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에 대한 재능과 관심
 

 

 김광우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과학과 미켈란젤로의 영혼>(미술문화)에서 

레오나르도는 30살 때 밀라노로 향했다.
자신의 재능을 로렌초가 알아주지 않자 잠시라도 피렌체를 떠나고 싶었을 것이다.
바사리는 레오나르도가 밀라노에 간 해를 1476년이라고 기술했지만 실제로는 1481년 겨울로 그 이전에 그가 피렌체를 떠나기는 불가능했다.
레오나르도는 친구 아탈란테 미글리오로티와 함께 밀라노로 향하면서 밀라노 최고 권력자 공작에게 선사할 악기를 소지했다.
바사리는 그 악기를 레오나르도가 직접 고안 제작한 것으로 류트와 유사하며 주로 은으로 제작되었다면서 ꡒ말 머리 형상을 한 이 낯선 악기는 강력한 하모니와 완전한 음을 냈다ꡓ고 적었다.
레오나르도는 피렌체에서 개최된 음악경연대회에서 이 악기를 연주한 것 같으며 그때 모든 음악가들을 물리치고 음악을 사랑하는 로렌초의 마음에 든 것 같았다.
당시 피렌체에는 다양한 악기가 있었고 레오나르도가 사용한 동물 머리 형상의 현악기 류트와 칠현금 리라 다 브라치오lira da braccio도 주로 가수가 노래를 부를 때 반주로 사용되었다.
리라 다 브라치오는 벨리니, 카르파치오Carpaccio, 라파엘로, 만테냐의 그림에서 천사가 사용하는 악기로 등장한다.

음악경연대회는 실제로 열렸던 것 같으며 15년 후 레오나르도는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ꡒ니콜라이오 델 투르코의 아들 타데오는 1497년 9월 28일 미카엘마스 이브Michaelmas Eve에 9살이었다. 아이는 그 날 밀라노로 가서 류트를 연주했으며 이탈리아 최고 연주자들 중 하나라는 판정을 받았다.ꡓ

레오나르도가 음악에 관심이 많았던 것에 대한 확신은 그의 노트에서 발견할 수 있으며 그는 자신이 발명한 악기는 물론 어쿠스틱acoustic 악기들에 관해서도 언급했다.
그는 비올라 오르가니스타viola organista, 그릴산도와 녹음기, 북과 키보드가 있는 종을 발명했으며 바이올린도 발명할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는 악보를 읽을 줄 알았고 쓸 줄도 알았으며 악보를 ꡒ보이지 않는 것들을 재현“하는 것이라고 적절하게 설명했다.
그가 쓴 악보는 현존하지 않는데, 그는 즉흥적 작곡가였다.
그는 종종 보표와 음표를 이합체와 수수께끼 가운데 사용하여 창조적으로 곡을 만들었다.
그가 몇 페이지에 걸쳐 쓴 악보를 보면 음자리표 다음에 보표를 낚시바늘(이탈리아어로 아모amo)로 그린 후 라레rare란 글자를 적고 레re 솔sol 라la 미mi 파fa 레re 미mi를 적었으며, 길게 선을 그은 후 라 솔 미 파 솔을 표기하고 글자 레치타lecita를 적었다.
이는 ꡐ아모레 솔 라 미 파 레미라레 라 솔미 파 솔레치타 Amore sol la mi fa remirare, la solmi fa sollecitaꡑ가 되고 번역하면 ꡐ오직 사랑만이 나의 심장을 휘저음을 기억하게 만든다ꡑ가 된다.
또 다른 가사는 ꡐ사랑이 내게 즐거움을 준다ꡑ라고 적혀 있다.

레오나르도는 밀라노의 음악가 서클에 곧 알려졌다.
그가 밀라노에서 처음 그린 초상화는 밀라노 공작이 아니라 음악가였다.
이 초상화는 1905년에야 세상에 알려졌는데, 앉은 사람이 악보를 들고 있고 악보에는 보표와 함께 ꡐ칸트 앙 Cant. Ang.ꡑ이라고 적혀 있다.
ꡐ칸트 앙ꡑ은 ꡐ칸티쿰 안젤리쿰 Canticum angelicumꡑ을 의미하고 이는 밀라노 대성당의 합창단장 가푸리우스Gafurius로 알려진 프랑치노 가푸리오Franchino Gaffurio의 작곡명이다.
따라서 초상화에 앉아 있는 사람은 가푸리우스로 짐작된다.
레오나르도는 가푸리우스의 이론서 『실용적 음악 Practica musicae』에 관한 삽화를 그린 것으로도 알려졌으며 하모니의 관념을 분석한 최초의 논문이다.

레오나르도는 파비아 사람 로렌초 구나스코Lorenzo Gugnasco도 알게 되었는데, 악기를 생산하고 매매하는 사람으로 오르간, 합시코드, 류트, 비올viol(중세 현악기로 바이올린 종류의 전신) 등 다양한 악기들을 취급했으며 밀라노, 페라라, 만투아 등지의 궁정에 납품했다.
레오나르도는 그와 가까이 지내면서 그의 작업장에서 다양한 악기들을 제작 실험한 것으로 짐작된다.
그는 또 자기보다 10살 어린 아탈란테 미글리오로티Atalante Migliorotti를 알게 되어 제자로 삼아 가르치면서 함께 여행하기도 했다.

아탈렌테는 레오나르도와 마찬가지로 사생아였다.
레오나르도는 그와 가까이 지내면서 그의 초상을 그린 것으로 알려졌다.
아탈렌테가 밀라노에서 무엇을 하고 지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가수이면서 수금을 연주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1491년 만투아에서 폴리지아노Poliziano의 작품 <파볼라 도르페오 Favola dꡑOrfeo>에서 주인공역을 맡았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기록에 의하면 레오나르도는 그와 헤어졌고 1513년 로마에서 다시 만났는데, 그때 아탈렌테는 막강한 후원자를 배경으로 가수로 왕성하게 활약했다.
레오나르도는 은으로 악기를 만들어 직접 밀라노 공작에게 바쳤으며 아탈렌테와 더불어 악기들을 연주하면서 밀라노 음악가들과 어울렸지만 음악가로 성공하겠다는 마음이 없었기 때문에 더이상 아탈렌테와 함께 활동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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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우의 <성난 고갱과 슬픈 고흐>(미술문화) 중에서

외젠 들라크루아와 폴 고갱


1888년 11월 16일경 고갱이 아를에서 반 고흐의 노란집에 묵고 있을 때 모호한 구성의 그림을 그렸는데 <건초 안에서, 하루의 열기 속에서>이다.
반 고흐는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 “건초와 돼지가 있는 가운데 누드 여인”이라고 언급했다.
해석하고 읽어내기 어려운 작품이다.
상단 끝에 돌로 된 벽이 조금 보이고 여인은 허리까지 알몸을 드러낸 채 등을 돌렸는데, 등과 어깨는 하얀 피부지만 팔꿈치 아래 왼손은 벌겋게 탔다.
화면 아래 왼편에 핑크빛 오렌지색의 돼지 몸통이 보이고 여인 오른편에도 돼지 뒷부분과 꼬리가 보인다.
여인의 허리 아래 갈퀴가 보여 여인이 작업 도중에 낮잠을 자고 있는 것으로 짐작된다.
하지만 여인의 모습이 모호해서 앉아 있는 것인지 서 있는 것인지 가늠하기 어렵다.
아를로 오기 전 고갱이 브르타뉴에서 드로잉한 여인의 기억을 되새겨 이 작품에 삽입한 것으로 추정된다.
여인의 모습은 프랑스의 낭만주의 화가 외젠 들라크루아의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에서의 누드를 상기시킨다.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은 들라크루아가 영국을 여행한 후 연극에 대한 이해가 한층 많아진 후 그린 것으로 바이런의 희곡 <사르다나팔루스>(1821)에서 영감을 받아 그린 것이다.
들라크루아는 1828년 살롱전의 소개 책자에 이 작품에 관해 적었다.

“사르다나팔루스는 거대한 화장대 위에 놓인 화려한 침대에 누워 화관들과 궁정의 근위병들에게 그의 처첩들과 시종들 그리고 그가 총애하던 말들과 개들까지 모조리 목을 자르라고 명한다.
그의 쾌락에 봉사했던 그 어떤 것도 그가 죽은 후 살아남아서는 안 되었던 것이다.”

바이런의 희곡은 수도 니네베가 적군의 수중에 떨어지자 감연히 분신자결을 택한 아시리아의 전설적인 군주 사르다나팔루스를 그리고 있다.
이 작품은 아시리아 중심으로 왕 옆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미르하는 두 팔을 활짝 펴고 침대에 엎드린 채 자신의 목을 자르려 다가오는 근위병들에게 등을 내보이고 있는 구성이다.
요란한 살육의 장면들이 적색, 오렌지색, 황색, 갈색 등으로 현란하게 묘사된 이 작품은 고전주의에 대한 형식 파괴를 보여주는 낭만주의의 상징적 작품이 되었다.
당시 화가들은 발루아 지방의 역사 혹은 16, 17세기의 영국의 역사에서 비극적인 사실들을 찾아내어 이런 것들을 극적인 장면들로 묘사했다.
살롱전에 출품된 작품들은 살인이나 전투, 학살장면 일색이었다.
그래서 일부 관람자들은 화가들이 대중을 타락시켜서 방탕함에 짓눌리게 한다고 비난했다.

고갱은 1888년 크리스마스에 아를을 떠나 파리로 간 후 그곳에서 두 달 머물다가 퐁타방으로 갔다.
브뤼셀과 볼피니에서의 전시가 경제적으로 실패하자 빚이 늘었고 우울해졌다.
퐁타방은 돈이 적게 들어 그에게는 제2의 고향과도 같은 시골이었다.
그러나 관광지가 되어버린 퐁타방에 계속 머무는 것도 창작에 도움이 되지 않아 1889년 10월 근처의 르 풀뒤로 갔다.
바닷가의 이 작은 마을은 화가들에게 제2의 브르타뉴로 부상되고 있었다.

그는 그곳에 안주하기 전 그곳을 자주 찾았고 1889년 봄에 <파도 속에서>를 그렸는데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과 <건초 안에서, 하루의 열기 속에서>와 유사한 형식의 작품이다.
여인이 수영하는 장면을 그리면서 파도와 정면으로 마주치게 해서 삶의 즐거움을 맞이하는 의미를 담았다.
고갱은 이원론적 사상을 갖고 있었는데 삶과 죽음,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인 것이다.
그가 르 풀뒤에서 작업한 작품들은 이런 이원론에 근거한다.
등을 관람자에게 돌린 여인의 모습은 <신비롭게 보이는>과 <큄퍼 주전자가 있는 정물>에서도 삽입되었다.

고갱은 르 풀뒤에서의 생활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타히티로 가기로 결심했다.
그가 타히티행을 결정한 것은 1890년 여름이 다할 무렵으로 반 고흐가 자살한 그해 7월 27일이 조금 지난 후였다.
그는 르 풀뒤에서 르동에게 편지를 썼다.

“마다가스카르가 좀더 유럽 가까이 있지만은 타히티로 가려고 하며 그곳에서 여생을 마치려고 합니다.
선생이 좋아하는 저의 예술이 먼 곳에 심어지고 저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원시적이고 야만적인 상태에서 성장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저는 고요와 평화의 상태에서 지내야 만합니다.
사람들이 ‘고갱은 끝났어. 그가 보여줄 것이란 더 이상 없어’라고 말하면서 저의 명예를 훼손하더라도 상관하지 않겠습니다.”(1890.9)

고갱이 타히티로 간 이유 가운데 그의 경제적 어려움이 가장 컸다.
그는 타히티에서는 거의 무일푼으로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1891년 2월 23일 월요일 드루오 호텔에서 작품 서른 점을 경매에 붙여 자금을 마련하기로 하고 한 달반 전부터 언론과 잡지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친구들을 동원하여 이 일을 대대적으로 알렸다.
고갱의 친구 모리스가 시인 스테판 말라르메로 하여금 미술평론가 옥타브 미르보에게 고갱의 작품에 호감을 주는 글을 청탁했다.
미르보의 글이 전시회가 열리기 한 주 전 1891년 2월 16일 <에코 드 파리>에 발표되었고, 사흘 후 일간지 <르 피가로>에 장문의 글이 기고되었으며, 경매 카탈로그에도 기재되었다.
미르보는 고갱을 “화가, 시인, 사도, 악마”라고 적으면서 회화의 그리스도라고 추켜세웠다.
미르보는 잉카의 후예인 고갱의 작품에서 야만적 아름다움과 모호한 상징주의의 요소가 발견되며 절대적인 고립을 위해 마르티니크로 간 적이 있는 고갱은 이제 자신의 꿈의 세계에 좀더 근접한 남태평양의 타히티로 가는 것이라고 하면서 어디를 가든지 그의 여정에 관심을 갖는다고 했다.
고갱은 미르보의 글에 대단히 만족해하며 그에게 직접 감사를 표했다.

시인이며 미술평론가 알베르 오리에도 고갱에 관한 글을 발표했다.
오리에도 고갱을 회화에 있어서 새로운 상징주의를 개척한 “축복받고 영감을 가진 예언자”라고 극찬하면서 회화에서의 상징주의 선구자라고 소개했다.
이렇게 자신의 명성을 쌓은 고갱은 정부 공무원과 사회적으로 지명도가 있는 인사들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을 도와달라고 청했는데,
그가 편지를 보낸 인사들 중에는 공화당 대변인이자 예술부 장관 안토냉 프루스트와 철학자이며 역사가 에르네스트 르낭도 포함되었다.
고갱은 프루스트에게 ‘타히티에 대한 정부 후원 미션’을 신청했으며 정치인으로 훗날 국무총리가 된 조르주 클레망소는 “타히티의 풍경과 풍물을 그리고 연구”하는 데 필요한 자금을 받게 해주었다.
고갱은 예술원으로부터 마르세유에서 타히티행 배표를 얻을 수 있었고, 식민지 책임자에게 보내는 소개장도 갖게 되었다.

고갱은 1891년 4월 1일 마르세유에서 배를 타고 타히티로 향했다.
그가 탄 배가 누메아에서 일주일 정박하고 타히티에 도착한 것은 6월 9일이었다. 타히티는 남태평양 중부, 프랑스령 폴리네시아의 소시에테 제도 가운데 동쪽 윈드워드 제도에서 가장 큰 섬으로 1767년에 발견되어 프랑스 식민지가 된 후 프랑스 관리와 군인이 통치하던 곳이다.
고갱의 표현으로 하면 “신비스러운 것들이 요염한 조화를 이루는 환희와 적막”을 맛볼 수 있는 타히티에서의 생활에 그는 만족해했다.
그는 그곳에서 <바다 근처>를 그렸는데 등을 돌린 동일한 여인이 삽입되어 있어 그가 실재에 상상의 인물을 삽입했음을 보고 또한 이 이미지에 집착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1893~94년에 제작한 판화에서도 이 이미지를 삽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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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홀과 친구들> 중에서

뒤샹은 물의를 자초하며


1917년 어느 날 뒤샹은 배관공들을 위한 물품 상점에서 변기를 하나 구입했다.
그는 변기 제조업자 리처드 머트(R. Mutt)의 이름을 변기에 서명한 후 제목을 〈샘〉(그림 18)이라고 붙여 그해 뉴욕 앵데팡당전에 출품했다.
뒤샹이 의도했던 대로 이 작품이 심사위원들로부터 배척당하자 그는 이 사건을 크게 확대해 반사이익을 노렸다.
심사위원들 앞으로 편지를 쓰고는 편지의 내용을 친구들과 함께 창간한 잡지 《장님 The Blind Man》 제1호에 게재했다.
뒤샹은 변기 제조업자 리처드 머트를 자신을 지칭하는 은유적인 이름으로 사용하면서 편지에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분명히 어느 예술가라도 6달러를 내면 전람회에 참여할 수 있다.
리차드 머트 씨는 〈샘〉을 출품했다. 그런데 아무런 의논도 없이 그의 작품이 사라졌다.
머트 씨의 〈샘〉이 배척당한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첫째, 사람들은 그것이 비도덕적이며 저속하다고 말한다.
둘째, 사람들은 그것이 표절이라고 말한다.

단순한 하나의 화장실 설비― 이제 머트 씨의 〈샘〉 ― 는 비도덕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누구든지 배관공들을 위한 상점의 진열장에서 매일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머트 씨가 〈샘〉을 직접 자신의 손으로 만들었느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는 그것을 선택했다.
그저 존재하는 평범한 생활용품을 선택하여 전시함으로써 새로운 제목과 새로운 견해 아래서 실용적인 의미는 사라졌다.
그는 새로운 개념을 창조한 것이다. 화장실 설비를 표절했다는 말은 부당하다.
미국이 만들어낸 유일한 예술품은 바로 이 화장실 설비와 교량들뿐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뒤샹은 물의를 자초하며 전통 미학 자체에 대한 사람들의 주의를 환기시키려고 했다.
1919년에는 레오나르도의 유명한 그림 〈모나리자〉의 모조품을 하나 사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상징하는 모나리자의 얼굴에 연필로 수염을 그려 넣어 다시 추문을 일으켰다.
그는 그것에 〈L.H.O.O.Q.〉(그림 19)라는 제목을 붙였는데 이를 프랑스말로 읽으면 Elle a Chaud au Cul로서 ‘그 여자는 뜨거운 엉덩이를 가지고 있다’라는 뜻이 된다.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은 그 작품을 보고 뒤샹이 환상의 실제를 창조한 것이라고 환호하며 반겼다.

뒤샹은 이따금 재미로 여장을 하고 타인행세를 했고 이러한 자신의 모습을 로즈 셀라비(Rrose Selavy)라고 명명했는데 셀라비란 ‘그것은 인생(C’est la vie)’에서 따온 말이었다.
만 레이는 뒤샹의 여장 모습을 사진으로 찍었는데 원래의 것은 없어졌으며 재생한 것이 지금 구겐하임 뮤지엄에 소장되어 있다(그림 21).
사진을 보면 뒤샹은 양손에 반지를 끼고 털목도리를 둘렀으며 얼굴에 화장을 했는데 실제 여자를 방불케 했다.
그의 원래의 모습은 마치 사기꾼이나 흉악범처럼 보이는데 여자로 분장했을 때는 아주 매력적인 여인처럼 보였다.

1923년 〈그녀의 독신자들에 의해서조차 벌거벗겨지는 신부〉(일명 큰 유리, 그림 20)를 제작한 후로는 서양장기에 전념하면서 예술을 등한시했지만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의 전람회 개최에 도움을 주기도 했다.
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큰 유리〉는 뉴욕에서 제작한 것으로 유리창처럼 생긴 것을 통해 내부의 조직을 볼 수 있도록 한 작품이다.
그는 철사 줄과 오일, 주석조각, 먼지를 사용하면서 호색적인 주제의 알쏭달쏭한 작품을 제작했는데 해석하는 사람들에 따라 의견이 분분했다.
어떤 사람은 기계예술의 이미지라고 했고 신비적 연금술적 상징이라고 말한 사람도 있다.
가장 설득력 있는 해석으로는 시인 앙드레 브르통의 “사랑에 대한 기계적인 해석으로 사치스러운 교묘함이 있다”는 것이다.
〈큰 유리〉가 1926년 브루클린 뮤지엄(Brooklyn Museum)에서 소개될 때 운반 과정에서 실수로 유리가 깨졌는데 뒤샹은 1936년에 두꺼운 유리로 금이 간 유리를 덮으면서 구성이 ‘우연에 의해서’ 완성되었다고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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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완전한 상태가 완성
 

  레오나르도가 피렌체 통치자 로렌초의 서클에 소개되었을 때 소외감을 느꼈을 것이다.
당시 그리스 고전 문화에 정통한 학자 조반니 아르지로폴로Giovanni Argyropolo가 1475년까지 피렌체에서 명강의를 했고 지식인들은 그의 강의에 매료되었지만 라틴어를 모르고 그리스어는 더욱 더 몰랐던 레오나르도가 그의 강의에 관심이 있었을 턱이 없었을 것이다.
레오나르도는 적었다.

“내가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주제넘은 몇몇 사람이 나를 가리켜서 교양 없는 사람이라고 비판할 수 있다는 점을 잘 안다. 얼마나 어리석은 인간들인가! 그들은 마리우스Marius가 고대 로마 귀족들에게 한 것처럼 내가 그들에게 응답할 수 있다는 것을 정녕 모르는 것일까. 다른 사람의 작품에 관해 알고 있다는 점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그들이 나의 작품에 도전할 수 있을까? 문학에 경험이 없는 까닭에 내가 선택한 주제에서 나 자신을 표현하는 데 장애가 있을 것이라고 그들은 말할 것이다.”

비록 배우지 못했더라도 레오나르도에게는 직관이 발달해 있었다.
그에게는 자연이 스승이었다.
그러므로 배우지 못한 데 대한 열등의식이 그에게는 없었다.
그도 로마인의 조각과 저부조bas-reliefs를 보고 고대 미술을 알게 되었지만 고대의 장점이나 완전함을 부인했다.
그는 이따금 고대 미술에 관해 언급했지만 표준으로 삼지는 않았다.
그의 견해는 예술이든, 과학이든, 문학과 철학을 포함해 그 어떤 것이든 전적으로 자연으로부터 나아오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적었다.

ꡒ어느 누구도 딴 사람의 방법을 모방하지 않아야 한다. 그렇게 되면 자연의 아들이 아니라 손자로 불리우기 때문이다. 자연적 형상들이 널려 있으므로 자연으로부터 습득한 사람을 마스터하기보다는 자연을 직접 똑바로 나아가는 것이 중요하다.ꡓ

레오나르도는 유행이란 지나가는 것이라면서 자신은 예술로 돈을 버는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로부터 영예와 자긍심을 기대하는 사람에게 주는 말이라고 했다.

레오나르도는 밀라노로 떠나기 몇 달 전 1480년경 제단화 <동방박사의 경배 Adoration of the Magi>를 위한 밑그림을 그렸다.
피렌체 인근 스코페토Scopeto의 상 도나토San Donato 수도회를 위해 제작한 것이다.
거의 2.5m(243-246cm)의 정사각형 크기로 초기 작품들 중 가장 외부의 영향을 받아 그린 것이다.
그는 작은 인물화가 아니라 수십 명이 등장하는 장대한 스케일로 구성했다.
여러 회화적 요소에 마음이 동요되는 15세기 특성이 나타나있지만 주요 대상을 부각시키는 방법이 새롭다.
보티첼리와 기를란다요도 <동방박사의 경배>를 그렸지만 두 사람은 사람들이 에워싼 가운데 마돈나가 별로 중요하지 않게 앉아 있는 모습이다.
그러나 레오나르도는 처음으로 마돈나를 두드러지게 구성했으며 독립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마돈나와 주변 사람들의 대조는 그만이 할 수 있는 효과로 나타났다.
보통 화가들이 마돈나를 묘사할 때 다리를 넓게 벌린 자세로 옥좌에 앉아 있게 그린 데 비해 그는 두 무릎을 모은 섬세하고도 여성적인 자세로 표현했다.
이후 화가들은 레오나르도의 이 그림을 본받아 그렸다.

레오나르도는 관람자가 직감적으로 <동방박사의 경배>가 어떤 사건인지 알 수 있도록 그리면서 성서 기록에 제한을 받지 않았다.
루브르에 소장되어 있는 습작 드로잉을 보면 마구간, 소, 당나귀가 그려져 있음을 본다.
그가 전통 도상을 따랐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완성시킨 작품에는 이런 공현 축일의 전통적 요소들이 사라졌다.
여러 가지 요소들을 한 화면에 담는 15세기의 특성이 있지만 주요 대상을 부각시키는 방법은 레오나르도의 새로운 감각에 의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보티첼리와 기를란다요도 <동방박사의 경배>에서 사람들이 에워싼 가운데 마돈나가 앉아 있는 모습을 그렸지만 보통 이럴 경우 마돈나는 중요하게 보이지 않는다.
레오나르도가 처음으로 주요 주제를 두드러지게 부각되도록 화면을 구성한 것이다.
독립적이고 단순한 모습으로 앉아 있는 마돈나와 그녀 주위에 몰려든 사람들 사이의 대조는 오로지 그만이 할 수 있었던 매우 효과적인 방식이다.

레오나르도는 3명의 나이 든 동방박사들이 감히 하느님의 아들에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고 조금 떨어진 데서 경배하는 장면으로 묘사했는데, 세 사람 모두 늙은 현인들로 수수한 의상에 겸허하고 지친 모습이다.
전설에 의하면 동방박사들 중 한 명은 발타사르Balthasar로 흑인으로 알려졌지만 레오나르도의 그림에는 모두 백인이다.
이 작품의 특이한 점은 마돈나와 아기 예수를 중심으로 주변 공간이 제대로 구분되지 않는 점으로 그렇기 때문에 어디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즉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장면으로 보인다.
그가 불필요한 상황의 세밀한 묘사를 생략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세 가지 예물 중 두 가지 향과 몰약을 바치는 것으로 제한했다.
이 그림을 그리기 위한 드로잉 배경에는 낙타가 그려져 있지만 최종적으로 완성한 그림에서는 낙타가 없고 말 탄 사람의 모습이 보일 뿐이다.
배경에 종려나무와 쥐엄나무carob tree가 보이는데, 전자는 평화를 상징하는 나무이고 후자는 성 요한을 상징하는 나무이자 유다가 목을 매 자살한 나무이기도 하다.

이 작품에는 그 밖의 성서가 언급한 내용에 관한 상징물이 없다.
13세기에 멘데Mende의 주교 기욤 두랑Guillaume Durand은 ꡒ교회 안에 있는 그림과 장식은 평신도들을 위한 읽기이다ꡓ라고 했는데 레오나르도는 그런 의미로 이 그림을 그린 것 같지는 않다.
이런 회화적 동기는 일련의 그의 그 밖의 종교화에서도 나타난다.
성서에 대한 레오나르도의 해석은 교회의 입장과 사뭇 달랐다.
상단에는 말 탄 사람들이 서로 죽이며 전투를 벌이고 있어 고대 세계의 혼돈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임을 알 수 있으며 쥐엄나무 주변에는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아는 무리가 놀라움과 즐거운 표정을 지으며 구세주를 바라보고 있다.
이것이 성서에 대한 레오나르도의 해석이다.

상 도나토의 수도승들은 레오나르도의 이와 같은 특이한 작품을 마음에 들어 했지만 그들은 그가 속히 완성해주기를 바랐다.
1481년 6월 수도원은 계약서를 정정해서 레오나르도가 좀더 적극적으로 작업에 매진할 수 있도록 물감 사는 데 필요한 돈을 지불해주었다.
그는 경제적으로 매우 곤궁했다.
수도승들은 그가 수도원의 시계를 노란색과 파란색으로 칠하게 하고 장작 한 짐과 커다란 통나무 하나를 주기도 했다.
7월 수도원은 그에게 28플로린을 지불했고 여름이 끝날 무렵에는 밀 한 부셰르(약 2말)를 줬으며 9월 28일에는 붉은 포도주 한 통을 줬다.
이것이 수도원 기록부에 적힌 내용 전부이다.

레오나르도는 겨울이 다가올 무렵 더 큰 작업을 얻기 위해 밀라노로 갔다.
그가 <동방박사의 경배>를 거의 완성단계에까지 그렸음에도 불구하고 마치지 않은 건 매우 놀라운 일이다.
16세기를 대표할 만한 작품들 속에 낄 수 있는 독특한 구성의 이 작품을 그가 왜 완성시키지 않았을까 하는 점은 미술사를 공부하는 모든 이에게 의문시 된다.
이 작품에서의 동방박사들은 그의 <최후의 만찬>에서 사도들로 등장하게 되고 배경의 말 타고 전투하는 사람들은 25년 후에 그린 <안기아리 전투 Battle of Anghiari>에 등장하게 된다.
쥐엄나무 뒤에서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는 사람의 모습은 <세례 요한 John the Baptist>을 예고한다.
손가락을 위로 가리키는 매우 특이한 장면은 왼쪽 중앙 두 마리 말 사이의 사람의 모습에서도 볼 수 있다.
이 그림을 보고 필리포 리피, 기를란다요, 보티첼리가 감동을 받았고 특히 라파엘로가 영감을 받아 이런 요소를 스탄자 델라 세나투라Stanza della Segnatura에 프레스코화를 그릴 때 응용했다.
미켈란젤로도 마돈나 주변 어둠 속의 환각 상태에 있는 사람들의 얼굴에서 영감을 받아 이런 무리를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에 그린 것으로 보인다.

레오나르도가 왜 이 작품을 완성하지 않았을까? 이에 대해 바사리는 아주 간단하게 그가 ꡒ변덕스럽고 불안정했기ꡓ 때문에 완성할 수 없었다고 적었다.
그러면서 ꡒ예술에 관한 지식이 많은 그는 많은 프로젝트를 의뢰받았지만 그 어떤 것도 완성시킬 수 없었는데, 자신이 생각한 완전함을 이룰 수 없었기 때문인 것으로 짐작된다ꡓ고 했다.
바사리에 의하면 레오나르도는 문제가 ꡒ너무 난해하고 너무 기묘하므로ꡓ 재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오늘 날 일부 평론가들은 이 불완전한 상태를 완성으로 본다.
이 상태에서 이미 레오나르도의 의도가 명확하게 달성된 것으로 본다.
완성에 대한 르네상스 개념과 오늘 날의 개념이 매우 차이가 있음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바사리가 말한 대로 레오나르도는 이 작품과 <성 제롬>을 미학적 문제에 봉착하자 완성하지 못한 것 같다.
수도원은 계약을 지키지 않았다고 이 작품을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계약위반으로 그를 기소하지는 않았다.
바사리에 의하면 이 작품을 지네브라의 친척 아메리고 데 벤치Amerigo deꡑ Benci가 소유했다.
1481년은 레오나르도가 다른 예술가들과 더불어 바티칸에 초대되지 않았던 해로 아마 그의 최악의 해였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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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의 <베노이스 마돈나>
 

  남색사건으로 기소되었다가 중지된 지 몇 달 후 1477년 대가 베로키오가 조수들을 이끌고 피렌체에서 약 40km 떨어진 피스토이아로 왔다.
그는 추기경 니콜로 포르테구에리를 기념하는 대리석 조각을 제작하기 위해서 온 것이다.
그가 피스토이아에까지 오게 된 기회를 이용해서 지방 집정부는 그에게 제단화 <동정녀와 아이 Virgin and Child>를 의뢰했다.
레오나르도도 이 팀에 가세했는데 아마 불미스러운 사건이 종결되자 잠시 피렌체를 떠나고 싶어서 베로키오 팀에 가세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가 얼마나 그곳에 머물었는지 알 수 없지만 오래 머문 것 같지는 않다.
그가 작업에 참여한 것은 작업장에서 조그만 부분을 그린 것이 전부이다.
루브르에 소장되어 있는 테라코타 모델이 레오나르도가 한 것으로 천사가 그리스도와 동정녀에게 문안드리는 장면이다.
이것은 그가 베로키오의 작업에 기여한 마지막 작품이다.

레오나르도가 처음으로 정부로부터 작품을 의뢰받은 것은 1478년 1월 1일로 그가 25살 때였다.
그는 서면으로 시그노리아(시위원회)로부터 성 베르나르드 예배당에 제단화를 그릴 것을 주문받았다.
그는 3월 16일 선불로 25플로린을 받았다.
하지만 레오나르도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계약을 이행하지 않았다.
그가 처음으로 이 작품에 대한 계약을 파기한 것은 아니다.
이 작품은 피에로 폴라이우올로가 주문한 것인데, 레오나르도가 약속을 지키지 않자 기를란다요에게 주문했고 그도 약속을 지키지 않자 필리포 리피의 몫이 되었으며 그가 7년 후에 완성했다.

1478년 12월 피렌체에는 홍수와 전염병의 재앙이 내려졌다.
레오나르도는 무슨 일이고 해야 했으며 그의 노트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나는 두 점의 동정녀 마리아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는 어떤 형식의 그림인지 또 누구를 위해 그렸는지에 관해서는 적지 않았다.
두 점 가운데 하나는 <베노이스 마돈나 Benois Madonna>인 것 같다.
당시의 전통은 대가가 역사와 전통을 좇아 그리게 되고 차세대 화가들은 대가의 작품을 보거나 의도를 파악하거나 책을 통해서 혹은 여행을 통해서 알고 역사와 범주 내에서 작품을 제작하게 된다.
그러나 이 작품을 보면 그런 점이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마돈나가 아기 예수와 재미있는 놀이를 하는 장면을 그린 화가가 과거에 없었다.
레오나르도는 보통 어머니가 아기와 즐거운 한때를 보내는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19세기 초 이탈리아 음악가가 타르타리의 아스트라칸에서 이 작품을 러시아인 사포지니코브에게 팔았는데 그가 어디서 이것을 구해 러시아인에게 팔았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이 작품을 사포지니코브의 손녀딸이 유증받았다.
그녀는 러시아 화가 레온 베노이스Leon Benois의 미망인이었고 그녀는 1914년에 세인트 페테르스부르그의 헤르미타지Hermitage 뮤지엄에 기증했다.
이 작품은 베노이스의 이름을 따서 <베노이스 마돈나>로 불리우게 되었다.
이것은 캔버스로 재현되었지만 레오나르도는 패널에 그렸다.
캔버스로 재현된 것은 아무래도 원화와는 같을 수 없는 데다 서툰 솜씨로 보수되어 원화와는 거리가 아주 멀어지게 되었다.
마돈나의 앞이마는 벗겨졌고 볼은 볼록하고 눈은 침침하며 목은 주름져 있다.
이빨은 색에 덮여 보이지 않고 피부도 보수하는 과정에서 매끈하지 않아 레오나르도의 작품이라고 말하기 어렵게 되었다.
이제는 더이상 원화의 상태로 되돌릴 수 없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미술사적으로 중요한 이유는 레오나르도가 도상적 전통을 무시하고 그렸기 때문이다.
과거 마돈나의 그림은 그녀를 숭고한 모습으로 표현하느라 딱딱하고 몸을 꼿꼿하게 세운 모습으로 마치 사진을 찍을 때 긴장하고 몸을 유연하게 하지 않고 얼어붙은 것처럼 포즈를 취하는 것과 같았다.
후기 15세기 화가들도 그런 식으로 그렸기 때문에 레오나르도의 이 작품은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이다.
레오나르도는 신비한 신성을 단지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으로 표현하면서 일상적인 모습으로 묘사했다.
아기 예수는 꽃에 매료되어 잡으려고 한다.
마돈나는 아기가 꽃을 제대로 잡지 못하는 것을 보고 즐거워한다.
어머니와 아기 모두 관람자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꽃을 두고 놀이를 하고 있다.
15세기 관람자들이 과연 이 작품을 만족해 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베로키오의 수석 조수가 된 로렌초 디 크레디로부터 라파엘로까지 레오나르도의 마돈나는 새로운 이미지로 전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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