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상주의 두 대가 마네와 모네의 우정>
김광우 님 글, 2005/04/10, 116 회 조회.

  이 글은 모 잡지사의 청탁을 받아 적은 것입니다.
A4 용지 두 장으로 마네와 모네 두 사람에 관해 써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두 사람에 관해 할 이야기가 책 한 권 분량인데 두 장으로 요약해서 쓴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해서 아래와 같이 지면에 맞추어 두 사람의 우정과 상이한 회화에 관해 적었습니다.
그림을 다섯 장 첨부했는데 여기에 올리지 못해 미안합니다.


<인상주의 두 대가 마네와 모네의 우정>


브라보, 모네! 고맙다, 마네!

마네와 모네의 이름이 비슷해서 우리에게 한 쌍으로 기억되며 어떤 작품이 마네의 것인지 모네의 것인지 혼돈스러울 때가 있다.
두 사람을 구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마네는 인물화의 화가, 모네는 풍경화의 화가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다만 우리를 혼란에 빠뜨리는 요인이 하나 있는데 마네가 그린 풍경화가 모네의 것과 유사하고 모네가 그린 인물화가 마네의 것을 보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하는 것으로 이 점만 바로 잡는다면 우리 모두 ‘마네와 모네의 전문가’가 될 수 있다.
이런 혼란은 두 사람의 우정이 돈독했고 서로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1832년에 태어난 마네는 모네보다 8살이 많지만 모두 동시대를 풍미한 프랑스의 대표적인 화가들이었다.

부유한 집안 출신 마네는 한 스승 아래서 6년 이상 수학하고 외국을 여행하며 견문을 넓히는 좋은 조건에서 화가로 출발했지만, 가난한 상인의 아들 모네는 스스로 회화를 익히며 역경을 해쳐나가는 불리한 조건에서 화가로 출발했다.
불리한 조건에서 성공했다는 점에서 우리는 모네에게 더 점수를 줄 수 있지만, 작품을 통해 당시 부르주아의 삶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부잣집 아들의 역할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될 것이다.
무엇보다도 고마운 건 가난한 모네에게 여러 차례 돈을 꿔주며 용기를 불어넣어 준 마네의 우정이다.
정상에 먼저 올라 명성을 독차지하려는 이기심이 그때나 지금이나 화가들에게 있는데, 친구를 부축해서 함께 정상에 올랐다는 데서 마네의 고상한 인격은 회화와는 별개로 본받을 만하다.

일찌감치 국전에 입선하고 언론을 통해 문인들의 호평을 받으며 작품을 비싸게 팔 수 있었던 마네는 부르주아답게 유명한 제단사가 지은 전통 양복을 입고 다녔지만, 가난한 후배 화가들과 함께 카페에서 어울리면서 맏형노릇을 했다.
당시 파리의 화단은 작았고 몇몇 카페에 가면 재능 있는 화가들을 만날 수 있었다.
젊은 화가들은 카페에 정기적으로 모여 등용의 문인 국전에 관해 주로 대화하면서 새로운 회화 경향에 관해 의견을 나누었는데, 모네, 세잔, 르누아르, 바지유, 팡탱-라투르, 그리고 미국에서 유학 온 휘슬러 등이 자주 모인 카페는 바티뇰 불바드에 있는 게르부아였다.
이 카페 가까운 곳에 마네의 아파트가 있었고 마네는 부모 몰래 그곳에서 자신의 피아노 선생이며 연상의 네덜란드 여인 수잔과 동거하고 있었다.
카페 게르부아에 모인 화가들은 동네 이름을 따 '바티뇰 그룹' 혹은 '마네파'로 불리었다.
모네가 마네를 만난 것도 이곳에서였다.
금요일이면 카페 주인은 문 입구 왼쪽의 두 테이블을 그들을 위해 비워두었다.

1865년 국전에 모네가 입선하면서 마네의 작품이 함께 소개되기 시작했고 이때부터 평론가들이 두 사람을 한 쌍으로 언급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작품이 국전에서 함께 소개되자 모네의 이름이 마네의 이름과 비슷하다고 지적한 평론가도 있었고, 어느 카툰리스트는 <모네냐 마네냐 - 모네다!>란 제목의 그림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그러나 마네가 있음으로 해서 모네가 가능했다. 브라보, 모네! 고맙다, 마네!"

인물화
인물화는 화가들이 선호한 장르로서 부자들이 자신이나 가족의 초상을 주문하는 경우가 많아 화가들에게는 주요 수입원이었다.
이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인물화는 인간의 개성을 나타내는 데 가장 이상적이라서 화가들이 즐겨 그리게 된다.
풍경화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 모네이지만 그가 그린 인물화는 인물화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 마네의 것에 미치지 못했다.
모네는 모델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포즈를 취하게 했으며 우아함을 표현하려고 하다 보니 오히려 어색함만을 드러냈다.
마네는 모델의 개성을 나타냈으며 자신의 아틀리에를 술집, 온실 등 극중의 환경으로 꾸미더라도 환경에 어울리게 자연스러운 포즈를 취하게 해서 실재감을 살렸는데 이것이 바로 인물화가 지녀야 할 고유한 장점이다.

모네의 <초록 드레스의 여인, 카미유>와 마네의 <베르테 모리소>를 예로 들면, 모네의 인물화는 습작으로 보인다. 습작도 작품이지만 습작은 습작etude으로 소개되어야 하고 작품tableau으로 소개될 경우 비난을 자초한다.
1870년 모네의 첫 번째 부인이 된 카미유는 모네가 선호한 모델이었다.
모네는 카미유를 전형적인 미모의 파리 여인으로 표현하고 싶어 화려한 초록색 실크 드레스와 가장자리에 털이 달린 재킷을 입은 모습으로 허구적, 낭만적으로 연출했는데, 자연을 있는 그대로 그리는 그의 미학에 반하는 것으로 결과는 인위적인 구도에 어색한 포즈로 인해 드레스만 두드러지게 화면을 차지할 뿐 습작의 수준에 머물고 말았다.

베르테 모리소는 여류 화가로 마네의 동생 외젠과 결혼한 여인으로 마네가 선호한 모델이었다.
마네가 그녀를 모델로 그린 그림은 11점이나 된다.
마드리드를 여행하고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마네가 아틀리에에서 그린 것인데, 관람자를 향해 똑바로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에서 그녀가 어떤 내면적인 즐거움에 만족하고 있음을 본다.
마네는 그녀의 개성적인 매력과 지성, 화가로서의 재능, 덜 다듬어진 미모 등을 유감없이 드러냈다.
검정색을 적절하게 사용하기란 쉬운 일이 아닌데 검정색의 강렬한 힘과 단순한 배경, 장미빛이 감도는 우유빛 피부, 당시 유행한 모자의 실루엣, 즉 얼굴의 외양을 감싸는 모자와 끈, 리본 등이 관람자를 사로잡으며 어딘가를 응시하는 그윽한 눈빛의 커다란 눈망울이 인상 깊게 한다.
마네는 베르테의 얼굴을 색으로 이등분하여 밝고 어두운 색을 병렬시켜 조명을 강조하면서 긴급하게 붓을 사용하여 베르테의 내면에서 우러나는 표정을 재빨리 포착했다.
이 작품에서 색을 평편하게 사용한 건 일본 판화에서 받은 영향이고 검정색을 효과적으로 사용한 건 벨라스케스의 영향이다.

풍경화
물의 풍경을 그린 것으로 유명한 모네는 보트를 개조하여 물에 뜨는 아틀리에로 사용했다.
이를 흥미롭게 여긴 마네는 <보트 스튜디오에서 그림 그리는 클로드 모네>란 제목으로 배에서 카미유를 그리는 모네의 모습을 묘사했다.
물의 라파엘로로 불리운 모네는 햇빛에 의해 영롱하게 반짝이는 수면을 시시각각으로 다르게 그렸다.
모네의 <콘타리니 궁전, 베네치아>와 마네의 <베네치아의 대운하>를 비교하면 두 사람의 회화적 차이를 분명하게 구분할 수 있다.
마네는 베니스를 방문할 때 스케치한 것을 파리에서 유화로 완성시켰는데, 모네는 이 작품이 허구적인 장면이라고 인정하지 않았다.
풍경을 세심하게 관찰하여 그 장소에서 완성시키는 모네의 눈으로 볼 때 스케치를 근거로 아틀리에에서 완성시키는 그림에 풍경이 제대로 묘사될 리 만무하며 기분만 냈을 뿐 실재 장면을 충실히 전달한 것이 못되었다.
모네가 빛의 역할에 역점을 두고 그린 데 비해 마네는 빛에 싸인 사물에 역점을 두었다.
붓질을 가느다랗게 사용하고 대상의 실재감과 자연주의 색채를 희생하면서까지 프리즘과도 같은 빛이 굴절하는 물에 마네는 몰입할 수 없었다.
모네의 그림에서는 빛의 반사가 영롱하게 나타나 있어 대상에 대한 관찰이 매우 치밀했음을 알게 하는 데 반해 마네의 대충 칠한 색은 관찰에 근거했다기보다는 자신이 생각하기에 그럴 듯한 색들로 구성했음을 알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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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홀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워홀의 적 리히텐슈타인


1960년 스텔라가 카스텔리 화랑에서의 개인전을 통해 평론가들로부터 인정받을 무렵 워홀의 회화경향은 어떠했을까.
카스텔리에게 보여준 〈딕 트레이시〉(그림 67)처럼 대중적인 이미지에 관심이 많았던 워홀은 완전추상을 추구한 스텔라와는 대조를 이루었다.
당시 인기있는 만화가 체스터 굴드의 유명한 만화 주인공 딕 트레이시는 유능한 형사고 옆에 있는 샘 케쳄은 딕 트레이시의 단짝이며 조수다.
워홀은 딕 트레이시의 턱을 90도 각도로 묘사하고 조수의 턱은 둥글게 했고 만화와 달리 자신이 바라지 않는 부분은 일부러 생략하거나 흐리게 했다.
이듬해 그린 〈슈퍼맨〉(그림 69)도 원래의 만화를 그대로 재현하면서 순수회화처럼 보이도록 그림 상단에 크레용을 쓱쓱 칠하고 말풍선의 글자를 추상표현주의 방법으로 일부러 흐리게 했다.
그는 대중적인 이미지들을 약간 변형함으로써 인생과 예술의 폭을 좁히려고 했는데 이는 팝아트의 미학이기도 했다.
워홀의 술수적 기교는 놀라운 것이었다.

워홀은 비개성적인 방법으로 그림을 그렸으며 이러한 회화방법은 평생 답습되었다.
모두 세 점을 그린 〈전과 후〉(그림 70)의 주제는 성형수술 광고인데, 왼쪽 여인은 매부리코의 못생긴 모습이고 오른쪽은 코를 교정하여 매력적인 코로 달라진 모습이다.
워홀은 이런 그림들을 통해 뉴욕 스쿨 예술가들의 물리적 아름다움의 이미지를 공허하게 만들었으며 예술의 높고 낮음은 단지 예술가에 의해서 인위적으로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폭로하려고 했다.
풍자적인 요소가 배제된 그의 그림을 관람자들은 만화를 볼 때처럼 코믹하게 여기지 않고 예술품을 관람하는 듯한 시각으로 바라보았다.

당시 워홀이 순수미술가로 변신하기가 쉽지 않았던 이유는 카스텔리가 나중에 팝아트라고 불릴 작품들을 소개하고 있는 유일한 화랑주인이었는데 그는 당시 라우센버그, 존스, 리히텐슈타인을 후원하고 있어 유사한 회화를 추구하는 다른 예술가는 후원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당시 뉴저지 주 럿거스 주립대학 부교수직을 사직하고 뉴욕으로 와서 회화에만 전념하고 있던 리히텐슈타인은 워홀과 마찬가지로 비개성적인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그는 “그림을 그릴 때 스스로 비개성적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고 하면서 “나는 추상표현주의 시대에 성장했다.
난 여전히 추상표현주의 예술가들이 만드는 형태와 그것들의 상호작용이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리히텐슈타인은 그림을 단순하게 그리고 색을 평평하게 칠하면서 공간에 대한 느낌을 아예 없애려고 했다.

워홀은 아직 리히텐슈타인을 만난 적도 없고 두 사람은 따로 떨어져 작업했음에도 불구하고 우연하게도 유사한 종류의 그림을 그렸다.
워홀은 리히텐슈타인을 자신이 대적할 적이라고 생각했다.

리히텐슈타인의 이미지들은 우아하지만 야단스러웠다. 평론가들은 그가 모더니즘 미학을 수용해 몬드리안과 1930년대에 두드러졌던 조형주의 예술가들로부터 영향을 받았으며, 비록 만화 같은 그림을 그리지만 그의 그림은 순수회화의 요소들을 다분히 가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몬드리안은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뉴욕으로 피신한 많은 유럽 예술가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뉴욕에 거주하는 동안 추상을 추구하던 그룹 AAA를 리드했다.
유토피아 미학이라고도 불리는 그의 신조형주의 미학은 젊은 예술가들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같은 나라사람 드 쿠닝은 몬드리안의 그림은 스타일의 속임수라고 말하면서도 항상 몬드리안의 조형에 반했다고 말한 적이 있다.
리히텐슈타인의 조형 감각은 몬드리안으로부터 연유한 것으로 그는 훗날 몬드리안의 그림을 부분적으로 자신의 그림 배경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일간신문 《뉴욕 타임즈》는 한때 리히텐슈타인을 “미국에서 가장 형편없는 예술가들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혹평한 적이 있는데 그의 그림들은 어떤 의미에서 농담과도 같았기 때문이다.
작가 멘켄은 “나는 미국사람으로서 자연스럽게 인생의 대부분을 웃으면서 지냈다”고 말한 적이 있었는데 농담은 미국사람들의 인생의 요소이자 팝아트의 요소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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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가지 죽을 죄와 네 종말이 있는 테이블 커버>
 

  보스의 종교관은 <일곱 가지 죽을 죄와 네 종말이 있는 테이블 커버>에서 현저하게 나타난다.
인간의 한계 상황과 운명이 순환적 이미지들로 나열되어 있다.
순환적 이미지들을 병렬하는 것은 중세에 있었던 일로 신앙수양, 도덕적·과학적 내용을 설명과 더불어 소개했으며 계절, 노동, 생일 관련 별자리를 표시한 것을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15세기에 출간된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 De civitate Dei(City of God)』에는 하나님의 백성이 마땅히 지켜야 할 ‘일곱 가지 미덕’과 이에 반하는 ‘일곱 가지 죽을 죄’가 그림으로 묘사되어 바퀴 형태로 병렬되어 있으며 이해를 돕는 글이 아래 적혀 있었다.
15세기 후반에 제작된 독일 판화에는 도상적 형판이 있는데, 보스 작품과 유사하다.
<일곱 가지 죽을 죄와 네 종말이 있는 테이블 커버> 원형 중앙에 ‘하나님의 눈’이 있고 동공에는 석관에서 모습을 일으키고 드러낸 부활한 그리스도가 십자가 처형 때 창에 찔린 상처를 관람자에게 보여주고 있다.
석관 아래에는 반원형으로 글이 적혀 있다.

"조심하라, 조심하라, 하나님께서 보고 계신다."

하나님이 일곱 가지 죽을 죄의 상황을 바라보고 있다.
죄명이 라틴어로 그림 하단에 각각 적혀 있다.
안주인이 식탁으로 나른 많은 음식물을 탐욕스럽게 먹어치우는 남자는 ‘폭음폭식 Gula’의 죄를 묘사한 것이고 난로 앞에서 졸고 있는 비대한 몸집의 남자는 ‘나태 Acedia‘를 의인화한 것이다.
나태한 자의 종교적 의무에 대한 불이행은 왼편으로부터 방 안으로 들어오는 여인의 로자리오를 들고 있는 모습에서 알 수 있다. 텐트 속 몇 쌍의 연인들은 ‘색욕 Luxuria’을 의인화한 것이다.
화려한 보닛을 쓴 악마가 거울을 들고 있는 것도 모르고 허영에 찬 여자가 새 모자를 쓰고 좋아하는 장면은 ‘자만 Superbia’을 묘사한 것이다.
이와 유사하게 ‘분노 Ira’는 술집 앞에서 다투는 두 남자로, ‘탐욕 Avaricia’은 뇌물을 받는 판사로, ‘시기 Invidia’는 거절당한 구혼자가 노려보는 것으로 각각 묘사되었다.
드라마의 한 장면과도 같은 이런 장면들은 네덜란드 전원이나 구체적인 가정용품들이 있는 실내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런 죽을 죄의 순서는 6세기 교황 대 그레고리가 정한 것으로 그 후 전통이 되었으며 보스가 전통을 좇아 시각화했다.

<일곱 가지 죽을 죄와 네 종말이 있는 테이블 커버>에는 미숙한 부분이 보여 보스의 초기 작품으로 알려졌지만 후대 학자들이 작품에 나타난 의상을 관찰한 결과 1490년경 이전에는 유행하지 않았던 것으로 밝혀져 1500년을 전후 한 중기에 해당하는 작품으로 간주한다.
일부 학자는 인물들이 땅딸막하고 서투르며 평편하고 외곽선이 경직되어 있는 데다 색채가 너무 밝아 보스의 다른 작품들과는 크게 차이를 보여 그의 작품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독창적 디자인은 보스가 고안했더라도 작업장에서 조수들이 완성시킨 것 같으며 ‘탐욕’과 ‘시기’에서의 수준 높은 인물 묘사만큼은 보스 자신이 그린 것으로 짐작된다.
세월이 오백 년이나 지났으므로 부분적으로 부식되었고 누군가에 의해서 덧칠된 데다 반복해서 복구했으므로 원래 솜씨가 사라졌을 수도 있다.
그리고 보스의 솜씨가 어디서 어디까지이고 어느 부분을 조수들이 그렸는지 확연히 구별할 수는 없더라도 이 작품에는 역동적 요소와 인간의 심리가 잘 나타나 있다.
구성에 있어서는 시계 방향으로 병렬시키는 건 전통 양식이었다.
14세기 영국 프레스코화에서도 이와 유사한 원형이 발견된다.
죄의 장면들을 원형으로 병렬하는 건 세상에 만연하는 일반 죄에 대한 분류이지만 보스는 중앙에 ‘하나님의 눈’을 삽입하여 하나님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죄로 변형시켰으며 죄의 내용을 좀더 구체적으로 표현함으로써 모티프를 강조했다.

<일곱 가지 죽을 죄와 네 종말이 있는 테이블 커버> 위 띠 안에는 라틴어로 구약성서의 구절이 적혀 있다.

"이 생각없는 민족, 철없는 것들, 조금이라도 셈이 슬기로왔더라면 알아 차렸을 터인데!(신명기 32:28~29)"
"그들에게 내 얼굴을 보이지 아니하리라. 그리고 결국 어찌 되는가 두고 보리라.(신명기 32:20)"

신을 거울에 비유하는 건 중세 문학에서 흔히 발견된다.
독일 인문학자 야곱 빔펠링은 에르푸르트Erfurt 교회에 적혀 있는 ‘하나님께서 보고 계신다’라는 말이 젊은 자신에게 감동을 주어 좀더 경건한 삶을 살게 만들었다고 훗날 술회했다.
보스가 그림 중앙에 ‘하나님의 눈’을 그려넣은 건 이 같은 효과를 노리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네 귀퉁이에는 원형의 작은 그림들이 그려져 있으며 죽음, 최후의 심판, 천국, 지옥이 각각 묘사되어 있다.
네 종말은 인과응보로서 보스 당시 네덜란드인에게 익히 알려져 있었다.
네 종말은 네덜란드 수도원에서 말년을 보낸 카르토지오 수도회의 수사 드니의 저술을 통해 널리 알려졌다.
그의 저서는 북유럽에서 대중적 인기를 얻었고 1477년 네덜란드어로 번역되었다.
이 책은 1500년 이전에 이미 46차례에 걸쳐 재판되었으며 네덜란드어로 재판된 것만도 무려 13차례나 되었다.
네 원형화에는 미숙한 부분이 많아 보스가 직접 그린 것이 아니라 조수들이 그렸을 것으로 짐작된다.
일곱 가지 죽을 죄를 범한 자들이 각각 처벌을 받는 지옥의 장면은 당시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머리에 떠올릴 수 있는 묵시록적 환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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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난 고갱과 슬픈 고흐>(미술문화) 중에서

고갱과 반 고흐의 상징주의 그리고 표현주의


상징주의는 1885년경~1910년경에 성행했던 문학과 미술운동으로 사실에 충실한 재현을 거부하고 환기와 암시의 방법을 선호했다.
상징주의는 19세기 말 폭넓은 반물질주의, 반합리주의 조류의 한 부분이었고, 특히 인상주의의 자연주의적 목표에 대한 반동이었다.
화가의 감정적 경험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상징주의 회화는 색채와 선에 많은 의미를 부여했다.
그리고 상징주의는 강렬하고 신비적인 종교적 감정을 특징으로 하며, 에로틱한 것과 병적인 것도 중요하게 다뤘다.
상징주의 화가들은 평면화된 형태와 넓은 색면을 지향했다.

예술이 곧 표현이라는 생각은 고갱과 반 고흐에게서 이미 나타났고 이를 분명하게 글로 밝힌 것은 20세기에 들어서였다.
서양미술에서 표현을 중시하게 된 것은 천재의 개념과 함께 낭만주의 시대에 수립되었다.
천재는 어떤 분야에서건 정신적인 세계, 즉 절대에 대해 보통 사람들보다 우월한 통찰력을 가지며, 따라서 그는 자신의 우월한 인성을 표현함으로써 자신보다 열등한 사람들을 어느 정도 자신과 유사한 수준의 통찰로 이끌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런 믿음에 근거하여 예술작품의 가치가 예술가의 가치에서 비롯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고갱과 반 고흐의 작품에는 상징주의와 표현주의의 요소가 함께 내재해 있는 것이 특기할 만하다.
두 사람이 주고받은 자화상 그리고 정물화, 풍경화, 인물화 등에서 이런 점을 발견하기란 쉽다.

고갱이 반 고흐에게 보낸 자화상 <레 미레제라블: 베르나르의 초상이 있는 자화상>(고갱 16)을 보면 성난 모습이다.
그는 자신을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 미제라블>의 주인공 장 발장에 비유했다.
사회로부터 부당한 대접을 받고 있다고 생각한 그는 <자화상>을 통해 “예술가의 영혼을 타오르게 만드는 격렬한 화염을 묘사하려고 했다”면서 1888년 10월 반 고흐에게 보낸 편지에 적었다.

“동심 어린 꽃송이와 소녀 같은 배경이 우리의 예술적 순수성을 나타낸다네.
장 발장에 관해 말하자면, 사회의 억압을 받았기 때문에 그의 사랑과 힘이 부랑자처럼 달라진 것이라네.
우리 인상주의 화가들도 마찬가지이지.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나 자신을 장 발장으로 묘사함으로써 스스로를 넘어서 사회에서 비참하게 희생된 우리 모두의 자화상을 그리려고 한 것이네.”

고갱은 자신을 고뇌하는 순교자의 모습으로 묘사하면서 순진한 모습의 에밀 베르나르의 초상화를 배경에 삽입해 일그러진 자신의 얼굴과 대조되게 하고 꽃무늬를 후광처럼 장식해 자신의 얼굴을 장 발장으로 상징하며 두드러지게 표현했다.

이 작품과 편지를 받고 반 고흐도 답례로 <자화상 (폴 고갱에게 바침)>을 고갱에게 보냈다.
그는 일본 판화에서 승려를 보고 자신의 머리를 깎았다.
그는 자신이 회화 세계에서 도를 구하는 수도승과 같다고 생각한 것이다.
고갱은 사회를 위해 희생하는 장 발장이었고 고흐는 회화를 위해 도를 구하는 수도승이었다.
반 고흐는 1888년 6월에 수도승이 등장하는 피에르 로티의 소설 <마담 크리상템>을 읽었고 일본 판화 복사본을 수집하고 있었는데, 이런 것들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두 사람의 자화상에서 물과 불 같은 성격이 드러났는데 고갱은 인습타파주의자였으며, 빈정거리는 말을 했고, 냉소적이었으며, 궤변을 일삼았고, 무심한 면이 있었다.
반면 반 고흐에게는 북유럽 사람의 기질인 거친 면이 있었으며, 천성이 열심히 노력하는 기질이었고, 동료에게 격정적인 애정을 쏟는 불 같은 사람이었다.
반자연주의적인 혹은 상징주의 그림을 주로 그린 두 사람은 지성이나 관망한 사물로부터가 아니라 개인적인 감성에 기초하여 그렸다.

두 사람의 자화상에서 눈과 코 부분을 때어내 화풍을 비교할 수 있다.
고갱은 살색을 칠했고, 눈썹 가장자리를 어두운 색으로 테를 둘렀으며,
물감 위에 연필이나 목탄을 사용해 드로잉의 효과를 첨가한 데 비해 고흐는 물감을 2~3mm 정도로 두텁게 사용하면서 눈썹을 삼차원적으로 표현하고 볼 또한 거친 붓자국으로 물감을 거칠게 두텁거나 얇게 칠하면서 살색이 아닌 감정을 나타내는 표현적이고 상징적인 색을 사용했다.
두 자화상에서 기법의 차이가 매우 상이하게 나타나 두 사람의 독특한 감각을 느낄 수 있다.

화가의 감정적 경험을 나타내는 상징주의와 화가의 우월한 인성을 드러내는 표현주의는 종종 모호하게 나타나기도 한다.
이런 예를 두 사람의 정물화와 인물화에서 발견할 수 있다.
반 고흐가 1885년 그린 <펼친 성경이 있는 정물>은 세 가지 오브제 현대소설, 펼친 성경, 촛대로 구성되었다.
이런 오브제들은 17세기 네덜란드 정물화에 종종 등장한 것들로 반 고흐의 오브제 선택에는 새로운 점이 없다.
이 정물화의 특징은 크고 작은 것의 대비로서 커다란 성경과 작은 소설, 펼쳐진 책과 닫힌 책, 단색조의 책과 밝은 색상의 책을 꼽을 수 있으며 그래서 모호한 느낌을 준다.
펼쳐진 성경은 구약 이사야서 35장, 유명한 ‘종의 노래’가 기록된 페이지로 이사야가 시적으로 예언한 장차 오실 메시야의 역할로 해석되는 구절이다.
메시야는 인류의 죄를 대신해서 고난 받는 종으로 훗날 그리스도의 전형이 되었다.
소설은 에밀 졸라가 1884년에 쓴 <삶의 기쁨 La Joie de vivre>이다. 진리를 상징하는 성경은 커서 권위의 느낌을 주고 소설은 작지만 밝은 노란색으로 시선을 끈다.
<삶의 기쁨>은 매우 진지한 철학적 의문을 내포한 책으로 졸라는 전통 신앙이 부재한 가운데서 우리가 삶의 모든 비극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의미 있는 존재로 남아 있을 수 있겠는지 독자에게 묻는다.
반 고흐는 이 정물화를 통해 신앙이 삶의 기쁨을 줄 수 있다고 말한다.

반 고흐가 실재를 신성화하는 신성한 사실주의라 할 수 있는 경향으로 나아갈 때 고갱의 작품은 초자연적 이상주의로 변하고 있었다.
이런 변화가 심화되어 고갱은 말년에 악마숭배 및 엑소시즘의 그림을 그리게 된다.
고갱의 대표작 <설교 후의 영상>은 1888년 9월 중순 퐁타방에서 그린 것이다.
그는 야곱이 천사와 씨름하는 장면을 바라보는 시골뜨기 여인들이 자연적인 것과 초자연적인 것 사이에서 환희를 경험하는 순간을 모티프로 삼았다.
반 고흐의 <해질녘 씨 뿌리는 사람>이 개신교 입장에서 본 새로운 종교화라면, <설교 후의 영상>은 가톨릭 입장에서 본 고갱의 환상적인 새로운 종교화라고 할 수 있다.
반 고흐의 환상이 실재적인 데 반해 고갱의 환상은 비실재적이다.
반 고흐의 작품이 물리적이며 자연주의적인 데 반해 고갱의 것은 형이상학적이며 초자연적이다.
고갱이 <설교 후의 영상>을 팔지 않고 브르통의 한 성당에 기증하고 싶어 한 것이 흥미롭다.

상징주의 시인이자 평론가인 알베르 오리에는 1891년 3월에 발표한 ‘회화에 있어 상징주의 운동’에서 고갱의 작품으로 상징주의를 설명했다.
오리에는 상징주의 성격의 작품에는 다섯 가지 내용이 필히 구비되어야 하는데 고갱의 작품에는 그것들이 있다고 주장했다.

1. 아이디어가 표현되어야 한다.
2. 상징적이어야 함은 고유한 표현이 아이디어에 있기 때문이다.
3. 추상적이어야 함은 일반적 의미 속에서 형태와 부호가 기록되기 때문이다.
4. 주관적이어야 함은 객관은 객관으로 보여지는 것이 아니라 주관자에 의해 관망한 부호가 되기 때문이다.
5. 장식적이어야 함은 이집트인, 그리스인, 원시인들이 예술적으로 장식했으며 그것들은 주관적, 추상적, 상징적, 이상적이었기 때문이다.

오리에의 다섯 요소는 고갱의 미학을 적절하게 설명했으며 20세기 미술의 특징으로 나타날 표현주의의 성격과 다르지 않다.
그래서 학자들은 반 고흐와 고갱을 표현주의 예술가들의 선조로 찬양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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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홀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워홀은 이미 존재하는 이미지를 사용하여


의리에 살고 의리에 죽는 남자 이반은 워홀에게 여간 고마운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1961년 7월 또 한 사람을 대동하고 워홀의 화실에 나타났는데 바로 헨리 겔드잘러였다.
맨해튼에서 성장해 명문대학 예일을 졸업하고 하버드 대학원까지 진학한 헨리는 막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에 일자리를 얻은 참이었다.
그 후 헨리는 워홀의 화실을 자주 방문했으며 워홀이 작업할 때 듣는 로큰롤도 좋아했다.
어느 날 헨리는 워홀에게 “난 너에게 몇 가지만이 아니라 모든 것들을 한꺼번에 수용하는 것을 배웠다”고 말했다.
워홀도 헨리에게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는데 특히 탁월한 평론에 귀를 기울이면서 그의 예술품 분석 능력에 감탄했다.
헨리는 워홀과 자신의 관계를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와 신화학자의 관계처럼 생각했다.

워홀은 자신이 무엇을 그려야 할 것인지 사람들에게 묻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는데 잡지에서 대중적인 이미지를 구하는 것이나 사람들에게 물어서 구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972년 워홀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추상표현주의 예술가가 될 걸 그랬나봐.
그렇다면 얼마나 그림을 쉽게 그려댈 수 있었겠어! 술을 마시고 폭풍처럼 그려대기만 하면 될 것을 …….

그러나 그것은 말뿐이었고 그에게는 추상을 그릴 만한 미학이 없었다.
후에 몇 점의 추상화를 제작한 적이 있는데 자신의 의도와는 전혀 무관한 그야말로 우연의 조작이었다.
그의 추상에 관해서는 나중에 언급하겠지만 회화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없는 그는 상업미술가답게 오직 디자인 감각으로 그림을 그렸다.

워홀은 이미 존재하는 이미지를 사용하여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그림을 그리려고 했다.
그러한 점은 뒤샹의 미학과 다르지 않았지만 목적은 상반되었다.
뒤샹은 이미 존재하는 이미지를 사용하여 전통 미학을 당혹케 하려고 했던 반면 워홀은 그러한 이미지에서 새삼 아름다움을 발견하려고 했다.
워홀은 다른 사람들이 가진 아이디어보다 더 나은 아이디어를 얻어야 한다고 말했다.

헨리 겔드잘러도 워홀을 자랑하고 다녔으므로 워홀에게는 이제 이반 캅에 이어 두 번째 후원자가 생긴 셈이다.
헨리는 화랑주인이며 능력 있는 중개상 시드니 재니스를 찾아가 워홀의 개인전을 열어주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재니스는 거절했다.
로버트 엘콘도 찾아가 후원을 요구했지만 엘콘은 “내가 실수하는 줄은 알지만 워홀을 후원할 처지가 못 된다”고 하면서 꽁무니를 뺐다.
헨리는 이번에는 스테이블(Stable) 화랑주인 일레노 와드를 찾아가 워홀에 관해 한참 동안 설명했지만 일레노는 워홀에게 관심은 있지만 화랑이 좁아서 전람회를 열어줄 수 없다고 거절했다.
매일 헨리로부터 이러한 내용을 보고받은 워홀은 그때마다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헨리는 “그 사람들이 너를 후원하기를 꺼리는 이유는 너의 작업이 상업미술과 관련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이반도 헨리 못지않게 화랑주인들을 만나 워홀의 전람회를 주선했지만 대부분의 화랑주인들은 그들의 고상한 벽에 만화를 거는 것은 웃기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이나 그때나 재능 있는 예술가라 하더라도 화랑을 통하지 않고는 유명해지기 어려웠다.
더구나 평판 있는 화랑은 손꼽을 정도였기 때문에 예술가들이 화랑을 이용한다는 것은 행운과도 같았다.
상업미술에서는 명성을 얻었지만 순수미술에서의 위상은 거의 제로였던 워홀은 카스텔리 화랑에서 전람회를 열면 일약 유명해질 수 있으리라 믿었는데 카스텔리가 자신의 화랑에서는 곤란하다는 말을 남기고 떠나자 여간 서운하지 않았다.
이반이 실망한 워홀을 위로하면서 다른 화랑을 알아보겠다고 말하고 여러 곳들을 수소문해보았지만 여의치 않았다.
이반은 워홀의 작품 사진과 슬라이드를 중개상들에게 보여주고 어떤 때는 직접 그림을 들고 그들을 방문하기도 했다.
한 중개상이 다른 중개상에게 예술가를 소개한다는 것은 어째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이반이 워홀을 칭찬하면서 후원해줄 것을 부탁하면 그 중개상들은 당연히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게 훌륭한 예술가라면 넌 어째서 그를 후원하지 않고 우리더러 후원하라고 하느냐? 무슨 수작이 있는 것 아니냐?”

처음부터 워홀을 미학적으로 도운 디는 실리적으로도 도우려고 했다.
그는 뉴욕에 있는 예술가들과 교통이 잦았으므로 뉴욕 스쿨 2세들의 동향에 관해서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워홀은 디를 통해 프랭크 스텔라가 장차 뉴욕 스쿨의 별로 떠오를 것이라는 말을 들었고 스텔라의 그림을 여섯 점이나 사기도 했다.

디는 워홀에게 좋아하지 않는 작품을 제작하는 예술가의 친구가 되는 것이 가장 어렵다면서 “나는 그들과 우정을 나눌 수가 없어. 그들의 작품을 보면 구역질이 나기 때문이야”라고 말했다.
그래서 디는 자신이 좋아하는 예술가들만 골라서 만났는데 워홀도 그가 선별한 예술가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디는 라우센버그와 존스와도 우정을 나누었는데 1950년대 중반 차이나타운 근처 펄 스트리트에 있는 두 사람의 화실을 방문해 존스의 그림 〈국기〉, 〈과녁판〉, 〈숫자판〉을 보고는 자신의 코가 납작해졌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 후 디는 두 사람의 새로운 그림을 볼 때마다 자신의 몸이 마비되는 것 같았다고 워홀에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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