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구성주의


구성주의는 명확하게 규정할 수 없는 용어로 1920년대에 목적과 관념이 서로 상반되는 두 가지 운동이 동시에 구성주의라는 용어를 채택했다.
하나는 소비에트 러시아에 국한되어 일어났고, 다른 하나는 유럽의 여러 국가에서 일어난 것으로 후자를 국제 구성주의International Constructivism 혹은 유럽 구성주의라 명명하여 러시아 구성주의와 구별한다.

1920년대 초반 소비에트 러시아의 구성주의는 비공리적인 미술에 대한 배격을 제외하여 유럽 취향에 적당하게 수정된 채 유럽에 전파되었다.
가보와 앙투안 페브스네르 형제는 러시아의 생산주의자들로부터 비난을 받은 자신들의 독자적인 구성주의를 유럽에 전파했다.
가보는 1922년 러시아를 떠나 베를린으로 갔고, 앙투안은 이듬해 파리로 향했다.
러시아에서 가보는 모스크바의 트베르스코이 가에서 첫 번째 야외전시회를 가졌고, 세르푸초프의 라디오 방송국을 설계했으며, 모터로 움직이는 최초의 키네틱 조각을 제작했다.
산업 디자인과 사회적으로 유용한 작품이 장려되면서 공공 정책에서 타틀린 그룹이 선호되고 예술 활동에 대한 통제가 분명해지자 가보는 1922년 러시아를 떠나 베를린으로 가서 이후 10년 동안 체류했다.
1924년에는 파리에서 형 앙투안과 함께 페르시에 화랑에서 전시회를 열었으며, 1926년에는 뉴욕의 리틀 리뷰 화랑에서 반 두스뷔르흐, 앙투안과 함께 처음으로 미국에서 전시회를 열었다.
가보는 1952년에 미국 시민권을 취득했고, 1953~54년 하버드 대학 건축 대학원의 교수를 역임했으며, 1965년에 미국 문예아카데미연구소의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1967년에 런던의 왕립미술대학에서 명예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1971년에는 명예 대영제국 나이트 작위를 받았다.

1919년 가보의 ‘사실주의 선언문’에 서명한 앙투안도 1922년 베를린으로 가서 제1회 러시아 회화전 준비를 도왔고, 그곳에서 유럽을 여행 중이던 마르셀 뒤샹을 만났다.
1923년 파리에 정착했고 1930년에 프랑스 국적을 취득했으며 이듬해에는 추상-창조 그룹에 가입했다.
추상-창조Art non-figuratif(Abstraction-Creation)는 1931년 2월 파리에서 추상 혹은 비대상 미술을 추구하는 화가와 조각가들이 결성한 그룹으로 이들은 1930년 파리에서 제1회 국제추상미술전을 열었고 이듬해에 그룹을 결성했다.
이 그룹은 추상 미술의 추구라는 큰 원칙 하에 외견상 개방되어 있었으므로 가보와 앙투안 형제, 리시츠키의 구성주의와 몬드리안의 신조형주의로부터 마넬리, 글레즈 같은 화가들과 칸딘스키의 표현적 추상까지, 심지어는 아르프의 생물 형태적 추상과 일부 추상적 초현실주의 등 많은 종류의 비구상 미술을 포괄했다.
그러나 구성주의자들과 데 스테일의 지지자들이 강세를 보이면서 점차 표현적 추상이나 서정적 추상보다는 기하적 추상에 역점을 두게 되었다.

1926년 가보, 앙투안과 함께 뉴욕에서 전시회를 연 테오 반 두스뷔르흐(1883~1931)는 네덜란드 화가, 건축가로 데 스테일De Stijil 그룹의 주요 창시자이다.
데 스테일은 미학과 미술 이론을 다룬 네덜란드 잡지로 1917~28년 반 두스뷔르흐가 운영하고 편집했으며 마지막 호는 1932년 반 두스뷔르흐의 미망인에 의해 출간되었다.
데 스테일은 1917년 레이덴에서 반 두스뷔르흐가 결성한 아방가르드 예술가 단체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 외에 창립에 참여한 예술가들 중에 피트 몬드리안(1872~1944)이 있다.
몬드리안이 1911년부터 1914년 사이에 걸쳐 서서히 추상에 도달한 반면 반 두스뷔르흐는 1916~17년에 급속히 추상으로 전환했다.
1917년 이후 그의 작품은 몬드리안의 것과 양식 및 구성에 있어 매우 흡사하여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반 두스뷔르흐의 사상은 바우하우스에서, 특히 산업 디자인 부문의 베르너 그레프(1901~78)에게 영향을 주었다.
1924년경부터 그의 작품은 데 스테일의 엄격한 초기 원칙으로부터 벗어났으며, 수직면과 수평면의 엄격한 제한에서 벗어나 비스듬히 기울어진 면을 사용함으로써 운동감과 역동성을 일부 허용했다.
그는 이런 그림을 ‘역구성’이라고 했다.

1920년대 유럽 구성주의는 전통 미술의 근본적 토대를 무분별하게 공격한 다다, 그리고 무의식적인 창조와 자동주의라는 초현실주의 강령에서 지침을 찾은 충동적이고 직관적인 구성에 대한 반동에서 비롯되었다.
구성주의자들은 다다주의자와 초현실주의자들과는 달리 보편적이며 객관적인 미적 원리와 일치하는 의식적이고 신중한 구성을 지지했다.
이는 반 두스뷔르흐가 1923년 한스 리히터(1888~1976)의 잡지 <게 G> 창간호에 기고한 ‘요소적 형성 Elemental Formation’에서 피력한 요소주의의 핵심 이론이기도 하다.
<게>는 리히터가 1923년에 ‘유럽 구성주의자들의 기관지’를 만들려는 의도로 창간한 잡지의 명칭으로 ‘게G’는 ‘형성 Gestaltung’을 의미한다.
창간호에 반 두스뷔르흐의 독창적인 글 ‘요소적 형성’이 실렸다.
반 두스뷔르흐는 표현 방식을 상반되는 두 가지로 구별했다.
그가 ‘장식적’이라고 일컬은 과거의 미술은 개인적인 기호와 직관에 달려 있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구성주의를 의미한 현재의 미술은 ‘기념비적’ 혹은 ‘구성적’이라고 표현되었다.
그는 구성주의 미술은 더 이상 충동적이거나 직관적이지 않으며 객관적인 미적 원리에 따르는 구성이며, 구성주의자들은 “그들의 기본적인 표현수단을 의식적으로 조정한다”고 주장했다.

반 두스뷔르흐가 ‘요소적 형성’에서 피력한 내용은 요소주의Elementarism의 핵심 이론이기도 하다.
유럽 구성주의의 중심이 된 원칙으로서의 요소주의는 미술에서 구성은 충동적이거나 직감적이어서는 안 되고 의식적이며 의도적이어야 하고 보편적인 미학적 원칙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는 점을 구현한 새로운 미술 개념이었다.
라울 하우스만, 장 아르프, 이반 푸니, 라슬로 모홀리-나기가 서명한 요소주의 선언문은 1922년 <데 스테일> 제4권 10호에 실렸는데,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우리는 요소주의 미술에 전념할 것을 맹세한다.
이는 철학이 아니라 고유한 요소들로 이루어졌으므로 근본적이다.
예술가는 형태를 이루는 요소들을 좇아야 한다.
예술가만이 미술의 요소들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요소들은 개인의 일시적인 기분에 의해 발견되지는 않는다.
개인은 고립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예술가는 우리 세계의 요소들에 예술적인 형태를 주는 히만을 사용한다.”

반 두스뷔르흐의 요소주의와 퓨리즘Purism 사이에는 유사한 점이 있다.
퓨리즘은 1918년 무렵부터 1925년경까지 파리에서 일어난 미술운동으로 기계 미술이라는 새로운 미학과 관련이 있다.
이 운동을 아메데 오장팡(1886~1966)과 스위스 화가이며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1887~1965, 본명은 샤를-에두아르 잔레)가 주도했다.
1917년 오장팡은 입체주의가 방향을 잃고 장식미술로 퇴보하고 있다고 보고 이런 점을 1915~17년 발간된 자신의 평론지 <엘랑 Elan, L'>에 발표했다.
오장팡은 <엘랑>을 통해 입체주의의 장식적 경향에 대해 반대를 표명했으며 뒤에 퓨리즘의 토대를 이루는 개념을 주창했다.
퓨리즘의 개념을 널리 알릴 목적으로 1920~25년 잡지 <에스프리 누보 Esprit nouveau, L'>를 공동으로 제작하고
1924년에는 <현대 회화>를 공저로 출간한 오장팡과 르 코르뷔지에는 자신들의 연합을 “건강한 예술을 재구성하기 위한 운동”으로 간주하고 “예술가와 시대 정신을 접목”시키는 것을 자신들의 목표로 삼았다.
두 사람은 “기계의 정밀함에 내재한 가르침”에서 많은 지식을 축적했고, 형태를 기능에 맞출 것을 주장하는 기능주의를 추구했다.
두 사람은 회화는 일상적인 도구와 기구를 엄격히 추상화하여 기초 형태들을 강조하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반 두스뷔르흐의 요소주의 혹은 구성주의와 퓨리즘 모두 단순성, 명료성, 간결성을 가장 중시하는 새로운 미적 관점을 가졌다.
그러나 구성주의자들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비재현적, 비표현적, 기하적 그리고 기하와 유사한 요소로 구성된 추상구성을 지지했다.

엘 리시츠키(1890~1941)는 1922년 베를린에서 수정된 소비에트 구성주의를 공표할 목적으로 일랴 에렌부르크 등과 함께 3개 국어로 된 잡지 <베시치/게겐슈탄트/오브제>를 발행했다.
또한 1923년 베를린에서 리히터는 리시츠키와 반 두스뷔르흐의 조언과 도움을 받아 <게>를 창간하면서 이를 유럽 구성주의의 기관지라고 선언했다.

유럽 구성주의 단체의 최초 공식 선언은 1922년 뒤셀도르프에서 개최된 국제진보예술가대회에서 이루어졌다.
이때 반 두스뷔르흐, 리시츠키, 리히터는 국제 구성주의 분파의 이름으로 연합 시위를 벌였다.
1920년대에는 공식적인 조직은 형성되지 않았지만 구성주의 원리를 문학, 건축, 영화에 확산시키려는 시도가 있었다.
상대적으로 프랑스는 구성주의 발전에 기여한 바가 거의 없지만, 1920년대 후반과 1930년대 초반의 파리는 러시아를 떠난 구성주의 예술가들에게 편안한 안식처를 제공했다.
파리에서는 오귀스트 에르뱅(1882~1960)과 벨기에의 조각가, 화가 조르주 반통게를루(1886~1965)가 추상-창조 그룹을 결성했고, 1932~36년 잡지 <추상-창조: 비구상 미술>을 발행했다.
이 그룹은 배타적이거나 독단적이지 않았으므로 이들을 매개로 다양한 양식과 견해를 가진 많은 예술가들이 한자리에 모일 수 있었다.
이 그룹은 사실상 모든 비구상 예술가들에게 문호를 개방했다.

스위스에서는 아르프와 조피 토이버-아르프 부부가 독자적인 구성주의를 발전시켰으며, 스트라스부르에 있는 유명한 식당 카페 로베트의 실내를 디자인했다.
스위스는 국제적 성격으로 인해 구성주의 전시회에 대해 호의적인 분위기가 감돌았으며, 1937년 바젤 뮤지엄에서 개최된 대규모 전시회는 구성주의라는 용어가 얼마나 폭넓게 이해되고 있으며 얼마나 다양한 양식을 포함하고 있는가를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1930년대 후반 많은 구성주의 예술가들이 영국으로 이주하여 런던에 정착했다.
가보와 앙투안 형제, 모홀리-나기, 그로피우스, 몬드리안이 여기에 속한다. 이들은 바버라 헵워스, 벤 니컬슨, 헨리 무어, 평론가 허버트 리드와 교류했지만,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곧 미국으로 이주했으므로 1950년대까지 영국에서는 독자적인 구성주의 운동은 일어나지 않았다.
1937년 가보는 벤 니컬슨 등과 공동으로 ‘구성주의 미술에 대한 국제적인 고찰’이란 부제가 붙은 자료 모음집인 <서클>을 편집했다.
가보는 여기에 ‘미술에 있어서의 구성주의적 개념’이란 제목의 글을 발표했다.
이 글에서 가보는 구성주의적 이념을 확장시켜 이를 과학, 예술 또는 기타 영역에서의 뛰어난 창의력과 구별하지 않았다.
입체주의가 자연주의적 미술을 완전히 파괴했다고 주장한 가보는 입체주의 이후 미술에서의 회생은 매우 힘들었다면서 적었다.

“이런 시점에 구성주의 이념은 미술 회생의 초석이 되었다.
구성주의 이념은 선, 색채, 형태와 같은 시각예술 요소는 외부세계와 무관한 독자적인 표현력을 가지고 있음을 보편적인 법칙으로 한다.
즉 이런 요소들의 생명과 활동은 인간의 본성 속에 내재되어 있으면서 스스로 조절되는 심리적 현상이다.
이는 단어와 숫자처럼 공리적인 이유 때문에 관습적으로 선택되는 것이 아니며, 단순한 추상적 기호가 아니라 인간의 감정과 즉각적이고 유기적으로 얽혀 있다.
이런 근본적인 법칙이 드러나면서 미술의 영역이 광범위하게 확장되어 그동안 간과되었던 인간의 충동과 감정 표현이 가능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이런 요소들은 문학이나 시 등으로도 가능한 이미지의 연상을 위해 잘못 사용되어왔다.”
가보의 주장은 구성주의의 의미를 확대시켜 표현적 추상을 비롯한 모든 비재현적인 추상 미술을 함께 아우르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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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홀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실크스크린은 누가 시작했나


워홀에게 막대한 부와 명예를 가져다줄 실크스크린이 그에 의해 처음으로 예술에 사용된 것은 아니다.
실크스크린은 원래 상업용으로 활자 인쇄와 장식적 인쇄에 사용되었고 포스터를 대량생산하면서 널리 알려졌다.
실크스크린이 순수미술에 도입된 것은 경제공황기부터였다.
공황을 타계하기 위해 루스벨트 대통령이 실시한 뉴딜 정책에는 가난한 예술가들을 구제하는 정책도 있었다.
정부는 WPA(Works Progress Administration)라는 기구를 두고 예술가들을 고용하여 주급을 지불하면서 대중들을 위한 작품을 제작하도록 한 것이다.
이때부터 소위 말하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가난한 예술’이 시작되었다.
예술가들은 도서관과 공항 그리고 공공건물에 대중들이 쉽게 알아볼 수 있는 주제를 택해 벽화를 그렸으며 몇몇 예술가들은 작품을 대량으로 생산하기 위해 실크스크린을 제작하기 시작한 것이다.

실크스크린을 순수미술에 도입한 예술가로 가이 맥코이와 앤소니 벨로니스 두 사람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두 사람은 1930년대에 이미 실크스크린을 제작했을 뿐 아니라 실크스크린 기법을 상세하게 설명한 책자를 만들기도 했다.
그들의 이러한 노력으로 인쇄에 취미가 있는 일반 사람들도 실크스크린을 프린트할 줄 알게 되었다.
워홀이 실크스크린을 제작하기 훨씬 전부터 실크스크린은 순수미술의 문턱에 와 있었지만 1940년대까지만 해도 오일이 함유된 잉크를 사용해야 했으므로 색에 제한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여러 가지 색을 사용하게 된 것은 1950년대 중반부터였다.

실크스크린에 의한 특기할 만한 첫 전람회가 1940년 매사추세츠 주 스프링필드 뮤지엄(Springfield Museum of Fine Arts)에서 열렸다.
얼마 후 뉴욕의 상업화랑 웨이히(Weyhe)에서 전람회를 가진 지그로서는 카탈로그에서 실크스크린을 순수미술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실크스크린이라는 말 대신 세리그래프(serigraph)라는 용어를 사용했는데, 세리(seri)는 그리스말로 실크라는 뜻이고 그래프(graph)는 쓰다(writing) 또는 드로잉(drawing)이라는 뜻이다.
그는 얼마 후 필라델피아 뮤지엄 판화부의 큐레이터로 선출되고 나서 기술혁신에 관해 글을 썼는데 초기 실크스크린에 관한 중요한 자료로 현재 인정받고 있다.

그러므로 실크스크린은 워홀의 창작이 아니며 새로 등장한 예술재료도 아니다.
여기서 예술이란 누가 시작했느냐보다는 어떻게 했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사실에 주목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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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적인 이미지의 천국은 육체적 욕정의 산물
 

  연못 주변의 말 탄 한 떼의 남자들은 결혼식과 다산의 의식과 관련 있다.
승마자들은 시계 방향으로 돌게 되고 그들의 중심에 있는 사람들은 결혼과 다산의 대상이 된다.
하지만 보스는 이런 관념적인 상징성을 뒤집고 죄, 열정, 세속적인 것, 특별히 탐욕의 표상으로 사용했다.
둥근 연못은 여인들의 힘을 은유한 것으로 그들의 주위에 남자들이 있음을 의미한다.
16세기 사랑을 주제로 한 시에 여인들의 주위를 남자들이 맴돈다는 말이 보통이었다.
이런 형태를 15세기와 16세기에 ‘모리스 댄스’(네덜란드어로는 moreskendans)라고 불렀는데,
모리스는 ‘무어인의 Moorish’이란 뜻이며 이 말에는 애욕이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연못에서 미역을 감으며 남자들을 성적으로 유혹하는 장면은 당시의 도덕성을 반영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배경의 유기적·인위적 구조물들은 자연에 대한 관념의 상징물들로 왼쪽 날개의 구조물과도 관련이 있다.
보스의 다른 작품에서도 이런 구조물이 발견된다.
반은 자연적이고 반은 인위적인 구조물은 자연의 성별 특징을 나타낸다.
자연의 성별 경향을 보스는 악과 관련지었거나 적어도 위험한 것으로 인식했다.
그는 인간을 자연의 힘에 의해 복종을 강요당하는 존재로 보았다.
구조물을 흰색, 핑크색, 그리고 파란색으로 칠했는데, 겐트 소재 얀 반 에이크의 <겐트 제단화 Ghent Altarpiece>에서의 천국을 상기시키며 중세 화가들의 천국 묘사에도 이런 형태가 발견된다.

분수와 네 줄기 강 또한 천국의 근본 특징이다.
보스가 묘사한 천국은 그러므로 성적 타락과 위험이 내포된 곳으로 오른쪽 날개의 지옥으로 연결된다.
타락한 천국에 대한 관념은 중세 은유문학에서 사랑을 주제로 자주 등장했다.
올바른 천국과 타락한 천국의 차이는 탐욕이다.
섹스를 원하는 욕정이 천국을 타락한 곳으로 변질시킨다.
성적 욕정에 의한 타락한 천국은 최후의 심판 때에 저주를 면할 수 없다.
보스가 나타내려고 한 건 최후의 심판의 대상이 되는 타락한 천국이다.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상상하는 천국을 묘사하면서 이를 최후의 심판과 연관지으려고 했다.
독일 인문학자 하인리흐 베벨Heinrich Bebel은 1509년 『비너스의 승리 Triumphus Veneris』에서 이와 유사한 사고를 보였는데, 보스가 사전에 이를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일부 지성인들은 대중적인 이미지의 천국이 육체적 욕정의 산물임을 지적했다.
보스와 베벨 모두 인간의 내적 욕정이 도덕보다 강하게 나타날 때, 섹스가 결혼의 신성함을 무너뜨릴 때 인간은 파멸에 이른다는 점을 지적했다.

새들이 물에 있고 물고기들은 마른 땅 위에 있다.
보스의 자연에서는 인간과 동물, 인간과 식물이 하나가 된다.
거대한 과일은 인간과 동물 모두의 먹이가 되고 인간은 자연과 조화를 이룬다.
여기에는 젊음과 생성만이 있을 뿐 죽음은 부재한다.
개인은 없고 모두 인형처럼 생긴 모습에 인종의 구별만 있을 뿐이며 우리는 이들이 어떤 인종인지 알 수 없지만 벌거벗은 이들의 몸이 영혼을 의미한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이들의 모든 행위는 어린아이들의 행위처럼 순진해보인다.
지상에서는 한 번도 이루어진 적이 없는 유토피아적 환영으로 보인다.
왼쪽 하단 코너의 다섯 사람은 지상의 모든 인종을 상징한다.
백인이 오른손을 높이 들고 왼쪽 날개 패널화를 가리키면서 “이곳으로부터 우리가 왔다”고 말하는 것 같다.

올빼미를 가로막고 있는 사람은 밤이 지속되기를 바라는 걸 의미하며,
그 아래 투명한 막으로 된 풍선 안에는 한쌍의 남녀가 사랑을 나누고 있고,
풍선 아래 식물의 형상을 한 원형 안에 있는 남자는 둥근 구멍으로 연결된 투명한 시린더에 앉아 있는 쥐를 응시하고 있다.
투명한 유리 시린더는 이 그림에서 여러 개 등장하며, 보스는 연금술사들이 사용하는 유리 시린더를 사용하여 창조의 법칙을 깨드리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려고 한 것으로 짐작된다.
만약 그렇다면 이것은 자연을 모방함으로써 신성한 창조를 모독하는 인류의 죄에 대한 비판으로 해석될 수 있다.
자연의 번성은 실험실에서 연금술사가 원소들을 화학적으로 변형시키는 것과는 사뭇 다르기 때문이다.

아담과 이브가 뱀의 유혹을 받아 선악과를 따 먹고 처음으로 지은 죄는 색욕이다.
자손을 얻기 위한 섹스가 아니라 쾌락을 추구하기 위해 섹스를 하면서 인간은 타락의 길을 걸었다는 것이 당시 보편적인 인식이었다.
색욕이 생기자 남자와 여지의 관계가 문란해졌고 따라서 시기와 질투가 생겨 죄가 더욱 커졌다.
이런 사고는 16세기 초 인간의 타락을 아담과 이브의 색욕적 장면으로 묘사한 데서 확인할 수 있다.
‘생명의 샘’이 있지만 인간은 어리석어서 그것에 등을 돌리고 육욕을 따른 것이다.
따라서 <지상 쾌락의 동산>은 오른쪽 날개에 묘사된 <지옥>으로 변하고 만다.
이것은 보스가 묘사한 가장 강렬한 지옥의 장면이다.
어둠 속에서 건물들이 화염에 휩싸이고 불길은 물을 피로 물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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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구성주의


러시아계 미국 조각가 나움 가보(1890~1977)는 브리안스크 태생으로 앙투안 페브스네르(1886~1962)의 동생이다.
뮌헨 대학에서 의학 및 자연과학, 공과대학에서 공학을 공부했는데, 이때 하인리히 뵐플린의 미술사 강의를 들었다.
1913년과 1914년에 파리를 방문했고, 그곳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던 앙투안을 통해 처음 아방가르드 미술을 접했다.
오슬로에서 가보라는 이름을 사용하면서 입체주의 특성과 후에 유럽 구성주의의 전조가 되는 기하적 추상을 결합하여 첫 번째 구성을 제작했다.
1917년 앙투안과 같이 러시아로 돌아왔고 1920년에 형과 함께 ‘사실주의 선언문’을 발표했다.
이 선언문은 러시아 구성주의의 창시자 블라디미르 타틀린(1885~1953)이 이끄는 이른바 ‘생산주의자’ 그룹에 대립하는 유럽 구성주의의 기초 원리를 제시했다.
한편 앙투안은 절대주의의 창시자 카시미르 말레비치(1878~1935), 칸딘스키와 더불어 모스크바 미술 아카데미 교수로 임명되었다.

말레비치는 인후크Inkhuk 내의 논쟁에서 칸딘스키와 페브스네르 형제에 동조하며 모든 미술은 반드시 실용적이어야 한다는 생산주의 예술가들의 견해에 반대했고, 산업미술은 자율적이고 창조적인 미술에서 나오는 새로운 발상에 좌우된다고 주장했다.
인후크는 1920년 5월 모스크바에서 미술 실험 프로그램을 수행하기 위한 목적으로 세워진 기관으로 러시아어로 미술문화연구소Institut Khudozhestvennoi Kulturi의 약자이다.
미술부 산하의 한 분과로 설립되었으며, 1918년 인민계몽위원회(IZO 나르콤프로스) 밑에 설치되었다.
1921년 말 페트로그라드에서는 타틀린, 비텝스크에서는 말레비치의 책임 아래 만들어졌다.
처음에는 칸딘스키가 인후크 프로그램의 정비를 맡았지만, 그의 계획안은 인후크의 대다수 좌파 예술가들에 의해 거부당했다.
칸딘스키는 곧 이곳을 떠났으며 그의 계획안은 후에 그의 바우하우스에서의 교수법에 바탕이 되었다.

1948년 예일 대학에서 행한 트라우브리지 강연에서 소비에트 구성주의에 대한 반대의사를 명학하게 밝혔다.

“구성주의란 단어는 1920년대에 미술을 말살시켜야 한다고 주장한 일단의 예술가들에 의해 사용되어 왔다.
그들은 이젤회화와 조각, 즉 예술가의 이념이나 감정을 전달하고자 하는 예술작품의 가치를 전적으로 부인했다.
그들이 예술가 특히 소위 구성주의 예술가들의 역할이라고 주장한 것은 물질적 가치가 있는 구조물, 즉 편리한 물건, 주택, 의자, 탁자, 스토브 등의 제작에 예술가의 재능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그들은 철학적으로는 물질주의를, 정치적으로는 마르크스주의를 추종했다.
구성주의 예술가들은 예술작품을 부패한 자본주의 사회에서만 소중히 생각되는 쾌락이며, 새로운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백해무익한 존재로 치부했다.
나와 동료들은 이런 이상한 주장에 대해 강력하게 반대한다.
미술은 예술가의 마음을 즐겁게 해주는 게임에 불과하다는 견해에 우리는 동의하지 않았으며 현재도 그렇다.
나는 미술이 인간 생활의 정신적, 사회적 구조에서 특별한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고 믿는다.
미술은 사회 구성원들 간의 가장 즉각적이고 효과적인 의사소통의 수단이라고 생각한다.
미술은 인생 자체와 맞먹는 최고의 역동성을 지니고 있으므로 인간의 모든 창조물보다 뛰어난 것이다.”

구성주의는 많은 현대 미술용어와 마찬가지로 명확히 규정되어 있지 않으며, 용어의 사용도 일원화되어 있지 않다.
구성주의Constructivism와 구성주의적Constructive이라는 용어는 1900년대와 1910년대에는 충동적이고 즉흥적이지 않으며 치밀하게 구성된 미술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당시 구성주의로 분류되었던 미술이 모두 현재에 구성주의라고 일컬어지는 범주에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1920년대에는 목적과 관념이 서로 상반되는 두 개의 운동이 동시에 구성주의라는 용어를 채택했다.
하나는 소비에트 러시아에 국한되어 일어났으며, 다른 하나는 유럽의 여러 국가에서 일어났다.
현재는 후자를 국제적 구성주의 또는 유럽 구성주의라고 명명하여 러시아 구성주의와 구별하기도 한다.

러시아 구성주의가 매우 구체적인 명칭인 반면, 유럽 구성주의는 의미가 모호하며 점차 비재현적 혹은 비표현적이라는 공통점을 가진 광범위한 화파와 양식을 포괄적으로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동일한 명칭 때문에 두 운동은 근본적으로는 하나인 이론의 두 가지 갈래인 것처럼 논의되었으며, 이론 인해 혼란이 야기되기도 했다.
사실 주요 유럽 구성주의 화파 중 러시아 구성주의의 기본적인 이념을 수용한 화파는 전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히려 유럽 구성주의의 목적과 작품은 러시아 구성주의자들이 선언문을 통해 순수미술이라고 비판한 종류의 것이었다.
가보와 앙투안, 말레비치, 타틀린, 로트첸코, 포포바, 클리운, 푸니, 로자노바의 1920년 이전 작품들은 일반적으로 국제적 구성주의의 범주에 포함된다고 볼 수 있으나 러시아 구성주의는 이 모두를 부인했다.
러시아 구성주의자들은 유럽 구성주의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초기 작품을 의도적으로 배격했다.
엘 리시츠키(1890~1941)만이 러시아 구성주의와 유럽 구성주의에 모두 동조했다.

1909~14년 다름슈타트에서 공학을 전공하다가 전쟁이 발발하자 러시아로 돌아가 모스크바에서 건축을 공부한 리시츠키는 입체-미래주의 양식과 루보크lubok라 불리는 농민 목판화 전통이 융합된 양식을 사용하면서 샤갈과 함께 유태교 서적의 삽화를 그렸다.
루보크는 밝게 채색된 러시아 민속 판화를 말하며 복수형은 루프키lubki이다.
일반적으로 민속 우화나 이와 유사한 장면들이 묘사되어 있다.
루보크는 17세기 중반부터 최소한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이전까지 제작되었다.
루보크란 용어는 교육받은 계층이 평민 미술에 대해 내린 경멸적인 평가를 함축하며 조잡한, 값싼, 단정치 못한, 심미안이 결여된 의미로 사용되었다.
리시츠키는 1919년 비텝스크에서 말레비치와 알게 되었고 러시아 구성주의를 주도하는 예술가의 한 명으로 성장했다.
리시츠키는 상당한 기간 동안 서구에 가장 잘 알려진 러시아 추상 예술가였다.
그의 전성기 작품에는 말레비치의 절대주의와 타틀린과 로트첸코의 구성주의, 그리고 몬드리안의 네덜란드 신조형주의가 성공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1920년경 러시아에서 구성주의의 기본 개념은 1920년대에 순수 미술과 실험실 미술에 반대하고 생산 미술을 지지하던 비대상 예술가의 이념을 설명하기 위한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타틀린은 입체-미래주의자들의 활동기간에 널리 유행한 구성이라는 용어를 자신의 작품과 관련하여 채택했다.
타틀린은 자신의 구성물에서 실제를 흉내내는 대신에 실제 물질을 사용했으며, 회화의 가상적 공간 대신에 실제 공간을 이용했다.
여기에서 중요한 원칙은 환영을 부인하는 것으로 이는 서구의 구체 미술 개념과 여러 측면에서 유사했다.
이는 사회적 유용성과 더불어 소비에트 구성주의의 중심 개념이 되었다.
타틀린의 물질-문화주의는 현대적 물질의 미적이고 실용적인 실제 특징을 조사하고 탐구하는 것으로 이후 구성주의자라고 자처하는 예술가들의 관심사 중 하나가 되었다.
구성주의자라는 용어는 1920년 8월에 간행된 가보와 앙투안의 ‘사실주의 선언’에서 타틀린의 미학적 이념을 가리키는 말로 처음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가보는 ‘사실주의 선언’에서 자신이 주창하는 비대상 미술을 설명하기 위해 구성과 구성주의적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그렇지만 후에 가보는 구성주의와 구성주의자라는 용어가 지나치게 교조적이라며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가보와 생산주의 화파 사이의 중요한 차이는 미술의 사회적 유용성에 대한 태도에 있다.
가보는 창작 미술로부터 사회적인 이익이 간접적으로 도출될 수도 있지만, 창작 미술은 비사회적이고 비실용적이어야 한다고 믿었다.
반면에 생산주의자들은 미술이 사회주의 사회의 생활향상에 직접적으로 기여해야 한다고 열렬히 주장했으며, 이것이 소비에트 구성주의의 중요한 원칙이 되었다.
가보가 서구에 소개한 구성주의는 그 자신의 독자적인 방식에 의한 구성주의였지만 러시아 내에서 구성주의는 사회적으로 유용한 미술을 추구하는 것을 의미했다.

타틀린이 가보의 신조와는 매우 동떨어진 공리주의 원리를 구체화시킨 <제3 인터내셔널 기념물>을 제작한 이래 구성주의 미술의 이론적 근거는 격렬한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이 기념물은 1919년 러시아 미술부가 모스크바 중심에 세울 구조물로 타틀린에게 디자인을 의뢰한 것이다.
타틀린이 처음에 계획한 기념물은 유리와 철로 된 것으로, 그 높이가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의 두 배이며, 중앙에 들어 있는 유리로 된 원통이 회전하는 것이었다.
타틀린은 이를 “공리적인 목적을 위하여 회화, 조각, 건축과 같은 순수 조형적 형태들을 결합하는 일”이라고 밝혔다.
1920년 12월 제8회 러시아 의회 전시장에서 기념물의 모형이 전시되었다.
가보는 기념물의 구도가 실현 불가능하다고 비난했으며 사실상 실현되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은 이후 러시아 구성주의의 대표적인 상징으로서 인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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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홀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워홀은 리히텐슈타인과 충돌하는 게 싫어


워홀은 리히텐슈타인과 충돌하는 게 싫어서였는지 아니면 두려워서였는지 더 이상 만화를 그리지 않고 음식물에 관한 것들을 그렸다.
그런데 이제 올덴버그가 음식물을 주제로 조각을 시작하자 자신의 식당영업이 위태롭게 느껴졌다.
게다가 로젠퀴스트까지 스파게티를 확대하여 그리지 않는가!
워홀은 식당을 폐업하고 다른 사업을 벌어야만 했다.
자신의 그림이 다른 예술가들의 것과 다르기를 바란 워홀은 구성과 기교에 특히 관심을 기울였다.
그래서 그는 바둑판처럼 그리는 방법을 선호했는데 뉴욕에는 그렇게 그리는 예술가가 없었기 때문이다.
같은 이미지를 조금만 변형시켜 가로세로 격자모양으로 50개, 100개, 또는 200개를 한꺼번에 그렸다.
우표도 50장, 100장씩 전지에 그리면서 그림의 일부분이 흐리게 나타나도록 색을 칠했고 글씨는 쓰다만 듯 미완성으로 남겼다.
달러 지폐도 여러 장 그렸는데 한없이 계속되는 그의 그림은 앞뒤가 없는 전차처럼 시작도 끝도 없이 진행되었다.

워홀이 조수 글럭에게 실제 달러 지폐를 실크스크린으로 대량생산하고 싶다고 말하자 글럭은 드로잉만 그려주면 자신이 제작하겠다고 말했다.
이렇게 해서 1962년 4월 말 1달러짜리 지폐 200장을 그린 가장 큰 실크스크린이 제작되어 그해 5월 11일자 주간지 《타임》에 소개된 워홀 사진의 배경으로 나타났다.

지폐를 그린 예술가가 워홀이 처음은 아니다.
19세기 말 윌리엄 하넷과 존 하벌이 지폐를 그린 적이 있다. 우표그림도 마찬가지인데 피카소가 콜라주 작품을 하면서 우표를 사용한 적이 있으며, 슈비터즈를 비롯한 예술가들의 콜라주 작품에서도 우표를 발견할 수 있다.
하넷이나 하벌과 마찬가지로 워홀도 거의 2차원의 사물을 선택하여 관람자들로 하여금 그림과 실제를 혼동케 하는 작업을 했다.
워홀의 이러한 미학은 존스의 〈국기〉, 〈과녁판〉, 〈숫자판〉과 다르지 않다.

이 시기에 워홀은 상업적 가치가 없는 이미지, 즉 글자를 실크스크린으로 제작했는데 〈조심해서 다룰 것 ― 유리 ― 고맙습니다〉가 그것이다.
부서지기 쉬운 물건을 포장할 때 취급주의를 표시하는 문구를 153번 반복해서 그린 그림이다.
그림에 실제로 유리는 없지만 ‘유리’라는 글자가 쓰여 있어 마치 그림이 부재하는 것에 대한 표기라는 주장을 하는 듯했다.
2년 후 존스가 글자를 그림에 삽입했을 때 사람들은 존스가 워홀의 그림으로부터 아이디어를 구했다고 생각했다.

1962년 봄부터 예술품 중개상과 수집가들이 워홀의 화실을 드나들며 그의 그림을 구입하기 시작했지만 그렇게 해서 벌어들이는 돈은 넉넉한 편이 아니었으며 수입은 대부분 상업미술로부터 들어왔다.
중개상들이 그의 그림을 그룹전에 포함시켰지만 뉴욕에는 아직 그의 개인전을 계획하는 용기 있는 중개상이 없었다.
4월 어느 날 마사 잭슨이 그의 화실로 와서 그림을 몇 점 구입하면서 개인전에 관해 의견을 나누었으므로 워홀은 은근히 그녀에게 기대를 걸었지만 잭슨이 계획을 포기했으므로 또 한 번 실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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