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난 고갱과 슬픈 고흐> 중에서
아마추어 화가에서 전업작가로
시가상자 뚜껑의 추상풍경화
성격이 외곬수인 폴 고갱은 자신의 생각을 거침없이 말하고 망설임 없이 실천에 옮기는 행동의 화가였습니다.
늘 신념에 차 있고 매사에 자신만만했으며 선뜻 행동을 취하고는 후회하는 법이 없었습니다.
이는 분명 단점이지만 개성을 존중하는 예술에서는 장점이 될 수 있습니다.
돌출적인 그의 거친 태도는 동료 예술가들과 반목하게 했지만 그보다 나이 어린 예술가들에게는 친절하고 따뜻하게 대해주었으므로 지도자로 대접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선각자 혹은 스승으로 여기며 따르는 화가들이 그의 주변에는 많았습니다.
1888년 9월 어느날 폴 세뤼지에가 고갱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 그를 따라 들로 나갔습니다.
고갱은 연못가를 산책했고 세뤼지에가 뒤를 따랐습니다.
고갱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이 나무가 어떻게 보이느냐?”
“노랗게 보입니다.”
“그럼, 네가 생각하기에 가장 적합한 노란색을 칠해라!”
“ … ”
“저 연못에 비친 나무들은 어떻게 보이느냐?”
“파랗게 보입니다.”
“그렇다면 두려워 말고 순수 파란색을 칠하거라.”
“잎들은?”
“주홍색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주홍색을 칠해야겠지.”
고갱의 지시대로 세뤼지에는 작은 시가상자 뚜껑에 풍경을 그렸는데,
아주 과격한 형태와 색의 대비로 나타났으며 평편하게 칠한 색들은 거의 완전추상이 되었습니다.
그는 화구는 들고 나갔지만 캔버스를 가지고 간 것이 아니라서 시가상자에 그린 것입니다.
풍경을 보고 강렬하게 느끼고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형태와 색을 고갱의 지시대로 신속하게 그린 추상풍경화입니다.
구체적인 형태와 수많은 유사한 색조를 생략해도 우리는 이 그림이 연못 건너편을 바라보고 그리면서 건너편 나무들이 연못에 투영된 장면을 그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노란색과 주홍색이 주로 사용한 데서 단풍이 든 가을풍경이란 것도 알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이 연못을 주위를 돌아 화면 중앙 상단에 보이는 나무 아래로 걸어갔을 거라고 짐작도 할 수 있습니다.
추상화라고 해도 이만큼의 정보를 제공해준다면 이는 매우 성공적입니다.
세뤼지에는 기분이 좋아 이 그림을 파리로 가지고 가서 친구들에게 자랑했는데 정말 그가 고갱의 지시대로 그린 것인지 의심스러울 정도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이와 유사한 그림을 이후에 그린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작품에 대한 칭찬은 고갱의 몫이어야 합니다.
세뤼지에는 작품의 제목을 <부적>이라고 했습니다.
<부적>을 아카데미 쥘리앙에서 함께 수학하는 친구들에게 보여주었고 모리스 드니는 “우리는 <부적>을 보자 모든 미술품을 변조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훗날 술회했는데
그만큼 회화에 자신이 생긴 것입니다.
형태와 색을 상징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면 과거 화가들이 그린 것보다 훨씬 다르게 그릴 수 있다는 자신이 생긴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세뤼지에와 드니는 친구들과 함께 ‘나비파 Nabis’ 그룹을 결성했는데 나비스Nabis는 히브리어로 예언자들이란 뜻으로 스스로를 회화의 예언자들임을 자처했고 당시 막 성행하기 시작한 아르 누보 발전에 한 몫을 했습니다.
여기서 잠시 세뤼지에가 누구이고 아르 누보가 무엇인지 살펴본 후 고갱의 이야기를 계속하겠습니다.
폴 세뤼지에Paul Serusier(1863~1927)는 파리에서 철학을 공부한 뒤 아카데미 쥘리앙에 입학했습니다.
회화에 관한 이론가이기도 한 그가 고갱을 만난 건 1888년 퐁타방에서였고 고갱의 상징주의 회화에 곧 매료되었습니다.
고갱을 만난 뒤 화가로서 눈이 열렸다고 말할 정도로 그는 고갱이 형태와 색을 상징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에서 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드니, 보나르, 뷔야르 등과 함께 ‘나비파’ 그룹을 창설한 후 그는 드니와 더불어 그룹의 이론가로 활약했습니다.
그는 1921년에 『회화의 ABC』를 출간했는데 색의 대비와 비례에 관한 체계를 정리한 책입니다.
아르 누보Art Nouveau는 ‘새 예술’이란 뜻으로 1880~1910년 유럽 전역에서 유행한 장식미술 양식을 일컫는 말입니다.
오늘날 유행하는 모든 디자인이 이 양식에서 출발하여 발전한 것입니다.
가구, 책에 사용되는 판화와 삽화 그리고 표지, 포스터, 벽지, 장신구, 보석, 유리제품, 부엌 용기, 건물 외부장식, 실내장식, 램프, 의상 등 우리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세련된 디자인으로 보기 좋고 아름다우며 더욱 실용적이 되게 하는 양식이 성행하기 시작했는데,
‘나비파’ 그룹도 이런 디자인 분야에서 왕성하게 활약했습니다.
디자인이란 상징과 추상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최소한의 선과 함축적 혹은 추상적 형태 그리고 상징적인 색으로 대상을 효과적으로 그리고 호감이 가게 표현하는 것으로 고갱이 강조한 상징과 추상을 ‘나비파’ 그룹 외에도 초기 아르 누보 디자이너들이 활용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