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세잔에 대한 폴 고갱의 찬사
 

  폴 고갱은 험담을 잘했다. 그러나 그가 평생 칭찬한 화가가 두 사람 있었는데, 한 사람은 에드가 드가였고 다른 한 사람은 세잔이었다.
고갱의 그림에서 톡톡 끊어 색을 칠하는 세잔의 화법을 발견하기란 쉬우며 말년 폴리네시아에서 그린 풍경화에서 세잔의 화법이 자주 발견되어 그가 세잔을 얼마나 좋아했는지 알 수 있다.
다음은 고갱의 산문으로 세잔에 대한 칭찬을 읽을 수 있다.

몇 개의 작은 길이 만나는 곳에서 아무런 사상도 없는 시골뜨기가 무엇인가를 찾는다.
그건 카미유 피사로(고갱의 친구이자 스승)의 작품일 것이다.
바닷가에 우물 하나 화려한 잡색 줄무늬 의상을 걸친,
분명 야망에 굶주린 듯한 파리의 몇몇 사람들이 메마른 우물 속에서 갈증을 풀어줄 만한 물을 찾는다.
온통 색종이 조각들,
그건 시냑의 작품일 것이다.
아름다운 색채가 아무도 모르게 존재하며 조심스럽게 친 베일 너머로도 그것임을 알 수 있다.
소녀들이 가슴 깊이 간직한 연정으로 애정을 일깨우며 서로 손잡고 애무한다.
난 주저함 없이 이것은 카리에르라고 말한다.
여자 분뇨 수거인,
싸구려 포도주,
목을 매단 사람의 집.
더이상 쓸 재주가 없으므로 최선의 방법이란 그런 것들을 보러가는 것이다.
과일이 담긴 광주리에 익은 포도가 빠져나와 있으며,
천 위에는 푸른 사과와 분홍빛 붉은 사과가 한데 어울린다.
흰 것이 푸르고 푸른 것이 희다.
세잔이야말로 진정 최고의 화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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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 반 고흐의 '장밋빛 작은 새우'
 

  현대미술의 문을 빈센트 반 고흐와 함께 연 폴 고갱은 빈센트에 관한 산문을 몇 점 남겼다.
다음의 글에서 고갱의 문장력을 볼 수 있으며 또한 빈센트의 인간성을 짐작하게 해준다.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겨울이다.
자네에게 흰 수의를 빌려주지.
내 말은 그저 눈을 뜻한다.
가난뱅이는 고생하지만 부자는 이를 이해하지 못한다.

헌데 12월 그 날,
내가 좋아하는 도시 파리의 루픽 가에서는 보행자들의 걸음걸이가 한가로운 기색이 없고 여느 때보다 분주했다.
기묘한 옷을 입은 추위에 떠는 한 사내가 행인들 틈으로 바깥쪽 큰 길로 가려고 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염소가죽으로 몸을 싸고, 분명, 토끼가죽으로 만들었을 모피 모자를 쓰고,
붉은 턱수염이 곤두서 있다.
소 치는 사람의 모습이다.

춥더라도 어정쩡하게 관찰하지 말고 균형을 갖춘 손과 매우 해맑은 어린 아이 같은 푸른 눈을 잘 보고 지나쳤으면 한다.
이 사람이 바로 그 가련한 부랑인이다.
그의 이름은 빈센트 반 고흐.

빈센트는 고철 부스러기와 유화를 헐값에 파는 고물상으로 급히 들어간다.
가련한 예술가!
자넨 팔려고 하는 작품에 혼의 한 면을 그려넣었던 것이지.
그것은 작은 정물화로 장밋빛 색종이에 그린 <장밋빛 작은 새우>이다.

"이 작품을 줄테니 돈을 주지 않겠소?
집세를 내야 하기 때문이오."

"아이고 나으리, 손님들이 까다로워졌답니다.
밀레의 작품을 싸게 달라고 하는 형편이랍니다.
게다가 ..."

장사꾼은 말을 잇는다.

"선생의 작품은 별로 밝지 못하지 않습니까?
지금은 르네상스가 가로수에 나뒹굴고 있으니 말이죠.
그래도 소문에 의하면 선생은 상당한 실력자라고 하더군요.
그러니 잘해 드려야지요.
여기에 5프랑 있습니다."

5프랑 화폐가 계산대 위에서 땡그랑 소리를 내고 빈센트는 말 없이 그 돈을 집어들고 장사꾼에게 인사하고 그곳을 나섰다.
간신히 루픽 가(빈센트가 동생 테오와 함께 지내던 파리의 아파트가 있는 거리)로 돌아와 집 근처에 다달았을 때 보호소에서 나온 가련한 여인이 화사한 미소를 디우며 그에게 동냥을 청했다.
깨끗한 흰 손이 외투에서 나왔다.
빈센트는 독서가였다.
그는 <아가씨 엘리자>(1878년 에드몽 드 공쿠르의 소설로서 '불행한 엘리자 la Fille Elisa에 관한 이야기)를 머리에 떠올렸다.
그래서 그의 5프랑은 가련한 여인의 몫이 되었다.
여인은 자신의 모습이 부끄러운 듯 주린 배를 안고 급히 도망쳤다.

(그 후)

그 날은 올 것이다.
난 그 날이 도래한 것처럼 볼 수 있다.
나는 경매장 제9호실로 들어간다.
경매자가 작품을 팔고 있다.

"<장밋빛 작은 새우>, 400프랑, 450프랑, 500프랑!
여러분, 여기를 보십시요.
이것은 더욱 값진 것입니다."

아무도 말을 하지 않는다.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 <장밋빛 작은 새우>는 이렇게 낙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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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고흐와 초상화
  

김광우의 <성난 고갱과 슬픈 고흐>(미술문화) 중에서


1888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자신의 귓불을 자르는 소동을 벌인 후 반 고흐는 생폴 드 모솔 요양원에 1년 동안 입원해야 했다.
그는 입원 중 네 차례의 발작을 일으켰다.
당시 요양원에는 서른 개의 병실이 비어 있었으므로 그 중 하나를 아틀리에로 사용할 수 있었다.
그는 작업할 때 환자들이 괴성을 지르며 벽을 두드리고 발광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환자들의 계속되는 광적인 고함소리, 곰팡이 냄새, 보잘 것 없는 음식 등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환청과 환각증세를 벗어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그림을 그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작품 때문에 낙담하기도 했는데 “그림이 원하는 대로 그려지지 않을 때 엄청난 자책감에 시달린다”고 했다.
닥터 페이롱은 테오에게 보낸 1889년 5월 26일자 편지에서 반 고흐가 처음에는 고통스러운 악몽을 꾸고 몹시 성을 냈지만 이제 많이 나아졌다고 보고했으며,
페이롱은 6월 5일 반 고흐에게 요양원 바깥에서 그림 그리는 것을 허락했다.

반 고흐는 9월 초 테오에게 다른 환자들과 어울리지 않으려고 작업실에 들어앉아 있으며 다만 간병인들 가운데 책임자인 트라부만 정기적으로 만난다고 했다.
9월 3일자인 듯한 이 편지에서 트라부에 관해 언급했다.
트라부는 환갑에 가까운 나이였고 1896년 9월 25일 생레미에서 사망했다.

“어제 간병인 중 책임자의 초상을 그리기 시작했다.
어쩌면 그의 아내의 초상도 그리게 될지 모르는데 이들 부부는 요양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의 작은 집에 살고 있다.
트라부의 얼굴은 아주 흥미 있게 생겼으며 ...”

반 고흐는 트라부의 얼굴을 르그로의 <스페인 최고 귀족>에 비유했다.
그는 트라부가 콜레라가 빠르게 확산될 무렵 두 차례에 걸쳐 마르세유의 병원에 근무하면서 고통당하고 죽어가는 많은 사람을 지켜봤기에 그의 얼굴에는 차분함이 있다고 적었다.
그는 트라부의 얼굴을 볼 때마다 귀조의 얼굴이 떠오른다고 했는데, 귀조는 제임스 드롬골 린턴이 1872년에 그린 <프랑스의 두 베테랑 정치가: 티에르와 귀조>에서의 키 작은 사람을 말한다.
그는 이런 얼굴은 평범한 사람의 대표적인 얼굴이라고 했다.
트라부의 초상은 자신의 얼굴과 비교된다면서 반 고흐는 그의 초상을 그리기 전날 <자화상>을 그렸다.

반 고흐는 닷새 동안 트라부의 초상을 두 점 그렸는데 한 점은 트라부가 의자에 앉은 실제 모습을 그린 것으로 현존하지 않고 테오를 위해 복제한 것만 남아 있다.
빠르게 복제하면서 배경을 청록색과 핑크색으로 대충 칠했다.
그는 자화상을 그린 지 닷새 후 <트라부 부인의 초상>도 그렸다.
남편과 마찬가지로 부인의 모습도 의자에 앉은 실제 모습을 그린 것으로 이것 또한 현존하지 않고 복제한 것만 남아 있다.

트라부 부부의 초상화는 생레미에서 반 고흐가 성취한 수준 높은 작품이다.
환자들을 돌보는 트라부의 깡마른 얼굴을 묘사하면서 줄무늬 옷이 그의 성격을 나타낼 수 있도록 상징적 요소로 부각시켰다.
사실적 방법으로 묘사한 얼굴과 상징적 옷이 한데 어울려 트라부는 극중 인물처럼 나타났다.

후기 인상주의의 주요 인물로 세잔, 고갱, 반 고흐를 꼽을 수 있다.
이들 세 명은 인상주의에 대해 매우 다양하게 반응했는데,
“인상주의를 미술관 속의 그림처럼 단단하고 영속적인 것으로 만들려고” 한 세잔은 회화의 구조에 몰두했으며,
고갱은 “자연주의의 지독한 결점”을 버리고 색채와 선의 상징적 사용을 탐구했다.
반 고흐의 자유로운 감정의 폭발은 표현주의의 원천이 되었다.
후기 인상주의라는 용어는 로저 프라이가 1910~11년 런던의 그래프턴 화랑에서 자신의 기획으로 열린 ‘마네와 후기 인상주의전’의 명칭으로 1880년경부터 1905년경 인상주의로부터 발전된 혹은 그에 대한 반동으로 발생한 다양한 회화를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반 고흐가 1890년 7월 29일 자살로 37해의 생을 마감한 후 20년 동안 그의 영향은 프랑스 표현주의 혹은 야수주의와 독일 표현주의 화가들에게 매우 컸으며 특히 반 고흐의 초상화가 그들에게 표현을 위한 장르로 즐겨 사용되었다.
1905년 야수주의를 이끈 앙리 마티스가 그린 <마티스 부인의 초상>은 반 고흐의 표현적인 채색의 영향이었고, 물감을 짧게 끊어서 사용한 것 외에도 색을 표현의 언어로 사용한 것 또한 반 고흐의 영향이었다.
마티스는 이런 표현적인 색의 언어를 풍경화에도 적용했다.
색이 좀더 밝아진 것은 마티스의 개성에 의한 것이지만 색의 문법은 반 고흐의 것을 그대로 따른 결과이다.
마티스의 밝은 색 사용은 그를 따른 젊은 화가들에 의해서 확산되었으며 앙드레 드랭과 모리스 블라맹크도 반 고흐의 영향을 받아 색을 표현의 수단으로 사용했다.
두 사람이 그린 상대방의 초상과 자화상에서 그 영향을 확인할 수 있다.

반 고흐가 이들에게 영향을 끼친 것은 1905년 파리에서 개최된 반 고흐의 회고전을 통해서였다.
45점의 유화와 드로잉이 함께 소개된 이 회고전은 파리의 화가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의 계기가 되었다.
회고전을 보고 충격을 받은 블라맹크는 “난 반 고흐를 나의 아버지보다 더 사랑한다”고 했다.
마티스는 베른하임 화랑에서 반 고흐의 작품을 보았는데 그곳에서 블라맹크와 드랭을 만났다.
세 사람 모두 반 고흐를 자신들을 출발점으로 삼았다.
마티스는 새로운 회화가 들라크루아로부터 반 고흐와 고갱으로 이어지고 있었으며 폴 세잔이 최종적으로 볼륨 있는 색을 선보였다면서, 이들로부터 색을 감성적 힘으로 사용하는 방법을 익히게 되었다고 말했다.

반 고흐의 영향은 독일 화가들에게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1896년 독일 뮌헨으로 이주해온 러시아 화가 알렉세이 야블렌스키는 파리의 회화 경향에 정통했으며 프랑스 화가들과 마찬가지로 반 고흐의 강렬한 감성을 나타내는 색의 사용에 영향을 받았다.
그가 1905년에 그린 <곱추>에서 반 고흐의 영향을 볼 수 있다.

반 고흐를 자신의 선구자로 삼고 다리 그룹을 결성하여 조직적으로 독일 표현주의를 표방한 독일 화가는 에른스트 루드비히 키르히너, 에리히 헥켈, 칼 슈미트-로틀루프였다.
세 사람 모두의 <자화상>은 반 고흐의 영향을 노골적으로 보여준다.
가브리엘 뮌터는 바실리 칸딘스키와 함께 조금 늦게 새로운 미술운동 청기사 그룹에 속했으며 그녀도 반 고흐의 영향을 받았다.
20세기 표현주의는 공교롭게도 같은 해인 1905년 마티스를 중심으로 야수주의 화가들과 키르히너를 중심으로 한 다리 그룹 화가들에 의해 프랑스와 독일에서 동시에 미술운동으로 전개되었다.
표현주의는 양식이 아니라 미술운동이었다.

1912년 드레스덴과 뮌헨에서 반 고흐의 작품 125점이 소개된 후 그의 영향은 독일 화가들에게 매우 크게 작용했다.
야블렌스키가 1912년에 그린 <자화상>에서는 독일의 어느 화가보다도 반 고흐의 영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이때 받은 영향이 야블렌스키로 하여금 향후 표현주의 화가가 되게 했다.
반 고흐의 영향은 북유럽 화가들에게 크게 작용했으며 노르웨이 화가 에드바르트 뭉크도 그의 영향을 받았으며 평생 표현주의 그림을 그렸다.

피카소는 1907년에 <자화상>을 그렸는데 반 고흐의 자화상에 대한 기억을 더듬어 그리면서 자신 특유의 각이 진 입체주의 방법을 혼용했다.
피카소는 영화에서 클로즈업하듯 자신의 얼굴을 가까이서 조명한 것처럼 묘사하면서 반 고흐와 마찬가지로 단번에 그렸다.

1913년 리투아니아에서 파리로 온 러시아 화가 샤임 수틴은 반 고흐, 아프리카 조각, 세잔에게서 영향을 받았으며, 초상화에서 반 고흐의 영향이 두드러진다.
그의 <모이세 키슬링의 초상>은 반 고흐의 <요제프 룰랭의 초상>에서 영감을 받아 그린 것이다.
파리 보헤미아 화가들 중 대표적인 인물로 꼽히는 수틴은 야수주의와는 별도로 밝은 색을 사용하는 표현주의 회화를 추구했으며 색을 거의 추상적으로 사용했지만, 붓질을 짧게 그리고 거칠게 사용하는 것은 반 고흐의 영향이었다.
이후 수틴이 그린 초상화에서 감동을 주는 표현적인 색채는 반 고흐의 영향을 나름대로 추상적인 색으로 진전시킨 것이다.

클림트, 쉴레와 더불어 오스트리아의 표현주의를 대표하는 오스카 코코슈카도 일찍이 반 고흐의 영향을 받았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의 영향을 받아 현대인의 정신분열을 모티프로 즐겨 삼은 코코슈카에게 반 고흐의 강렬한 색채의 사용은 관심 밖일 수 없었다.
그가 1907년에 그린 <늙은 히르시그>는 그가 아직 색을 거칠게 사용하기 전의 작품으로 조심스럽게 반 고흐의 채색법을 실험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그는 반 고흐의 다양한 색의 효과를 응용하여 자신의 모티프를 강렬한 이미지로 만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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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홀과 친구들> 중에서

라우센버그는 ‘혼용한 회화’를 소개했는데


라우센버그는 1954년 크리스마스 시즌에 빨간색을 주로 사용하여 그린 그림들을 이간(Egan) 화랑에서 소개했는데 사람들의 반응이 좋아 그는 전람회를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불렀다.

라우센버그의 가장 두드러졌던 작품 〈Charlene〉(그림 28)은 여러 가지 물질을 과감하게 혼용하여 콜라주한 것으로 라우센버그는 그것을 ‘혼용한 회화(mixed painting)’라고 불렀다.
〈Charlene〉에서 그는 우산을 편 채로 캔버스에 부착시켰으며 낡은 사진과 심지어는 T셔츠까지도 작품에 포함시켰는데 과연 돈키호테와도 같은 순진한 용맹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이듬해 제작한 〈인터뷰〉(그림 29)는 커다란 나무상자를 둘로 나눈 후 콜라주하여 색칠한 것으로 그림이라기보다는 벽에 붙인 조각이라고 할 수 있는데 라우센버그는 구태여 조각과 그림을 구별하려고 하지 않았다.
평면에서 약간 볼록하게 나오는 릴리프는 르네상스 시대 이후의 일반적인 경향이었지만 거의 조각과도 같은 3차원적 그림은 이 시기의 산물이었다.
표현을 위해서라면 장르와 장르의 구별도 무시함으로써 예술가의 자유는 더욱 확장되었는데 이것이 뉴욕 스쿨 1.5세들의 선택으로서 즉흥적인 표현에 충실하고 형식을 전혀 의식하지 않았던 것이다.

파리에서 화랑을 경영했던 이탈리아 사람 레오 카스텔리가 1957년 2월 57번가에 화랑을 열고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을 찾고 있었다.
그는 라우센버그와 존스가 장차 성공할 예술가들임을 알아채고 두 사람의 전람회를 각각 열어주었다.
1958년 1월에 열린 두 사람의 전람회를 비교해볼 때 존스에 비하면 라우센버그의 전람회는 덜 성공적이었다.
라우센버그는 ‘혼용한 회화’를 소개했는데 캔버스에 물질들을 잔뜩 갖다 붙인 그의 그림은 관람하는 사람들을 경악시켰다.
사진, 인쇄물, 신문지를 캔버스에 부착하면서 드 쿠닝의 기분내키는 대로의 붓질을 혼용한 그의 과격한 행위는 유럽의 신사실주의와 유사했다.
신사실주의와 유사한 팝아트가 영국에서 먼저, 그리고 뒤따라 미국에서 성행했지만 그때만 해도 아직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할 때였다.
다시 말하면 라우센버그의 행위는 이른 팝아트라 할 만한 것으로 추상표현주의와 팝아트 사이의 교량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회화는 예술과 인생과의 관계다”라는 말로 자신의 작품을 설명했는데 이 말은 케이지의 말을 반복한 데 불과한 것으로 그가 얼마나 케이지의 영향을 받았는지를 시사하는 말이다.

1955년에 제작한 〈침대〉(그림 30)는 추문을 일으킬 만한 소지가 다분했는데 나무판에 베개와 이불을 붙이고 그 위에 추상표현주의의 빠른 붓질을 가한 것이다.
사람들은 전시장에서 이 작품을 보고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회화의 영역이 도대체 어디까지 이를 것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게 된 사람들은 예술가들이 예술이라는 미명 하에 방종하는 것은 아닌지 예술가들의 지성에 의심을 품기도 했다.
라우센버그의 말로는 이 작품을 제작할 때 마침 캔버스가 떨어져서 대신 이불을 사용했다는 것인데,
샤갈이 이불에 그림을 그린 적이 있어 그쯤은 이해가 되지만 베개를 부착한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으며 자위행위적인 기분내키는 대로의 붓질은 예술가의 방종으로밖에는 여겨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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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은 영혼의 창문
 

 

 김광우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과학과 미켈란젤로의 영혼>(미술문화)에서 

레오나르도는 인간이 "자연의 모든 현상들에 의한 향상을" 기억할 수는 없더라도 가능한 한 익히고 기억한다면 지식의 폭을 넓힐 수 있으며 새로운 오브제와 씨름할 때 어려움이 덜 하게 된다고 적었다.
그에게는 잠들기 전 기억한 것들을 드로잉하는 습관이 있었으며 그렇게 할 것을 화가들에게 권했다.
그는 이런 습관을 스승 베로키오로부터 익힌 것으로 짐작된다.
베로키오는 드로잉에서 탁월했고 이 점을 바사리가 지적했다.
바사리는 베로키오가 인내를 갖고 드로잉했으며 여인의 머리를 그린 것들은 매우 우아하며 이런 아름다움을 레오나르도가 평생 모방했다고 적었다.

레오나르도는 어떤 글이라도 드로잉보다 정확할 수는 없다면서 하나의 이미지는 한 권의 책과도 같다고 했다.
드로잉은 그에게 매우 중요했으며 끊임없는 훈련을 통해 생각하는 카메라와도 같았다.
그는 오브제를 자신의 거울에 반사시켜 종이에 옮겨 담았으며 망막과 종이는 일체가 되었다.
그는 아주 빠른 속도로 오브제를 재현해냈다.
그는 눈이 마음보다 실수를 덜 한다고 했으며 회화와 음악과 비교해서 "음악은 회화의 누이동생 the younger sister of painting"이라면서 소리는 오래 가지 못하므로 음악은 표현하는 순간 죽게 되고 반복을 통해 표현된다고 했다.
회화와 조각에 견주어서는 그 어떤 작품도 대리석이나 청동으로 뜬 작품보다 오래 갈 수 없고 회화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경이로운 것 miraculous thing"으로 좀더 지성적이며 열 가지 원리들 "빛, 어둠, 색, 부피, 모양, 위치, 거리, 근접, 운동, 조화"에 기초하므로 어떤 것도 재현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눈을 "영혼의 창문 the window of the soul"으로 보았다.
당시 사람들은 눈에서 발하는 미립자들spezie에 의해 영상이 생기는 것으로 이해했지만 레오나르도는 눈이 발하는 것이란 아무것도 없고 광선을 받아들일 뿐이라고 했다.
해부학적으로 눈을 관찰한 그는 렌즈를 발견했다.
당시에는 렌즈를 "수정의 유머 crystalline humor"로 불렀다.
그는 눈이 이미지를 거꾸로 받아들인다고 생각했으며 처음으로 입체 영상의 원리, 즉 삼차원 릴리프의 지각에 관해 언급했다.
당시 사람들은 한 순간에 빛이 세상에 가득 차진다고 믿었는데, 그는 빛이 지나간다고 보고 빛의 속도에까지 관심을 기울였다.
빛이 어떻게 발산하는가에 대해 그는 오늘 날 우리가 말하는 진동을 떨림tremore이란 말로 표현했다.
프랑스 수학자 페르마Fermat(1601~65)보다 한 세기 전에 그는 이런 근본적인 법칙을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에 근거해서 "모든 자연적 현상들은 가장 짧은 가능한 수단에 의해 나타난다"고 적었다.
그의 이런 실험이 훗날 럼포드Rumford의 광도계photometer를 예고했다.
그는 왜 하늘이 청색인지에 관해서도 설명했으며 다음과 같이 적었다.

“공기가 우리로 하여금 보게 만드는 하늘의 색은 본래 색이 아니지만, 이 색이 빛에 의해 뚜껑처럼 덮이게 되는 강한 어둠의 불명료함 아래서 빛나는 아주 작고 인지할 수 없는 미립자 속으로 증발되는 따뜻하고 습도가 있는 공기로부터 온다.”

과학에 대한 레오나르도의 관심과 연구는 여러 분야에서 각각 조명되어야 하는데 그는 음향, 물 관련 도구와 설치, 운동, 격발장치, 힘, 무게 등에 관해서도 연구했으며 지질학, 식물학, 음성학에도 일가견을 갖고 있었다.
과학자로서의 그의 위상을 정확하게 정하는 일은 과학자들의 몫으로 남겨놓아야 할 것이다.
그는 굴절작용에도 관심을 기울였지만 삼각법trigonometry을 충분히 알지 못했으므로 굴절의 법칙을 정립하지는 못했다.
증기의 속성에 관심이 많았지만 증기기관차를 제작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는 또한 갈릴레오보다 한 세기 앞서 일종의 망원경을 발명한 듯하다.
그는 "달을 확대해 보기 위해 유리로 만들었다"고 적었다.
렌즈를 연결시켰지만 그것들로 망원경의 효시가 될 만한 기구를 만든 것 같지는 않다.
그렇지만 그가 고안한 것은 혁명적 천문학에 근간이 되었다.
그에게는 행성들이 태양의 주위를 공전한다는 데 의심이 없었다.
당시 레오나르도가 과학에서 거둔 결실은 매우 크다.
과거 어느 누구도 질의를 일으키지 않는 것들에 호기심을 갖고 다양한 분야에서 끊임없이 연구했으며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이런 그의 독학 태도는 놀라운 것이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인용했는데 자신의 좌우명과도 같았던 말이었다.

“인간은 자신의 재능으로 무엇을 했느냐 혹은 하지 않았느냐 하는 것으로 칭찬을 받거나 책망을 받을 만하다.”

돌 두 개를 한꺼번에 연못에 던질 경우 잔잔한 물 위에 두 개의 동심원이 생길 것이며 두 개의 동심원이 서로 닿더라도 모두 부서지지 않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이는 일반적인 자연현상이지만 레오나르도는 이를 관찰하여 이는 물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그러 하지 않음을 발견해냈다.
이에 관해 그는 "물이 타격을 받자 갑자기 열고 닫히는 것으로 운동이라기보다는 좀더 진동에 가까운 반응을 전달하는 것"이라고 적었다.
두 개의 동심원이 부딪쳐서 부서지지 않는 이유를 그는 "물은 미분자들로 구성된 동질이고 진동이 물 자체를 움직이지 않고서도 미분자들을 전파시키기 때문이"라고 적었다.
이런 원리를 파도에 적용시킨 그는 소리와 빛은 동일한 방법으로 공중을 나아간다고 했다.

자연은 그에게 실험실과도 같았다.
그는 눈을 뜨고 바라볼 때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을 보게 된다고 했다.
침전으로 생긴 산에서 조개껍질과 해초 화석을 발견하고는 바다가 한때 지상을 덮은 적이 있었다고 추론했다.
유리 볼에 물을 넣어 한 점으로 집중하는 렌즈로 사용했으며, 작은 구멍을 낸 종이를 벽에 대어 광선의 운동 경로를 시위했고, 어둠 속에서 횃불을 빠르게 움직여 불의 선을 보여주었으며, 탁상에 칼을 꽂아놓고 탁상에 진동이 생기게 하여 칼이 두 개로 보이는 환영을 보여주면서 눈이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오브제를 제대로 구분하지 못함을 지적했다.
그는 류트의 줄이 진동할 때는 이중으로 보이는 것을 시위했다.
눈이 시각적 인상을 곧바로 받아들이지 못함을 지적함으로써 눈이 거울처럼 단순하게 받아들이는 기능을 할 뿐이며 빛이 빠른 속력으로 투사되고 있음을 시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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