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디오 아트


비디오와 TV 장비 그리고 기술을 사용해 다양한 방식으로 제작하는 비디오 아트를 프랭크 포퍼는 여섯 가지 유형으로 분류했다.
첫째, 새로운 시각적 이미지의 창출을 위해 기술적 수단을 사용하는 것,
둘째, 퍼포먼스를 영구적인 형태로 만들기 위해 비디오를 사용하는 것,
셋째, 비디오를 사용해 지배체제에 의해 억압받기 쉬운 이미지와 정보들을 배포하는 것으로 이를 포퍼는 ‘게릴라 비디오’라 칭했다.
넷째, 비디오 카메라와 모니터를 조각적인 설치작업에 이용하는 것,
다섯째, 비디오를 현장 퍼포먼스에 즉흥적으로 사용하는 것,
마지막으로 비디오를 주로 컴퓨터와 함께 사용하는 것과 관련하여 진보적인 기술적 선언을 하는 것이다.

1959년 볼프 포스텔이 작동 중인 TV 수상기로 아상블라주 작업을 한 바 있으나 하나의 장르로서 비디오 아트를 탄생시킨 사람은 한국의 음악가이자 행위예술가 그리고 조각가인 백남준이다.
1950~53년 쾰른에서 사진 석판을 비롯한 판화 기법을 배운 후 1954~55년에 부퍼탈에서 회화와 실험적인 타이포그래피를 공부한 독일 예술가 볼프 포스텔Wolf Vostell(1932~98)은 1955~56년 파리의 에콜 데 보자르, 1956~57년 뒤셀도르프 아카데미에서 공부했다.
포스텔은 찢긴 포스터 조각으로 콜라주를 구성하고 이를 콜라주의 반대어 데콜라주라고 칭했는데, 이들 작품이 이미 붙여진 포스터와 인쇄물을 찢어내어 구성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종종 밑에 있는 재료들을 식별할 수 없도록 표면에 채색하고 선으로 낙서하기도 했다.
1958년부터 울름, 부퍼탈, 베를린, 뉴욕에서 해프닝을 기획하여 유명해졌으며, 일상생활로부터 가져온 임의적이거나 파괴적인 파편들이 모여 하나의 전체적인 작품을 구성한다는 의미로 포스텔은 이를 ‘데콜라주-해프닝’이라고 불렀다.

백남준(1932~)은 1964년에 뉴욕에 정착했고, 이듬해 소니사의 휴대용 비디오 녹화기가 뉴욕에서 판매되자마자 이를 구입했다.
이 새로운 장치인 녹화기를 구입한 바로 그 날 첫 녹화작업을 하여 그 날 저녁 녹화한 비디오 테이프를 카페 고고Cafe-a-Go-Go라는 예술가 클럽에서 선보였다.
백남준은 존 케이지의 <조합 피아노>에서 영감을 받아 TV 스크린 위에 자석을 놓아서 방송되는 이미지를 일그러뜨리는 실험을 했다.
엔지니어이자 발명가의 아들 존 케이지John Cage(1912~92)는 1935~37년 아르놀트 쇤베르크로부터 음악 교육을 받았고, 주로 작곡가로 유명해졌는데, <뉴 그로브 음악 음악가 사전>(1980)에는 그를 가리켜 “20세기의 다른 어떤 미국 작곡가보다도 세계 음악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역할을 했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케이지는 시각예술에 관심이 많았으며, 많은 친구들과 공동작업을 하고 그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으며, 말년에는 판화 제작자로서 명성을 얻었다.
케이지는 1943년 뉴욕의 모마에서 자신의 작품 3곡을 포함한 연주회를 지휘했고, 이로써 더욱 확고한 명성을 쌓았다.
임의성과 우연의 효과를 탐닉하고, 피아노 줄 사이에 여러 가지 물체를 삽입하여 타악기고 변형시킨 발명품인 <조합 피아노>와 전자장치의 기이한 소리로 실험하면서 극히 비정통적인 작품을 만들었다.

백남준은 비디오 작업으로 전환한 후 종종 첼리스트 샬럿 무어먼Charlotte Moorman(1940~94)과 공동으로 작업했으며, 특히 무어먼은 두 개의 축소된 TV 스크린으로 된 브라를 착용하고 첼로를 연주하는 <살아 있는 조각을 위한 브라>(1969)로 유명하다.
무어먼은 백남준의 다른 퍼포먼스 작업에서 우발적인 노출이 문제가 되어 체포된 적도 있다.
백남준은 1972년에 말했다. “1950년대의 자유주의자들과 1960년대의 극단주의자들의 차이는 전자가 심각하고 염세주의적인 데 비해 후자는 낙관적이며 재미를 추구한다는 점이다.
누가 사회변혁에 더 기여했는가? 극단주의자들이다.
심각한 대륙 미학을 거부하는 존 케이지와 해프닝, 팝아트, 플럭서스 운동의 출현은 1960년대를 예견했다.
1970년대를 무엇이 예견할 것인가? 말할 것도 없이 비디오이다.”

백남준은 1956년 동경 대학을 마치고 독일에 도착하여 1958년 다름슈타트의 하기강좌에서 강의를 맡고 있던 케이지를 만났다.
케이지와의 만남은 전통 음악에 회의를 갖고 있던 백남준에게 새로운 돌팔구를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다.
백남준은 기상천외한 해프닝을 행위 했는데 케이지의 새로운 음악과 선불교 사상에 영향을 받은 다다적 돌출행동이었다.

백남준은 말했다.
“나는 존재하지 않는 소리를 찾고 있다. 나의 스승은 내가 원하는 음이 음표들 사이에 있다고 말해주었다.
그래서 나는 피아노 두 대를 사서 음이 서로 어긋나게 조율했다.”

실험음악을 추구한 그에게 우연, 침묵, 비경정성 등의 새로운 음악 이론과 연극적 음악 혹은 음악적 연극이라는 새로운 복합매체 공연을 제시한 케이지는 그의 운명을 바꾸어놓은 스승이었다.
백남준은 1959년 11월 장 피에르 빌헬름의 뒤셀도르프 22번가 화랑에서 <케이지에게 바침: 테이프 레코더와 피아노를 위한 음악>을 발표했다.

1963년 부퍼탈 파르나스 화랑에서 열린 ‘음악의 전시회 - 전자 텔레비전’ 전시회는 백남준의 첫 개인전이자 비디오 아트가 시작된 의미 있는 사건이었다.
그는 13대의 장치된 TV와 장치된 피아노를 선보였는데 이것들은 기존의 미학적 가치에 대한 반예술적 도전이면서 동시에 장치된 TV는 가해 대상인 TV가 지닌 다원성으로 인해 공격적 제스추어일 뿐 아니라 그 자체가 새로운 시각예술의 장르가 되는 미술사에 구두점을 찍는 전시회였다.
장치된 TV는 TV 내부 회로를 변경시켜 방송 이미지를 왜곡시키거나 브라운관을 조작하여 스크린에 추상적 선묘를 창출하는 기능을 지녔다.
백남준은 조작과정에서 예술적 의도나 기술을 배제하고 순전히 기계적 과정에만 의존하여 우연적이며 무작위적인 이미지를 얻어냈다.
무작위적으로 얻어진 이미지는 예측할 수 없는 시각적 비결정성과 다양성을 보여주었다.
13대의 TV 수상기들은 생방송 이미지를 왜곡시켜 일그러진 저명 인사의 얼굴을 만들거나 흑백 이미지의 명암을 도치시키거나 혹은 내부 회로를 변경시켜 화면에 추상적 주사선을 만들었다.
백남준은 ‘비디오 아트의 황제’라는 명예로운 칭호를 받았다.

또 한 명의 잘 알려진 비디오 아티스트는 미국의 빌 비올라Bill Viola(1951~)로서 현학적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하지만 좀더 진지한 성격을 띤다.
비올라의 대표작은 <멈추지 않고 기도하기>(1992)이며 이 작품에 대해 그는 설명했다.
“현대의 성무일과서이며 영원의 날까지 밤을 세워 비는 이미지로 도시를 위해 그치지 않고 계속 기도하는 역할을 한다.
이미지들은 12시간을 주기로 거리에 면해 있는 창문에 설치된 스크린에 계속 상영된다.
이 이미지들은 하루 24시간, 주 7일 동안 계속해서 영사되며, 창문의 안쪽, 위, 아래에 설치된 스피커를 통해 윌트 휘트먼의 <나의 노래> 중에서 발췌한 글을 읽는 목소리가 유리창 밖과 안으로 조용히 들려 온다.
낮에는 햇빛 때문에 이미지들은 보이지 않고 목소리만 들린다.
비디오 재생기는 컴퓨터에 의해 하루의 시간과 일치되게 되어 있다. ...
작품을 구성하는 12개의 부분들, 즉 각 기도의 길이는 15분에서 2시간까지 다양하며 개인적이고 보편적인 삶의 주기를 묘사한다.”

비올라의 작품은 많은 평론가들의 찬사를 받았다.
1993년 런던의 왕립 아카데미에서 열린 ‘20세기의 미국 미술’ 전시회 도록에는 비올라를 ‘설치의 기술적인 거장’으로 지칭했다.
그러나 같은 해 브라이언 슈얼은 비올라의 작품을 “아마추어적이며 무능력한” 것으로 비하하면서 “예술가로서 그의 주장은 변명의 여지없이 현학적이며 그를 지지하는 이들의 변호는 너무나 어처구니 없다.
그의 불쾌한 비디오 작품은 화화나 조각의 기법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고 했다.
비디오를 순수하게 시각적 매체로 보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비올라는 백남준을 이어 차세대의 가장 유명한 비디오 아티스트로 알려졌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워홀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팝 아트의 승리, 추상표현주의의 종말


스테이블 화랑에서 전람회를 가지기 전까지만 해도 워홀은 캠벨 수프 통조림을 그린 예술가로 알려졌는데 이제 스타들의 실크스크린 초상화를 제작하는 예술가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워홀의 개인전은 적절한 시기에 열렸던 것이었다.

시드니 재니스 화랑에서 성대하게 열린 ‘신사실주의 예술가들 The New Realists’전(1962. 10. 31~12. 1)에 워홀도 참여했다.
이 전시는 미국미술사에 한 획을 그은 전람회로 기록되었다.
유럽과 미국 예술가 29명의 작품 50점이 소개된 이 전시에 워홀은 200개의 수프 통조림을 그린 그림을 출품했고 올덴버그는 비닐에 색칠한 조각을 출품했다.
그 밖에도 영국의 유명한 팝 아트 예술가 피터 블레이크가 참여했으며, 프랑스 작가는 일곱 명이 참여했는데 아르망, 크리스토(불가리아계), 레이몽 하인, 이브 클랭, 마샬 라이세, 다니엘 스포에리, 장 팅글리였다. 미국사람은 열두 명이 참여했는데 워홀과 올덴버그 외에도 짐 다인, 인디애나, 리히텐슈타인, 로젠퀴스트, 조지 시걸, 탐 베셀만이 포함되었다.

시드니 재니스는 추상표현주의 예술가 윌렘 드 쿠닝, 아돌프 가트립, 필립 구스턴, 로버트 마더웰, 마크 로드코를 후원했던 익히 알려진 중개상이었다.
재니스는 신사실주의 예술가들을 도시의 대중적인 예술가들이라고 지칭하면서 그들은 매일매일 일어나는 사실과 아이디어를 예술의 재료로 사용한다고 말했다.
재니스는 맨해튼 57번가 이스트 15번지 5층에 있는 자신의 화랑 공간이 넉넉하지 못해 웨스트 19번지의 상점을 잠시 빌려 같이 전시장으로 사용했다.
전람회는 아주 성공적이었으며 사람들은 화랑과 상점을 오가며 작품들을 관람했다.
프랑스의 평론가 피에르 레스타니는 카탈로그에서 예술이란 근래의 자연이라고 하면서 근래의 예술에는 기계적이고 산업적이며 광고와 같은 내용들이 넘친다고 기술했다.

사실 재니스 화랑에서 대규모 전람회가 열릴 때만 해도 팝 아트라는 말이 공식적으로 사용되진 않았다.
평론가들은 전람회에 참여한 예술가들에게 제각기 이름을 붙였는데 더러는 그들을 네오다다이스트라고 불렀고, 신사실주의자라고 불렀던 평론가들도 있었으며 공공주의자(Commonists), 속물주의자(Vulgarists), 간판쟁이(Sign Painters), 미국을 꿈꾸는 자들(New American Dreamers), 대중적 사실주의자(Popular Realists), 사실존중주의자(Factualists)라고도 불렀는데 한결 같이 그들을 유물론자쯤으로 취급했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팝 아트를 추구하는 예술가들을 복수유물론자(Polymaterialists)라고 불렀고 프랑스 사람들은 신사실주의자(Nouveaux R럂listes)라고 불렀다.
다만 영국사람들만이 로렌스 알로웨이를 따라 팝 아트 예술가들이라고 불렀는데 그러니까 팝 아트는 알로웨이에 의해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알로웨이는 이미 1950년대에 이 말을 사용해 대중적인 영화, 공상과학, 광고, 게임기구, 언론에서 취급하는 배우, 가수, 정치가 등의 영웅들을 소재로 작품을 제작하는 행위를 팝 아트라고 분류했다.

재니스 화랑에서 열린 이 전람회는 추상표현주의의 몰락을 의미했다.
재니스뿐 아니라 레오 카스텔리, 리처드 벨라미, 앨런 스톤, 그리고 일레노 와드도 더 이상 추상표현주의 예술가들의 전람회를 열지 않았다.
평론가 해롤드 로젠버그는 잡지 《뉴요커》에서 “‘신사실주의 예술가들’전은 뉴욕 미술계를 강타한 지진이다”라고 기술했다.
《아트 뉴스》의 편집자이자 평론가 토마스 헤스는 추상표현주의 예술가들을 향해 새로운 것이 도착했으니 낡은 것은 떠날 때가 되었다고 했다.
“팝아트 예술가들이 우리를 죽이려고 한다”고 했던 로드코의 말은 바로 이러한 상황에 대한 불평이었다.

1962년 12월 13일 모마가 일반인들을 위해 ‘팝 아트 심포지엄’을 개최하고 연사로 리히텐슈타인, 로젠퀴스트, 시걸, 그리고 워홀을 초대했다.
이때부터 팝 아트는 미국 미술의 주류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다음은 신세계에 기고한 글입니다.

관능적 아름다움을 추구한 드가와 르누아르


에드가 드가(1834~1917)와 피에르-오귀스트 르누아르(1841~1919)를 묶어서 말할 수 있는 공통점은 프랑스 전통회화를 유지 발전시킨 데 있다.
두 사람 이후 전통회화의 맥이 끊어진 것을 볼 때 두 사람은 전통회화의 마지막 보루였다.
프랑스 전통회화는 다비드와 앵그르로 이어지는 역사화와 인물화였으며 미적 강령은 일찍이 그리스 회화에서 성취된 현실적인 아름다움을 초월한 이상주의였다.
프랑스의 소묘 전통을 최고의 수준으로 완성시킨 앵그르의 선묘는 관능적인 느낌을 주어 낭만주의에 가까운 표현력을 발휘했고 그는 아카데미에 방향성과 권위를 부여했다.
이상적인 미의 추구는 프랑스 회화의 특징이었으며 이를 추종한 화가가 바로 드가와 르누아르이다.

19세기 프랑스 회화를 주도한 것은 낭만주의였으며 일상적 현실의 단조로움에 반발한 낭만주의의 한 측면은 이국 취향이었다.
이국 취향은 고갱의 경우 타히티에서 삶을 마감하는 현실 도피로도 나타났다.
평범한 현실에 숭고함을 부여하려는 노력도 낭만주의의 태도였다.
19세기 초 프랑스 회화의 가장 취약한 분야는 풍경화였다.
프랑스 회화의 선구자들 푸생과 클로드 로랭이 일찍이 풍경화를 그렸지만 인물들을 묘사하기 위한 배경으로서의 역사적 풍경화였고 풍경화를 고유한 장르로 발전시킨 것은 19세기 중반에 활약한 바르비종 화파였다.
바르비종 화파란 퐁텐블로 숲 외곽의 작은 마을에 정착한 테오도르 루소를 비롯한 화가들이 풍경화를 주로 그린 데서 붙여진 명칭이다.
풍경화는 19세기 말 인상주의 화가들에 의해서 독립된 장르가 되었으며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
인상주의의 세계적 명성은 프랑스 전통회화의 종말을 의미한다.
19세기 말 드가와 르누아르는 인상주의자로 불렸지만 다른 인상주의자들과는 달리 현실적인 아름다움을 초월하는 이상을 구현하면서 프랑스 전통을 이어가고 있었다.

드가가 7살 연하의 르누아르를 만난 것은 훗날 인상주의로 불리게 될 화가들의 모임에서였다.
1862년 르누아르, 모네, 바지유, 시슬레 등 훗날 인상주의의 주역이 될 화가들은 스위스 태생의 글레이르의 파리 아틀리에에서 수학하면서 친구가 되었으며, 이들은 살롱전을 통해 프랑스 화단에 이름을 날린 마네를 중심으로 카페에서 자주 만났다.
그들은 마네가 1864년 새로 이사한 바티뇰 불바드에 있는 카페 게르부아에서 주로 만났으며 이들은 ‘바티뇰 그룹’ 또는 ‘마네파’로 불리었다.
드가가 2살 연상의 마네를 처음 만난 것은 1863년 루브르 뮤지엄에서였고 마네가 그를 게르부아로 오게 해서 젊은 화가들에게 소개한 것으로 짐작된다.
제1회 인상주의 그룹전이 1874년 4월 15일~5월 15일에 열렸을 때 드가는 10점의 작품을 출품했다.
드가는 모두 8차례에 걸쳐 열린 인상주의 그룹전에 7번이나 참가하여 ‘인상주의자’라는 말을 들었지만 독자적인 양식을 구사했고, 그들과는 달리 풍경화보다는 실내에서 벌어지는 장면을 자연스러운 모습 그대로 묘사하는 그림을 주로 그렸다.
특기할 점은 일본 판화의 영향을 받아 대각선에서 바라본 장면이나 그림 가장자리에 인물이 잘리기도 하는 낯선 구도를 사용했다.
드가의 작품은 자발적인 장면과 분위기 그리고 솔직한 행위가 스냅사진처럼 포착된 것으로 보이지만 이는 외관적인 관점이고 그가 매우 신중한 태도로 구성한 결과이다.
몰래 들여다보는 장면처럼 그리는 것이 바로 그가 의도적으로 기획한 구성인 것이다.

드가는 파스텔로 그리기를 선호했으며 1880년대 시력이 나빠진 후에는 빠른 속도로 그림을 완성시킬 수 있는 파스텔화를 더욱 선호하게 되었다.
시력이 나빠지자 유화를 그리기 어려워져 밀랍으로 모델링을 하기 시작했으며 1890년대에 시력이 더욱 나빠지자 조각에 전념했다.
그가 회화에서 선호했던 모티프는 조각의 모티프이기도 했는데, 달리는 말, 목욕하거나 몸을 치장하는 누드 여인, 발레리나 등이었다.
이런 조각들은 그가 타계한 후에야 청동으로 주조되었다.
말년의 거의 20년 동안 드가는 거의 실명상태였으며 이 시기에 은둔생활을 했다.
피사로는 드가를 가리켜서 “우리 시대의 가장 위대한 예술가”라고 칭찬했고 르누아르는 그가 “로댕보다 더 뛰어난 조각가”라고 극찬했다.

가난한 재단사의 아들로 태어난 르누아르는 파리 시가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몽마르트르에 거주하면서 동네 사람들을 그렸는데, 몽마르트르에는 상점 종업원, 식당 종업원, 잡부, 모델, 연예인들이 대거 거주했고 카페가 많아 밤이면 더욱 붐볐다.
르누아르는 귀엽게 생긴 어린이, 꽃, 자연의 경관, 여인의 초상 등을 특유의 따뜻한 느낌을 주며 화사한 색채로 그려 시각적 즐거움을 주는 작품을 제작했고, 경제적으로 매우 쪼들렸지만 1880년경부터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1890년대에 관절염을 앓기 시작하고 1897년 자전거를 타다 팔이 부러져 병이 더욱 악화되었다.
유명해진 후에는 고전적 주제, 특히 여인의 누드와 어린 소녀를 즐겨 그리면서 신화에서 주제를 얻기도 했다.
그는 더욱 현란한 색채를 사용하면서 인체의 형태를 풍만하게 그리고 부드럽고 둥글게 표현했다.
1912년부터는 휠체어에 탈 정도로 몸이 쇠약해졌으며 간병인의 도움으로 자유롭지 못한 손가락 사이에 붓을 끼우고 계속 그림을 그렸다.
마티스는 이런 그의 모습을 보고 감동했으며 자신도 회화를 위해 헌신하기로 결심했다.

르누아르의 아들이며 유명한 영화감독인 장 르누아르는 1962년에 <르누아르, 나의 아버지>를 썼으며 이 책은 그 해 프랑스와 영어로 출간되었다.

<드가의 초상>, 사진, 드가의 동생이 1895~1900년에 찍은 것이다.

드가의 <늘어진 옷을 걸친 서 있는 모습>, 1860~62년
26~28살 때 화가가 되기 위해 공부할 때 그린 드로잉이다.
선으로 정확하게 인체와 의상을 묘사하는 것은 아카데미가 추구한 목적이었으며, 따라서 프랑스 회화의 전통이 되었고, 드가는 앵그르의 제자로부터 이런 훈련을 받았다.
제자를 방문한 앵그르가 드로잉 훈련을 받는 드가를 보고 “젊은이, 선으로 그리게. 선은 회화의 생명일세”라고 격려해준 말을 드가는 친구들에게 자랑하고 자신의 좌우명으로 삼았다.

드가의 <목욕 후>, 1883~84년
드가는 목욕하는 여인의 모습을 많이 그렸는데 마치 몰래카메라를 설치하고 바라본 모습처럼 모델로 하여금 자연스러운 포즈를 취하게 했다.
그는 모델로 하여금 목욕할 때 그리고 목욕 후 몸을 말릴 때 취할 수 있는 모든 다양한 포즈를 취하게 했으므로 그의 작품에서 우리는 당시 프랑스 여인들의 솔직한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이 작품에서 보듯 그는 파스텔로 인체와 방의 내부를 매우 정교하게 묘사했으며 따라서 파스텔화를 고유한 장르로 끌어올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드가의 <댄스교실>, 1874년
이 작품은 댄스교실에서의 한 순간을 포착한 스냅사진처럼 보이지만 매우 사려 깊게 미리 준비한 인물들을 배열한 것이다.
드가는 인물 하나하나를 미리 습작을 통해 준비했다가 합성시키는 방법으로 작품을 제작했는데 오른편의 댄스 교사는 이미 타계한 사람으로 사진에서의 모습을 실제로 그곳에 있는 것처럼 삽입했다.

바지유의 <르누아르의 초상>, 1867년

르누아르의 <알프레드 시슬레와 그의 아내>, 1868년경
르누아르와 함께 수학한 시슬레는 파리에서 영국인 부자 사업가의 아들로 태어나 어렸을 때 영국으로 보내져 언어와 상업을 공부했는데 아버지가 사업가로 만들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업보다는 회화에 더 관심이 많은 시슬레는 곧 파리로 돌아왔고, 글레이르의 아틀리에서 화가로서의 꿈을 키우고 있었다.
르누아르의 말로 ‘유쾌한 사나이’인 그는 여자들에게 꽤 인기가 있었다.
르누아르는 이 작품에서 남편을 놓치지 않으려는 아내를 매달리는 모습으로 묘사했다.

르누아르의 <일광욕하는 사람들>을 위한 습작, 1886~87년
그림을 그리기 위해 그린 드로잉에서 르누아르의 뛰어난 소묘력을 볼 수 있다.
선을 중요시하는 것은 프랑스 회화의 전통으로 드가와 르누아르가 이어받았다.
인체의 가장자리를 흰색으로 칠한 것은 인체를 두드러지게 하기 위한 일반적인 방법이다.
이런 유연하고 아름다운 선은 채색에서 사라지게 되지만 사실적 형상을 묘사하기 위해서는 선행되어야 한다.

르누아르의 <일광욕하는 사람들>, 1918~19년
이 작품은 타계하기 얼마 전에 그린 것으로 화면에 두 여인이 나란히 누워있지만 동일한 여인으로 포즈를 달리 하게 해서 합성한 것이다.
모델은 러시아 여인으로 르누아르의 아들 장과 결혼했다.
관능적인 아름다움을 나타내기 위해 화사한 색을 사용했으며 붓질을 짧게 하면서 여러 색을 섞어 사용하는 방법은 그의 독창적인 양식이 되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장식적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왜곡


왜곡은 다섯 가지 이유에서 행해진다.
첫째, 장식적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이다.

구스타프 클림트의 <다나에>(1907~08)

아르고스의 왕 아크리시우스는 딸 다나에가 낳은 아들, 즉 손자가 자신을 살해할 것이라는 신탁을 알게 되자 딸을 청동 성채에 가두었다.
다나에를 사랑한 제우스는 금빛 소나기의 형상으로 그녀를 찾아 갔으며 다나에는 제우스의 아들 페르세우스를 낳아 길렀다.
아크리시우스 이 사실을 안 것은 4년 후였다.
그는 딸과 손자를 상자에 가두어 바다에 던졌다. 다나에는 아들과 함께 바다를 표류하다 세리포스 섬에 사는 어부 딕티스에 의해 구조되었다.
딕티스의 형인 폴리덱테스는 이 섬의 통치자였다.
폴리덱테스는 다나에를 사랑했지만 그녀는 그의 사랑을 거절했다.
폴리덱테스는 잔치를 열고 세리포의 귀족들을 한자리에 모으면서 말을 한 필씩 갖고 오게 했다.
다나에의 아들 페르세우스는 머리가 뱀인 괴물 고르곤 세 자매의 머리를 베어 말을 사겠다고 공언했다.
폴리덱테스는 페르세우스가 농담한 것인 줄 알았지만 불가능해 보이는 그 일을 집행하게 되었다.

페르세우스의 일에 로마 신화의 머큐리에 해당하는 신들의 사자인 헤르메스와 아테네의 수호신으로 지혜, 예술, 전술의 여신인 아테네가 도와주기로 했다.
헤르메스에게서 둥근 칼을 받은 페르세우스는 고르곤이 있는 곳으로 날아갔다.
고르곤 세 자매 가운데 메두사만은 불멸하지 않는 존재이지만 누구든지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게 되면 그 자리에서 돌이 되었다.
페르세우스는 메두사를 직접 바라보지 않고 방패에 비친 모습을 보았다.
또 다른 신화에 의하면 아테네가 페르세우스의 손을 인도했다고 전해지며 페르세우스는 메두사의 목을 베어 가죽부대에 담았다.
페르세우스가 세리포스로 날아와 고르곤의 머리를 꺼내 보여주자 폴리덱테스와 섬의 귀족들이 돌로 변해버렸다.
페르세우스는 메두사의 머리를 아테네에게 바쳤다.
다나에와 페르세우스는 아르고스로 돌아왔다. 게임에 참가한 페르세우스가 원반을 던지게 되었는데 아크리시우스 왕이 그 원반에 맞아 죽었다.
그리하여 신탁이 이루어졌다.

구스타프 클림트(1862~1918)
1897년 빈 분리파를 창립하여 초대 회장을 역임한 클림트는 아르 누보를 바탕으로 독특한 양식을 발전시켰다.
그러나 그와 같은 양식으로 제작된 그의 작품은 전혀 수용되지 않았으며 1900~03년에 제작한 빈 대학의 벽화들은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키며 거부되었고, 1902년 분리파 봄 전시회에 출품한 베토벤 프리즈 또한 거부당하자 클림트는 점점 고립되어 갔다.
클림트의 작품은 오늘 날 구식으로 보이며, 오스카르 코코슈카나 에곤 쉴레와 같은 오스트리아 젊은 표현주의 화가들에게 영향을 끼쳤다는 점에서만 중요하게 평가되지만, 옅은 회화 공간이 특징인 그의 장식적 인물화와 1903년 이후에 제작한 모자이크 같은 풍경화는 미술사에 길이 남을 가치를 지니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클림트의 작품을 통해서 예술가의 자유와 학문의 전당 대학 사이의 갈등이 어떻게 발생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예술가의 자유가 대학이 추구하는 학문보다 존중되어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예술가에게 무한한 자유를 허락해서는 안 되는 것인지 오늘 날에도 중요한 문제가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브뤼케 그룹


브뤼케Die Brucke 그룹은 젊은 독일 건축학도 에른스트 루트비히 키르히너, 에리히 헤켈, 카를 슈미트-로틀루프, 프리츠 블라일에 의해 1905년 드레스덴에서 결성되었다.
키르히너의 <브뤼케 그룹 연감 Chronik der Kunstlergemeinschaft Brucke>에는 키르히너가 블라일과 헤켈을 만난 1903년이 창립 연도로 기록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슈미트-로틀루프가 합류한 1905년에 공식적인 모임이 처음 이루어졌다.
1906년 막스 페히슈타인이 가입하고 1907~08년 에밀 놀데가 참여함으로써 그룹의 규모는 더 커졌다.
그러나 에밀 놀데Emil Nolde(1867~1956)는 1년 동안 그룹에 가담했지만 본질적으로 고독한 기질의 그는 그룹이나 협회에 참여하기를 꺼려했다.

키르히너는 그룹 내에서 처음으로 폴리네시아 미술을 비롯한 여러 원시 미술을 열렬히 찬양한 인물이지만 원시주의 미술품의 영향은 그보다는 그룹의 다른 멤버들의 작품에서 더욱 두드러졌다.
그들은 후기 고딕 양식의 독일 목판화와 드레스덴에 있는 츠빙거 뮤지엄의 민속 자료실에 소장된 목조조각과 같은 윈시 미술의 영향을 받았으며 야수주의의 영향도 어느 정도 받았다.
표현 기법에 있어서는 일화적인 사실주의와 인상주의를 모두 혐오했고, 고갱과 반 고흐에게서 싹튼 표현주의를 뭉크와 호들러의 영향을 받아 독일식으로 창조하려고 했다.
실제로 표현주의라는 명칭을 주로 현대 독일 미술 경향에 작용하게 된 데는 이들의 영향이 컸다.

브뤼케 그룹의 멤버들은 강한 사명감을 가진 청년들로서 당대의 원대한 사회적 열망에 고취되어 있었던 그들은 회화를 수단으로 인류를 위해 보다 나은 미래를 추구해나가려고 했다.
그들은 자신들을 혁명적인 엘리트로 여겼으며 호라티우스의 ‘세속적인 인간에 대한 증오 Odi profanum vulgus’를 신조로 삼아 도전적인 반부르주아적 태도를 취했다.
브뤼케라는 명칭은 슈미트-로틀루프가 채택한 것으로 그룹을 하나로 묶는 유대를 상징한다.
나중에는 이 명칭에 좀더 심오한 의미가 부여되어 자신들의 작품이 미래의 미술로 이어지는 ‘다리’ 역할을 할 수 있게 되기를 열망하는 그들의 신념을 나타냈다.
놀데를 멤버로 초대하는 편지에 슈미트-로틀루프는 적었다.
“모든 혁명적이고 자극적인 요소들을 끌어당기는 것, 이것이 바로 브뤼케라는 명칭에 내포되어 있는 목적이다.”
그러나 미래의 미술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정의는 결코 내려진 적이 없으며 결과적으로 그들의 목적은 계속해서 모호한 상태로 남게 되었다.

1910년경 브뤼케 그룹의 예술가들은 베를린으로 이주했고, 페히슈타인은 그곳에서 놀데와 함께 신분리파Neue Sezession를 결성했다.
이 그룹은 놀데의 <오순절>이 베를린 분리파 전시회에서 거절당하자 그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결성된 것이다.
키르히너, 헤켈, 슈미트-로틀루프도 신분리파에 가담했으며, 거기서 오토 뮐러를 만나 그를 브뤼케 그룹의 마지막 회원으로 가입시켰다.
그러나 그들은 브뤼케 그룹을 독립적이며 완전한 그룹으로 유지시키기 위해 곧바로 신분리파를 탈퇴했고 페히슈타인이 계속 신분리파에 집착하자 그를 브뤼케 그룹에서 축출했다.
드레스덴에서 공부하고 1906년에 브뤼케 그룹의 일원이 된 막스 페히슈타인Max Pechstein(1881~1955)는 1908년에 베를린으로 이주하여 시대에 뒤떨어진 인상주의에 반대하는 현대미술 논쟁에 활발하게 참여하여 신분리파 창설을 주도했다.
1912년에 신분리파를 떠나라는 요구를 페리슈타인이 거부하자 브뤼케 그룹에서 축출 당했다.
그는 프랑스 야수주의, 특히 마티스의 피상적인 특징을 모방하는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브뤼케 그룹은 1912년 블라우에 라이터(청기사) 그룹의 두 번째 전시회에 함께 참여했지만, 키르히너가 <브뤼케 그룹 연감>에서 밝힌 그룹의 목적과 정책이 1913년 논란을 일으켜 해체되었다.

브뤼케 그룹을 결성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에른스트 루트비히 키르히너Ernst Ludwig Kirchner(1880~1938)는 1901~05년 드레스덴 공과대학에서 건축을 공부했으며 그 사이 1903~04년에는 뮌헨에서 회화를 공부했다.
키르히너가 초기 목판화 작품에서 보여준 독일판 아르 누보인 유겐트슈틸Jugendstil의 양식화된 선은 곧 가파른 각진 형태로 바뀌었는데, 이런 특성들은 그가 높이 평가한 독일 후기 고딕의 목판에서 끌어온 것으로 브뤼케 그룹의 양식적 특성이 되었다.
키르히너는 뮌헨에서 열린 전시회에서 본 후기 인상주의자들의 영향을 받았으며, 특히 고갱과 반 고흐의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주로 뭉크의 영향을 받아 단순화된 드로잉과 과감한 대조를 보이는 색채를 사용하면서 야수주의자들의 작품과 유사한 방식을 발전시켰다.
1907~10년까지 ‘야수들의 왕’ 앙리 마티스와 그의 동료들이 1905년에 도달한 양식과 표면적으로는 유사한 회화양식을 발전시켰다.
그러나 키르히너는 야수주의보다 더 충동적이고 직접적인 태도로 주제에 접근했으며, 회화적 가치는 그다지 고려하지 않았다.
그는 야수주의보다 더욱 주제에 몰두했는데, 도시 풍경의 인간적 파편들 속에서 섹슈얼리티의 뉘앙스를 가지고 서커스와 뮤직홀의 생활에서 뽑아낸 감성과, 유쾌함, 슬픔을 물감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키르히너는 1911년 베를린으로 이주했고, 1912년과 1913년에는 독일 표현주의의 가장 극단적이고 가장 성숙된 표현으로 여겨지는 거리풍경 연작을 제작했다.
그는 더 격렬해진 양식으로, 속도와 병적인 우울함과 화려함,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 직전 베를린의 쿠어퓌르스텐담 거리에서 재현되었던 대도시인들의 자기 노출적 에로티시즘을 시각적으로 표현했다.
이 시기에 그는 정신적으로 위기를 맞았으며, 전쟁에 징집된 직후인 1914년 심각한 육체적 정신적 쇠약 상태를 겪었다.
요양소에서 얼마 동안 머문 후 1917년 스위스의 다보스 근처의 산중에서 고독하게 살면서 그림을 그렸고, 독일의 정치적 사건들과 그 자신의 작품에 가해진 비난으로 인해 정신적 불안을 겪었으며, 1938년 자살하기 전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1928년부터 키르히너의 양식은 변화를 겪는데, 직접적으로 자연을 그리던 과거 작품에 비해 더 추상적으로 변했다.
이는 일종의 그림-문자로서 그의 ‘상형 문자적’ 형상들을 이용하여 그린 것으로, 직접적인 재현이 차지하는 부분이 감소되었다.

그는 말했다.
“이 가시 세계의 내적 이미지를 비자연주의적인 형태를 통해 만들어낸 ‘상형 문자’는 시각적 법칙에 따라 형태를 취하게 되고, 그 형태의 경계가 넓어지기도 한다.
이 시각적 법칙은 이제까지의 미술에서는 사용된 적이 없었던 것으로, 예를 들어 반영의 법칙, 간섭과 분극화의 법칙 등이 그것이다.”

이런 생각은 1912년에 칸딘스키에 의해 표명된 이론과 공통점이 있다.
그는 인정하지 않았지만 그의 새로운 방식은 경험의 시각적 표현을 위해 일종의 추상적인 그림문자를 써 넣은 피카소의 실험적 아이디어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1904년 드레스덴 기술전문학교에서 건축을 공부한 에리히 헤켈Erich Heckel(1883~1970)은 다른 그룹의 멤버들과 마찬가지로 화가로서 정식 교육을 받지 않았으며, 그의 재능은 때로 회화보다는 판화에서, 특히 목판화에서 더욱 충분히 드러나는 것으로 여겨졌다.
1906년 그의 회화양식은 독일 표현주의와 반 고흐의 양식에 기초를 두었으며, 풍경화, 누드화, 초상화에 보이는 거칠고 강한 색채의 병치로 유명했다.
그렇지만 헤켈의 작품은 브뤼케 그룹의 다른 멤버들의 작품에 비해 다소 서정적인 편이며 그는 병과 내적 고통을 묘사하는데 특별한 관심을 보였다.
또한 풍경화에서는 대부분의 독일 표현주의의 특징이 아닌 장식적인 특징을 나타내곤 했다.
그는 다른 멤버들과 함께 1911년에 베를린에 정착했고, 그곳에서 파이닝거, 마케, 마르크와 교류하면서 그의 회화의 형태적인 구조가 힘과 짜임새를 갖추었다.
그러나 인간의 이미지는 거칠게 각이져 비틀리고 표정은 고통스러우며, 몸짓은 딱딱하면서도 산만하게 표현되어 한층 비관적이 되었다.
눈에 거슬리는 노란색과 흐린 푸른색을 강렬한 빨간색과 거칠게 대비시킴으로써 이와 같은 분위기를 반영했다.
1914년부터 헤켈은 플랑드르 지방에서 위생병으로 복무했으며, 그곳에서 그에게 영향을 미친 엔소르, 베크만과 만나게 되었다.
풍경화에서 색채는 좀더 어두워졌으며 구성 요소들을 대립시켜 전쟁의 고통을 표현했고, 작품의 음울하고 비극적인 분위기는 더욱 강해졌다.
1920년 이후의 작품은 좀더 보수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본래의 이름이 카를 슈미트인 카를 슈미트-로틀루프Karl Schmidt-Rottluff(1884~1976)는 드레스덴 공과대학에서 건축을 공부했다.
브뤼케 그룹의 멤버들에 비해 그의 양식은 더 활력이 넘치면서도 거칠었다.
이런 특징은 특히 목판화의 투박한 표현방식에서 두드러졌으며, 색조의 변화 없이 대조되는 색채의 평면으로 이루어진 회화에도 반영되었다.
1906년 놀데와 함께 알젠 섬에 머물면서 놀데로부터 ‘기념비적인 인상주의’를 이어받았는데, 이것은 1907년 헤켈과 함께 방문한 당가스터에서 그린 풍경화들에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1911년 베를린으로 이주한 뒤 그의 기념비적인 회화양식은 더욱 강렬해졌다.
이는 흑인 조각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된 것으로 그의 회화는 색조의 변화가 없는 원색들의 강한 대조와 거칠고 단순화된 형태들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후에 슈미트-로틀루프는 원근법과 점진적으로 변화하는 색채를 사용하여 이런 거칠고 평면적인 형태를 수정해나갔는데, 이는 키르히너의 영향 또는 1924년 파리 여행과 1930년 이탈리아 여행의 영향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1896~98년 드레스덴에서 회화를 공부한 오토 뮐러Otto Muller(1874~1930)는 아르놀트 뵈클린Arnold Bocklin(1827~1901)의 영향을 받았으며, 인간과 자연의 합일을 표현하는 회화를 목표로 삼았다.
뮐러는 다작을 하는 화가였지만 1908년 이전에 제작한 대부분의 작품을 나중에 파괴했다.
1908년 베를린으로 이주했고 1910년 베를린 신분리파 가입을 거부당했다.
당시 거부당한 예술가들이 모여 개최한 전시회에서 브뤼케 그룹 화가들을 만나 브뤼케 그룹에 동참했으며, 1911년 키르히너와 함께 보헤미아 지방을 여행했다.
뮐러의 양식은 브뤼케 그룹의 영향으로 더욱 거칠고 딱딱하게 변해갔으며 윤곽선을 강조하게 되었다.
풍경 속의 누드 혹은 순수한 풍경화를 그렸으며 1920년 이후에는 집시도 모티프로 사용했다.
그는 능수능란한 기교를 지녔기 때문에 디스템퍼를 사용해 번들거림이 없는 마무리 효과를 낼 수 있었다.

브뤼케 그룹은 종종 같은 시기 프랑스에서 일어난 야수주의 운동에 상응하는 독일의 미술 운동으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야수주의 화가들과 마찬가지로 브뤼케 그룹 화가들도 모티프를 자연에서 직접 취하고 추상에 반대했다.
그러나 프랑스 화가들이 늘 회화적 의도를 가장 주요시했던 것에 비해 독일 화가들은 주제에 임하는 화가의 강렬한 감정을 표현하는 데 더욱 주력했다.
그들은 이런 태도를 삶의 가장 내밀한 본질로 여겼으며 이를 위해 야수주의 화가들보다 더욱 더 왜곡되고 거친 표현을 추구했다.
독일 표현주의는 본능적이고 자발적이며 주관적인 것에 역점을 두었으며,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라틴 민족의 고전적인 절제 감각은 결여되어 있었다.
결국 브뤼케 그룹의 화가들은 야수주의 화가들에 뒤떨어지는 결과를 낳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