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드의 야심과 나폴레옹의 꿈>(미술문화) 중에서 

 바로크의 끝 로코코

미술에서는 궁정화가들의 영향이 컸다.
예를 들면 프랑수아 부셰의 <마담 퐁파두르의 초상>(1756)은 당시 보편적인 미적 취향이 되었으며 화가지망생들에게 규범이 되었다.
부셰의 작품은 로코코풍으로 이 양식의 특징은 쾌, 환상, 즐거움, 도피주의를 추구하는 것이다.
로코코는 바로크의 마지막을 장식한 양식이자 르네상스 최후에 만개한 꽃이라 할 수 있다.
로코코 양식이 프랑스에 소개된 것은 1700년경이었고 18세기에 유럽 전역에 성행했다.
로코코는 회화와 건축에 나타난 양식으로 그 특징은 밝고 우아하며, 우스꽝스럽거나 쾌활하고, 친밀한 느낌을 준다.
로코코는 바로크(Baroque, 포르투칼어 바로코Barocco에서 온 말로 '불규칙한 진주나 돌'을 의미) 양식에 반발하여 생긴 양식이지만 동시에 바로크로부터 진전된 양식이다.
로코코Rococo란 말은 바로코Barocco와 돌이란 뜻의 프랑스어 로카이유Rocaille의 합성어이다.
로코코의 어원적 의미는 '비속하게 현란하거나 잘 꾸민'이란 뜻이다.
그러나 현재는 이런 경멸적인 뜻으로 이 말을 사용하지는 않는다.
로코코 예술가들은 바로크의 복잡한 구성은 받아들이면서도 화면의 복잡함, 칙칙한 색, 지나친 허식 대신 밝은 핑크색, 파란색, 초록색을 사용하면서 때로는 흰색을 두드러지게 사용했다.
당시 사람들은 루이 14세의 베르사이유 궁전의 지나치게 과대한 장식에 진력을 내고 우아하면서도 편리한 점을 요구했다.
로코코는 이런 요구에 부응해서 처음에는 주로 장식적이었다.
로코코의 대표적인 화가는 와토이고 로코코의 성숙된 낙천적 정신을 잘 표현한 화가들로는 부셰와 프라고나르를 꼽을 수 있다.
로코코 회화의 전형적인 모티프는 남신과 여신의 호색적인 기질에 관해 전래된 신화와 님프, 목자가 있는 목가적 장면들이었다.
신과 목자는 도자기 인형에도 사용될 만큼 흔한 주제였으며 파스텔 핑크, 노란색, 파란색, 초록색 등이 주로 사용되어 화사하게 나타났다.
로코코 회화는 사람들에게 시각적 즐거움을 제공해주었지만 정신적인 면은 결여되어 있었다.
이런 이유로 계몽주의 철학자와 작가들은 회화가 단지 장식적이거나 감각적이어서는 안 된다고 한 것이다. 디드로는 말했다.
"먼저 날 동요시켜라. 날 놀라게 하라. 날 공격하고 전율하게 하며 울게 만들고 조바심나게 하고 화 나게 하라. 그리고 나서 할 수만 있다면 나의 눈을 진정시켜라."
디드로의 말에서 로코코 회화가 무엇을 결여했는지 알 수 있다.
시각적으로만 요란한 로코코 회화에는 관람자의 정신 혹은 영혼에 호소하는 요소가 결여되어 있었다.
미적으로 이런 새로운 변화를 요구하던 시기에 다비드가 화가로서의 삶을 살았다.

프아수아 부셰
로코코 화가로 알려진 부셰는 젊었을 때 와토를 좋아하여 그의 많은 작품을 판화로 제작했다.
그는 1727~31년 이탈리아로 가서 수학했고 파리로 돌아와서는 빠르게 화가로 성공했다.
1765년 앙립미술아카데미의 책임자, 루이 16세의 궁정 수석화가가 되었다.
루이 15세의 정부였던 마담 퐁파두르는 화가들 가운데 부셰를 가장 좋아했다.
부셰는 그녀에게 그림 그리기를 지도했으며 초상을 여러 점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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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우의 <마네의 손과 모네의 눈>(미술문화) 중에서

인상주의 두 대가 마네와 모네의 우정

브라보, 모네! 고맙다, 마네!
마네와 모네의 이름이 비슷해서 우리에게 한 쌍으로 기억되며 어떤 작품이 마네의 것인지 모네의 것인지 혼돈스러울 때가 있다.
두 사람을 구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마네는 인물화의 화가, 모네는 풍경화의 화가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다만 우리를 혼란에 빠뜨리는 요인이 하나 있는데 마네가 그린 풍경화가 모네의 것과 유사하고 모네가 그린 인물화가 마네의 것을 보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하는 것으로 이 점만 바로 잡는다면 우리 모두 ‘마네와 모네의 전문가’가 될 수 있다.
이런 혼란은 두 사람의 우정이 돈독했고 서로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1832년에 태어난 마네는 모네보다 8살이 많지만 모두 동시대를 풍미한 프랑스의 대표적인 화가들이었다.
부유한 집안 출신 마네는 한 스승 아래서 6년 이상 수학하고 외국을 여행하며 견문을 넓히는 좋은 조건에서 화가로 출발했지만, 가난한 상인의 아들 모네는 스스로 회화를 익히며 역경을 해쳐나가는 불리한 조건에서 화가로 출발했다.
불리한 조건에서 성공했다는 점에서 우리는 모네에게 더 점수를 줄 수 있지만, 작품을 통해 당시 부르주아의 삶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부잣집 아들의 역할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될 것이다.
무엇보다도 고마운 건 가난한 모네에게 여러 차례 돈을 꿔주며 용기를 불어넣어 준 마네의 우정이다.
정상에 먼저 올라 명성을 독차지하려는 이기심이 그때나 지금이나 화가들에게 있는데, 친구를 부축해서 함께 정상에 올랐다는 데서 마네의 고상한 인격은 회화와는 별개로 본받을 만하다.
일찌감치 국전에 입선하고 언론을 통해 문인들의 호평을 받으며 작품을 비싸게 팔 수 있었던 마네는 부르주아답게 유명한 제단사가 지은 전통 양복을 입고 다녔지만, 가난한 후배 화가들과 함께 카페에서 어울리면서 맏형노릇을 했다.
당시 파리의 화단은 작았고 몇몇 카페에 가면 재능 있는 화가들을 만날 수 있었다.
젊은 화가들은 카페에 정기적으로 모여 등용의 문인 국전에 관해 주로 대화하면서 새로운 회화 경향에 관해 의견을 나누었는데, 모네, 세잔, 르누아르, 바지유, 팡탱-라투르, 그리고 미국에서 유학 온 휘슬러 등이 자주 모인 카페는 바티뇰 불바드에 있는 게르부아였다.
이 카페 가까운 곳에 마네의 아파트가 있었고 마네는 부모 몰래 그곳에서 자신의 피아노 선생이며 연상의 네덜란드 여인 수잔과 동거하고 있었다.
카페 게르부아에 모인 화가들은 동네 이름을 따 '바티뇰 그룹' 혹은 '마네파'로 불리었다.
모네가 마네를 만난 것도 이곳에서였다.
금요일이면 카페 주인은 문 입구 왼쪽의 두 테이블을 그들을 위해 비워두었다.
1865년 국전에 모네가 입선하면서 마네의 작품이 함께 소개되기 시작했고 이때부터 평론가들이 두 사람을 한 쌍으로 언급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작품이 국전에서 함께 소개되자 모네의 이름이 마네의 이름과 비슷하다고 지적한 평론가도 있었고, 어느 카툰리스트는 <모네냐 마네냐 - 모네다!>란 제목의 그림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그러나 마네가 있음으로 해서 모네가 가능했다. 브라보, 모네! 고맙다, 마네!"

인물화
인물화는 화가들이 선호한 장르로서 부자들이 자신이나 가족의 초상을 주문하는 경우가 많아 화가들에게는 주요 수입원이었다.
이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인물화는 인간의 개성을 나타내는 데 가장 이상적이라서 화가들이 즐겨 그리게 된다.
풍경화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 모네이지만 그가 그린 인물화는 인물화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 마네의 것에 미치지 못했다.
모네는 모델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포즈를 취하게 했으며 우아함을 표현하려고 하다 보니 오히려 어색함만을 드러냈다.
마네는 모델의 개성을 나타냈으며 자신의 아틀리에를 술집, 온실 등 극중의 환경으로 꾸미더라도 환경에 어울리게 자연스러운 포즈를 취하게 해서 실재감을 살렸는데 이것이 바로 인물화가 지녀야 할 고유한 장점이다.
모네의 <초록 드레스의 여인, 카미유>와 마네의 <베르테 모리소>를 예로 들면, 모네의 인물화는 습작으로 보인다. 습작도 작품이지만 습작은 습작etude으로 소개되어야 하고 작품tableau으로 소개될 경우 비난을 자초한다.
1870년 모네의 첫 번째 부인이 된 카미유는 모네가 선호한 모델이었다.
모네는 카미유를 전형적인 미모의 파리 여인으로 표현하고 싶어 화려한 초록색 실크 드레스와 가장자리에 털이 달린 재킷을 입은 모습으로 허구적, 낭만적으로 연출했는데, 자연을 있는 그대로 그리는 그의 미학에 반하는 것으로 결과는 인위적인 구도에 어색한 포즈로 인해 드레스만 두드러지게 화면을 차지할 뿐 습작의 수준에 머물고 말았다.
베르테 모리소는 여류 화가로 마네의 동생 외젠과 결혼한 여인으로 마네가 선호한 모델이었다.
마네가 그녀를 모델로 그린 그림은 11점이나 된다.
마드리드를 여행하고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마네가 아틀리에에서 그린 것인데, 관람자를 향해 똑바로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에서 그녀가 어떤 내면적인 즐거움에 만족하고 있음을 본다.
마네는 그녀의 개성적인 매력과 지성, 화가로서의 재능, 덜 다듬어진 미모 등을 유감없이 드러냈다.
검정색을 적절하게 사용하기란 쉬운 일이 아닌데 검정색의 강렬한 힘과 단순한 배경, 장미빛이 감도는 우유빛 피부, 당시 유행한 모자의 실루엣, 즉 얼굴의 외양을 감싸는 모자와 끈, 리본 등이 관람자를 사로잡으며 어딘가를 응시하는 그윽한 눈빛의 커다란 눈망울이 인상 깊게 한다.
마네는 베르테의 얼굴을 색으로 이등분하여 밝고 어두운 색을 병렬시켜 조명을 강조하면서 긴급하게 붓을 사용하여 베르테의 내면에서 우러나는 표정을 재빨리 포착했다.
이 작품에서 색을 평편하게 사용한 건 일본 판화에서 받은 영향이고 검정색을 효과적으로 사용한 건 벨라스케스의 영향이다.

풍경화
물의 풍경을 그린 것으로 유명한 모네는 보트를 개조하여 물에 뜨는 아틀리에로 사용했다.
이를 흥미롭게 여긴 마네는 <보트 스튜디오에서 그림 그리는 클로드 모네>란 제목으로 배에서 카미유를 그리는 모네의 모습을 묘사했다.
물의 라파엘로로 불리운 모네는 햇빛에 의해 영롱하게 반짝이는 수면을 시시각각으로 다르게 그렸다.
모네의 <콘타리니 궁전, 베네치아>와 마네의 <베네치아의 대운하>를 비교하면 두 사람의 회화적 차이를 분명하게 구분할 수 있다.
마네는 베니스를 방문할 때 스케치한 것을 파리에서 유화로 완성시켰는데, 모네는 이 작품이 허구적인 장면이라고 인정하지 않았다.
풍경을 세심하게 관찰하여 그 장소에서 완성시키는 모네의 눈으로 볼 때 스케치를 근거로 아틀리에에서 완성시키는 그림에 풍경이 제대로 묘사될 리 만무하며 기분만 냈을 뿐 실재 장면을 충실히 전달한 것이 못되었다.
모네가 빛의 역할에 역점을 두고 그린 데 비해 마네는 빛에 싸인 사물에 역점을 두었다.
붓질을 가느다랗게 사용하고 대상의 실재감과 자연주의 색채를 희생하면서까지 프리즘과도 같은 빛이 굴절하는 물에 마네는 몰입할 수 없었다.
모네의 그림에서는 빛의 반사가 영롱하게 나타나 있어 대상에 대한 관찰이 매우 치밀했음을 알게 하는 데 반해 마네의 대충 칠한 색은 관찰에 근거했다기보다는 자신이 생각하기에 그럴 듯한 색들로 구성했음을 알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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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난 고갱과 슬픈 고흐> 중에서

물 같은 성격과 불 같은 성격


폴 고갱과 빈센트 반 고흐는 우리에게 한 쌍으로 기억된다.
두 사람이 함께 작업한 적이 있고, 회화에 관해 논쟁하다가 서로 미워한 적이 있으며, 쌀쌀맞은 고갱의 태도에 화가 치밀어 고흐가 분을 삭이지 못하고 자신의 귓불을 잘라 창녀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준 해프닝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두 사람에 의해 회화가 전통과 단절하고 근대에 들어설 수 있었기 때문이다.
파리에는 전통과 권위를 자랑하는 최고의 미술학교 에콜 데 보자르가 있었고, 명망 있는 대가의 문하생들도 많았지만, 가난하고 충분히 교육을 받지 못한 아마추어 두 화가가 그들 모두를 제치고 근대회화를 보여준 것은 여간 통쾌한 일이 아닐뿐더러 두 사람의 노력이 피땀으로 얼룩져 있어 생각할 때마다 가슴에 전율이 생긴다. 
두 사람의 성격은 물과 불 같아 도저히 화해할 수 없는 기질이다.
고흐보다 5살 많은 고갱은 인습타파주의자였으며, 빈정거리는 말을 했고, 냉소적이었으며, 궤변을 일삼았고, 무심하며, 상대방을 자신의 손아귀에 넣어야 직성이 풀리는 너무 성격이 강한 사람이었다.
반면 고흐에게는 북유럽 특유의 거친 면이 있었지만 천성이 열심히 노력하는 기질이었고, 동료에게 격정적인 애정을 쏟는 불같은 사람이었으며, 우정을 위해서는 목숨이라도 내어줄 듯하지만 버림을 받게 되면 자신을 괴롭히는 매우 내성적인 사람이었다.

장 발장과 수도승의 자화상
두 사람이 주고받은 자화상을 보면 성격과 화풍을 동시에 알 수 있다.
고갱의 <자화상>을 보면 성난 모습으로 고뇌에 찬 순교자와도 같다.
자신을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 미제라블>의 주인공 장 발장에 비유했다. 사회를 위해 헌신하지만 지명수배를 피해 끊임없이 도망치는 신세였던 장 발장과 마찬가지로 자신도 회화를 위해 헌신하지만 사회로부터 부당한 대접을 받고 있다고 그는 분노했다.
그는 <자화상>에서 “예술가의 영혼을 타오르게 만드는 격렬한 화염을 묘사하고자 했다”고 고흐에게 보낸 편지에 적었다. 
<자화상>과 편지를 받고 고흐도 자신의 모습을 그려 고갱에게 답례로 보냈는데 <자화상(폴 고갱에게 바침)>이다.
고흐는 일본 판화에서 승려를 보고 자신의 머리를 깎았다. 그는 자신이 회화의 세계에서 도를 구하는 수도승과 같다고 생각한 것이다.
고갱은 사회를 위해 희생하는 장 발장이었고 고흐는 회화를 위해 도를 구하는 수도승이었다. 근대회화는 장 발장과 수도승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자화상에서 눈과 코 부분을 때어내 화풍을 비교해보자.
고갱은 살색을 칠했고, 눈썹 가장자리를 어두운 색으로 테를 둘렀으며, 물감 위에 연필이나 목탄을 사용해 드로잉의 효과를 첨가한 데 비해 고흐는 물감을 2~3mm 정도로 두텁게 사용하면서 눈썹을 삼차원적으로 표현하고 볼 또한 거친 붓자국으로 물감을 거칠게 두텁거나 얇게 칠하면서 살색이 아닌 감정을 나타내는 표현적이고 상징적인 색을 사용했다.
두 자화상에서 기법의 차이가 매우 상이하게 나타나 두 사람의 독특한 감각을 느낄 수 있다.

수수께끼 정물화
고갱과 고흐의 공통점은 열악한 환경에서 스스로 혹독한 훈련을 통해 화가가 된 것이다.
고갱은 컵을 화면에 크게 부각시키며 테이블 너머의 사람들을 배경으로 정물화를 그렸고 고흐는 성경과 소설을 주제로 정물화를 그렸는데, 수수께끼 정물화는 두 사람의 미학을 비교하는 열쇠가 된다.
여기에 나타난 회화적 경향은 이후 두 사람의 작품에서 일관되게 나타난다.
둘 다 전통을 무시한 창작이었고, 상징주의 요소가 강하게 나타났으며, 자신들의 정체성을 말해준다. 
고흐의 <펼친 성경이 있는 정물>에서 펼친 성경은 구약 이사야서 35장 ‘종의 노래’이다.
인류의 죄를 대신해서 고난 받는 종의 모습은 훗날 그리스도의 전형이 되었다.
성경 앞의 낡은 소설은 에밀 졸라가 1884년에 쓴 <삶의 기쁨>이다.
커다란 성경은 권위를 나타내는 데 비해 작은 소설은 그러하지 못하지만 밝게 빛난다.
고흐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대를 이어 목사가 되지 못한 것을 부끄럽게 생각했다.
아버지가 과로로 목사관 앞에서 쓰려져 세상을 떠나자 아버지를 추모하며 그린 것이다.
고흐는 목사가 되어 집안의 대를 이으려고 했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하지 못한 그는 아무리 노력을 해도 신학교 입학시험에 합격할 수 없어 포기해야 했다.
그래서 그림을 통해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교화하고 희망을 주는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와 고갱의 그림을 상징주의로 분류하는 것은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이나 사물이 상징적 의미를 표현하기 때문이다.
표현이 강렬해서 두 사람의 작품을 표현주의로 분류할 수도 있다.
소설의 내용을 아는 사람은 고흐의 정물화가 무엇을 상징 혹은 표현하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삶의 기쁨>은 매우 진지한 철학적 의문을 내포한 책으로 저자는 전통 신앙이 부재한 가운데서 우리가 삶의 모든 비극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의미 있는 존재로 남아 있을 수 있겠는지 독자들에게 묻는다.
고흐는 신앙이 삶의 기쁨을 줄 수 있다고 말한다. 
고갱의 <정물이 있는 실내>는 매우 복잡하고 특이하게 구성되었다.
화면 하단 테이블 위에는 커다란 오브제들이 널려 있고 중앙에 가구가 어렴풋이 보이며 배경의 사람들은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으로 인해 실루엣으로 나타난다.
사람을 그린 것을 인물화라 하고 사물을 그린 것을 정물화라고 하는데 그는 이 둘을 합쳐서 인물화와 정물화의 장르 구분을 없앴다.
사물이 화면에 더 크게 부각되었으므로 정물화라고 한 것이다.
공간에 대한 배분도 수수께끼인데 침대가 유난히 높고 카드놀이를 하는 테이블은 침대보다 낮으며 5명이 보이지만 그들이 어떤 관계인지 짐작할 수 없다.
화면 앞 테이블에는 스칸디나비아인들이 즐겨 사용하는 나무로 제작된 커다란 컵 탱카드가 있는데 이 컵은 그의 그림에 종종 등장한다.
컵 너머로 문이 열린 방안의 장면을 그린 것인지 아니면 테이블 뒤 벽에 걸린 거울에 비친 장면을 그린 것인지 알 수 없다.
정물의 전문적 요소와 개인적 주제가 혼합된 이 정물화는 여전히 수수께끼이다.

외로운 죽음
고흐에게는 간질병이 있었다. 간질 증세가 나타날 때 그는 소리를 듣고 영상이 눈앞에 어른거린고 했다.
작가 귀스타브 플로베르는 “진주는 조개의 병의 결과이며 스타일은 대단한 고통의 산물이다”라고 했는데 고흐에게 어울리는 말이다.
그는 발작하게 되면 공간이 보인다고 했는데 그 공간이 작품에서 노란색으로 나타났다.
노란색은 그가 즐겨 사용한 고흐의 색이다.
노란색의 상징적 의미를 알면 그의 회화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발작을 일으켜 병원에 격리되기 전 1888년 12월과 이듬해 초 그의 그림에서 노란색이 배경으로 현저하게 나타난 것을 볼 수 있다.
고흐는 1년 동안 요양원에 격리되었고 병세가 호전되어 파리 근교 오베르로 갔다.
그는 10년 동안 그림을 그릴 수 있었던 것은 동생 테오가 매달 생활비를 보내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생이 결혼하고 자식을 낳자 형을 보양하기 어려워졌다.
고흐는 동생에게 경제적으로 부담을 주는 데 대해 늘 괴로워했고 결국 동생의 짐을 덜어주기 위해 1890년 7월 27일 오베르 근교 성곽 뒤로 가서 권총으로 자신을 쏘았다.
총알이 심장에 박혔다. 그가 어디에서 권총을 구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37해 생을 쓸쓸히 마감했고 오베르 공동묘지에 묻혔다. 
고갱은 문명이 인간성을 파괴한다고 비판하면서 생의 후반을 프랑스 식민지 타히티 섬에서 지냈다.
말년에 걸작 <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누구이고, 어디로 가는가?>를 그렸는데, 이 물음은 그가 평생 자신에게 그리고 관람자에게 물었던 화두였다.
그림에는 신생아로부터 늙은이까지 인생의 파노라마가 펼쳐져 있다.
인생의 수수께끼를 상징하는 대작이다. 그는 1903년 8일 동안 집에 혼자 있었는데 4월 30일 갑자기 어지럽고 경련을 이기지 못해 커다란 소리로 이웃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는 밤낮을 구별하지 못하고 헛소리를 지르다가 뇌일혈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섬의 공동묘지에 묻혔고 묘비도 세워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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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난 고갱과 슬픈 고흐> 중에서 

아마추어 화가에서 전업작가로


시가상자 뚜껑의 추상풍경화
성격이 외곬수인 폴 고갱은 자신의 생각을 거침없이 말하고 망설임 없이 실천에 옮기는 행동의 화가였습니다.
늘 신념에 차 있고 매사에 자신만만했으며 선뜻 행동을 취하고는 후회하는 법이 없었습니다.
이는 분명 단점이지만 개성을 존중하는 예술에서는 장점이 될 수 있습니다.
돌출적인 그의 거친 태도는 동료 예술가들과 반목하게 했지만 그보다 나이 어린 예술가들에게는 친절하고 따뜻하게 대해주었으므로 지도자로 대접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선각자 혹은 스승으로 여기며 따르는 화가들이 그의 주변에는 많았습니다.
1888년 9월 어느날 폴 세뤼지에가 고갱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 그를 따라 들로 나갔습니다.
고갱은 연못가를 산책했고 세뤼지에가 뒤를 따랐습니다.
고갱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이 나무가 어떻게 보이느냐?”
“노랗게 보입니다.”
“그럼, 네가 생각하기에 가장 적합한 노란색을 칠해라!”
“ … ”
“저 연못에 비친 나무들은 어떻게 보이느냐?”
“파랗게 보입니다.”
“그렇다면 두려워 말고 순수 파란색을 칠하거라.”
“잎들은?”
“주홍색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주홍색을 칠해야겠지.”
고갱의 지시대로 세뤼지에는 작은 시가상자 뚜껑에 풍경을 그렸는데,
아주 과격한 형태와 색의 대비로 나타났으며 평편하게 칠한 색들은 거의 완전추상이 되었습니다.
그는 화구는 들고 나갔지만 캔버스를 가지고 간 것이 아니라서 시가상자에 그린 것입니다.
풍경을 보고 강렬하게 느끼고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형태와 색을 고갱의 지시대로 신속하게 그린 추상풍경화입니다.
구체적인 형태와 수많은 유사한 색조를 생략해도 우리는 이 그림이 연못 건너편을 바라보고 그리면서 건너편 나무들이 연못에 투영된 장면을 그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노란색과 주홍색이 주로 사용한 데서 단풍이 든 가을풍경이란 것도 알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이 연못을 주위를 돌아 화면 중앙 상단에 보이는 나무 아래로 걸어갔을 거라고 짐작도 할 수 있습니다.
추상화라고 해도 이만큼의 정보를 제공해준다면 이는 매우 성공적입니다.
세뤼지에는 기분이 좋아 이 그림을 파리로 가지고 가서 친구들에게 자랑했는데 정말 그가 고갱의 지시대로 그린 것인지 의심스러울 정도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이와 유사한 그림을 이후에 그린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작품에 대한 칭찬은 고갱의 몫이어야 합니다.
세뤼지에는 작품의 제목을 <부적>이라고 했습니다.
<부적>을 아카데미 쥘리앙에서 함께 수학하는 친구들에게 보여주었고 모리스 드니는 “우리는 <부적>을 보자 모든 미술품을 변조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훗날 술회했는데
그만큼 회화에 자신이 생긴 것입니다.
형태와 색을 상징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면 과거 화가들이 그린 것보다 훨씬 다르게 그릴 수 있다는 자신이 생긴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세뤼지에와 드니는 친구들과 함께 ‘나비파 Nabis’ 그룹을 결성했는데 나비스Nabis는 히브리어로 예언자들이란 뜻으로 스스로를 회화의 예언자들임을 자처했고 당시 막 성행하기 시작한 아르 누보 발전에 한 몫을 했습니다.
여기서 잠시 세뤼지에가 누구이고 아르 누보가 무엇인지 살펴본 후 고갱의 이야기를 계속하겠습니다.
폴 세뤼지에Paul Serusier(1863~1927)는 파리에서 철학을 공부한 뒤 아카데미 쥘리앙에 입학했습니다.
회화에 관한 이론가이기도 한 그가 고갱을 만난 건 1888년 퐁타방에서였고 고갱의 상징주의 회화에 곧 매료되었습니다.
고갱을 만난 뒤 화가로서 눈이 열렸다고 말할 정도로 그는 고갱이 형태와 색을 상징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에서 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드니, 보나르, 뷔야르 등과 함께 ‘나비파’ 그룹을 창설한 후 그는 드니와 더불어 그룹의 이론가로 활약했습니다.
그는 1921년에 『회화의 ABC』를 출간했는데 색의 대비와 비례에 관한 체계를 정리한 책입니다.
아르 누보Art Nouveau는 ‘새 예술’이란 뜻으로 1880~1910년 유럽 전역에서 유행한 장식미술 양식을 일컫는 말입니다.
오늘날 유행하는 모든 디자인이 이 양식에서 출발하여 발전한 것입니다.
가구, 책에 사용되는 판화와 삽화 그리고 표지, 포스터, 벽지, 장신구, 보석, 유리제품, 부엌 용기, 건물 외부장식, 실내장식, 램프, 의상 등 우리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세련된 디자인으로 보기 좋고 아름다우며 더욱 실용적이 되게 하는 양식이 성행하기 시작했는데,
‘나비파’ 그룹도 이런 디자인 분야에서 왕성하게 활약했습니다.
디자인이란 상징과 추상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최소한의 선과 함축적 혹은 추상적 형태 그리고 상징적인 색으로 대상을 효과적으로 그리고 호감이 가게 표현하는 것으로 고갱이 강조한 상징과 추상을 ‘나비파’ 그룹 외에도 초기 아르 누보 디자이너들이 활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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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난 고갱과 슬픈 고흐> 중에서

천치가 아니면 천재일 거야  
 

폴 고갱은 1848년 6월 7일 파리에서 태어났는데,
이 날은 ‘2월 혁명’으로 프랑스의 왕정이 무너지고 공화정이 수립된 날로 거리에는 바리케이드가 쳐져 있었고 총격전이 벌어졌습니다. 고갱의 아버지 클로비는 『르 나시오날』 신문 정치부 기자로 혁명군을 지지했습니다.
혁명이 성공할 기미가 보이지 않자 클로비는 페루로 망명하던 도중 페루의 수도 리마로 가는 배에서 10월 30일 동맥류파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한 살밖에 안 된 고갱은 아버지를 잃은 채 두 살 난 누나 마리, 어머니와 함께 리마에 도착했습니다.
어머니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외삼촌에게 자신과 어린 남매를 의탁해야 했습니다.
외할아버지가 따뜻하게 보살펴주었으므로 고갱은 부유한 환경에서 5년 동안 지냈습니다.
1854년 말 어머니는 남매를 데리고 프랑스로 돌아와 시아버지가 남긴 오를레앙의 유산을 인수하고 살았습니다.
이듬해 고갱은 오를레앙의 예수회 소속 학교에 입학하여 프랑스어를 배우며 규칙적인 생활에 적응했습니다.
훗날 고갱은 이 시절을 회상했습니다.
오를레앙에 살던 숙부는 키가 아주 작았고 이름은 이지도르였는데 사람들은 그분을 ‘지지’라 불렀다.
숙부는 종종 내가 페루에서 돌아와 할아버지 집에 살던 때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나는 칼로 단도 손잡이를 깎아 조각을 새겨넣기도 했다.
어른들이 이해할 수 없는 수많은 작은 꿈들을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웃의 노인이 놀라 소리쳤다.
“이 아이는 훌륭한 조각가가 될 거야.”
불행하게도 그분의 예언은 적중하지 못했다.
훗날 나는 오를레앙의 기숙사에 들어갔는데 학교 선생님이 말했다.
“이 아이는 천치가 아니면 천재일 거야.”
하지만 나는 둘 중 어느 편도 아니었다.
생에 대부분을 화가로 살았으므로 조각가가 될 것이란 노인의 예언이 적중하지 못했다고 고갱은 술회했지만 말년에 나무를 깎아 제작한 조각품들은 매우 우수했으므로 선생님의 예언은 정확했습니다.

덴마크 여인과 결혼하다
유산을 다 소비한 후 고갱이 11살 때 어머니는 리세로 이주해 모자제조 공장에서 일했습니다.
고갱은 리세의 생메밍 신학교로 전학해야 했는데 규율이 매우 엄한 학교였습니다.
졸업 후 해군이 되기 위해 예비학교에 입학했고 어머니는 아들의 뜻을 꺾지 않았습니다.
그가 학교를 졸업한 건 17살 되던 1865년 12월이었고,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해군사관학교에 입학되지 못하고 상선대 사관후보생으로 입대해야 했습니다.
선실에서 근무했고, 그가 탄 배는 남아메리카로 항해했는데 한 살 때 아버지와 함께 페루로 향했던 항로였습니다.
1866년에 2등 항해사로 진급했으며 그가 승선한 배는 13개월 동안 지중해와 북극해 등 세계 전역을 누볐습니다.
고갱이 어머니의 타계소식을 접한 건 1867년 인도의 어느 항구에서였습니다.
어머니는 “주위 사람들의 거부감이 심해 언젠가 넌 고립되고 말 테니 모쪼록 하는 일에 정진하기 바란다”는 유언을 아들에게 남겼습니다.
아들이 타협을 모르고 자기 신념대로 행동하는 기질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끊임없이 노력할 것을 당부한 것입니다.

고갱은 1868년 해군에 입대했고, 프랑스 왕 나폴레옹 3세가 1870년 프로이센을 공격하면서 보불전쟁을 일으키자 그는 제롬 나폴레옹호를 타고 노르웨이와 덴마크 국경 근처에서 복무하게 되었습니다.
나폴레옹 3세는 프랑스 혁명을 일으켜 유럽에 맹위를 떨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조카입니다.
그의 장담과는 달리 프랑스는 전쟁에 패하고 말았습니다.
전쟁에 패한 프랑스 경제는 이후 여러 해에 걸쳐 매우 극심하게 나타나 실업자가 크게 증가했습니다.
1871년 4월에 제대하고 파리로 돌아온 고갱은 생클루 거리에 있는 집이 모두 불에 타 사라져버린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브레다 가에 사는 대부 귀스타브 아로사를 찾아갔는데 아로사는 어머니와의 친분으로 고갱과 마리의 후견인이기도 했습니다.
금융업자이면서 사진작가이기도 한 아로사는 현대화를 수집했는데 소장한 작품 중에는 들라크루아, 코로, 쿠르베, 용킨트, 피사로 등의 작품도 있었습니다.
그의 친구 중에는 유명한 사진작가 펠렉스 나다르도 있었으며 나다르는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전시회를 위해 자신의 작업실을 빌려준 사람입니다.
아로사는 고갱에게 베르텡의 은행에서 주식중개에 관한 일을 할 수 있도록 직장을 마련해주었고,
고갱은 부동산 처분과 주식을 사고파는 일을 했으며,
곧 유능한 사원으로 인정받았습니다.
25살 되던 해 고갱은 아로사 집안과 알고 지내던 23살의 덴마크 여인 메테 소피 가트를 만났습니다.
미모와 지성을 갖춘 메테는 자유분방하며 거침없는 성격으로 고갱과 비슷하지만 매우 합리적인 생활방식이 몸에 벤 여인이었습니다.
고갱이 메테를 만난 건 고갱의 조각가 친구 장 폴 오베의 아내가 운영하던 하숙집에서였습니다.
메테는 코펜하겐의 실업가 헤고르의 권유로 파리를 여행하던 중이었습니다.
고갱과 메테는 수개월에 걸친 연애 끝에 1873년 11월 22일 소샤 가에 있는 루터교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결혼식을 올릴 때까지만 해도 메테는 고갱에게 화가로서의 재능이 있는 줄 몰랐고 또 작품을 수집하는 데 흥미가 있는 줄도 몰랐습니다.
메테는 다만 파리에서의 생활에 만족하고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메테는 1874년 8월에 첫 아들 에밀을 낳고 3년 후 딸을 낳았는데 이름을 고갱의 어머니 이름 알린으로 지었습니다.
메테는 2년 간격으로 아들 클로비(1879년), 장 르네(1881년), 폴-롤라(1883년) 셋을 더 낳았습니다.
고갱은 알린을 무척 사랑했으며 타히티에 거주할 때 알린이 20살로 요절했다는 비보를 받고 몹시 울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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