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록과 친구들> 중에서 

 양식을 속임수로 본 윌렘 드 쿠닝

 윌렘 드 쿠닝Willem de Kooning은 1904년 네덜란드의 로테르담에서 태어났고 그의 부모는 그가 세 살 때 이혼했다.
1916년 그는 지방에 있는 상업미술가의 장식 조수로 일하면서 밤에는 로테르담 아카데미에서 1924년까지 수학했다.
이 시기에 그는 같은 나라 사람 피에 몬드리안Piet Mondrian으로부터 주로 영향을 받았다.
그는 1926년에 미국으로 왔는데 “나는 이곳에 예술가들이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우리는 네덜란드에서 미국에 예술가들이 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다만 미국에 가서 열심히 일한다면 편한 인생을 살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고 예술을 위해서라면 당연히 유럽으로”라고 훗날 말했다.
그가 친구 화가의 소개로 아실 고르키를 만난 건 1929년이었다.
드 쿠닝은 “나는 네덜란드 아카데미에서 완전히 훈련을 받고 이곳으로 왔지만 고르키는 그런 훈련이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는 여섯 살 때 조지아주에 있는 티플리스에서 이곳으로 온 후 미국인처럼 성장했다.
그리고 신비스러운 이유로 회화와 예술을 잘 이해하고 있었는데 그는 자연스럽게 알았던 것이다.
내가 더 잘 알고 느끼고 이해했어야 했는데 실제로는 그가 더 잘 알고 느끼고 이해하고 있었다”라고 했다.
드 쿠닝이 고르키를 위해 할 수 있었던 것은 회화 기교를 가르쳐주는 것이었다.
드 쿠닝은 초상과 인물을 주로 그렸는데 알베르토 자코메티의 후기 이미지를 고대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지만 그는 자코메티와는 다르게 더욱 과격한 방법으로 이그러진 사람의 모습을 그렸으며 특히 여인을 기분내키는 대로 이그러뜨렸다.
그는 처음에 입체주의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그는 말했다.
"나는 모든 회화 경향들 중에서 입체주의를 가장 좋아한다.
입체주의 그림은 불확실한 재현의 분위기를 지니며, 시적인 구조 속에는 무엇이든 가능하고, 예술가는 직관을 나타낼 수 있다.
과거의 미술을 버리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보태려고 하는 것이다.
다른 회화에서 내가 받아들이는 요소들은 입체로부터 온 것이다.
입체주의는 하나의 흐름이었지만 하나의 흐름으로 고정되지 않았다."
드 쿠닝은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의 자동주의 기교를 조심성스럽게 실험하면서 그런 방법에 손질을 가한 후 자신의 그림에 응용했다.
그렇게 해서 그린 그림들은 피카소가 1930년대 말에 환상적인 분위기가 나도록 그린 그림과 유사한 데가 있었다.
그는 초현실주의와 입체주의 회화방법을 개인적인 의도로 합성하면서 분석입체주의 방법으로 색을 제거하기도 했다.
그의 그림에서 꽉찬 형태는 루벤스와 렘브란트의 회화방법을 응용한 결과였다.
그는 검정색과 흰색만을 사용해 사람의 모습을 그려 더욱 인간적인 모습을 강조했는데 당시 폴록과 몇몇 화가들이 검정색과 흰색을 주로 사용해 그렸다.
존 그래엄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는 것은 캔버스와 물감의 논쟁이 시작되는 것과 같다"고 했는데 드 쿠닝의 그림에 어울리는 말이다.
드 쿠닝은 노력하는 예술가였다.
그는 평론가 로젠버그에게 말한 적이 있다.
"나는 절충적인 화가로서 미술사 책 어느 페이지를 열어도 그것들로부터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드 쿠닝의 친구들은 그가 그림을 미완성으로 남긴다고 했는데 인터뷰에서 그는 말했다.
"양식이라는 건 속임수이다.
양식은 반 되스부르그와 몬드리안의 지독한 아이디어들로서 그들은 양식을 강요했다.
힘의 반사적 저항력은 양식을 유지하고 그림의 내용들을 진행하는 것이다.

나는 몬드리안에게 반했다.
나는 늘 그의 주문에 반해 있었다."
드 쿠닝은 그림을 그릴 때 자꾸만 고치는 습관이 있다고 했는데 이는 조각가 알베르토 자코메티가 사물을 그리고서 자꾸 고치는 습관으로 인해 결국에는 실재보다 작게 그리게 되었다고 한 말을 상기하게 했다.
자꾸 고치는 드 쿠닝의 습관은 자코메티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의 고유한 회화방법이 되었다.
그는 말했다.
"나는 작품에 관해 확고하게 단언하는 사람이 아니다.
나의 인생에서 확고한 형태는 적다. 난 밤새 바꿀 수가 있다.

나는 커다란 그림을 몇 주 동안 그리며 물감이 늘 젖어 있게 하는데 그래야 바꾸고 또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내 말은 같은 것을 고치고 또 고친다는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폴록과 친구들> 중에서 

 미리암을 위한 프란츠 클라인

프란츠 클라인Franz Klein(1910~62)은 폴록보다 2살이 많고 드 쿠닝보다는 6살이 어렸는데 드 쿠닝과는 단짝이었지요.
그의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성격이 매우 온화했습니다.
그는 1950년 뉴욕의 이간 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가지면서 뉴욕 화단에 정식으로 데뷔했습니다.
주량의 대단해서 폴록과 밤늦도록 술을 마실 정도였답니다.
클라인은 1910년 펜실바니아 주의 윌크스-바레에서 태어났고, 아버지는 독일 함부르크 툴신이고 어머니는 콘발에서 온 사람이었는데 아버지가 1917년에 타계한 지 3년만에 어머니는 재혼했습니다.
클라인은 운동을 아주 좋아했으므로 1929년 바시티Varsity 미식축구 팀의 주장이 되었습니다.
그는 1931~5년까지 보스턴 대학에서 회화를 공부했으며 1937년 파리로 갔다가 다시 런던으로 가서 헤덜리Heatherley 미술학교에서 수학했습니다.
런던에서 클라인은 엘리자베스 빈센트 파슨즈와 결혼했는데 그녀는 새들러Sadler의 웰즈 발레단Wells Ballet에 속했던 무용수였습니다. 웰즈 발레단은 나중에 로열 발레단으로 명칭이 바뀌었습니다.
1938년 미국으로 돌아온 그는 뉴욕 주 버펄로Buffalo에 있는 백화점에서 디자이너로 잠시 근무한 적이 있지요.
이듬해 뉴욕으로 와서 클라인은 더러 작품을 발표하고 했는데 그가 추상표현주의 그림을 그리게 된 것은 아주 우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의자를 검정색으로 굵게 드로잉한 후 무료해서 돋보기를 갖고 자신이 그린 그림을 살펴보다가 확대기 속에서 아주 인상적인 느낌을 발견했답니다.
그때부터 그는 더이상 오브제를 재현하는 그림을 그리지 않고 추상화에 전념하기 시작했지요.
1952년 그의 그림이 휘트니 뮤지엄이 발향하는 연감에 수록되었고 1955년에는 모마MoMA에서 열린 '열두 명의 미국 화가와 조각가들' 전시회에 초대받았습니다.
모마에서는 1952년에 이미 그의 작품을 구입했으며 휘트니 뮤지엄은 1955년에 그의 대표작 <마호닝 Mahoning>을 구입했습니다.
미리암양이 도판을 올린 대로 클라인의 그림들은 추상인 동시에 실존주의적입니다.
바로 코 앞에서 보고 싶다고 했는데 가장 적절한 표현입니다.
물감의 실존을 가까이서 바라볼 때 그의 작품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습니다.
미리암양이 올린 드 쿠닝의 작품 몇 점이 클라인의 것들과 유사한 데가 있지 않아요?
가까이서 바라본 듯한 구성의 추상 말입니다.
그것들은 드 쿠닝이 클라인의 영향을 받아서 그린 것들입니다.
클라인은 자신의 그림을 '시추에이션 Situation"이라고 말하곤 했답니다.
캔버스에 막 색을 칠하게 되면 시추에이션이 시작된다는 것이지요.
그는 또 그림을 그릴 때 마음을 백지화한다고 했는데 이는 마치 동양의 선zen 사상을 가진 예술가와도 같은 태도였습니다.
그에게 그림은 그려지는 과정에서의 느낌에 의해 결정됩니다.
그는 "내 것이든 남의 것이든 최종적인 그림에는 화가의 감정이 나타나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클라인은 시사풍자를 창조한 오노레 도미에를 좋아했고 렘브란트와 고야의 작품을 좋아했습니다.
1950년부터 그는 싸구려 상업용 페인트와 붓을 사용해 단숨에 그리는 듯한 붓질의 행위를 보여주었다.
과감히 단순화한 이미지와 색들을 검정색과 흰색으로 제한하여 그린 그의 그림들은 마치 동양의 붓글씨를 확대한 듯한 느낌을 주었는데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때로 내가 흰 캔버스에 검정색으로 어떤 부호 같은 것을 그린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나는 검정색을 사용하듯이 흰색을 사용하며 그만큼 흰색은 내게 중요하다."
클라인은 단숨에 그림을 그리면서 육체적 행위의 에너지와 붓의 운동을 나타냈으며 행위와 자세의 아이디어를 조직으로 완전하게 표현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그림들은 사람들에게 액션 페인팅Action Painting으로 쉽게 이해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다비드의 야심과 나폴레옹의 꿈> 중애서  

 

다비드와 신고전주의

 
18세기 말과 19세기 초 프랑스 화단뿐 아니라 유럽을 대표할 만한 화가 자크 루이 다비드를 말할 때면 우리는 신고전주의라는 말을 함께 떠올리게 된다.
신고전주의는 하나의 양식이었다.
1750년에 시작되어 1830년까지 유럽에 널리 유행된 신고전주의는 당대의 미술에 만족하지 못한 예술가들에 의해 창조된 새로운 양식으로, 고대의 미술 특히 그리스의 미술을 창조적 규범으로 삼아 새롭게 미술을 시작하려 했던 일련의 예술가들의 노력에 의한 성과물이다.
이 시기의 예술가들은 고대 그리스인이 추구한 이상과 이미지들을 재활시키려고 했다.
신고전주의 양식은 회화, 조각, 건축뿐 아니라 도자기, 가구, 택스타일에서도 두드러졌다.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 꽃피운 이 양식은 유럽 전역으로 퍼졌으며 1830년 이후에는 확고한 주류 양식으로 미술사에 자리매김하였다.
유럽의 집, 교회, 뮤지엄, 은행, 상점들이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다지아니되었고 건물 안에 들어서면 의자, 침대, 주전자, 버클, 램프, 의상, 심지어는 헤어스타일까지도 그리스 양식이어서 고전 일색이었다.
황제 나폴레옹이 미술에서 신고전주의를 가장 좋아했던 것도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신고전주의의 특징은 단순한 형태와 색을 추구하면서 복잡한 구성을 제거하는 것이다.
꾸밈이 없고 기하적인 이 시기의 작품들에는 르네상스의 마지막 거추장스러운 양식들인 바로크와 로코코에 대한 의도적인 배제도 내재되어 있었다.

신고전주의는 이탈리아로의 대여행을 통해 시작되었다.
이탈리아에는 고대 그리스의 걸작들을 모방한 미술품들이 많았고 고대 유물들이 발견되자 고전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더욱 더 활발해졌다.
교황 클레멘트 11세는 고대 로마의 유물을 수집했고 그를 이은 클레멘트 12세는 1734년 고대 유물을 일반인들도 관람할 수 있도록 유럽에 처음으로 뮤지엄을 건립했다.
고고학자들이 1738년 헤르쿨라네움에서 발굴작업을 폈으며 10년 후에는 폼페이에서 발굴잡업을 했다.
프랑스인 수도원장 베르나르 드 몽포콩이 1719년에 출간한 로마 미술에 관한 책 <형태로 설명되고 재현된 고대>는 예술가와 작가들에게 훌륭한 자료가 되었다.
이후 고대에 관심을 가진 작가들이 이탈리아를 여행하고 고대에 관한 서적들을 출간했고 고대의 문화들을 삽화로 재현해냈다.
이런 출간물과 삽화들은 과거 번성했던 문화에 대해 낭만적인 생각을 갖게 해주었지만 삽화를 보고 이탈리아를 여행한 사람들은 부서지고 낡은 유물들을 보고 실망하기도 했다. 이렇듯 유럽 전체가 고대에 대한 향수에 젖어 있을 때 다비드가 화가로 활약했다.
그리고 그는 신고전주의에서 빼놓을 수 없는 가장 중요한 인물이 되었다.
18살에 왕립미술아카데미에 입학한 그는 유럽에 명성이 자자한 조제프-마리 비엥으로부터 수학했다.
아직 파리 화단에는 로코코 양식이 건재할 때였는데 비엥은 그림을 아름답게 꾸미는 로코코 양식보다는 그리스 미술에 매료되어 거전을 주제로 그리고 있었다.
다비드는 비엥을 통해 신고전주의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다비드는 1774년 로마대상을 수상했고 2년 후 비엥과 함께 이탈리아로 갔다.
다비드는 로마에 체류하면서 고대에 관해 탐닉했으며 새로운 고전주의 재활에 앞장을 선 영국 화가 개빈 해밀턴을 만났다.
1780년 프랑스로 돌아온 후에는 신고전주의 화가로서 자신의 입지를 굳혔는데 프랑스의 신고전주의 개념은 그의 일련의 작품들을 통해 이루어졌다.
최초의 미술평론가 드니 디드로는 다비드를 가리켜 '신푸생주의자'라고 불렀다.
영국의 화가 조수아 레이놀즈는 다비드의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보고 또 보려고 살롱전이 열린 전시장을 무려 18차례나 방문한 후 그의 작품이 모든 면에서 완벽하다고 극찬하면서 그 완벽함을 미켈란젤로가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에 그린 프레스코화에 견주었다.
레이놀즈는 다비드를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 이래 최고의 화가로 꼽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다비드의 야심과 나폴레옹의 꿈> 중에서 

 다비드와 정치

 다비드는 37살 때 <호라티우스의 맹세>를 그렸는데, 신고전주의 회화에서 가장 훌륭한 작품으로 꼽힌다.
아마 1640년 피에르 코르네유가 쓴 <호라티우스 가족>을 읽었거나 이 가족에 관한 연극을 보고 아이디어를 구한 것 같은데, 이 작품은 당시 발레로도 공연되는 등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졌다.
그는 아버지 앞에서 맹세하는 호라티우스 삼형제를 삼각구도로 묘사함으로써 조국을 위해 몸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는 영웅들의 모습을 나타내려고 했다.
삼형제는 말없이 결연한 자세를 취하고 여인들은 슬퍼하면서도 소리내어 울지 않는데, 이는 결의에 찬 감정을 나타낸 것으로 빙켈만은 이런 감정의 억제를 예술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성격으로 꼽았다.
맹세는 방에서 이루어졌지만 다비드는 텅빈 방에 불필요한 가구들을 두지 않음으로써 관람자의 시선이 딴 곳을 향하지 못하게 했다.
드로잉에는 있었던 계단이나 불필요한 인물들을 제거함으로써 구상을 더욱 간결하게 했다.
그는 작은 무대에서 이루어지는 한 장면처럼 넓은 공간을 허락하지 않았으며 형상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되게 했다.
그는 고대 로마의 릴리프 조각을 연구하면서 이러한 공간구성 방식을 터득하였다.
다비드가 <호라티우스의 맹세>를 그릴 때만 해도 프랑스 대혁명(1789~93)이 일어나기 5년 전이었지만, 1790년대 초에는 이 작품이 새로 집권한 프랑스 공화당에 충성하는 제스처로 해석되었다.
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다비드는 정치에 관여하지 않았지만 혁명이 일어난 이후 정치에 매우 적극적으로 관여했으며 그의 작품은 정치 선전용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다비드는 1780년대에 이미 영웅주의와 조국에 충성을 표하는 그림을 많이 그렸고 1783년에 그린 <헥토르의 죽음을 애도하는 안드로마케>도 그런 내용의 작품들 가운데 하나였다.
그는 헥토르(그리스의 장군 아킬레우스에 의해 죽은 트로이의 왕자)의 아내 안드로마케가 비탄에 젖어있는 모습을 묘사하면서 위대한 영웅 헥토르의 고결한 시신이 침상에 누워 있는 모습으로 구성했다.
침상 아래에 검과 투구를 그려넣어 관람자로 하여금 전쟁의 공포를 느끼게 했다.
그는 푸생과 개빈 해밀턴이 그린 죽음을 애도하는 작품들을 보고 영감을 받았다.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의 한 장면을 그린 이 작품으로 다비드는 더욱 더 유명해졌고 왕립미술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되는 영광을 누릴 수 있었다.
다비드는 정치와 인연을 맺으면서 부와 영광을 누리게 되었으며 프랑스 화단에 막강한 영향력을 주는 권력도 탐하게 되었다.
역사화를 그려서 명성을 얻은 후 그리스 역사에서 좀더 엄격한 주제를 선택하여 그렸는데 그것이 <소크라테의 죽음>이다.
마치 푸생이 그린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이 작품에는 놀랍게도 빛을 효과적으로 사용한 그의 기교가 두드러진다.
이런 기교는 카라바조로부터 받은 영향이었다.
<소크라테스의 죽음>이 성공하자 왕은 두 번째 작품을 의뢰했으며 그는 자신이 선택한 <브루투스의 아들들의 시신을 운반하는 릭토르들>을 그렸다.
최초의 집정관인 브루투스는 자신의 두 아들이 로마제국에 반하는 음모를 꾸민 사실을 알고 두 아들을 사형시킨 후 집으로 돌아왔는데 릭토르(집정관을 따라다니며 죄인을 잡던 관리)들이 집정관으로 하여금 장사지낼 수 있도록 시신들을 가져왔다.
브루투스는 아버지로서의 역할 이전에 집정관으로서 공화국에 대한 의무를 다하려고 했다.
공화국에 대한 충성이 우선적인 가치라는 교훈을 주는 이 작품을 1790년대 햑명적 이상주의자들이 환호하며 반긴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혁명을 일으킨 사람들은 극장을 자신들의 회의장으로 사용하면서 단두대로 목을 치는 사형제도를 실행하기로 결정하고 반혁명적인 인사들을 처형했으며 루이 16세와 왕후도 처형했다.
다비드는 루이 16세의 단두대 처형에 찬성표를 던졌다.
프랑스 공화국은 대의회장의 연단에 혁명의 과정에서 죽어간 두 사람의 모습을 그린 다비드의 그림 두 점을 걸어놓았다.
두 사람 모두 1793년에 반대파에 의해 살해된 사람들이다.
다비드는 정치에 적극적으로 관여했다.
루이 16세를 처형하던 날 밤 대의회 의원이었던 미셀 르 펠레티에가 왕의 호위대에 속한 군인에 의해 살해되었고, 그로부터 6개월 후에는 과격한 사상을 가진 장-폴 마라도 광신적인 반혁명파 여인 샬로트 코르데이의 칼에 찔려 숨을 거두었다.
마라는 목욕하는 도중에 살해되었다.
마라가 이런 모습으로 살해된 상황은 품위가 있거나 웅장한 그림이 되기 어렵지만 다비드는 실제 현장을 세밀히 살펴본 후 순교자와도 같은 죽음을 맞이한 영웅의 모습으로 마라를 묘사해냈다.
다비는 <마라의 죽음>에서 영웅주의와 미덕의 이상을 표현했다.
다비드는 마라를 알고 있었고 그를 좋아했다.
그는 마라를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위대한 사상가들에 견주었을 뿐 아니라 자신이 그린 소크라테스와도 비교할 만한 인물로 높이 평가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다비드의 야심과 나폴레옹의 꿈> 중에서

 다비드와 나폴레옹

 
나폴레옹은 다비드가 프랑스의 최고 화가라는 사실을 소문을 통해 익히 알고 있었다.
그는 26살에 소장으로 진급했으며 동시에 프랑스 국내 치안사령관이라는 막중한 권력을 가졌다.
사관학교를 졸업한 지 불과 10년만에 그는 실질적으로 프랑스 군대의 최고 권력자가 된 것이다.
다비드가 나폴레옹을 만난 것은 두 사람이 서로를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나폴레옹이 다비드와 정식으로 교신한 것은 1797년 봄과 여름이었다.
나폴레옹은 이탈리아로 원정을 떠나면서 다비드에게 자신과 함께 동행하여 전투장면을 그려줄 것을 청했지만 다비드는 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다비드가 나폴레옹을 처음 만난 것은 1797년 12월 10일 파리에서였다.
전승하고 돌아온 나폴레옹을 정부가 공식 축하하는 축하연에서였다.
나폴레옹은 다비드를 꼭 만나기를 원했으므로 집정부 간사에게 다비드와 함게 식사하도록 자리 배정을 지시했다.
다비드 역시 나폴레옹을 만나기를 원했던 터라 두 사람은 식사를 하면서 화기애애하게 대화했다.
식사 도중 다비드는 나폴레옹에게 초상을 그리겠다고 했고 나폴레옹은 쾌히 승낙했다.
이 날 이후 다비드는 나폴레옹의 사람이 되었고 나폴레옹은 그를 가리켜 "프랑스 최고의 화가"라고 극찬했다.
나폴레옹은 1799년 30살에 프랑스의 최고 권력자 제1통령에 올랐고 35살에 황제에 즉위했다.
나폴레옹의 권력은 막강했고 그의 신임을 받고 있던 다비드는 "프랑스 화단의 나폴레옹"이라는 별명을 들을 정도로 또한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다.
나폴레옹과 조제핀이 황제와 황후로 즉위하는 대관식을 그린 것은 다비드가 프랑스 최고의 화가임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21살 연상인 다비드를 다루기가 쉽지는 않았다.
나폴레옹의 휘하에서 많은 장군들이 부를 축적했듯이 다비드도 부를 탐닉했다.
나폴레옹은 대관식에 앞서 다비드에게 그날의 장면을 네 개의 캔버스에 그릴 것을 공식으로 청했으나 다비드가 요구하는 엄청난 금액을 지불할 형편이 못되었고 다비드는 두 점만을 그렸다.
다비드는 나폴레옹을 정치가로서 존경했지만 그를 통해 그림값을 터무니없이 올려 받으려고 했다. 나폴레옹도 다비드를 존경했지만 그림값을 지나치게 청구할 때는 다른 화가들에게 의뢰했다.
<황제와 황후의 대관식>은 프랑스 화가가 그린 가장 큰 작품들 중 하나였다.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거행된 대고나식에는 200여 명이 공원되었는데 다비드가 묘사한 많은 사람들의 모습이 실제와 동일했다.
과연 다비드가 아니면 해낼 수 없는 작업이었다.
1812년에 그린 <서재에서의 나폴레옹>은 혈기왕성하고 매끈하고 날렵한 몸매의 운동선수와도 같은 영웅이 아니라 머리가 약간 벗겨지고 배가 나오기 시작한 모습의 나폴레옹이었다.
나폴레옹은 이 작품을 보고 매우 만족해 하며 다비드에게 말했다.
"선생이 날 제대로 묘사했군요. 친애하는 다비드 선생, 난 밤에 국민의 행복을 위해 일하고 낮에는 국민의 영광을 위해 일합니다."
그 밖에도 다비드는 나폴레옹의 청을 받고 그의 초상을 여러 점 그렸다.
앞서 혁명기간 중에 그린 초상화와 마찬가지로 다비드의 작품은 순수 미학적 동기에서 그린 것들이 아니라 정치적 목적에 부합되게 그려진 것들이다.
그래서 사실이 많이 왜곡되었다.
다비드의 뛰어난 기교와 신고전주의 양식의 특징인 단순하고 명료함은 서양미술사에 있어 신고전주의를 완성했다는 칭찬을 받지만 내용에 있어서는 다분히 정치선전적이었고 관람자를 오도하는 것들이었다.
화가가 정치가와 유착되었을 때, 명성과 부를 가져다주기는 하지만 그 화가의 작품이 미학적으로는 파산지경에 이른다는 것을 다비드의 일생을 통해 볼 수 있다.
결국 정치가와의 유착고리가 끊어졌을 때, 즉 나폴레옹이 몰락했을 때 나폴레옹의 사람 다비드도 그와 더불어 몰락할 수밖에 없었다.
나폴레옹은 강제로 세인트 헬레나 섬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외로운 죽음을 맞이했고 다비드는 스스로 벨기에로 망명하여 그곳에 뼈를 붇었다.
미술과 정치의 관계는 이 책의 주요 내용들 중 하나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