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네의 손과 모네의 눈>(미술문화)에서
서양미술의 근대
미술에 있어서 서양 미술의 근대가 언제 누구에 의해서 시작되었냐고 묻는다면,
근대에 대한 정의에 따라서 미술사학자들마다 의견이 분분할 것이다.
가장 오랜 시기와 작가를 꼽는다면
오르낭 출신 귀스타브 쿠르베Gustave Courbet(1819~77)가 1849년에 그린 <오르낭의 매장 The Burial at Ornans>이라고 할 수 있다.
주제 선택에 있어 현실주의자였던 쿠르베는 낭만적 과장이나 이국적 정서를 배제하고
프랑스 낭만주의의 창시자 제리코Jean Louis Andre Theodore Gericault(1791~1824)와 들라크루아Ferdinand-Victor-Eugene Delacroix(1798~1863)의 사실적 요소를 지속시켰다.
그는 사소하거나 일화적인 것에 장엄함을 부여하고,
색조를 부드럽게 하거나 이상화시키지 않고,
추하거나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에 위엄을 불어넣었다.
정치적 사회주의자이기도 한 쿠르베는 말했다.
“추상적이어서 눈에 보이지 않고 또한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것은 회화의 영역에 속하지 않는다.”
쿠르베는 예술가의 주관적인 느낌을 무시하고 사물을 보이는 대로 재현함으로써 사진과 마찬가지로 그림 자체가 사실임을 강조했다.
눈에 보이는 것만을 그려서 리얼리즘을 선포했는데, 이는 우리가 말하는 사물을 똑같이 그리는 사실주의와는 다르다.
그는 현실을 강조한 것으로 눈에 보이는 것을 재현함으로써 현실에 내재된 진실 혹은 사실성을 드러내려는 것이었다.
<오르낭의 매장>은 실제 장례식을 재현한 것으로
예수나 역사적으로 위대한 인물의 죽음만이 슬픈 것이 아니라 이웃의 죽음이 한층 더 슬프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 사실성이 서양 미술의 근대를 열었다.
같은 의미로 비너스나 신화상의 인물이 아닌 이웃에 사는 여인의 누드를 그린 것이 인상주의의 아버지로 불리우는 에두아르 마네Edouard Manet(1832~83)의 <올랭피아 Olympia>(1863)이다.
샤를 보들레르와 에밀 졸라의 칭찬을 받은 이 작품은 1865년의 살롱전에 입선했다.
이 작품은 베네치아 미술 최고 전성기를 주도한 티치아노Tiziano Vecellio(1488/90~1576)의 <우르비노의 비너스 Venus of Urbino>(1538년경)에서 영감을 받아 그린 것으로
티치아노의 주제를 새롭게 재해석하면서 여신을 상징하는 비너스 대신 벌거벗은 모델을 침대에 누이고 옆에는 흑인 하녀를 세웠다.
모델은 빅토린이었고 올랭피아는 당시 화류계에서 흔한 이름이었다.
<오르낭의 매장>을 보면 쿠르베가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난 사건을 가까이서 본 듯이 그렸음을 알 수 있고, 줄지어 앉은 사람들의 모습은 명암에 의한 살붙임으로 양감이 명확히 나타나 있다.
이에 비하면 <올랭피아>는 평편하고 깊이가 결여되어 보인다.
이 작품에서 사물의 양감은 경계에 의해서라기보다는 강한 명암 차이에 의해 암시되며, 완만하게 안으로 향해 둥근감을 지닌 것처럼 보이지 않더라도 인체가 실재감을 지닌 채 그려져 있음을 본다. 이런 점은 르네상스 이래 추구되어 온 환상에 눌려왔는데 마네가 회화의 이차원적 평면성과 삼차원 인물의 관계를 문제삼았다.
자신들이 존재하는 곳에서 본 광경이 빛의 풍경인 것을 깨달은 사람은 클로드 모네Claude Monet(1840~1926), 카미유 피사로Camille Pissarro(1831~1903) 등을 주축으로 한 인상주의 화가들이었다.
대기와 색채를 표현한 인상주의의 특징을 가장 강력하게 대표하는 모네가 말년에 그린 <수련 Nympheas> 시리즈에서 연꽃, 조용한 수면, 물 위에 떠 있는 나뭇잎 등이 떨리는 빛의 소용돌이에 빠져들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여기에서 각 사물이 고유한 색을 지니고 있다는 여태까지의 지식은 무시되고 그곳에서 발산되는 빛의 파장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다.
빛은 혼색을 가능한 한 억제한 밝은 물감의 색조 차이로 치환되어 표현되는데 회화로서의 빛의 추구라 할 수 있다.
테오도르 루소Theodore Roussau(1812~67), 카미유 코로Jean-Baptiste Camille Corot(1765~1875) 등 바르비종파Barbizon school 화가들도 야외에서 직접 풍경을 그리면서 자연을 영위하는 심원함과 그 속에서 사는 즐거움을 합친 부드러움까지도 목표로 했다.
바르비종파라는 명칭은 퐁텐블로 숲 외곽의 작은 마을 바르비종에서 유래했다.
1840년대 후반 테오도르 루소와 그의 추종자들이 이곳에 정착했다.
그들은 각기 독자적인 양식으로 특수한 유형의 풍경화를 즐겨 그렸는데 이들에 비해 인상주의 화가들의 풍경화에는 대상이 주체로서의 특권을 상실한다.
세잔은 야외의 제작장소로 향하는 것을 “모티프로 간다”고 표현했으며,
그와 모네에게 자연은 그림을 그리게 하는 동인動因으로서의 모티프였다.
그래서 모네에게는 같은 장소라도 계절에 따라서 그리고 일기와 시간에 따라서 그림이 완전히 달라지는 것이다.
그가 그린 동일한 루앵 대성당은 이런 점을 여실히 보여준다.
쿠르베는 보이는 것이 회화의 대상이라고 했고 인상주의 화가들은 그 보이는 것의 의미를 회화의 문제로 삼았다.
인상주의 양식은 마네에 의해 처음 실험되었는데
그가 1868년에 그린 <불로뉴 해변 Sur la Plage de Boulogne>에서 발견된다.
그는 바다를 배경으로 해변의 사람들을 그렸는데, 사람들을 분명하게 묘사하지 않고 색을 적당히 쓱쓱 문질렀다.
이런 방법은 오히려 과학적 사실주의에 근거한 것으로 사람이 어떤 한 지점을 바라볼 때 시선이 닿는 곳의 사물은 분명하게 볼 수 있지만
주변의 것들은 불분명한 형태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1869년에 『감상적 교육 Sentimental Education』을 출간한 프랑스의 작가 귀스타브 플로베르Gustave Flaubert(1821~80)도 많은 사건들을 전개하면서
마네의 그림처럼 어느 한 사건을 특별히 중요한 사건으로 부각시키지 않았다.
인상주의Impressionism가 공식적으로 출발한 해는 1874년이다.
인상주의는 단일한 이념이나 명백하게 정의된 원칙을 지닌 유파가 아니라 공통적인 견해를 가지고 작품 전시를 목적으로 서로 연결된 화가들의 자유로운 연대였다.
그룹 내의 화가들은 각기 다양한 사고방식을 강조했는데,
이런 사고방식의 일부가 후에 미술사학자들에 의해서인상주의 운동의 특징으로 간주되었다.
모네의 노력으로 1874년 1월 17일 화가, 조각가, 판화가들이 모여서 무명협동협회Societe Anonyme Cooperative를 결성한 후
카퓌신 불바드 35번지, 사진작가 펠렉스 투르나숑 나다르Felix Tournachon Nadar(1820~1910)의 2층 작업실에서 4월 15일~5월 15일에 그룹전을 개최했다.
카탈로그에는 65점의 작품명이 실렸으며
출품작가는 모네, 모네의 스승 부댕, 펠렉스 브라크몽, 세잔, 드가, 아르망 기요맹, 에두아르 레핀, 베르테 모리소, 피사로, 르누아르, 시슬레, 카이유보트 등이었다.
모네는 유화 5점과 파스텔화 7점을 출품했으며 유화 <인상, 일출 Impression, Sunrise>이 포함되었다.
4월 25일자 『르 샤리바리』에는 평론가 루이 르루아의 글이 실렸는데, 제목이 ‘인상주의자들의 전람회’였다.
르루아가 인상주의라는 말을 처음 사용하면서부터 인상주의라는 말이 하나의 사조로 미술사에 등장하게 되었다.
르루아는 모네의 <인상, 일출>을 두고 “얼마나 자유로운가. 얼마나 쉽게 그렸는가”라고 경멸조로 적었다.
그가 인상주의라고 한 것은 경멸에서 비롯했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이는 서양미술사에 있어 최초의 그룹운동이 되었다.
그들은 1886년까지 총 8회의 전람회를 열었는데, 인상주의라는 명칭은 제1회, 제4회, 그리고 마지막 전람회를 제외하고는 모두 사용되었다.
인상주의는 19세기 후반 널리 행해졌던 과학적 사실주의의 한 표현으로 간주될 수 있다.
자신들의 소설을 순수한 기록이라고 여긴 발자크나 공쿠르 형제처럼 이 그룹의 화가들 대부분도 자신들의 작업을 동시대 삶과 경험의 단편을 냉정하게 기록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사회의 개선에 목적을 두지 않았고 비속함이나 추악함의 표현에서 어떤 의미도 찾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어떠한 해석도 필요하지 않고 단지 직접적인 체험을 기록한다고 하는 사고방식으로 인해 이들은 대부분의 작품에서 형식적인 구도를 피했다.
때문에 이들은 우연히 촬영한 사진처럼 우연적이고 임의적인 배치의 효과를 표현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인상이란 사실 상당히 계획적이고 신중한 것이었다.
예를 들어 드가는 현장에서 그린 스케치를 기초로 아틀리에에서 작품의 구도를 결정했으며 마네 역시 야외에서 직접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