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홀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워홀의 적 리히텐슈타인
1960년 스텔라가 카스텔리 화랑에서의 개인전을 통해 평론가들로부터 인정받을 무렵 워홀의 회화경향은 어떠했을까.
카스텔리에게 보여준 〈딕 트레이시〉(그림 67)처럼 대중적인 이미지에 관심이 많았던 워홀은 완전추상을 추구한 스텔라와는 대조를 이루었다.
당시 인기있는 만화가 체스터 굴드의 유명한 만화 주인공 딕 트레이시는 유능한 형사고 옆에 있는 샘 케쳄은 딕 트레이시의 단짝이며 조수다.
워홀은 딕 트레이시의 턱을 90도 각도로 묘사하고 조수의 턱은 둥글게 했고 만화와 달리 자신이 바라지 않는 부분은 일부러 생략하거나 흐리게 했다.
이듬해 그린 〈슈퍼맨〉(그림 69)도 원래의 만화를 그대로 재현하면서 순수회화처럼 보이도록 그림 상단에 크레용을 쓱쓱 칠하고 말풍선의 글자를 추상표현주의 방법으로 일부러 흐리게 했다.
그는 대중적인 이미지들을 약간 변형함으로써 인생과 예술의 폭을 좁히려고 했는데 이는 팝아트의 미학이기도 했다.
워홀의 술수적 기교는 놀라운 것이었다.
워홀은 비개성적인 방법으로 그림을 그렸으며 이러한 회화방법은 평생 답습되었다.
모두 세 점을 그린 〈전과 후〉(그림 70)의 주제는 성형수술 광고인데, 왼쪽 여인은 매부리코의 못생긴 모습이고 오른쪽은 코를 교정하여 매력적인 코로 달라진 모습이다.
워홀은 이런 그림들을 통해 뉴욕 스쿨 예술가들의 물리적 아름다움의 이미지를 공허하게 만들었으며 예술의 높고 낮음은 단지 예술가에 의해서 인위적으로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폭로하려고 했다.
풍자적인 요소가 배제된 그의 그림을 관람자들은 만화를 볼 때처럼 코믹하게 여기지 않고 예술품을 관람하는 듯한 시각으로 바라보았다.
당시 워홀이 순수미술가로 변신하기가 쉽지 않았던 이유는 카스텔리가 나중에 팝아트라고 불릴 작품들을 소개하고 있는 유일한 화랑주인이었는데 그는 당시 라우센버그, 존스, 리히텐슈타인을 후원하고 있어 유사한 회화를 추구하는 다른 예술가는 후원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당시 뉴저지 주 럿거스 주립대학 부교수직을 사직하고 뉴욕으로 와서 회화에만 전념하고 있던 리히텐슈타인은 워홀과 마찬가지로 비개성적인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그는 “그림을 그릴 때 스스로 비개성적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고 하면서 “나는 추상표현주의 시대에 성장했다.
난 여전히 추상표현주의 예술가들이 만드는 형태와 그것들의 상호작용이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리히텐슈타인은 그림을 단순하게 그리고 색을 평평하게 칠하면서 공간에 대한 느낌을 아예 없애려고 했다.
워홀은 아직 리히텐슈타인을 만난 적도 없고 두 사람은 따로 떨어져 작업했음에도 불구하고 우연하게도 유사한 종류의 그림을 그렸다.
워홀은 리히텐슈타인을 자신이 대적할 적이라고 생각했다.
리히텐슈타인의 이미지들은 우아하지만 야단스러웠다. 평론가들은 그가 모더니즘 미학을 수용해 몬드리안과 1930년대에 두드러졌던 조형주의 예술가들로부터 영향을 받았으며, 비록 만화 같은 그림을 그리지만 그의 그림은 순수회화의 요소들을 다분히 가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몬드리안은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뉴욕으로 피신한 많은 유럽 예술가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뉴욕에 거주하는 동안 추상을 추구하던 그룹 AAA를 리드했다.
유토피아 미학이라고도 불리는 그의 신조형주의 미학은 젊은 예술가들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같은 나라사람 드 쿠닝은 몬드리안의 그림은 스타일의 속임수라고 말하면서도 항상 몬드리안의 조형에 반했다고 말한 적이 있다.
리히텐슈타인의 조형 감각은 몬드리안으로부터 연유한 것으로 그는 훗날 몬드리안의 그림을 부분적으로 자신의 그림 배경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일간신문 《뉴욕 타임즈》는 한때 리히텐슈타인을 “미국에서 가장 형편없는 예술가들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혹평한 적이 있는데 그의 그림들은 어떤 의미에서 농담과도 같았기 때문이다.
작가 멘켄은 “나는 미국사람으로서 자연스럽게 인생의 대부분을 웃으면서 지냈다”고 말한 적이 있었는데 농담은 미국사람들의 인생의 요소이자 팝아트의 요소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