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샹과 친구들> 중에서

마르셀 뒤샹의 즐거운 레디메이드


마르셀 뒤샹은 1913년 가을 새로운 장소로 작업실을 옮긴 후 자전거 앞바퀴를 부엌에서 사용하는 등받이 없이 걸터앉는 원형의자 위에 거꾸로 세워 조립했다.
평론가들은 그것을 20세기의 첫 레디메이드 작품이라고 했고, 또는 움직이는 첫 조각이라고 극찬했다.
하지만 뒤샹은 평론가들이 말한 의도를 갖고 그것을 제작한 것은 아니었고, 그저 그렇게 제작하고 싶어서 만들었을 뿐이다.
그는 자전거 바퀴는 “즐거움처럼 그저 나타난 것”이라면서 말했다.

“네가 불이나 연필깎기를 가진 것처럼 불필요한 것이 내 방에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운동을 행하는 즐거운 부속품이다.”

자전거 바퀴를 앞으로 혹은 뒤로 밀면 바퀴살은 보이지 않지만 바퀴가 천천히 돌면서 바퀴살이 불분명하게 보이다가 결국 분명해진다.
그는 <자전거 바퀴>를 “사람들에게 보여주려고 제작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내가 사용하려고 제작한 것이었다”고 했다.

레디메이드란 말은 2년 후부터 사용되기 시작하지만 이런 말이 통용되기 전 1914년 그는 레디메이드를 두 번 더 발견했다.
1월 어느 날 저녁 그는 가족이 사는 루엥으로 가려고 기차를 탔는데 멀리 떨어진 곳에 불이 켜진 진열장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불이 켜진 진열장은 약국 표지판처럼 빛에 색을 사용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를 내게 주었다”고 했다.
그는 미술재료를 파는 상점에 가서 나무와 강이 그려진 무의미한 컬러 석판화를 프린트한 종이를 석 장 샀다.
그는 약국 표지판처럼 그 종이에 과슈로 붉은색과 푸른색으로 동그란 점을 그렸는데,
여동생 수잔느가 약사 남편과 1914년에 이혼한 것을 상징한 것이라면서 “지성적인 개념을 나타내기 위한 시각적인 개념의 이그러뜨림이었다”고 했다.

뒤샹이 말한 또 다른 레디메이드는 병을 말리는 데 사용하는 <병걸이>로서, 이 경우 시각적 이그러뜨림과는 무관했다.
프랑스인은 포도주병을 계속해서 사용하는데 이와 같은 병걸이에 포도주병을 말린 후 그 빈 병을 포도주 상점에 가지고 가 포도주를 채운다.
그는 상점에서 병걸이를 구입했지만 포도주병을 말리는 데 사용하려는 의도는 없었다.
“내가 병걸이를 구입한 것은 레디메이드 조각이란 생각 때문이었다”고 그는 2년 후 수잔느에게 보낸 편지에 적었다.
하지만 병걸이는 그의 작업실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었지 레디메이드 작품으로 사람들에게 소개된 적은 없었다.

뒤샹이 뉴욕에 도착한 것은 1915년 6월 15일이었다.
1913년 2월 17일에 개최된 대규모 아모리 쇼에 작품을 네 점 출품했고 언론을 통해 뒤샹의 작품이 알려졌으므로 미국에는 뒤샹을 환대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아모리 쇼를 기획했던 월터 패츠가 항구에서 뒤샹을 반가이 맞았고 월터 아렌스버그가 경제적으로 후원했다.
뒤샹보다 아홉 살 많은 아렌스버그는 피츠버그의 커다란 스틸 회사 사장의 아들로 하버드대학에서 영문학과 철학을 공부하고 1900년에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후 이탈리아의 플로렌스로 가서 오래 머물면서 이탈리아어를 배웠으며, 단테의 <신곡>을 번역했다.
유럽의 모더니즘에 매료된 그는 미술품을 수집했고 뒤샹의 작품을 이해하고 있었다.
아렌스버그는 하버드대학에서 조교로 잠시 근무하다가 뉴욕으로 와 기자생활을 하면서 <이브닝 포스트>지에 이따금 미술평론을 기고했다.
현재 필라델피아 뮤지엄에 소장되어 있는 대부분의 뒤샹의 작품은 그가 구입하여 콜렉트한 것을 기증한 것들이다.

뒤샹은 또 다른 레디메이드를 선보였다.
그는 컬럼버스 애비뉴에 있는 철물점에서 눈을 치울 때 사용하는 눈삽을 구입했다.
눈삽은 미국의 어느 철물점에서도 구입할 수 있는 흔한 것이다.
왜 뒤샹이 그것을 샀을까? 뒤샹은 그런 삽을 과거에 본 적이 없는데 프랑스에는 없기 때문이다.
그는 눈삽을 스튜디오로 가지고 와서 물감으로 <부러진 팔에 앞서서>라고 제목을 적은 후 ‘from Marcel Duchamo 1915’라고 서명했다.
그는 눈삽의 손잡이를 철사에 묶어 천장에 매달았다.
그에 의해서 평범한 물질이 하나의 작품으로 선정된 것이다.
뒤샹은 수잔느에게 보낸 편지에 적었다.

“내 화실에 가면 자전거 바퀴와 병걸이를 볼 것이다.
병걸이는 레디메이드 조각으로 내가 구입한 것이다.
여기 뉴욕에서 나는 동일한 특성을 지닌 물건을 구입하여 레디메이드(처음으로 영어로 레디메이드란 말을 사용했다)로 취급하고 있단다.
네가 영어 ready made의 뜻을 이해할 줄 안다.
난 영어로 제목과 이름을 적어넣는다.
예를 들면 커다란 눈삽에 ‘부러진 팔에 앞서서’라고 적었는데 프랑스어로 En avance 여 bras casse가 될 것이다.
그것을 낭만주의나 인상주의 또는 입체주의적으로 이해하려고 애쓸 필요는 없다.
그것들과는 무관하단다.
다른 레디메이드 조각은 <두 번에 걸친 비상사태>인데 프랑스어로는 Danger (Crise) en faveur de 2 fois이다.
이런 머리말들은 실제로 말하기 위해서이다.
병걸이를 집으로 가져 가거라. 먼 이곳에서 난 그것을 레디메이드 조각으로 만들려고 한다.
병걸이 바닥 안쪽 둥근 곳에 은색과 흰색을 사용하여 작은 글씨로 다음과 같이 적어주기를 바란다. From Marcel Duchamp"

수잔느에게 준 뒤샹의 지침은 이미 때가 늦었다.
오빠의 화실을 청소하다가 자전가 바퀴와 병걸이를 발견하고 수잔느는 쓰레기로 알고 내다버렸다.
현재 파리의 퐁피두센터와 미국의 필라델피아 뮤지엄 등에 있는 <자전거 바퀴>와 <병걸이>는 뒤샹이 제작한 본래의 것들이 아니고 나중에 재생한 것들이다.
뒤샹이 편지에 언급한 <두 번에 걸친 비상사태>는 눈삽과 마찬가지로 그가 구입한 것인데,
아무도 그것을 본 사람이 없고 현존하지도 않는다.

뒤샹은 레디메이드를 미술품으로 취급하여 그것에 서명했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미술인가?
사람이 만든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미술품이란 말인가?
레디메이드는 미술을 정의할 수 있는 가능성을 아예 부정하는 미술품이 되었다.
그가 어떤 사물을 선정하든지 그것에는 그의 특유의 아이러니와 유머가 있고, 미적 모호함이 있다.
그러나 그는 레디메이드를 평생 20개 이상 선정하지 않았는데 이는 모순이며, 뒤샹 자신도 이 점을 잘 알고 있었다.
레디메이드에 관한 그의 개념도 계속 달라졌으므로 모순은 더욱 극대화될 수밖에 없었는데 이 점을 훗날 카반느가 뒤샹에게 물었다.

카반느: 무엇이 선생님으로 하여금 레디메이드 사물들 중 하나를 선정하게 했습니까?

뒤샹: 사물에 달렸지. 보통 난 어떻게 보여지는가에 관심이 있었어. 사물을 선정하는 일은 어려운 이유는 보름만 지나면 그 사물을 좋아하든지 싫어하든지 하게 된단 말이야. 무관심한 마음으로 미학적 감성을 가지지 않은 채 사물을 보아야 하네. 레디메이드를 선정할 경우 시각적 무관심으로 그렇게 해야 하고, 동시에 좋고 나쁘다는 감각을 완전히 상실한 상태에서 선정해야 하네.

카반느: 감각이란 무엇입니까?

뒤샹: 습관이야. 이미 받아들인 어떤 것을 반복하는 것이지. 자네가 수차례에 걸쳐서 반복한다면 그것이 감각이 되는 것이지. 좋은 것이거나 나쁜 것이거나 같은 것일세. 감각일 뿐일세.

카반느: 무엇이 선생님으로 하여금 감각으로부터 자유로워지게 해습니까?

뒤샹: 기계적인 드로잉이었어. 그것은 모든 회화적 전통 밖의 것으로 감각을 가지지 않도록 하지.

카반느: 계속해서 인식하는 것에 대적하는 것으로 자신을 방어하시는군요.

뒤샹: 미학적 느낌이 있도록 형상 혹은 색을 만들며 ... 그리고 그것들을 반복하고 ...

카반느: 선생님은 반자연주의적인 태도를 취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연적인 사물로 그렇게 하시는군요.

뒤샹: 그래, 하지만 내게는 그것이 늘 같았어. 내 책이랄 수 없지. 그것은 그렇게 되어진 거야. 나 혼자 그렇게 만든 것은 아니란 말일세. 책임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 나의 방어가 되겠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워홀과 친구들> 중에서

래리 리버스는 워홀에게

1959년 유태인 뮤지엄에서 래리 리버스의 전람회가 열리고 있을 때 워홀은 리버스를 만날 겸 뮤지엄으로 갔다.
미니스커트가 한창 유행할 때라서 뮤지엄에 온 여인들은 노출이 심했다.
리버스는 워홀에게 “앤디, 저 여자들을 봐라! 이제 여자들은 몸을 많이 노출시킨다. 넌 저런 여자들을 보면 욕망이 생기지. 그리고 여자들과 섹스하고 싶지. 넌 놀라운 열정을 불태우게 될 거야”라고 말했다.
워홀보다 먼저 팝아트에 해당하는 그림을 그린 리버스는 워홀보다 일곱 살이 많았다.
모터사이클을 타고 다니는 리버스는 술집에서 섹스폰을 불며 돈을 벌었고 그리니치 빌리지에 있는 시다 술집에서 추상표현주의 예술가들과 어울리곤 했다.

리버스가 1953년에 그린 〈델라웨어 강을 가로지르는 워싱턴〉(그림 38)은 팝아트를 예고하기에 적당한 작품이었다.
19세기 예술가 에마뉴엘 로이체의 대중적 아카데미즘 회화(그림 39)에 매료된 리버스는 대가들 그림을 자신의 주제로 삼아 그리기 시작했다.
그는 미국사람들의 향수 섞인 대중적 이미지들을 예기치 못한 주제로 재현하여 신선한 느낌을 주었으며 추상표현주의의 이성적인 그림에 자신의 것을 대조시켰다.
그는 1954-55년에 주로 누드를 그리면서 추상표현주의 예술가들을 대대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1955년에 그린 〈버디의 이중 초상화〉는 장모의 누드 두 점을 그린 것으로 마치 한 화면에 두 사람의 누드가 병렬된 것처럼 보이도록 구성해서 말년의 르누아르가 한 여인의 누드를 나란히 병렬시켜 두 여인의 누드인 것처럼 그린 것을 연상시킨다.

1963년에 그린 〈네덜란드 대가들〉(그림 43)은 렘브란트의 그림에서 구한 주제였다.
마네가 그려서 악명을 떨친 〈올랭피아〉(그림 42)를 주제로 〈나는 검은 얼굴의 올랭피아를 좋아한다〉(그림 40)를 그릴 때는 올랭피아 옆에 흑인여인의 누드를 나란히 그렸다.
마네는 1863년에 티치아노의 유명한 〈우르비노의 비너스〉(그림 41)를 주제로 사용하면서 비너스 대신 파리의 창녀 올랭피아를 그려 넣고 그 옆에 흑인 가정부를 등장시켰다.
마네의 〈올랭피아〉는 국전에서 낙선해 낙선전에서 소개되었는데, 황제가 “뻔뻔스러운 그림”이라고 말해 주말이면 사람들이 문제의 그림을 관람하려고 전시장 밖에 줄을 섰다고 한다.
이제 리버스는 창녀 올랭피아 대신 흑인여인의 누드로 새삼 충격을 주려고 했다.
리버스의 그림은 뉴욕 스쿨에서 독특했는데 추상표현주의에 속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팝아트라고 단정하기에는 팝의 이미지가 강하게 나타나지 못했다.
그러니까 그의 그림은 추상표현주의와 팝아트 중간에 위치했으며 그의 개성은 팝에 보다 가까웠다고 말할 수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열린 미술관
헹크 판 오스 지음, 반성완 옮김 / 미술문화 / 2004년 9월
평점 :
절판



열린 미술관
 

  <열린 미술관>은 추천할 만한 신간입니다.
네덜란드와 벨기에의 뮤지엄이 소장하고 있는 잘 알려진 작품들에 관한 이야기를 모은 책입니다.
저자 헹크 판 오스Henk van Os는 얼마 전까지 암스테르담 릭스 뮤지엄 관장으로 활동하였고 현재는 암스테르담 대학의 미술사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번역자는 반성완으로 서울 물리대학, 베를린 자유대학에서 독문학과 미학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서양문예이론과 미학에 관한 다수의 논문과 번역서를 발표했으며 현재 한양대학교 인문대 교수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제대로 번역하는 사람이 드문데 반 선생님은 번역에 뛰어난 분입니다.

이 책은 네덜란드에서 성황리에 방영되고 있는 미술 분야 TV 시리즈의 대본으로 쓰여진 여러 글들 가운데서 뽑은 것입니다.
매우 중요한 미술의 문제를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는 것이 이 책의 특징입니다.

네덜란드는 우리와는 매우 친숙한 나라입니다.
네덜란드Netherland, The Netherlands는 '낮은 땅' 혹은 '저지대'라는 뜻을 지녔으며 실제로 전 국토의 27%가 바다보다 낮은 지역으로 되어 있습니다.
네덜란드를 지칭하는 또 하나의 이름인 홀란드Holland는 본래 북부에 있는 주의 이름이지만 이 주와 이 주의 수도였던 암스테르담이 이 나라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에 홀란드 혹은 화란으로 불려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공식명칭은 어디까지나 네덜란드입니다.
그리고 더치Dutch라는 이름은 네덜란드의 또 다른 영어식 표기입니다.

벨기에는 1830년 네덜란드에서 떨어져나와 독립했습니다.
옛날에 벨기에 지역은 남부 네덜란드로 불리었습니다.
이 책에 등장하는 플랑드르, 브라반트, 안트베르펜 등은 모두 옛날 남부 네덜란드의 주나 도시들이었습니다.
루벤스가 주로 활동했던 남부 네덜란드는 지리적 역사적으로 프랑스 문화와 가톨릭 교회의 영향권에 있었으며 렘브란트의 무대였던 북부 네덜란드는 대체로 독일 문화와 신교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오늘날 네덜란드와 벨기에를 구분짓는 언어적 문화적 차이는 이러한 역사적 배경에서 생겨난 것입니다.

이 책은 33가지 미술의 문제를 이해하기 쉽게 풀어내고 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죽음의 그림자로 얼룩진 에드바르트 뭉크의 생애
 

 

김광우의 <뭉크, 쉴레, 클림트의 표현주의>(미술문화)에서  

에드바르트 뭉크는 1863년 12월 12일 노르웨이 북쪽 헤드마크 지방 뢰텐의 엥겔하우겐 농장에서 태어났습니다.
뭉크는 ‘승려’란 뜻이며 증조할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성직자였습니다.
뭉크의 아버지 크리스티안은 육군 군위관으로 내성적인 사람이었으며 오슬로 의무담당관이 되었습니다.
외할아버지는 자녀를 스무 명이나 둔 것으로 보아 육체적으로 매우 건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외할아버지의 신체적 건강함을 유산으로 받지 못했습니다.
아버지와는 대조적으로 명랑하고 사교적이었던 어머니는 뭉크가 다섯 살 때 서른 살의 나이로 다섯 자녀를 남기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독서를 즐겨 하고 동물을 좋아하며 종교적 성향이 강한 아버지는 스무 살 연하의 아내가 사망하자 우울증에 빠졌습니다.
그는 고립된 생활을 자초했고 종교에 깊이 빠져든 후에는 빈민가를 돌보는 의사로 봉사했으므로 가정 형편이 넉넉하지 못했습니다.
때로 자식들을 미친듯이 꾸짖는 아버지는 어린 뭉크에게 삶에 대한 불안감을 심어주었습니다.
훗날 뭉크는 아버지가 거의 정신이상 증세를 나타냈다고 술회했습니다.

뭉크가 14살 때 어머니 역할을 대신했던 누나 소피에가 어머니와 같은 병 폐결핵으로 죽었습니다.
뭉크 자신도 류머티즘. 열병, 불면증 등으로 시달렸지만 동생들과는 사이좋게 지냈습니다.
어린 나이에 겪은 어머니와 누나의 죽음, 자신의 육체적 허약함이 그를 불안하게 했고 아버지의 정신적 방황과 가난으로 인해 삶의 고통이 더욱 가중되었습니다.
이런 성장환경은 그로 하여금 죽음의 미학에 흠뻑 빠지게 했습니다.
죽음은 그의 인생에 반려자가 되어 어둡고 소름끼치는 그림들로 나타났습니다.
뭉크가 여머니와 누나의 죽음을 주제로 그림을 그린 것은 자신을 괴롭히는 죽음의 슬픔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고통과 슬픔을 인간의 보편적인 것들로 고양시킴으로써 스스로를 위로할 수 있었습니다.

뭉크는 22살 때 침대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창백한 얼굴을 한 누나 소피에의 모습을 <병든 아이>란 제목으로 그려렸습니다.
어머니가 타계한 후 이모가 집안살림을 도와주었는데 이 작품에서 이모는 누나의 침대 옆에 앉아서 기도하는 모습입니다.
뭉크는 26살 때 누나가 창백한 얼굴로 안락의자에 앉아 머리 뒤 베개에 의지한 채 창문으로부터 쏟아지는 햇빛을 받는 장면을 <봄>이란 제목으로 그렸습니다.
봄의 부드러운 햇살이 방안 깊숙히 들어오며 상쾌한 바람이 커튼을 흔들며 방안의 답답하고 무거운 공기를 창문 밖으로 내모는 장면입니다.
탁자에는 꽃병과 약병이 놓여 있어 투병중임을 말해 줍니다.
서른 살이 넘어서도 <병든 아이>란 제목으로 여러 점 누나의 모습을 묘사한 것을 보면 누나의 죽음의 그림자가 그의 마음 속에 길게 드리워져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뭉크가 서른두 살 때 그린 <임종>과 <병실에서의 죽음>은 제목이 시사하는 대로 죽음의 미학을 표현한 작품들입니다.
그 밖에도 <죽은 엄마와 아이>, <죽음과 소녀> 등도 죽음에 대한 그의 강박관념이 시각적으로 나타난 작품들입니다.

뭉크는 정신장애를 일으켰고 종종 피해망상증에 시달렸습니다.
여자로부터 쫓긴다는 생각에 시달렸고 친구 중 누군가가 자신을 해치려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늘 과음했고 그로 인해 건강이 나빠졌습니다.
결국 그는 1907년 독일에서 9개월 동안 정신과 치료를 받고 발트해 연안의 한 마을에서 휴양을 취해야 했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코펜하겐으로 갔는데 개인전을 열기 위해서였고, 그는 코펜하겐 작가들과 술을 너무 많이 마신 것 때문에 건강이 몹시 악화되어 1908년 10월에는 코펜하겐에 있는 다니엘 야콥슨 박사의 정신과 병원에 입원하여 전기치료를 받았습니다.
그는 8개월 동안 입원해 있으면서 전기치료를 받는 자신의 모습을 스케치했고 야콥슨 박사와 자화상을 실재 크기로 그리기도 했습니다.
퇴원 후에는 금주가로 변신하여 건강을 돌보았습니다.

이 시기에 그의 전시가 유럽 각지와 미국 등지에서 개최되었으며 노르웨이 최고의 화가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1931년 어머니와 다름 없던 이모 카렌이 사망했고 뭉크의 나이 예순여덟이었지만 다시금 피해망상증으로 고통을 겪었습니다.
뭉크는 적의를 갖고 주위 사람들을 대했으며 길을 걸을 때는 주변을 두리번거렸고 늘 불안해 했습니다.
사람들을 만나지 않으려고 집에만 틀어박혀 편지로만 용무를 보는 등 스스로 고독한 생활을 선택했습니다.

뭉크와 스트린드베르크를 연구한 사람은 두 사람의 인생이 매우 유사함을 발견합니다.
뭉크가 스트린드베르크보다 14살 어렸지만 두 사람의 인생 항로는 기묘하게 일치합니다.
두 사람 모두 모국을 떠나 유럽 각지를 유랑하며 외로운 떠돌이 생활을 했으며 평생 화목한 가정을 꾸미지 못했고 여성에 대해 ‘흡혈귀’관을 가졌습니다.
두 사람은 중년에 이르러 피해망상으로 고통을 겪었으며, 지독한 고독과 폐쇄적인 생활로 일생을 마쳤습니다.
스트린드베르크는 문패는 물론 초인종도 달지 않고 방문자를 집안에 들이지 않았습니다.
뭉크는 정도가 더욱 심해 그가 사망한 후 마을 사람들이 그의 집을 지나다 “뭉크는 부재중!”이라고 쓴 자필 메모를 발견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워홀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재스퍼 존스의 새로운 객관적 분위기의 그림들은


재스퍼 존스는 회화의 가능성을 여러 가지로 실험했다. 1960년에 제작한 〈두 개의 공이 있는 그림〉(그림 36)도 그 가운데 하나로 나무로 만든 공 두 개로 캔버스를 둘로 가른 것이다.
그림의 평면은 두 개의 공 때문에 자연히 부서질 수밖에 없었으며 추상표현주의의 역동적인 붓질이 갈라지고 부서진 평면에서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었다.
그는 평면과 깊이의 상호작용을 보여주었으며 자유로운 붓질과 기계적인 글자를 통해 독특한 역설과 재담을 창조했는데 이것 역시 뒤샹의 것들과 유사했다.
존스는 그림 아래에 기계적인 형태로 그림 제목을 써넣음으로써 그림 제목이 회화적인 요소로 작용하도록 조작했다.
그는 개념과 시각적 실제를 다른 수준에서 섞었으며 그것들의 솔직한 요소들은 관람하는 사람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그의 그림은 예술이 은유면서 동시에 아주 단순하다는 것을 시사했다.

존스의 새로운 객관적 분위기의 그림들은 나중에 하드 에지(Hard Edge) 예술가들, 즉 엘스워스 켈리, 케네스 놀런드, 프랭크 스텔라로 하여금 좀 더 지성적으로 색과 형태를 조절하는 완전추상을 추구하도록 했다.
위의 세 예술가들은 추상표현주의 예술가들과는 달리 개념적으로 웅대한 그림을 그렸고 그들에 비해 회화가 자아발견이나 자아정의라는 생각을 덜 가졌으며 오히려 회화를 실제의 독특한 형태나 조절된 형식적 재현으로 인식했다.
그의 회화적 구성이 명확해진 것은 1958 -59년에 〈색 안의 숫자들〉을 그리고 난 후부터였다.

존스는 빠르게 성공했고 경제적으로 넉넉해지자 1961년 사우스캐롤라이나 주 에디스토(Edisto) 섬에 집을 장만했다.
그곳에서 작업하면서부터 자연히 라우센버그와는 멀어졌으며 이듬해부터는 더 이상 친구 사이가 아니었다.
그의 중요한 첫 전람회가 1964년 1월부터 4월까지 모마에서 개최되었고 존스는 하와이와 일본을 방문한 후 런던의 화이트 채플 화랑에서도 전람회를 가졌다.

1968년 존스가 일본을 다시 방문할 무렵 에디스토 섬에 있는 집이 화재로 전소되자 지난 해 재정적인 여유가 있어 구입해두었던 과거에 은행이었던 맨해튼 남쪽 건물을 화실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1973년 그의 〈이중 하얀 지도〉(그림 37)가 경매에서 24만 달러에 팔렸는데 당시 생존하는 미국 예술가들의 작품들 가운데 최고가였다.
1980년 9월 휘트니 뮤지엄은 〈세 국기〉(그림 33)를 100만 달러에 구입했다.
그림 가격이 이렇게 폭등하게 된 원인은 1980년대 오일 파동이 있은 후 일본사람들이 예술품을 투자대상으로 간주하고 미련할 정도로 많은 돈을 주고 예술품들을 사들였기 때문이다.
존스의 작품이 뮤지엄에 100만 달러에 팔린 것도 그런 분위기가 조성되었기 때문이며, 예술이 돈과 정치와 연계되어 황폐해진 경향은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존스는 “나는 이따금 물체를 본 후에 그림을 그린다.
그러나 어떤 때는 그림을 그린 후에야 물체를 보기도 한다.
이 두 가지 방법은 모두 순수하지 못하며 난 어느 방법에도 만족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자연 안에는 무엇이든 볼 것이 있다. 나의 작품에는 눈의 초점을 바꾸기 위한 유사한 가능성들이 있다”고 말했고 “일반적으로 나는 단순한 개념을 그리는 데 반대한다”고 말한 적도 있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