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홀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워홀은 이미 존재하는 이미지를 사용하여
의리에 살고 의리에 죽는 남자 이반은 워홀에게 여간 고마운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1961년 7월 또 한 사람을 대동하고 워홀의 화실에 나타났는데 바로 헨리 겔드잘러였다.
맨해튼에서 성장해 명문대학 예일을 졸업하고 하버드 대학원까지 진학한 헨리는 막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에 일자리를 얻은 참이었다.
그 후 헨리는 워홀의 화실을 자주 방문했으며 워홀이 작업할 때 듣는 로큰롤도 좋아했다.
어느 날 헨리는 워홀에게 “난 너에게 몇 가지만이 아니라 모든 것들을 한꺼번에 수용하는 것을 배웠다”고 말했다.
워홀도 헨리에게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는데 특히 탁월한 평론에 귀를 기울이면서 그의 예술품 분석 능력에 감탄했다.
헨리는 워홀과 자신의 관계를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와 신화학자의 관계처럼 생각했다.
워홀은 자신이 무엇을 그려야 할 것인지 사람들에게 묻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는데 잡지에서 대중적인 이미지를 구하는 것이나 사람들에게 물어서 구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972년 워홀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추상표현주의 예술가가 될 걸 그랬나봐.
그렇다면 얼마나 그림을 쉽게 그려댈 수 있었겠어! 술을 마시고 폭풍처럼 그려대기만 하면 될 것을 …….
그러나 그것은 말뿐이었고 그에게는 추상을 그릴 만한 미학이 없었다.
후에 몇 점의 추상화를 제작한 적이 있는데 자신의 의도와는 전혀 무관한 그야말로 우연의 조작이었다.
그의 추상에 관해서는 나중에 언급하겠지만 회화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없는 그는 상업미술가답게 오직 디자인 감각으로 그림을 그렸다.
워홀은 이미 존재하는 이미지를 사용하여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그림을 그리려고 했다.
그러한 점은 뒤샹의 미학과 다르지 않았지만 목적은 상반되었다.
뒤샹은 이미 존재하는 이미지를 사용하여 전통 미학을 당혹케 하려고 했던 반면 워홀은 그러한 이미지에서 새삼 아름다움을 발견하려고 했다.
워홀은 다른 사람들이 가진 아이디어보다 더 나은 아이디어를 얻어야 한다고 말했다.
헨리 겔드잘러도 워홀을 자랑하고 다녔으므로 워홀에게는 이제 이반 캅에 이어 두 번째 후원자가 생긴 셈이다.
헨리는 화랑주인이며 능력 있는 중개상 시드니 재니스를 찾아가 워홀의 개인전을 열어주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재니스는 거절했다.
로버트 엘콘도 찾아가 후원을 요구했지만 엘콘은 “내가 실수하는 줄은 알지만 워홀을 후원할 처지가 못 된다”고 하면서 꽁무니를 뺐다.
헨리는 이번에는 스테이블(Stable) 화랑주인 일레노 와드를 찾아가 워홀에 관해 한참 동안 설명했지만 일레노는 워홀에게 관심은 있지만 화랑이 좁아서 전람회를 열어줄 수 없다고 거절했다.
매일 헨리로부터 이러한 내용을 보고받은 워홀은 그때마다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헨리는 “그 사람들이 너를 후원하기를 꺼리는 이유는 너의 작업이 상업미술과 관련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이반도 헨리 못지않게 화랑주인들을 만나 워홀의 전람회를 주선했지만 대부분의 화랑주인들은 그들의 고상한 벽에 만화를 거는 것은 웃기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이나 그때나 재능 있는 예술가라 하더라도 화랑을 통하지 않고는 유명해지기 어려웠다.
더구나 평판 있는 화랑은 손꼽을 정도였기 때문에 예술가들이 화랑을 이용한다는 것은 행운과도 같았다.
상업미술에서는 명성을 얻었지만 순수미술에서의 위상은 거의 제로였던 워홀은 카스텔리 화랑에서 전람회를 열면 일약 유명해질 수 있으리라 믿었는데 카스텔리가 자신의 화랑에서는 곤란하다는 말을 남기고 떠나자 여간 서운하지 않았다.
이반이 실망한 워홀을 위로하면서 다른 화랑을 알아보겠다고 말하고 여러 곳들을 수소문해보았지만 여의치 않았다.
이반은 워홀의 작품 사진과 슬라이드를 중개상들에게 보여주고 어떤 때는 직접 그림을 들고 그들을 방문하기도 했다.
한 중개상이 다른 중개상에게 예술가를 소개한다는 것은 어째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이반이 워홀을 칭찬하면서 후원해줄 것을 부탁하면 그 중개상들은 당연히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게 훌륭한 예술가라면 넌 어째서 그를 후원하지 않고 우리더러 후원하라고 하느냐? 무슨 수작이 있는 것 아니냐?”
처음부터 워홀을 미학적으로 도운 디는 실리적으로도 도우려고 했다.
그는 뉴욕에 있는 예술가들과 교통이 잦았으므로 뉴욕 스쿨 2세들의 동향에 관해서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워홀은 디를 통해 프랭크 스텔라가 장차 뉴욕 스쿨의 별로 떠오를 것이라는 말을 들었고 스텔라의 그림을 여섯 점이나 사기도 했다.
디는 워홀에게 좋아하지 않는 작품을 제작하는 예술가의 친구가 되는 것이 가장 어렵다면서 “나는 그들과 우정을 나눌 수가 없어. 그들의 작품을 보면 구역질이 나기 때문이야”라고 말했다.
그래서 디는 자신이 좋아하는 예술가들만 골라서 만났는데 워홀도 그가 선별한 예술가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디는 라우센버그와 존스와도 우정을 나누었는데 1950년대 중반 차이나타운 근처 펄 스트리트에 있는 두 사람의 화실을 방문해 존스의 그림 〈국기〉, 〈과녁판〉, 〈숫자판〉을 보고는 자신의 코가 납작해졌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 후 디는 두 사람의 새로운 그림을 볼 때마다 자신의 몸이 마비되는 것 같았다고 워홀에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