에서 자신의 피아노 선생이며 연상의 네덜란드 여인 수잔과 동거하고 있었다.
카페 게르부아에 모인 화가들은 동네 이름을 따 '바티뇰 그룹' 혹은 '마네파'로 불리었다.
모네가 마네를 만난 것도 이곳에서였다.
금요일이면 카페 주인은 문 입구 왼쪽의 두 테이블을 그들을 위해 비워두었다.
1865년 국전에 모네가 입선하면서 마네의 작품이 함께 소개되기 시작했고 이때부터 평론가들이 두 사람을 한 쌍으로 언급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작품이 국전에서 함께 소개되자 모네의 이름이 마네의 이름과 비슷하다고 지적한 평론가도 있었고, 어느 카툰리스트는 <모네냐 마네냐 - 모네다!>란 제목의 그림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그러나 마네가 있음으로 해서 모네가 가능했다. 브라보, 모네! 고맙다, 마네!"
인물화
인물화는 화가들이 선호한 장르로서 부자들이 자신이나 가족의 초상을 주문하는 경우가 많아 화가들에게는 주요 수입원이었다.
이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인물화는 인간의 개성을 나타내는 데 가장 이상적이라서 화가들이 즐겨 그리게 된다.
풍경화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 모네이지만 그가 그린 인물화는 인물화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 마네의 것에 미치지 못했다.
모네는 모델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포즈를 취하게 했으며 우아함을 표현하려고 하다 보니 오히려 어색함만을 드러냈다.
마네는 모델의 개성을 나타냈으며 자신의 아틀리에를 술집, 온실 등 극중의 환경으로 꾸미더라도 환경에 어울리게 자연스러운 포즈를 취하게 해서 실재감을 살렸는데 이것이 바로 인물화가 지녀야 할 고유한 장점이다.
모네의 <초록 드레스의 여인, 카미유>와 마네의 <베르테 모리소>를 예로 들면, 모네의 인물화는 습작으로 보인다. 습작도 작품이지만 습작은 습작etude으로 소개되어야 하고 작품tableau으로 소개될 경우 비난을 자초한다.
1870년 모네의 첫 번째 부인이 된 카미유는 모네가 선호한 모델이었다.
모네는 카미유를 전형적인 미모의 파리 여인으로 표현하고 싶어 화려한 초록색 실크 드레스와 가장자리에 털이 달린 재킷을 입은 모습으로 허구적, 낭만적으로 연출했는데, 자연을 있는 그대로 그리는 그의 미학에 반하는 것으로 결과는 인위적인 구도에 어색한 포즈로 인해 드레스만 두드러지게 화면을 차지할 뿐 습작의 수준에 머물고 말았다.
베르테 모리소는 여류 화가로 마네의 동생 외젠과 결혼한 여인으로 마네가 선호한 모델이었다.
마네가 그녀를 모델로 그린 그림은 11점이나 된다.
마드리드를 여행하고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마네가 아틀리에에서 그린 것인데, 관람자를 향해 똑바로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에서 그녀가 어떤 내면적인 즐거움에 만족하고 있음을 본다.
마네는 그녀의 개성적인 매력과 지성, 화가로서의 재능, 덜 다듬어진 미모 등을 유감없이 드러냈다.
검정색을 적절하게 사용하기란 쉬운 일이 아닌데 검정색의 강렬한 힘과 단순한 배경, 장미빛이 감도는 우유빛 피부, 당시 유행한 모자의 실루엣, 즉 얼굴의 외양을 감싸는 모자와 끈, 리본 등이 관람자를 사로잡으며 어딘가를 응시하는 그윽한 눈빛의 커다란 눈망울이 인상 깊게 한다.
마네는 베르테의 얼굴을 색으로 이등분하여 밝고 어두운 색을 병렬시켜 조명을 강조하면서 긴급하게 붓을 사용하여 베르테의 내면에서 우러나는 표정을 재빨리 포착했다.
이 작품에서 색을 평편하게 사용한 건 일본 판화에서 받은 영향이고 검정색을 효과적으로 사용한 건 벨라스케스의 영향이다.
풍경화
물의 풍경을 그린 것으로 유명한 모네는 보트를 개조하여 물에 뜨는 아틀리에로 사용했다.
이를 흥미롭게 여긴 마네는 <보트 스튜디오에서 그림 그리는 클로드 모네>란 제목으로 배에서 카미유를 그리는 모네의 모습을 묘사했다.
물의 라파엘로로 불리운 모네는 햇빛에 의해 영롱하게 반짝이는 수면을 시시각각으로 다르게 그렸다.
모네의 <콘타리니 궁전, 베네치아>와 마네의 <베네치아의 대운하>를 비교하면 두 사람의 회화적 차이를 분명하게 구분할 수 있다.
마네는 베니스를 방문할 때 스케치한 것을 파리에서 유화로 완성시켰는데, 모네는 이 작품이 허구적인 장면이라고 인정하지 않았다.
풍경을 세심하게 관찰하여 그 장소에서 완성시키는 모네의 눈으로 볼 때 스케치를 근거로 아틀리에에서 완성시키는 그림에 풍경이 제대로 묘사될 리 만무하며 기분만 냈을 뿐 실재 장면을 충실히 전달한 것이 못되었다.
모네가 빛의 역할에 역점을 두고 그린 데 비해 마네는 빛에 싸인 사물에 역점을 두었다.
붓질을 가느다랗게 사용하고 대상의 실재감과 자연주의 색채를 희생하면서까지 프리즘과도 같은 빛이 굴절하는 물에 마네는 몰입할 수 없었다.
모네의 그림에서는 빛의 반사가 영롱하게 나타나 있어 대상에 대한 관찰이 매우 치밀했음을 알게 하는 데 반해 마네의 대충 칠한 색은 관찰에 근거했다기보다는 자신이 생각하기에 그럴 듯한 색들로 구성했음을 알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