뭉크의 <절망>과 <불안>

<뭉크, 쉴레, 클림트의 표현주의>(미술문화) 중에서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1875-1926)는 1920년 오스카르 코코슈카에 관한 글을 써달라는 아르파드 바인가트너의 청탁을 거절하는 편지에서 뭉크의 작품, 특히 <절규>가 머리에 떠오른다면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뭉크의 선이 이미 테러의 구성적 힘을 내포하고 있으며, 거기에는 코코슈카의 것보다 자연에 관한 무한한 힘이 있으므로 뭉크는 순수 공간적 의미, 즉 이미지나 그림에서 선의 끝을 무디게 하는 데서 보존과 파괴의 상대적인 것들을 화해시킬 수 있었습니다.
<절규>를 그리기 한 해 전 뭉크는 <절규>에서의 다리를 배경으로 <절망>을 그리고, 2년 후에는 <불안>을 그렸으며, 1896년에는 <불안>을 구성만 약간 달리 하여 목판화와 석판화로 제작했다.
모두의 배경은 <절규>와 같다. 같은 배경으로 다리 위에 그는 자기 자신 외에도 남자와 여자들을 세웠다.
붉은색 저녁노을이 여기에서도 강렬한 느낌을 주는데 곧 어둠을 예고하는 노을은 절망을 상징한다.
뭉크가 정면을 바라보는 검은 의상의 군상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이런 정면성에 대해 더러 사람들은 말하기를 분열병 심리에서의 표현성과 친화성이라고 하는데, 그는 자신을 괴롭히는 불안이 모든 사람들에게 있다는 즉 키에르케고르가 말한 실존적 불안임을 관람자에게 인지시키기 위해서였다.
어느 누구도 떨쳐버릴 수 없는 숙명으로서의 불안을 표현하고자 한 것으로 뭉크에게는 이런 염세주의 사상이 있었다.
<불안>은 <칼 요한 거리의 봄날 저녁>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절규>의 다리 뒤로 보이는 풍경을 합성한 것이다.
캔버스의 구성과 새빨간 노을이 <절규>와 같다.
관람자의 시야를 엄습하고 경악하게 하는 것은 저녁으로 상징되는 죽음의 그림자이다.
항구를 배경으로 한 무리의 사람들은 지금 어디를 향해 가는 것일까?
뭉크가 실존적 불안을 표현한 것이므로 이렇게 물어야 할 것이다.
인간은 어디를 향해 가는 것일까?
이런 근원적인 의문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없는 불안이 <절망>과 <불안>에 내재한 내용이다.
뭉크는 1892년에 <절망>과 <칼 요한 거리의 봄날 저녁>을 그리고 다음해에 <절규>를 그렸다.
<절망>과 <칼 요한 거리의 봄날 저녁>이 충분하지 않다고 판단한 그는 불안에 치를 떠는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기로 결심한 것이다.
두 작품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삼인칭이지만 자화상은 일인칭으로서 이인칭의 관람자와 직접 소통하는 관계이다.
다른 사람에 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관해서 말하는 것이다.
<절규>에 나타난 다리는 실재하는 다리이지만 회화의 세계로 통하는 관문으로서의 다리이다.
우리에게 소개하기 위해 그가 다리에 세운 그의 회화의 세계에 속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외로운 모습이다.
공포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환영의 세계 사람들이다.
다리 반대편의 세계에는 <다리 위의 여인들>과 <다리 위의 소녀들>이 있다.
<다리 위의 소녀들>의 의상이 흰색, 붉은색, 푸른색으로 밝고 배경이 탁 트여 상쾌한 느낌을 준다. 그의 작품 가운데 드물게 선명한 색을 사용한 작품이다.
원근법을 강조하여 다리를 비스듬히 한 것은 역동성을 위해서이다.
다리를 똑바로 구성한다면 배경이 양분되고 산만해질 것이다.
다리 한편의 배경만을 보여주는 단순한 구성이 작품을 명쾌하게 하다.
그는 이 작품을 약간만 변형하여 1900년에 다시 그렸는데, 거기에서는 붉은색과 푸른색 의상의 소녀들은 관람자에 들을 돌리고 난간에 팔을 얹고 강물을 바라보고 있지만 흰색 의상의 소녀는 그들과 반대로 서서 오른손에 모자를 길게 늘어뜨리고 쥔 채 몸을 관람자로 향하게 했다.
소녀의 얼굴은 그의 회화에 나타나는 전형적인 무뚝뚝하고 차가우며 유령 같은 표정이다.
그는 구성을 조금만 달리 하여 1901년에도 그렸다.
1899년에 캔버스에 유채로 그린 <다리 위의 소녀들>을 21년이 지난 뒤인 1920년에 목판화와 석판화로 다시 제작한 것을 보면 이 작품에 대한 애착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판화에서는 반대로 구성되었는데, 목판과 석판에 제작할 때 그대로 그리더라도 인쇄를 하게 되면 반대로 나타나게 된다.
당시 판화에 대한 관심이 많았고, 특히 독일 화가들이 잊혀가는 전통 판화기법을 되살렸는데, 뭉크의 판화기법은 혁신적이었다.
판화는 그의 정신세계를 표현하는 데 매우 효과적인 매체였으며 그는 과감한 실험을 통해 단순한 복제로 생명력을 상실한 판화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동일한 작품을 전혀 다른 느낌이 나도록 할 수 있었던 것은 기법 때문이며 칼 같은 예리한 선의 효과가 더욱 더 강렬한 느낌을 준다.
판화가 그에게 얼마나 중요했었는지는 크리스티아니아 시에 기증된 유작을 통해 짐작할 수 있는데, 회화가 1,008점, 드로잉과 수채화가 4,443점, 조각 6점인데 비해 판화는 무려 15,391점이나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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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네의 손과 모네의 눈>(미술문화)에서 

서양미술의 근대 

 

미술에 있어서 서양 미술의 근대가 언제 누구에 의해서 시작되었냐고 묻는다면,
근대에 대한 정의에 따라서 미술사학자들마다 의견이 분분할 것이다.
가장 오랜 시기와 작가를 꼽는다면
오르낭 출신 귀스타브 쿠르베Gustave Courbet(1819~77)가 1849년에 그린 <오르낭의 매장 The Burial at Ornans>이라고 할 수 있다.
주제 선택에 있어 현실주의자였던 쿠르베는 낭만적 과장이나 이국적 정서를 배제하고
프랑스 낭만주의의 창시자 제리코Jean Louis Andre Theodore Gericault(1791~1824)와 들라크루아Ferdinand-Victor-Eugene Delacroix(1798~1863)의 사실적 요소를 지속시켰다.
그는 사소하거나 일화적인 것에 장엄함을 부여하고,
색조를 부드럽게 하거나 이상화시키지 않고,
추하거나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에 위엄을 불어넣었다.
정치적 사회주의자이기도 한 쿠르베는 말했다.
“추상적이어서 눈에 보이지 않고 또한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것은 회화의 영역에 속하지 않는다.”
쿠르베는 예술가의 주관적인 느낌을 무시하고 사물을 보이는 대로 재현함으로써 사진과 마찬가지로 그림 자체가 사실임을 강조했다.
눈에 보이는 것만을 그려서 리얼리즘을 선포했는데, 이는 우리가 말하는 사물을 똑같이 그리는 사실주의와는 다르다.
그는 현실을 강조한 것으로 눈에 보이는 것을 재현함으로써 현실에 내재된 진실 혹은 사실성을 드러내려는 것이었다.
<오르낭의 매장>은 실제 장례식을 재현한 것으로
예수나 역사적으로 위대한 인물의 죽음만이 슬픈 것이 아니라 이웃의 죽음이 한층 더 슬프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 사실성이 서양 미술의 근대를 열었다.
같은 의미로 비너스나 신화상의 인물이 아닌 이웃에 사는 여인의 누드를 그린 것이 인상주의의 아버지로 불리우는 에두아르 마네Edouard Manet(1832~83)의 <올랭피아 Olympia>(1863)이다.
샤를 보들레르와 에밀 졸라의 칭찬을 받은 이 작품은 1865년의 살롱전에 입선했다.
이 작품은 베네치아 미술 최고 전성기를 주도한 티치아노Tiziano Vecellio(1488/90~1576)의 <우르비노의 비너스 Venus of Urbino>(1538년경)에서 영감을 받아 그린 것으로
티치아노의 주제를 새롭게 재해석하면서 여신을 상징하는 비너스 대신 벌거벗은 모델을 침대에 누이고 옆에는 흑인 하녀를 세웠다.
모델은 빅토린이었고 올랭피아는 당시 화류계에서 흔한 이름이었다.
<오르낭의 매장>을 보면 쿠르베가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난 사건을 가까이서 본 듯이 그렸음을 알 수 있고, 줄지어 앉은 사람들의 모습은 명암에 의한 살붙임으로 양감이 명확히 나타나 있다.
이에 비하면 <올랭피아>는 평편하고 깊이가 결여되어 보인다.
이 작품에서 사물의 양감은 경계에 의해서라기보다는 강한 명암 차이에 의해 암시되며, 완만하게 안으로 향해 둥근감을 지닌 것처럼 보이지 않더라도 인체가 실재감을 지닌 채 그려져 있음을 본다. 이런 점은 르네상스 이래 추구되어 온 환상에 눌려왔는데 마네가 회화의 이차원적 평면성과 삼차원 인물의 관계를 문제삼았다.
자신들이 존재하는 곳에서 본 광경이 빛의 풍경인 것을 깨달은 사람은 클로드 모네Claude Monet(1840~1926), 카미유 피사로Camille Pissarro(1831~1903) 등을 주축으로 한 인상주의 화가들이었다.
대기와 색채를 표현한 인상주의의 특징을 가장 강력하게 대표하는 모네가 말년에 그린 <수련 Nympheas> 시리즈에서 연꽃, 조용한 수면, 물 위에 떠 있는 나뭇잎 등이 떨리는 빛의 소용돌이에 빠져들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여기에서 각 사물이 고유한 색을 지니고 있다는 여태까지의 지식은 무시되고 그곳에서 발산되는 빛의 파장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다.
빛은 혼색을 가능한 한 억제한 밝은 물감의 색조 차이로 치환되어 표현되는데 회화로서의 빛의 추구라 할 수 있다.
테오도르 루소Theodore Roussau(1812~67), 카미유 코로Jean-Baptiste Camille Corot(1765~1875) 등 바르비종파Barbizon school 화가들도 야외에서 직접 풍경을 그리면서 자연을 영위하는 심원함과 그 속에서 사는 즐거움을 합친 부드러움까지도 목표로 했다.
바르비종파라는 명칭은 퐁텐블로 숲 외곽의 작은 마을 바르비종에서 유래했다.
1840년대 후반 테오도르 루소와 그의 추종자들이 이곳에 정착했다.
그들은 각기 독자적인 양식으로 특수한 유형의 풍경화를 즐겨 그렸는데 이들에 비해 인상주의 화가들의 풍경화에는 대상이 주체로서의 특권을 상실한다.
세잔은 야외의 제작장소로 향하는 것을 “모티프로 간다”고 표현했으며,
그와 모네에게 자연은 그림을 그리게 하는 동인動因으로서의 모티프였다.
그래서 모네에게는 같은 장소라도 계절에 따라서 그리고 일기와 시간에 따라서 그림이 완전히 달라지는 것이다.
그가 그린 동일한 루앵 대성당은 이런 점을 여실히 보여준다.
쿠르베는 보이는 것이 회화의 대상이라고 했고 인상주의 화가들은 그 보이는 것의 의미를 회화의 문제로 삼았다.
인상주의 양식은 마네에 의해 처음 실험되었는데
그가 1868년에 그린 <불로뉴 해변 Sur la Plage de Boulogne>에서 발견된다.
그는 바다를 배경으로 해변의 사람들을 그렸는데, 사람들을 분명하게 묘사하지 않고 색을 적당히 쓱쓱 문질렀다.
이런 방법은 오히려 과학적 사실주의에 근거한 것으로 사람이 어떤 한 지점을 바라볼 때 시선이 닿는 곳의 사물은 분명하게 볼 수 있지만
주변의 것들은 불분명한 형태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1869년에 『감상적 교육 Sentimental Education』을 출간한 프랑스의 작가 귀스타브 플로베르Gustave Flaubert(1821~80)도 많은 사건들을 전개하면서
마네의 그림처럼 어느 한 사건을 특별히 중요한 사건으로 부각시키지 않았다.
인상주의Impressionism가 공식적으로 출발한 해는 1874년이다.
인상주의는 단일한 이념이나 명백하게 정의된 원칙을 지닌 유파가 아니라 공통적인 견해를 가지고 작품 전시를 목적으로 서로 연결된 화가들의 자유로운 연대였다.
그룹 내의 화가들은 각기 다양한 사고방식을 강조했는데,
이런 사고방식의 일부가 후에 미술사학자들에 의해서인상주의 운동의 특징으로 간주되었다.
모네의 노력으로 1874년 1월 17일 화가, 조각가, 판화가들이 모여서 무명협동협회Societe Anonyme Cooperative를 결성한 후
카퓌신 불바드 35번지, 사진작가 펠렉스 투르나숑 나다르Felix Tournachon Nadar(1820~1910)의 2층 작업실에서 4월 15일~5월 15일에 그룹전을 개최했다.
카탈로그에는 65점의 작품명이 실렸으며
출품작가는 모네, 모네의 스승 부댕, 펠렉스 브라크몽, 세잔, 드가, 아르망 기요맹, 에두아르 레핀, 베르테 모리소, 피사로, 르누아르, 시슬레, 카이유보트 등이었다.
모네는 유화 5점과 파스텔화 7점을 출품했으며 유화 <인상, 일출 Impression, Sunrise>이 포함되었다.
4월 25일자 『르 샤리바리』에는 평론가 루이 르루아의 글이 실렸는데, 제목이 ‘인상주의자들의 전람회’였다.
르루아가 인상주의라는 말을 처음 사용하면서부터 인상주의라는 말이 하나의 사조로 미술사에 등장하게 되었다.
르루아는 모네의 <인상, 일출>을 두고 “얼마나 자유로운가. 얼마나 쉽게 그렸는가”라고 경멸조로 적었다.
그가 인상주의라고 한 것은 경멸에서 비롯했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이는 서양미술사에 있어 최초의 그룹운동이 되었다.
그들은 1886년까지 총 8회의 전람회를 열었는데, 인상주의라는 명칭은 제1회, 제4회, 그리고 마지막 전람회를 제외하고는 모두 사용되었다.
인상주의는 19세기 후반 널리 행해졌던 과학적 사실주의의 한 표현으로 간주될 수 있다.
자신들의 소설을 순수한 기록이라고 여긴 발자크나 공쿠르 형제처럼 이 그룹의 화가들 대부분도 자신들의 작업을 동시대 삶과 경험의 단편을 냉정하게 기록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사회의 개선에 목적을 두지 않았고 비속함이나 추악함의 표현에서 어떤 의미도 찾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어떠한 해석도 필요하지 않고 단지 직접적인 체험을 기록한다고 하는 사고방식으로 인해 이들은 대부분의 작품에서 형식적인 구도를 피했다.
때문에 이들은 우연히 촬영한 사진처럼 우연적이고 임의적인 배치의 효과를 표현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인상이란 사실 상당히 계획적이고 신중한 것이었다.
예를 들어 드가는 현장에서 그린 스케치를 기초로 아틀리에에서 작품의 구도를 결정했으며 마네 역시 야외에서 직접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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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록과 친구들> 중에서 

 떠내려가는 색을 창조한 마크 로드코

  

마크 로드코Mark Rothko는 클리포드 스틸과 함께 한쌍으로 기억되는데 두 사람의 미학이 유사하고 두 사람이 평생 우정을 나눴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추상표현주의 예술가들 가운데 포함되지만 그린버그에 의해 컬러-필드 회화Colour Field painting를 창조한 영예로운 화가들로 따로 분류되었다.
로드코는 1903년 러시아 비테브스크의 드빈스크에서 네 자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유대인 아버지는 약사였으며 가족은 1913년 미국으로 이민 와 오레곤주의 포틀랜드Portland에 정착했다.
그해 미국으로 이민 온 사람은 백만 명이 넘었는데 동유럽에서 많은 난민들이 왔으며 그들 가운데 유대인이 많았다.
아버지가 위장병으로 수년 동안 고생하다가 미국에 도착한 지 7개월 후 1914년 3월에 세상을 떠났다.
어린 로드코는 신문을 배달하며 돈을 벌어야 했다.
그때 배고픔을 경험했다고 그는 훗날 말했다.
학교성적이 우수했으므로 그는 1921년 명문대학 예일에 장학생으로 입학할 수 있었다.
그는 여가가 있으면 피아노와 만도린을 연주했고 시를 썼는데 그의 시가 지금도 남아 있다.
그는 “내가 화가가 된 이유는 뒤떨어진 회화를 음악과 시와 같은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해서였다”고 했는데 파울 클레의 말을 상기시킨다.
당시 아이비 리그 대학에서 일어나기 시작한 반유대주의 감정으로 인해 로드코는 학교측으로부터 더이상 장학금을 받을 수 없으며 원한다면 졸업할 때까지 학비를 융자해주겠다는 통보를 받았다.
당시 유대인 학생들에 대한 명문대학들의 차별정책 때문에 뉴욕에 거주하던 우수한 학생들이 헌터 칼레지와 시티 칼레지로 몰렸다.
사람들은 시티 칼레지를 가난한 학생들의 하버드 대학이라고 불렀는데 1920년 당시 두 대학 학생들 가운데 무려 8, 90%가 유대인이었다.
로드코는 경제적으로 넉넉치 못했으므로 1923년 대학을 자퇴하고 “여기저기 서성거리는 거지”가 되었다.
그는 뉴욕으로 가서 봉제공장에서 천을 자르는 일도 했으며 1925년 10월 아트 스튜던츠 리그에 입학해 막스 베버Max Weber의 정물화반에서 6개월 동안 수학했다.
그는 베버의 가르침에 만족하지 못했고 자신을 가리켜서 본질적으로 독학한 화가라고 했다.
이 시기에 그는 폴란드에서 온 젊은 피아노 연주자 아서 게이지와 방을 함께 썼다.
그는 게이지에게 “내가 위대한 화가가 될 수 있는 이유는 고등어 통조림 하나와 빵 한 줄 그리고 훔친 우유로 사흘 동안 산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고 했다.
로드코의 친구 한 사람은 “로드코는 내가 만난 사람들 중 가장 외로운 사람이었다.
그처럼 외로운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면서 로드코의 친절한 성격은 그가 부분적으로 외로웠기 때문이었을 거라고 훗날 말했다.
1932년 여름부터 로드코는 더이상 외롭지 않았는데 친구들과 함께 캠프에 갔다가 자신의 만돌린 연주 솜씨에 반한 에디스 사차를 만났기 때문이다.
사차는 브루클린에 거주하는 유대인으로 로드코의 첫 아내가 되었다.
로드코는 1929년부터 브루클린에 있는 센트럴 아카데미의 강사로 재직했으며 이때부터 30년 동안 가르치는 일을 계속했다.
1930년대 중반부터 로드코는 많은 예술가들을 만났는데 폴록, 드 쿠닝, 고르키를 만났고 개인적으로는 이웃에 사는 아돌프 고틀립과 우정이 두터웠다.
고틀립은 컬럼비아 대학에서 수학한 지성인이었으므로 로드코는 그와 수준 높은 미학을 논할 수 있었다.
그는 고틀립을 거의 매일 만나 신화에 관해 대화하면서 신화에서 주제를 발견하여 현대적으로 해석했다.
로드코는 클리포드 스틸을 만난 후 그와도 지성적인 대화를 나눴고 두 사람은 멀리 떨어져 살고 있었지만 서신을 교환했는데 두 사람의 서신이 지금도 남아 있다.
스틸은 그때 캘리포니아주에 있는 대학에서 가르치고 있었다.
로드코는 초현실주의로부터 영향을 받고부터 신화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진동하는 듯한 색의 면을 그려서 관람자로 하여금 그림의 공간 속으로 친숙하게 빠져들게 하기 위해 커다란 그림을 그리기를 선호했다.
그는 어두운 모노크롬 그림을 그렸으며 분명하지는 않지만 우주적 의미와 감성을 환기시키는 그림을 그렸다.
그는 1947년에 사각형태로 물감을 캔버스에 촉촉히 젖게 하여 마치 사각형이 물에 떠내려가는 듯한 그림을 그렸다.
그가 1949년에 <무제 Untitled>로 그린 것도 그런 것들 중 한 점으로 그는 세로로 세운 직사각형 캔버스에 가로로 누인 직사각형 형태들을 그려넣었다.
그는 유화물감을 수채처럼 엷게 사용하여 캔버스에 촉촉히 젖게 하면서 직사각형 형태의 가장자리를 불분명하게 했다.
그의 떠내려가는 색들은 분명한 형태를 띠지 않기 보통이었으며 미세한 운동과 색들이 제공하는 촉감들이 평면에서 깊이를 나타냈다.
이런 그의 그림들은 이후 5년 동안 진전되면서 대개는 커다란 사각형태들로 색이 있는 배경 위에 그려졌다.
물감을 물에 엷게 적신 듯이 다양한 색조를 지닌 로드코의 형태들은 캔버스에서 구름처럼 시각적으로 천천히 움직이는 듯 보였다.
그가 1950년에 그린 <초록, 빨강, 오렌지 Green, Red, Orange>는 거대한 크기의 그림인데 형태와 색이 매우 단순화되어 있었다.
휘트니 뮤지엄은 그의 그림을 구입하려고 했지만 그는 휘트니 뮤지엄을 “쓰레기 매매장”이라고 비난하면서 그림을 팔지 않았다.
그는 1951년에 말했다.
"나는 매우 큰 그림을 그린다.
나는 커다란 그림을 그리는 것이 매우 장엄하며 과시하게 된다는 걸 알았다.
내가 크게 그리는 특별한 이유는 관람자에게 친근해지고 인간적으로 다가가기 위해서이다.
그림을 작게 그리는 것은 네 자신을 너의 경험 밖에 두는 것이며 입체환등기처럼 경험을 쳐다보는 것이다.
그림을 크게 그리게 되면 넌 그 안에 있게 된다. 이는 네가 명령하는 그런 것이 아니다."
1950년대 로드코의 명성은 높았으며 1954년 그의 그림 한 점이 4천 달러에 팔렸다.
(History of Modern Art 457) 그의 컬러-필드 그림은 평론가 해롤드 로젠버그가 폴록과 드 쿠닝 그리고 프랜츠 클라인의 그림을 이벤트로 보고 액션 페인팅이란 말로 분류한 것에 비해 좀더 사변적이었다.
로드코는 인간의 감성 문제와 고뇌를 감각적으로 묘사할 줄 알았다.
그는 말했다.
"나는 추상화가가 아니다.
나는 색·형태 혹은 어느 것과의 관계에도 관심이 없다.
난 오로지 기본적인 인간의 감성을 표현할 따름이며, 비극, 희열, 운명을 표현한다.
많은 사람이 내 그림을 보고 울거나 나약해지는 것은 나의 인간적 감성이 그들에게 전해진 까닭이다.
내 그림 앞에서 우는 사람들은 나와 함께 종교적 경험을 하는 사람들로서 나는 그림을 그릴 때 이런 경험을 한다.
여러분이 색들의 관계만을 생각한다면 초점을 잃게 될 것이다."
로드코의 그림값이 앙등했으며 케네디 대통령은 그를 백악관으로 초청했다.
그는 1960년대에 팝아트가 성행하자 격노하면서 “팝아트 예술가들은 사기꾼들이며 기회주의자들이다”라면서 “젊은 예술가들이 우리를 살해하려고 한다”고 투덜거렸다.
말년에 그는 폭음했고, 1944년 두 번째 아내로 맞은 앨리스는 알코올 중독자들을 위한 요양소에 보내졌다.
동맥류로 고생하던 로드코는 1970년 초 동맥을 끊어 스스로 세상을 버렸다.
말년에 정신적으로 고독해지면서 빛의 시인으로 불리운 그의 그림들은 자꾸만 어두워지기 시작했으며 마지막으로 그가 그린 그림은 밤의 풍경화와도 같았다.
1978년 구겐하임 뮤지엄에서는 그를 위한 기념전을 대규모로 개최했는데 당시 그의 그림 한 점이 19만 7천 달러에 팔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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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뭉크, 쉴레, 클림트의 표현주의> 중에서 

 클림트는 신의 섹스 행위를 ...

 
신의 섹스 행위를 주제로 그림을 그린 화가가 있다.
그가 오스트리아의 표현주의 화가 귀스타브 클림트Gustave Klimt(1862-1918)이다.
그는 1907년에 <다나에 Danae>를 그렸는데 여인이 요염한 몸부림을 치며 자위행위 하는 모습이다.
다나에는 아르고스Argos 왕의 유일한 딸로 그녀의 아버지에 의해 성에 갇혀 사나운 개들의 감시를 받았는데 왕의 운명이 아들을 가질 수 없을 뿐 아니라 손자에 의해 살해될 것이라는 계시를 받았기 때문이다.
다나에와 사랑에 빠진 제우스는 비를 통해 다나에를 임신시켜 그녀로 하여금 아들 페르세우스Perseus를 낳도록 해 운명의 계시가 이루어지게 했다.
클림트는 이런 신화를 주제로 자아도취에 빠져 애욕적인 모습을 한 여인을 그리면서 제우스가 내린 비를 신성한 빛이 쏟아지는 장면으로 대신하며 초자연적인 영감을 묘사했다.

다나에와 페르세우스
페르세우스는 메두사를 퇴치한 영웅이다.
아르고스의 왕 아크리시우스는 딸 다나에가 낳은 아들, 즉 손자가 자신을 살해할 것이라는 신탁을 알게 되자 딸을 청동 성채에 가두었다.
다나에를 사랑한 제우스는 금빛 소나기의 형상으로 그녀를 찾아 갔으며 다나에는 제우스의 아들 페르세우스를 낳아 길렀다.
아크리시우스가 이 사실을 안 것은 4년이 지난 후였다.
그는 딸을 가두고 손자를 바다에 던졌다.
다나에는 아들과 함께 바다를 표류했고 두 사람은 세리포스 섬에 사는 어부 딕티스에 의해 구조되었는데 딕티스의 형은 폴리덱테스의 통치자였다.
촐리덱테스는 다나에를 사랑했지만 그녀는 그의 사랑을 거절했다.
폴리덱테스는 잔치를 열고 세리포스의 귀족들을 한자리에 모으면서 말을 한 필씩 갖고 오게 했다.
페르세우스는 자신이 머리가 뱀인 괴물 고르곤 세 자매의 머리를 베어 말을 살 것이라고 공언했다.
폴리덱테스는 페르세우스가 농담한 것인줄 알았지만 불가능해보이는 그 일을 집행하게 되었다.

페르세우스의 일에 헤르메스(신들의 사자로서 로마 신화의 머큐리에 해당한다)와 아테네(아테네의 수호신으로 지혜, 예술, 전술의 여신으로 알려졌다)가 도와주기로 했다.
헤르메스에게서 둥근 칼을 받은 페르세우스는 고르곤이 있는 곳으로 날아갔다.
고르곤 세 자매 가운데 메두사만은 불멸하지 않는 존재이지만 누구든지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게 되면 그 자리에서 돌이 되었다.
페르세우스는 메두사를 직접 바라보지 않고 방패에 비친 모습을 보았다.
또 다른 신화에 의하면 아테네가 페르세우스의 손을 인도했다고 전해지며 페르세우스는 메두사의 목을 베어 가죽부대에 담았다.
페르세우스가 세리포스로 날아와 고르곤의 머리를 꺼내 보여주자 폴리덱테스와 섬의 귀족들이 돌로 변해버렸다.
페르세우스는 메두사의 머리를 아테네에게 바쳤다.
다나에와 페르세우스는 아르고스로 돌아왔다.
게임에 참가한 페르세우스가 원반을 던지게 되었는데 아크리시우스 왕이 그 원반에 맞아 죽었다.
그리하여 신탁이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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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과학과 미켈란젤로의 영혼> 중에서

제목: 자연을 탐험한 다 빈치와 영혼을 새긴 미켈란젤로

르네상스의 두 대가

레오나르도는 정신보다 물질이 우선이라고 생각한 유물론자이며 미래가 밝다고 전망한 낙천주의자인 반면 이상주의자 미켈란젤로는 물질을 하찮게 여기고 눈으로는 볼 수 없는 형상의 가치를 가장 높게 평가했다.
정신만을 고귀하게 여겼으므로 진지하며 고독한 사람이었고 자신과 같은 생각을 갖지 않은 사람들을 경멸했다.
미켈란젤로가 건강하고 아름다운 인체를 통해 순수하고 영원한 영혼의 형상을 보여주기를 바란 데 반해 레오나르도는 그로테스크한 인간의 모습을 다양하게 표현함으로써 여러 종류의 인간이 사는 세계를 보여주고자 했다.

레오나르도는 멋진 옷을 입고 오늘날 고급 스포츠카에 해당하는 값비싼 말을 탔으며, 손수 악기를 만들고 작곡과 연주를 하면서 풍류를 즐겼다.
인생을 즐겁게 살기를 바랐고 물질이 주는 풍요로움을 만끽했다.
그와 달리 중세 도덕관이 몸에 벤 미켈란젤로는 명성이 드높아지고 많은 돈을 벌었지만 물질의 풍요로움을 탐닉하는 것을 죄로 알고 검소한 생활을 했다.
레오나르도는 상류사회에 접근하여 화려한 삶을 살았지만 미켈란젤로는 현세의 안락보다는 내세의 영생을 소망했기에 일찍이 자신이 속한 상류사회를 벗어났고,
거의 아흔 해를 사는 장수의 복을 누렸지만 인생이 길어지는 것을 오히려 더 많은 죄를 짓게 되는 요인으로 보고 스스로 염세주의의 짐을 졌다.
그의 삶은 금욕주의를 추구하는 구도자의 삶과 같았다.

레오나르도의 언행에는 경박함이 있었지만 유쾌한 사람이었고 비관적 태도를 취하기보다는 적극적으로 행동하면서 자신의 운명을 개척했다.
인체를 기계에 비유하며 사용하지 않을 경우 녹이 슨다고 생각했으므로 늙어서도 끊임없이 드로잉하고 자신의 생각을 글로 남겼다.
반면 과거 철학자와 신학자들의 사상에 심취한 미켈란젤로는 언행에 신중을 기했으며 많은 작품을 피하고 자신이 맡은 작품에 완벽을 기하기 위해 전력을 투구했다.
고상한 생각을 정해놓고 작업했으므로 그는 늘 자신의 작품에 불만이었다.
따라서 근심이 많고 우울했으며 자책하며 스스로를 괴롭혔다.
지나치게 형이상학을 신뢰한 그가 나중에 신비주의에 빠지고 만 건 어쩌면 당연해 보인다.

두 사람 모두 독신으로 생을 마쳤고 동성연애자로 알려졌다.
동성애의 역사는 아주 오래 되었고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폭넓게 이뤄졌다.
발랄한 성격의 레오나르도는 동성애로 기소당한 적이 있고 잘생긴 젊은이들이 주변에 있었으며 그들과 함께 여행하기를 즐겨했다.
행동에 앞서 생각하는 기질의 미켈란젤로도 동성애자로 알려졌지만 확증될 만한 단서를 남기지 않았다.
레오나르도와는 달리 그의 삶은 닫혀 있었고 가문과 자신에 관해 말하기를 꺼려했다.
레오나르도는 엄청난 양의 글을 남겼으며 사람들과 어울리기 좋아하며 열린 삶을 살았기 때문에 그의 삶은 구체적으로 알려진 데 반해 미켈란젤로는 많은 편지와 시를 남겼어도 대부분 철학적 내용이라서 그의 정신세계를 엿보는 데는 훌륭한 자료가 되지만 구체적 생활상은 알려져 있지 않아 후세 사람들에게 궁금증으로 남아 있다.

레오나르도가 현실주의자라면 미켈란젤로는 환영에 사로잡힌 현실도피주의자라고 말할 수 있다.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레오나르도에게는 사물을 바라보는 통찰력이 있었고 어디에도 매이지 않는 자유분방한 상상력이 있었던 데 비해 철학과 문학의 요람에서 교육을 받은 미켈란젤로는 당시에도 난해한 단테의 『신곡』을 해석할 수 있을 정도로 박식했지만,
오늘날의 지성인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는 학문에 치우친 협소한 시각을 가졌다.
하루는 레오나르도가 친구 화가와 함께 스피니 궁전 앞 산타 트리니타 광장을 걷고 있었다.
벤치에서 잡담하던 사람들이 레로나르도를 불러 세우고는 단테의 글에서 난해한 부분을 지적하며 그의 의견을 물었다.
그때 마침 미켈란젤로의 모습이 광장에 나타나자 레오나르도가 말했다.
“여기 미켈란젤로가 오고 있군. 그가 자네들에게 말해줄 걸세.”
그러자 미켈란젤로가 벌컥 화를 내면서 레오나르도에게 말했다.
“선생님 스스로 대답하세요. 선생님은 말을 모델로 만들었지만, 청동으로는 뜨지 않고 포기했다는 걸 부끄러운 줄 아세요.”
미켈란젤로는 발걸음을 돌렸고 레오나르도는 한동안 아무 말도 못하고 서 있었다.
미켈란젤로는 뒤돌아 선 채 다시 말했다.
“밀라노인은 어리석었기 때문에 선생님을 믿었던 거에요.”

이 에피소드를 통해 23살 연하의 미켈란젤로가 레오나르도를 업신여겼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화풍을 비교하면 미켈란젤로가 레오나르도를 상당히 닮아 내면에서는 그에게 존경을 표했음을 알 수 있다.
“말을 모델로 만들었지만, 청동으로는 뜨지 않고 포기했다는 걸 부끄러운 줄 아세요”라고 핀잔했지만,
미켈란젤로도 해낼 수 없었음을 그 자신 알고 있었을 것이다.
밀라노의 통치자 루도비코가 공화국을 건설한 아버지 프란체스코 스포르차를 기념하는 기마상을 레오나르도에게 의뢰한 것을 꼬집은 말인데, 막강한 부를 가진 루도비코는 실재 말보다 서너 배 크고 장려한 형상으로 제작하기를 원했고 레오나르도는 앞다리를 든 말을 청동으로 제작하려고 했다.
수 톤에 이르는 말의 무게를 뒷다리로만 지탱하게 하는 것은 당시 기술로서는 가능하지 않았으며 앞다리가 하나 더 있어야 가능했다.
기마상은 실현되지 않았고 과연 레오나르도에게 제작할 능력이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미켈란젤로에 의해 제기되었으며 사람들은 제작되지 못한 책임을 레오나르도에게 돌렸다.
그러나 작품의 미완성은 당시의 상황과 직접 관련이 있었는데, 나폴리, 프랑스와의 전쟁 위기 속에서 그만한 청동을 구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200년이 지난 후 프랑스 조각가 프랑수아 지라르동이 루이 14세의 동상을 높이 6,82미터로 제작했는데, 레오나르도가 고안한 청동뜨는 법과 거의 유사한 방법으로 했다.
이 동상은 프랑스 혁명 때 파괴되어 현존하지 않지만 당시의 기록에는 레오나르도가 실험한 방법을 그대로 사용한 것으로 적혀 있다.
따라서 레오나르도의 기술에 문제가 있었다기보다는 위급한 상황으로 인해 청동을 구하지 못한 데 그 원인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지네브라 데 벤치 vs. 바쿠스

레오나르도가 1476년경에 나무패널에 그린 <지네브라 데 벤치의 초상>은 <모나리자>를 예고하는 작품이다.
여인의 이름이 지네브라임을 배경의 로덴나무 숲에서 알 수 있는데, 로뎀나무가 이탈리아어로 지네브라이기 때문이다.
로뎀나무는 야인의 고상한 인격을 나타내는 데 적절했다.
레오나르도는 인격을 시각화하는 데 충실하면서 말했다.

“인물을 그릴 때는 성격이 겉으로 드러날 수 있도록 자세를 취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칭찬받을 수 없다.”

지네브라는 부유한 은행가의 딸로 17살의 나이에 결혼했다.
당시 시인들이 그녀의 미모에 매료되어 여러 편의 시를 썼으며 이 초상화는 회화의 언어로 찬양한 레오나르도의 시라고 말할 수 있다.
초상화가 낯설게 보이는 까닭은 젖가슴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상체가 짧기 때문이다.
<모나리자>처럼 원작의 상체가 배꼽까지 묘사되었지만 아랫부분이 상해 12~15센티미터나 잘라냈다.
작품 뒤에 “아름다움이 덕을 꾸민다”고 적혀 있다.
지네브라의 눈썹이 조금밖에 없고 이마가 아주 넓은 것은 당시의 유행을 따른 것으로 미의 규준이었다.
나중에 그린 <모나리자>는 눈썹이 없고 이마가 넓은데, 눈썹을 밀어버리는 것이 유행이었다.
<모나리자>가 그려진 이후 곧 유행이 달라져 이마가 도로 내려왔고 얼굴을 강력하게 분할해주는 눈썹이 있는 것이 훨씬 아름답게 여겨졌다.
이 초상화를 워싱턴 갤러리가 1967년에 백만 달러 이상을 주고 구입했으며, 미국 내에 유일한 레오나르도의 작품이 되었다.

미켈란젤로는 13살 때 조각을 배우기 시작했고 조각다운 조각을 처음 제작한 건 22살 때 완성한 <바쿠스>이다.
포도주의 신 바쿠스는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모습으로 묘사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미켈란젤로는 술에 취해 오른손으로 잔을 높이 들고 있는 모습으로 바쿠스를 묘사하면서 뒤에 반인반수이면서 호색가인 사티로스가 포도를 훔쳐 먹으며 관람자를 향해 미소짓게 했다.
미켈란젤로는 이 술꾼이 발이 떨리고 가득 채워진 술잔을 높이 쳐든 채 게슴츠레한 눈길로 어린 사티로스에게 의지하는 순간을 포착했다.
사티로스가 훔쳐 먹는 포도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포도주의 신 바쿠스에게는 포도가 얼마든지 있고 그의 머리조차 포도송이로 되어 있다.
미켈란젤로는 통통한 사티로스를 모델로 삼아 개인적 특성과 거의 여자처럼 부드러운 신체를 만들어냈다.
또한 환상적인 효과를 위해 드릴을 사용해 사티로스 발 아래의 사자 생가죽과 포도송이를 제작했다.
성기가 잘려나갔는지 일부러 생략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성기가 없는 바쿠스는 남성도 여성도 아닌 중성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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