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토의 변용의 미학 

 

아서 단토에게 예술의 종말을 감지하게 한 것은 시각예술에서의 변용의 미학이다.
평범한 것을 변용을 통해 아이콘으로 만들고 대중적인 미술과 고급 미술과의 구별을 흐리게 한 데 있다.
일차적으로는 변용을 통해 평범한 사물을 고급 미술의 미학적 사물로 격상시키고 결과적으로는 대중적 미술과 고급 미술의 경계가 사라지게 했음을 주목했다.
변용은 기독교의 개념으로 소위 말하는 '변화산 정상의 사건'을 의미한다.
어느 날 산 정상에서 예수를 따르던 제자 세 사람이 예수의 모습에서 예언자 혹은 메시야의 이미지를 발견했다는 데서 비롯한 말이 변용이다.
변용은 말 그대로 모습이 달라졌다는 뜻이다.
겉으로는 동일한 모습인데 바라보기에 따라서 달라진 것이다.
보는 사람의 인식이 달라진 것이지 대상 자체가 달라진 것은 아니다.

팝아트는 바로 관람자의 인식을 문제 삼은 미술이다.
동일한 사물을 달리 인식하는 사유의 문제를 제기한 미술이다.
단토가 이 점을 깨달았던 것이다.

단토는 팝아트가 그토록 자극적이었을 수 있었던 원인이 변용적이었음을 지적한다.
평범한 사물을 통해서 인식의 변화를 요구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자극을 준 것이다.
단토는 말한다.

"팝아트 자체는 미국 고유의 업적이며, 내가 생각하기에, 그것이 도처에서 그토록 전복적이었던 것은 그것의 기본 입장이 변용되기 때문이다."

그는 팝아트가 평범한 것들인 일상적 문화 경험의 대상과 아이콘들을 미술로 변용시킨다고 보았다.
그는 추상표현주의는 문화 경험의 대상과 아이콘들에 숨겨진 과정에 관심을 기울였으며 초현실주의적인 전제들에 기초했음을 지적했는데 이는 매우 중요한 점을 언급한 것이다.
그는 추상표현주의자들이 원초적인 힘과 접촉하는 무당 노릇을 하려고 했음을 지적했다.
팝아트가 추상표현주의에 반발로 생겨난 미술운동이었으므로 단토는 팝아트와 추상표현주의와의 상이한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두 가지의 상이한 점을 그는 이렇게 말한다.

"추상표현주의가 철저하게 형이상학적이었다면, 팝아트는 가장 일상적인 삶의 가장 일상적인 것들, 즉 콘플레이크, 수프 통조림, 비누 뭉치, 인기 영화배우, 만화 따위를 찬양했다. 그리고 변용의 과정을 거쳐 팝아트는 이런 것들에게 거의 선험적인 분위기를 부여했다."

이에 앞서 분석철학자 단토는 철학이 종말에 이르게 된 것으로 1930년대 성행했던 분석철학을 꼽았다.
분석적 철학이 오랫동안 유지되었던 형이상학을 무용하게 만들었음을 지적했는데, 이는 단토가 아니더라도 1930년대부터 만연되었던 사고였다.
단토는 분석철학이 철학의 종말을 재촉한 것처럼 팝아트가 예술의 종말을 재촉했음을 논리적으로 설명했다.
둘 다 인식가능성의 새로운 지평을 열게 했다.
분석철학과 팝아트 모두 해방적이다.
그는 비트겐슈타인이 파리통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파리에게 어떻게 보여줄 수 있는지 말한 적이 있음을 들어 분석철학과 팝아트가 사람들로 하여금 정형화된 인식으로부터 새로운 인식세계를 구축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함을 지적한다.
미술은 이러저러하다든가 미술품이란 이러저러해야 한다든가 하는 고정관념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준 것이 팝아티스트들의 성과라는 것이다.

그는 새로운 인식의 가능성이 무엇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최소한 우리를 억압한 과거의 인식체계로부터의 해방을 말한다.
분석철학과 팝아트 모두 이전의 철학과 미술을 총괄적으로 조망했음을 지적한다.
분석철학은 플라톤으로부터 하이데거에 이르는 철학 전체와 대립했고 팝아트는 실제적 삶을 위해 미술 전체에 대립했음을 지적한다.

단토는 미래의 미술을 철학의 문제로 본다.
분석철학과 팝아트가 동일한 시기에 오래된 고정 관념의 인식체계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켰기 때문이며 둘 모두 인류에 봉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동반자라고 생각한다.
그는 미학학회에서 발표한 논문을 통해 한 걸음 더 나아가 원래 예술과 철학은 동반자 관계였는데 정치적 상황에 의해서 플라톤이 예술을 수준이 낮은 것으로 여겼으므로 철학과 거리가 생긴 것이라고 주장한다.
철학과 예술의 관계가 회복 내지는 정상화되었다고 본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1950년대 중반 철학과 미술 둘 다 당시의 인간 심리 저 깊은 곳에 있던 어떤 것에 응답하고 있었으며 바로 이 점이 그것들로 하여금 미국 장면 밖에서는 그토록 대단한 해방력을 발휘할 수 있게 해주었다고 생각한다."

팝아트에 대한 그의 희망적 청사진은 대단했는데 "팝아트가 의식 속으로 끌어올린 것은 우리 모두 세상에 홀로 남겨져 살아간다는 것으로서, 이것은 누구라도 바랄 수 있는 훌륭한 삶이었다"고 한 말에서 알 수 있다.
그는 팝아트가 심대한 사회적, 정치적 변화를 예고하고 예술 개념에 있어 심원한 철학적 변화를 성취한 대격변의 모멘트였다고 말한다.

변용은 뒤샹의 레디메이드에서도 찾아볼 수 있지만 뒤샹은 평범한 것을 찬양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의 레디메이드를 팝아트와 구별한다.
하지만 뒤샹이 미적인 것의 중요성을 감소시키고 미술의 경계선들을 시험한 공로는 인정하면서 미술사에 있어서 이와 같은 일을 한 사람이 없었음을 지적한다.
뒤샹과 팝아트 사이에 어떤 외적인 유사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팝아트가 우리로 하여금 꿰뚫어 볼 수 있게 해주는 것들 중 하나이며 또한 팝아트의 성과로 꼽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르네상스의 여건을 마련한 세 시인 

 

서로마제국이 476년 몰락한 후 그리스 문화는 약 천 년 동안 거의 잊혀졌으며 중세에는 카톨릭 신학, 철학, 연대기, 동화 등이 있었을 뿐이다.
천 년 암흑시대로 알려진 이 시기에 로마를 근거로 하는 카톨릭의 세력이 유럽을 지배했으므로 기독교 문화만 두드러졌을 뿐 이국의 종교문화는 이단으로 몰려 발전을 꾀할 수 없었다.
교황 보니파티우스 8세Bonifatius VIII가 1303년에 타계하자 교권은 더욱 더 쇠퇴하기 시작했는데, 보니파티우스는 여든 살에 교황직에 올랐는데, 괴팍한 성격의 소유자인 그는 프랑스 왕 필립 4세와 극렬한 투쟁을 벌였으며 역대 교황들 가운데 가장 큰 과오를 범한 인물이 되었다.
그가 타계했을 때 사람들은 "그는 여우 같이 되어 사자 같이 정치를 하다 개 같이 죽었다"고 했다.

그는 신의 심판이란 있을 수 없으며 지옥과 천국은 지상에 있다고 공언했다.
그는 성적으로 탐익되어 있었으며 늙고 병들고 성적 불능이 지옥이며 반대로 젊고 건강하며 아름다운 여인과 소년이 천국이라고 했다.
어느 신부가 그리스도에게 도움을 청하는 기도를 올리자 보니파티우스는 그에게 성을 내며 욕설을 퍼부었다.
"이 천치야, 예수는 우리와 같은 사람이다. 자기 생명도 구원하지 못한 자가 누구를 구한다고 생각하느냐?"
그는 냉소주의자였으며, 정력적이었고, 권력을 휘둘렀으며, 내세에는 무관심한 르네상스 스타일의 전형적인 인물이었다.

지식인들은 수도원에서의 금욕주의적 생활과 현세를 무시하고 경멸하면서 현재 인생의 권리를 주장하고 인간의 보편적 권리를 주장했다.
교회의 위선에 대한 지식인들의 증오가 르네상스의 가장 큰 정신적 원동력이 되었다.
그리고 르네상스의 여건은 13~14세기의 선구자 단테Dante(1265~1321), 페트라르카Petrarca(1304~74), 보카치오Boccachio(1313~75) 세 시인에 의해 마련되었다.
이들 3대 시인들 중 단테는 르네상스의 가장 큰 별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다비드의 야심과 나폴레옹의 꿈>에서 발췌

말 탄 남자


1799년 11월 14일 서른 살의 나폴레옹은 성공적인 쿠데타로 뤽상부르 궁에서 통령 취임식을 가졌다.
제1통령의 임기는 10년이었고, 제2통령, 제3통령은 제1통령인 나폴레옹의 자문에 불과했고 봉급도 제1통령의 3분의 1에 불과한 15만 프랑이었다.
프랑스는 새로 들어선 통령정부로 새로운 전기를 맞았으며 5년 전부터 빈번하게 발생한 쿠데타와 정치적 혼란이 다소 안정되었다.
하지만 재정부족을 비롯한 프랑스의 갖가지 어려움은 그대로 남은 상태였다.
프랑스는 정치적 파열, 경제적 탈진, 사회적 분열, 정신적 피폐의 문제를 안고 있었다.

나폴레옹은 1799년 겨울 군대를 개편하고 이탈리아 원정길에 오를 준비를 했다.
이탈리아 피에몬테에서 잔여 병력을 이끌고 있는 프랑스의 마세나 장군이 두 배나 되는 병력 10만을 거느린 71살의 늙은 오스트리아 장군 멜라스에게 심한 압박을 받고 있었으므로 지원을 해야 했다.
그는 운송용 노새에 대포를 싣고 1800년 5월 14일 생-베르나르 샛길을 따라 알프스 산맥을 넘어 남쪽으로 진격했다.

나폴레옹이 2차 이탈리아 원정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자크-루이 다비드는 그의 초상을 기념비적인 모습으로 그리고 싶어 포즈를 취해줄 것을 제의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거절했고, 가장 중요한 점은 닮게 그리는 것이 아니라 성격을 나타내는 것이라면서 알렉산더 대왕이 고대 그리스의 예술가 아펠레스에게 포즈를 취해주지 않았음을 지적했다.
다비드는 할 수 없이 나폴레옹이 마렝고에서 사용한 부츠, 뿔모양으로 생긴 모자, 장식이 달린 유니폼, 칼 등을 아들 또는 제자 프랑수아 제라르로 하여금 사용하게 해 나폴레옹을 대신한 모습으로 그렸다.

1774년에 로마대상을 수상한 후 스승을 따라 로마로 가서 프랑스 지부 아카데미에서 유학하면서 다비드는 고대 예술에 탐닉했고, 개빈 해밀턴을 포함한 새로운 고전 부흥의 선구자들과 교류했다.
그가 공감했던 미학상의 견해는 독일인 화가 멩스가 먼저 주장한 것이었다.
멩스는 빙켈만의 친구이며 그로부터 이론적 영향을 많이 받아 작품에 적용했다.
멩스는 완벽한 미를 얻기 위해서는, 그리스의 전통적인 구상 위에 라파엘로의 표현성과 코레조의 명암법과 티치아노의 색채를 결합시켜야 한다는 절충주의를 주장했다.

다비드는 1783년 왕립미술아카데미 회원이 되었다.
1780년대에 루이 15세와 로코코 시대의 경박함에 대한 사회적, 도덕적 반발이 거세지자, 다비드의 위치는 확고해졌다.
색채보다 선묘를 더 중시하는 당시의 조류와는 타협하지 않았고, 표현에서 불필요한 요소를 거부했다.
다비드는 왕립아카데미를 대신하는 새로운 기관을 창설하는 데 적극 참여했다.
그는 1794년 로베스피에르의 실각 이후 투옥되었다가 혁명에 대해 서로 공감하지 못했던 이유로 이혼했던 전부인의 탄원으로 석방되었다.
석방되고 나서 그린 <사비니 여인들의 중재>는 그에게 명성과 지위를 다시 회복시켜 주었다.
그 후 다비드는 나폴레옹의 열렬한 지지자가 되었고, 사회적, 예술적으로 다시 지배적인 지위를 누렸다.

다비드는 사나운 말 위에 침착하게 앉아 있는 모습으로 그리라는 나폴레옹의 주문으로 승리를 찬양하는 <생-베르나르 고갯길을 지나는 보나파르트>를 그리면서 왼편 하단 바위에 나폴레옹의 이름과 함께 한니발과 샤를마뉴의 이름을 적어넣었는데 두 사람은 나폴레옹에 앞서 험준한 알프스를 넘은 정복자들이었다.
샤를마뉴는 프랑크 왕국의 왕(768~814년 재위)으로 ‘유럽의 아버지 왕’으로 서유럽 대부분을 통일했다.

나폴레옹이 좋아한 그림은 자신의 모습이 주제로 그려진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미술이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는 데 매우 효과적이라는 점을 알고 기꺼이 미술품에 많은 돈을 지불했다.
그에 의해서 프랑스 회화는 정치적 성격이 짙어지게 되었으며 집정부(1799~1804)와 나폴레옹에 의해 예술가들은 호황을 누리게 되었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다비드가 묘사한 것처럼 거창하게 알프스를 넘지 않았다.
부하들이 이미 알프스를 넘은 며칠 후 말이 아닌 노새를 타고 협소한 길을 따라 넘었다.
훗날 폴 들라로세가 그린 그림이 실제에 가깝다.
들라로세는 1845년에 <퐁텐블로 궁전에서 퇴임하는 나폴레옹>을 그린 경험으로 나폴레옹의 인물 묘사에 자신이 생겼고, 1847년 <알프스를 넘는 샤를 마뉴>에 이어 1848년에 <생-베르나르 고갯길을 지나는 보나파르트>를 그렸다.

다비드는 20년 전 로마에 체류할 때 폴란드의 귀족 스타니슬라스 포톡키 백작으로부터 초상화를 주문받아 말 탄 모습으로 그를 그린 적이 있었다.
다비드는 바로크의 유명한 초상화가 안토니 반 다이크의 <말 탄 사보이의 왕자 토마스>를 참조하여 거의 같은 스케일로 그렸다.
루벤스를 예외로 하면 반 다이크는 17세기 플랑드르 최고의 화가이다.
열 살 때부터 회화를 수학한 그는 19세에 화가들의 연합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1620년에 런던으로 가서 수개월 동안 제임스 1세의 후원으로 그림을 그렸으며 다음해 이탈리아로 가서 1627년까지 그곳에 머물렀다.
이탈리아에서 돌아온 그는 1628~32년까지 안트베르펜에서 지냈고 1632년 영국으로 가서 타계할 때까지 그곳에 거주했다.

다비드는 포톡키의 초상을 밝고 생기 있는 색을 사용하여 그렸는데 이런 요소들은 과거 작품에서 발견할 수 없는 것들로 그의 양식이 달라지고 있음을 알게 해준다.
과거에 그린 초상화들에서는 가장 밝은 부분이 흩어진 데 비해 이 작품에서는 대각선 명암의 효과로 포톡키의 왼쪽이 밝게 드러났으며 말 다리의 어두운 부분은 극적인 장면으로 보인다.
다비드는 자신의 이름과 제작연대를 하단 왼편 가장자리 달마티안 개의 목걸이에 적어넣었다.
폴란드의 고귀한 귀족 출신의 백작 포톡키는 아내가 가져온 신부지참금으로 부자가 된 사람이다.
학자이기도 한 그는 빙켈만의 저서를 번역했으며 그의 별명은 ‘폴란드의 빙켈만’이었다.
로마에서 다비드의 양식에 변화가 생긴 것은 무엇보다도 로코코 양식을 완전히 버리고 좀더 극적이면서 사실적인 묘사에 충실한 데 있으며, 대가들의 구성과 기교를 두루 관찰하면서 전통을 따르려고 한 것도 요인이었다.

다비드가 <생-베르나르 고갯길을 지나는 보나파르트>를 그릴 때 마드리드 궁전에 벨라스케스의 <말 탄 올리바레스의 백작>이 장식되어 있었다.
야외를 배경으로 하늘을 넓게 화면을 차지한 점에서 그리고 오른편에서 약간 비스듬히 바라본 구성은 반 다이크보다는 벨라스케스의 구성이 더욱 <생-베르나르 고갯길을 지나는 보나파르트>와 유사하다.
벨라스케스는 반 다이크보다 먼저 이런 구성의 그림을 그렸다.
다비드가 벨라스케스의 작품을 참조했다는 기록이 없지만 두 작품의 유사성이 우연의 일치로 보기에는 개운하지 않다.

벨라스케스는 1622년에 마드리드를 잠시 방문했고 이듬해 재상 올리바레스 백작의 초대를 받아 다시 수도로 가서 펠리페 4세의 궁정화가가 되어 여생을 마드리드에서 보냈다.
궁정화가로서의 그의 임무는 모르 반 다스호르스트와 코에요로부터 비롯된 에스파냐 궁정 초상화의 경직되고 의례적인 양식의 전통에 인간미를 부여하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그는 모델들에게 좀더 자연스런 포즈를 취하게 하고 장신구를 생략하여 인물에게 생명력과 개성을 부여했다.
왕실 컬렉션에 있던 티치아노의 초상화에서 영감을 얻었지만 그의 작품은 티치아노의 작품을 훨씬 뛰어넘어 자연스러움과 단순함을 향해 한 걸음 더 나아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회화에 대한 다비드의 열정 
  

 김광우의 <다비드의 야망과 나폴레옹의 꿈>(미술문화) 중에서 

 

다비드는 1748년 8월 30일 파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문에서는 프리메이슨Freemasons(중세 석공의 숙련공 조합원)과 건축가가 속속 배출되었다.
다비드의 아버지 루이 모리스는 귀족들이 사용하는 브레이드, 리본, 레이스, 주름장식 등을 제조하는 사업을 했다.
어머니 마리 제네비에브 부롱은 벽돌공이며 건축업자의 딸이었다.
루이 모리스는 사업이 번창하자 당시 새롭게 부상한 철 도매업에도 투자했다.
그는 돈을 주고 말단 공무원직을 샀는데 18세기 프랑스에서는 흔한 일이었다.
루이 모리스는 이런 품위를 갖추는 생활에 매우 만족해 했다.
그는 1757년 12월 2일 칼바도스를 여행하던 중 피스톨 결투로 31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왜 결투를 하게 되었는지에 관해서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9살에 아버지를 여윈 다비드는 외삼촌 프랑수아 부롱과 이모부 자크-프랑수아의 보살핌을 받고 자랐는데 보호자 두 사람 모두 목수, 건축가, 건설업자였다.
부롱가는 18세기 후반 파리의 급격한 건설붐을 타고 많은 돈을 벌었다.

다비드는 기숙사가 딸린 학교에 보내졌고 마지막 학년을 쾨트르-나시옹 대학에서 마쳤다.
학문적으로 명문인 이 대학은 라틴어를 완전하게 구사하도록 가르쳤고 그리스사와 로마사를 중점적으로 가르쳤다.
다비드는 우수한 학생이었으므로 고대사와 영웅들에 관해 충분히 배워 알고 있었지만 학자로서의 자질은 없었다.
훗날 그는 모교를 두 번 방문할 일이 있었는데 한 번은 1796년 죄인의 몸으로 갇힐 때 감옥으로 사용되었고 다음은 10년이 지난 후 영예로운 아카데미 회원으로서 방문했는데 그 시기 이 대학은 프랑스 아카데미의 온상이었다.

어머니는 다비드가 군인이 되어 가문을 빛내주기를 바랐고 보호자인 외삼촌과 이모부는 건축가가 되기를 바랐지만 보통의 부르주아 출신 젊은이답지 않게 그는 하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다비드는 훗날 자신에 관해 적었는데 자신을 삼인칭으로 지칭한 것이 흥미롭다.

"그는 아주 어렸을 적부터 드로잉에 열심이었다. ...
회화에 대한 열정은 가족들의 반대에 비례해서 더욱 더 커졌는데 가족들은 화가가 되는 걸 반대했지만 그는 드로잉을 마스터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1860년에 외젠 들라크루아는 말했다 

김광우의 <다비드의 야망과 나폴레옹의 꿈>(미술문화) 중에서 

 

"다비드는 회화와 조각에 있어서 모던 학파의 아버지였다. 그는 건축에서도 개혁을 꾀했으며 일상용 가구에서조차 개혁을 해냈다."

모던 학파가 다비드에게서 비롯했다는 최대의 찬사이다.
다비드의 <황제와 황후의 대관식>을 보기 위해 매년 많은 사람이 루브르 뮤지엄을 향한다.
루브르에서 다비드의 작품보다 더 많은 사랑을 차지하는 작품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뿐이다.

열정적인 동시에 조울증적인 다비드의 기질은 모든 그의 작품에 속속들이 배어 있으며 이는 그의 고유한 양식이 되었다.
자신의 개인적인 복잡한 느낌을 시각적으로 미묘하면서도 매우 적절하게 묘사해내는 데 있어 다비드는 달인이었다.
궁정 수석화가가 되는 것이 회화에 입문한 후부터 그의 유일한 꿈이었고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정치에 깊숙히 관여했으며 결국 꿈을 이루어냈지만 나폴레옹이 퇴위하자 '화단의 나폴레옹'으로 군림했던 그도 자의 반 타의 반 망명의 길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다비드와 나폴레옹 모두 조국을 등지고 이국에서 세상을 떠났다.

자크 루이 다비드가 태어날 무렵 프랑스는 정치적, 사회적으로 불안정한 상태가 극에 달해 곧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
정부는 누적된 재정적자를 해결하기 위해 전쟁을 선택할 수박에 없었다.
유럽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프랑스는 유럽의 나라들 가운데 가장 번영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1780년 당시 프랑스 인구는 2천 5백만에 육박했고 파리 시민은 65만으로 가장 큰 도시였다.
참고로 주변 나라들의 인구를 보면 러시아가 2천 4백만, 이탈리아 1천 7백만, 스페인 1천만, 영국 9백만, 프러시아 8맥 60만, 오스트리아 790만, 아일랜드 4백만, 벨기에 220만, 포르투칼 210만, 스웨덴 2백만, 네덜란드 190만, 스위스 140만, 덴마크 80만, 노르웨이 70만이었다.

당시 빈부 격차가 극심했으며 가문, 명예, 땅의 소유가 사람들의 사회적 지위와 계급을 결정지웠다.
사회계급은 삼등분되어 있었으며, 성직자가 13만, 귀족이 40만, 나머지가 평민이었고, 평민은 혹독한 법의 지배를 받았으며 죄의 심판은 그들에게 가혹했다.
정부의 무능으로 군사적 침략을 받았고 전쟁의 패배가 재정을 악화시켰으며 국고를 충당하기 위해 세금을 올리자 가난한 사람들은 한층 더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야 했다.
경제적으로 프랑스는 영국에 비해 매우 빈곤했다.

이 시기에 정치적, 사회적으로 급격한 변화가 일어났는데 은행가. 금융업자, 변호사, 돈 많은 상인들인 부르주아 계급이 자신들의 축적된 부를 이용해서 사회적 지위와 권력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기존의 귀족과 연합하거나 왕가에 영향력을 행사해 정치적 지위를 차지했다.
이런 혼란과 횡포에 맞서 불평등을 고발하고 왕권과 종교적 전통에 반발한 철학자와 작가들이 있었는데 장 자크 루소, 볼테르, 드니 디드로 세 사람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계몽주의의 파도를 타고 이들의 영향은 프랑스에서 뿐 아니라 국외에서도 매우 컸다.
디드로와 장 르 롱드는 1751~80년 사이 35권의 방대한 분량의 <백과사전>을 출간했는데 인류의 모든 지식을 집약한 것으로 프랑스의 사회적, 기술적 현대화의 청사진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