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난 고갱과 슬픈 고흐> 중에서

천치가 아니면 천재일 거야  
 

폴 고갱은 1848년 6월 7일 파리에서 태어났는데,
이 날은 ‘2월 혁명’으로 프랑스의 왕정이 무너지고 공화정이 수립된 날로 거리에는 바리케이드가 쳐져 있었고 총격전이 벌어졌습니다. 고갱의 아버지 클로비는 『르 나시오날』 신문 정치부 기자로 혁명군을 지지했습니다.
혁명이 성공할 기미가 보이지 않자 클로비는 페루로 망명하던 도중 페루의 수도 리마로 가는 배에서 10월 30일 동맥류파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한 살밖에 안 된 고갱은 아버지를 잃은 채 두 살 난 누나 마리, 어머니와 함께 리마에 도착했습니다.
어머니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외삼촌에게 자신과 어린 남매를 의탁해야 했습니다.
외할아버지가 따뜻하게 보살펴주었으므로 고갱은 부유한 환경에서 5년 동안 지냈습니다.
1854년 말 어머니는 남매를 데리고 프랑스로 돌아와 시아버지가 남긴 오를레앙의 유산을 인수하고 살았습니다.
이듬해 고갱은 오를레앙의 예수회 소속 학교에 입학하여 프랑스어를 배우며 규칙적인 생활에 적응했습니다.
훗날 고갱은 이 시절을 회상했습니다.
오를레앙에 살던 숙부는 키가 아주 작았고 이름은 이지도르였는데 사람들은 그분을 ‘지지’라 불렀다.
숙부는 종종 내가 페루에서 돌아와 할아버지 집에 살던 때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나는 칼로 단도 손잡이를 깎아 조각을 새겨넣기도 했다.
어른들이 이해할 수 없는 수많은 작은 꿈들을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웃의 노인이 놀라 소리쳤다.
“이 아이는 훌륭한 조각가가 될 거야.”
불행하게도 그분의 예언은 적중하지 못했다.
훗날 나는 오를레앙의 기숙사에 들어갔는데 학교 선생님이 말했다.
“이 아이는 천치가 아니면 천재일 거야.”
하지만 나는 둘 중 어느 편도 아니었다.
생에 대부분을 화가로 살았으므로 조각가가 될 것이란 노인의 예언이 적중하지 못했다고 고갱은 술회했지만 말년에 나무를 깎아 제작한 조각품들은 매우 우수했으므로 선생님의 예언은 정확했습니다.

덴마크 여인과 결혼하다
유산을 다 소비한 후 고갱이 11살 때 어머니는 리세로 이주해 모자제조 공장에서 일했습니다.
고갱은 리세의 생메밍 신학교로 전학해야 했는데 규율이 매우 엄한 학교였습니다.
졸업 후 해군이 되기 위해 예비학교에 입학했고 어머니는 아들의 뜻을 꺾지 않았습니다.
그가 학교를 졸업한 건 17살 되던 1865년 12월이었고,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해군사관학교에 입학되지 못하고 상선대 사관후보생으로 입대해야 했습니다.
선실에서 근무했고, 그가 탄 배는 남아메리카로 항해했는데 한 살 때 아버지와 함께 페루로 향했던 항로였습니다.
1866년에 2등 항해사로 진급했으며 그가 승선한 배는 13개월 동안 지중해와 북극해 등 세계 전역을 누볐습니다.
고갱이 어머니의 타계소식을 접한 건 1867년 인도의 어느 항구에서였습니다.
어머니는 “주위 사람들의 거부감이 심해 언젠가 넌 고립되고 말 테니 모쪼록 하는 일에 정진하기 바란다”는 유언을 아들에게 남겼습니다.
아들이 타협을 모르고 자기 신념대로 행동하는 기질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끊임없이 노력할 것을 당부한 것입니다.

고갱은 1868년 해군에 입대했고, 프랑스 왕 나폴레옹 3세가 1870년 프로이센을 공격하면서 보불전쟁을 일으키자 그는 제롬 나폴레옹호를 타고 노르웨이와 덴마크 국경 근처에서 복무하게 되었습니다.
나폴레옹 3세는 프랑스 혁명을 일으켜 유럽에 맹위를 떨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조카입니다.
그의 장담과는 달리 프랑스는 전쟁에 패하고 말았습니다.
전쟁에 패한 프랑스 경제는 이후 여러 해에 걸쳐 매우 극심하게 나타나 실업자가 크게 증가했습니다.
1871년 4월에 제대하고 파리로 돌아온 고갱은 생클루 거리에 있는 집이 모두 불에 타 사라져버린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브레다 가에 사는 대부 귀스타브 아로사를 찾아갔는데 아로사는 어머니와의 친분으로 고갱과 마리의 후견인이기도 했습니다.
금융업자이면서 사진작가이기도 한 아로사는 현대화를 수집했는데 소장한 작품 중에는 들라크루아, 코로, 쿠르베, 용킨트, 피사로 등의 작품도 있었습니다.
그의 친구 중에는 유명한 사진작가 펠렉스 나다르도 있었으며 나다르는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전시회를 위해 자신의 작업실을 빌려준 사람입니다.
아로사는 고갱에게 베르텡의 은행에서 주식중개에 관한 일을 할 수 있도록 직장을 마련해주었고,
고갱은 부동산 처분과 주식을 사고파는 일을 했으며,
곧 유능한 사원으로 인정받았습니다.
25살 되던 해 고갱은 아로사 집안과 알고 지내던 23살의 덴마크 여인 메테 소피 가트를 만났습니다.
미모와 지성을 갖춘 메테는 자유분방하며 거침없는 성격으로 고갱과 비슷하지만 매우 합리적인 생활방식이 몸에 벤 여인이었습니다.
고갱이 메테를 만난 건 고갱의 조각가 친구 장 폴 오베의 아내가 운영하던 하숙집에서였습니다.
메테는 코펜하겐의 실업가 헤고르의 권유로 파리를 여행하던 중이었습니다.
고갱과 메테는 수개월에 걸친 연애 끝에 1873년 11월 22일 소샤 가에 있는 루터교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결혼식을 올릴 때까지만 해도 메테는 고갱에게 화가로서의 재능이 있는 줄 몰랐고 또 작품을 수집하는 데 흥미가 있는 줄도 몰랐습니다.
메테는 다만 파리에서의 생활에 만족하고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메테는 1874년 8월에 첫 아들 에밀을 낳고 3년 후 딸을 낳았는데 이름을 고갱의 어머니 이름 알린으로 지었습니다.
메테는 2년 간격으로 아들 클로비(1879년), 장 르네(1881년), 폴-롤라(1883년) 셋을 더 낳았습니다.
고갱은 알린을 무척 사랑했으며 타히티에 거주할 때 알린이 20살로 요절했다는 비보를 받고 몹시 울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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