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우의 <워홀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워홀은 영화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워홀은 한두 명의 친구를 대동하고 외출하거나 화랑의 전람회 축하 파티에 참석하기를 좋아했다.
또한 아방가르드와 팝 문화에 관심이 많아 해프닝, 시낭송, 비주류 공연, 춤 발표회, 실험영화 보기를 즐겼다.
그는 팝아트 예술가답게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 자주 갔으며 록뮤직을 특히 좋아했다.
그렇게 분주하게 다니다 보니 영감을 받는 일도 많아 늘 새로운 주제로 작업할 수 있었다.
이 무렵 많은 작품을 제작한 그는 작품의 양이 늘자 렉싱톤 애비뉴에 있는 집이 이제 좁게만 느껴졌다.
벽에는 캔버스들이 잔뜩 기대어 있어 공간은 점점 줄어들었다.
그에게는 이제 커다란 작업실이 필요했다.

1963년 초 워홀은 렉싱톤 근처 이스트 87번가에 있는 월세 150달러짜리 2층 벽돌 건물을 세냈는데 집에서 불과 두 블럭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과거에 소방서였던 이 건물의 내부에는 소방수들이 재빨리 출동하기 위해 설치한 위 아래층을 연결하는 쇠기둥이 있어 쇠기둥에 몸을 감고 미끄러지듯이 아래층으로 내려올 수 있었다.
워홀은 물감, 캔버스, 그리고 실크스크린을 제작하기 위한 도구들을 그곳으로 운반했다.
위층을 작업실로 사용하고 아래층은 가능한 한 넓게 비워두었다가 방문객들에게 둘둘 말아놓은 캔버스를 펼쳐 보여주곤 했다.
작업실에는 전화도 전기도 없었으므로 낮에만 작업해야 했고, 전화가 없으니 작업을 방해할 사람도 없어 이때 워홀은 많은 양의 작품을 제작할 수 있었다.

그해 여름부터 워홀은 영화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지난 한 해 동안 아방가르드 영화에 관심을 가졌던 워홀은 영화배우이자 제작자 잭 스미스를 만나고부터 영화에 대한 관심이 더욱 커졌다.
무비 카메라가 대량생산되었으므로 누구든지 16mm 무비 카메라만 있으면 영화를 제작할 수 있게 되어 영화는 헐리우드에서만 제작한다는 생각이 차츰 사라지기 시작했다.
돈이 넉넉하지 않은 사람은 흑백 필름으로 무성영화를 제작할 수 있었으며 여유가 있는 사람은 컬러 필름에 소리까지도 녹음할 수 있었다.
아마추어 제작자들은 주로 언더그라운드에서 활약하면서 실험적인 영화를 제작했고 에로틱한 주제나 과격한 장면들을 다루기도 했다.

워홀도 언더그라운드 영화제작자였으나 언더그라운드라는 말의 의미를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늘 사람들의 눈에 띄기를 바라는 자신이 왜 언더그라운드 영화제작자로 불리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워홀이 언더그라운드라는 말의 의미를 모른다는 말은 믿기 어렵다.
그는 일찌감치 언더그라운드 예술가들과 자주 어울렸으며 언더그라운드 록그룹과 연계하여 무대를 장식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언더그라운드에서 워홀의 위상은 확고해갔다.
이 시기에 언더그라운드에서 두드러졌던 영화제작자로는 케네스 앵거, 스턴 브라케이지, 그레고리 마코풀로스를 꼽을 수 있다.
그들은 컬러 필름에 동시 녹음되는 영화를 제작했다.

1963년 워홀은 친구의 초대를 받아 코네티컷 주 올드림에서 여름을 보냈다.
윈 챔벌레인의 농가가 있는 그곳에는 일레노 와드가 세낸 별장도 있었다.
주말이면 뉴욕에서 온 친구들이 챔벌레인과 일레노를 방문했는데 그 가운데 영화제작자 잭 스미스도 있었다.
스미스는 언더그라운드에 잘 알려진 아마추어 제작자로 워홀은 그가 만든 60분짜리 영화를 보고 감동한 적이 있었다.
스미스가 올드림에서 영화 〈보편적인 사랑〉을 촬영하는 것을 보고 워홀은 자신도 영화를 제작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스미스의 영화제작 방법은 헐리우드의 일반 영화와 달랐다.
연출 없이 그저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필름에 담았으며 촬영도중에 무슨 일이라도 벌어지면 그러한 장면도 필름에 담았다.
이처럼 그가 우연을 영화의 요소로 사용한 데 워홀은 감동했다. 16mm 볼렉스 무비 카메라를 구입한 워홀이 처음으로 제작한 영화는 3분짜리 뉴스였고 내용은 스미스가 〈보편적인 사랑〉을 촬영하는 장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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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미술에 변화를 일으킨 팝아트


단토는 팝아트를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미술운동으로 본다.
그는 팝아트가 1960년대 초에 부지불식간에 시작되었다고 했는데, 그가 부지불식간이라고 한 것은 추상 표현주의 회화에 나타난 물감 흘리기와 물감 떨어뜨리기에 대한 반발로 일어난 면이 어느 정도 있었기 때문이다.
팝아트가 이런 충동적 동기를 완전히 벗어버리고 본연의 모습을 드러낸 때를 그는 1964년으로 꼽는다.

단토는 미국 미술에 변화를 일으킨 팝아트를 좀더 철학적 방식으로 생각해야 함을 주장한다.
단토의 내러티브 혹은 새로운 패러다임의 제시에 근거하면, 팝아트는 미술의 철학적 진리를 자의식으로 가져옴으로 해서 서양 미술의 위대한 내러티브에 종지부를 찍은 것이다.
팝아트에 대한 이런 고견을 갖고 있던 그가 파리의 유학을 마치고 뉴욕으로 돌아와 1964년 4월 스테이블 화랑에서 앤디 워홀Andy Warhol(1928~87)의 <브릴로 상자 Brillo Box>를 보고 충격을 받은 것은 당연했다.
그 작품을 보고 미국 미술계를 규정하고 있던 논쟁의 구조가 적응력을 상실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뿐만 아니라 호퍼와 그 밖의 주류 사실주의, 추상이나 모더니즘 따위의 이론들과는 전혀 다른 완전히 새로운 이론이 요구된다는 데 충격을 받았다.

당시 구상과 비구상 혹은 사실주의와 추상의 반목이 매우 심화되어 있었다.
호퍼를 비롯한 사실주의 화가들은 추상을 ‘딱딱한 표현 gobbledegood’이라고 부르면서 모마MoMA가 추상을 선호하는 데 대해 심히 반발했다.
그들은 1959~60년 휘트니 연감에 사실주의 계열의 작품이 거의 들어있지 않은 데 대해 경악해했다.
단토는 사실주의와 추상 사이의 구분에 대해 양측이 얼마만큼의 도덕적 에너지를 갖고 있는지 의구심이 들었다.
당시의 상황은 거의 신학적 강도였으며 문명의 다른 단계였더라면 분명 화형감이 될 정도로 반목이 심했음을 지적한다.
사실주의 그림을 그리는 것이 거의 이단으로 보일 정도였음을 말하는 것이다.

당시 미술계에는 그린버그의 영향이 컸으며 사실주의에 대한 추상의 우월주의가 반목을 더욱 심화시켰다.
그린버그는 1939년에 추상을 일종의 역사적 불가피성 혹은 진보 또는 진화의 과정으로 보았다.
논문 <더 새로운 라오콘을 향하여>에서 주장했듯이 그린버그에게 추상은 “역사로부터 나오는 명령”이었다.
1959년에 발표한 논문 <추상미술의 옹호>에서 그린버그는 재현이란 부적합하다며 “티치아노의 회화가 갖고 있는 추상적 형식적 통일성이 그 회화가 묘사하고 있는 것보다 더 중요한 특질이다”라고 주장했다.
단토는 그린버그의 불공평한 특질 부여를 문제 삼았다.
단토는 그린버그가 호퍼를 비롯한 사실주의 회화를 역사적 진화의 낮은 단계로 자리매김하는 데 분통을 터뜨린다.
그린버그의 독선은 그 수위를 넘었는데, 1961년에는 추상마저도 역사적 운명의 분위기를 상실했다고 추상 표현주의의 조각적 분위기를 비판했으며, 추상 표현주의는 1962년 거의 종결되고 말았다.

오늘날 구상과 비구상 혹은 사실주의와 추상의 차이는 없다.
둘 다 양식의 문제이고, 그린버그가 말한 대로 좋고 나쁘고의 차이가 아니며, 역사적 진화와는 무관하다.
단토는 모든 양식을 동등하게 취급한다.
양식은 작품의 질과는 무관한 것이다.
단토가 제7장에서 말하는 ‘지나간 미래’는 호퍼를 비롯한 미국의 전통 미술이 그린버그에 의한 모더니즘론의 등장과 모마를 비롯한 뮤지엄들의 추상 전시회 선호로 인해 지나간 미래가 되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미국 회화의 미래는 모마에 의해 정의된 모더니즘의 초기에 추상이 자리를 차지했던 자리에다 온갖 회화를 죄다 쑤셔놓은 그런 꼴의 미래였다.
추상을 수많은 미술적 가능성들 가운데 하나로 보지 않고 유일한 역사적 진보의 개념으로 본 것은 그린버그의 큰 오류였다.
게다가 조각 및 그 밖의 장르들이 엄연히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미술과 회화를 동의어로 취급한 것은 변명하기 어려운 과오였다.

단토는 이런 미국의 미술계에서 변화의 원인을 제공한 것으로 팝아트를 꼽는다.
마침 그때 단토는 보스턴에서 열린 미국 철학학회에서 논문을 발표하게 되었으며 그는 <미술계 The Art World>란 제목으로 발표했는데, 미술을 다룬 최초의 철학적 노력이었다.
그의 논문은 미술계와 철학계가 서로 깊은 관련을 맺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서로 멀리 떨어져왔는가를 보여준 하나의 사례가 되었다.
단토는 팝아트가 고대의 가르침, 즉 플라톤의 가르침을 뒤집어엎는 방식이었음을 지적했다.
예술을 모방으로 보고 상상할 수 있는 실재의 가장 낮은 등급으로 좌천시킨 플라톤의 사상이 서양 미술의 근간을 이루어왔는데, 이것이 워홀을 비롯한 팝아티스트들에 의해 붕괴되었다는 것이 단토의 주장이었다.

그린버그는 컬러필드Color Field 이후부터 1992년 현재까지를 팝아트를 시작으로 30년 동안의 일련의 미술을 미술사에 있어 퇴행의 시기로 보고 “지난 30년 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데카당스의 시기로 간주하고 절망했다.
그러나 단토는 오히려 지난 30년이 미술사상 예술가들이 가장 자유를 구가한 시기였을 뿐만 아니라 미술이 본연의 자리를 회복한 것으로 보고 매우 희망적임을 지적한다.
좀 더 본질적으로 말하면 미술사의 개념 자체가 붕괴되었으며 제6장에서 언급한 대로 ‘역사의 경계’ 또는 ‘역사의 울타리’가 무너졌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미술사는 유럽을 중심으로 주류와 비주류로 분리되어 있었다.
유럽에서 보면 시베리아나 아프리카의 미술은 ‘역사의 경계’ 또는 ‘역사의 울타리’ 밖에서 이루어진 비주류였던 것이다.
그러나 모든 미술이 동등하게 인정받는 다원주의가 도래하자 경계는 자연히 붕괴되었다.
역사는 자유를 위해서 있는 것이고 모든 사람이 자유를 누리게 되면 역사는 종말을 고할 수밖에 없다는 단토의 주장은 헤겔의 역사철학에서 비롯된 것이다.
헤겔은 한 사람이 자유를 누리고, 소수가 자유를 누리며, 결국에는 모든 사람이 자유를 누리게 될 터인데 그때는 역사의 울타리가 사라질 것이라고 예고했다.
단토의 역사의 종말 혹은 탈역사는 역사 이후를 의미한다. 이는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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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퍼리얼리즘


1960년대 후반 특히 미국과 영국에서 유행한 회화양식으로 사물을 세부까지 섬세하고 비개성적으로 묘사하는 것이 특징인 수퍼리얼리즘Superrealism에는 조각까지 포함된다.
극사실주의, 또는 포토리얼리즘이라 불리기도 하는데, 이런 양식으로 작업하는 예술가 중에는 실제로 사진을 재료로 사용하고 때때로 캔버스에 컬러 슬라이드를 비추면서 작업하는 사람들도 있다.
의도적으로 초점이 맞지 않은 사진과 유사한 효과를 추구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세부까지 정확하게 묘사하며 그 규모는 종종 크게 확장된다.

수퍼리얼리즘의 직접적인 선조는 팝아트이다. 두 사조 모두 소비사회의 진부한 이미지들을 소재로 하고 있으며 수퍼리얼리즘이란 명칭을 만들어낸 맬컴 몰리, 그리고 멜 레이모스 같은 예술가들은 두 분야 모두에 걸쳐 있다.
그러나 수퍼리얼리즘에서는 팝아트에서 볼 수 있는 종류의 유머는 거의 찾아볼 수 없고 차갑고 비개성적인 경향을 띤다.
작품의 소재도 다수의 반사광을 갖는 사물처럼 단지 기술적으로 매력적이라는 이유로 선택되는 경우가 많다.
팝아트와 마찬가지로 수퍼리얼리즘은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에드워드 루시-스미스는 <수퍼리얼리즘>(1979)에서 적었다.
“한마디로 말하면 수퍼리얼리즘은 1960년대 말과 1970년대 초 눈부신 성공을 거둔 유일한 혁신적 양식이었다.
뉴욕의 미술계에 처음 선보이자마자 미술품 수집가들 사이에서 성공을 거두었고, 평론가와 미술 관련 기관들에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은 좀더 나중의 일이었다.”

미국의 선도적인 수퍼리얼리즘 화가는 척 클로스Chuck Close(1940~)이다.
예일 대학을 1964년에 졸업한 척 클로스는 초기에 추상표현주의 그림을 그렸지만 곧 수퍼리얼리즘으로 방향을 전환했으며, 거대한 여권사진처럼 얼굴 정면을 그린 초상화가로 유명하다.
미니애폴리스의 워커 아트센터에 소장되어 있는 거의 3m 높이의 <자화상>(1968)이 그런 예이다.
본래 검정색과 흰색만 사용하여 그렸지만 1970년경에 색채를 도입했다.
클로스는 사진을 격자무늬의 구획으로 분할하고 이를 다시 캔버스에 옮겨 작업했다.
후기의 몇몇 작품에서는 의도적으로 격자무늬를 강조하여 마치 서리로 덮인 창문을 통해 얼굴을 바라보거나 컴퓨터 스캔 화면을 보는 듯한 ‘낮은 선명도’의 이미지를 그렸다.
클로스의 초상화 대부분은 친구를 모델로 한 것이다.
그는 인간의 이미지를 “진부한 인본주의적 관념”을 위한 매체로 보기보다는 하나의 “정보의 근원”으로 보았다.
1988년 척추 혈관의 손상으로 인해 몸이 거의 마비되었지만 붓을 테이프로 팔에 고정하고 계속 그림을 그렸다.

1965~69년 하와이 대학에서 공부하고 1969~70년 산타 바버라에 있는 캘리포니아 대학에서 공부한 돈 에디Don Eddy(1944~)는 1972년부터 뉴욕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초기에는 자동차나 자동차의 광택나는 세부를 집중적으로 그렸지만 1971년 이후에는 주로 상점의 유리창을 묘사했는데, 이런 작품에서 유리창에 반사된 거리의 모습은 판매되는 상품만큼 매우 자세히 묘사되었다.

수퍼리얼리즘의 가장 대표적인 화가 리처드 에스티스Richard Estes(1936~)는 1952~56년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에서 공부하고 1959년 뉴욕에 정착했다.
몇 년 동안 판화를 제작하다가 1966년이 되어서야 전업 화가로 작업하기 시작했다.
1968년 뉴욕의 앨런 스톤 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고 1960년대 말에는 수퍼리얼리즘 분야에서 선도적인 인물로 부상했다.
에스티스는 작품에서 도시의 풍경만을 다뤘다.
초기의 작업에서는 인물에 초점을 맞추었지만 1967년경부터는 건물이 주제가 되었다.
특별한 특징이 없는 전형적인 거리풍경의 단편을 묘사했는데, 유일하게 잘 알려진 건물을 그린 작품으로는 주문을 받아 제작한 솔로몬 R. 구겐하임 뮤지엄을 그린 것이 있다.
에스티스는 한 장면에 대해 여러 장의 사진을 찍은 후 느낌이 맞을 때까지 사진의 조각들을 여러 번 결합하는 장식으로 작업했다.
많은 수퍼리얼리즘 화가들과 달리 그는 에어브러시보다는 전통적인 붓으로 작업했다.
아크릴 물감을 사용하며 명확한 초점을 그려내기 위해 마무리 단계에서는 유화물감을 사용했다.
그는 도시를 볼거리로 제시하면서 밝은 빛 가운데 그려내어 그의 작품에서는 심지어 쓰레기조차도 광택이 난다.
에스티스는 매우 공들인 정교한 스크린프린팅screenprinting 기법을 이용한 판화도 제작했다.
스크린프린팅은 스텐실에 기초한 판화 기법으로 원래는 상업 디자인에 사용되었던 것인데 1960년대 이후 화가들이 독창적인 판화 작업을 위해 애용했다.
이 기법의 기본 원리는 나무틀에 가는 망으로 된 스크린을 팽팽하게 잡아당겨 씌우고, 이것을 종이 위에 올려놓고 스퀴지라고 불리는 고무롤러를 사용하여 물감이 망으로 스며들게 하는 것이다.
보통 이 스크린이 실크로 되어 있어 실크스크린 판화라는 명칭이 생겼는데, 이는 미국에서 주로 사용되는 명칭이며, 스크린이 면이나 나일론 또는 금속으로도 만들어질 수 있게 때문에 보다 포괄적인 명칭이 필요하다.

종교적 상징이나 허영심과 죽음의 이미지를 그린 정물화에서 감정적 효과를 불러일으키는 효과를 노린 오드리 플랙Audrey Flack(1931~)이 있고, 초현실주의적 요소를 사용하거나 형상을 잘라낸 다음 배경에 붙이는 작업을 한 하워드 카노비츠Howard Kanovitz(1929~)가 있다.
수퍼리얼리즘 화가로 불리지만 작품에 상상적 요소를 첨가하는 화가들 중에 잭 빌, 앨프리드 레슬리, 필립 펄스타인 등이 있다.

윌리엄 메리 칼리지와 버지니아 주의 폴리테크닉 인스티튜트 및 시카고 아트 이스티튜트에서 공부한 잭 빌Jack Beal(1931~)은 인디애나 대학과 퍼듀 대학, 위스콘신 대학 및 쿠퍼 유니언에서 잠시 동안 학생들을 가르쳤다.
빌은 1960년대 말 치밀한 구성의 자연주의 화풍으로 돌아간 화가들 중 하나였다.
빌이 그린 매혹적인 누드화는 밝은 색채의 현란한 세부와 알록달록한 가구 부속물에 통합되어 인간적 속성을 상실한 것으로 보인다.

앨프리드 레슬리Alfred Leslie(1927~)는 1956~57년 토니 스미스, 윌리엄 배지오티스 및 뉴욕 미술계에서 두각을 나타낼 예술가들과 함께 뉴욕 대학에서 공부했다.
레슬리는 1950년대 중반부터 드 쿠닝을 모범으로 삼은 제2세대 추상표현주의를 따르는 예술가들에 포함되었다.
1960년대 중반부터는 뉴 리얼리즘의 범주에 속하는 양식으로 전환하여 크기로 관람자를 압도하는 대형 초상화를 전문적으로 그렸다.
현재 휘트니 뮤지엄에 소장되어 있는 자화상 <앨프리드 레슬리>(1966~67)가 그 예인데 가로 세로 2.7m 1.8m에 달한다.

피츠버그 태생으로 뉴욕에 정착한 필립 펄스타인Philip Pearlstein(1924~)은 1960년대 초 추상표현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인간 형상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한 뉴 리얼리즘에 속한다.
뉴 리얼리즘New Realism은 1960년대 초 추상표현주의에 대한 반발로 생겨난 것으로 대중 매체들에서 평범하고 사실적 이미지를 차용하고 대량생산된 일상의 소비상품을 비롯한 실제 사물을 아상블라주로 만들거나 회화 면에 부착시켰던 경향을 말한다.
영어권 지역에서는 누보 레알리슴의 번역어로서 뉴 리얼리즘을 사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용어는 매우 포괄적으로 사용되어 펄스타인의 작품처럼 추상표현주의와 타시즘에 대한 반발로 새로이 부활한 자연주의적 구상과 객관성이라는 새로운 정신이 결합된 경우나, 수퍼리얼리즘으로 더 잘 설명되는 양식도 포함한다.
또한 팝아트의 동의어로 혼동되어 사용되는 경우도 있어서 1964~65년 영국 팝아트 전시회는 ‘뉴 리얼리즘’이란 명칭으로 헤이그, 빈, 베를린을 순회했다.
그러나 1976년 함부르크, 뮌헨, 요크에서 열린 전시회에서는 이 명칭을 사용하지 않고 단순하게 ‘영국의 팝아트’라고 했다.

배리 슈워츠는 <새로운 인본주의 The New Humanism>(1974)에서 펄스타인에 관해 적었다.
“이러한 새로운 구상(수퍼리얼리즘)는 자연 그대로의 장면을 취할 것을 주장한다.
예술가들의 태도는 눈에 띄게 냉정하고 무심하며 중립적이다.
필립 펄스타인 같은 사실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예술은 아무런 판단도 내리지 않으며 시각 이외의 어떠한 인간적인 것과도 관련이 없다고 주장한다.
펄스타인은 암시적인 의미를 모두 배제하고자 인간 주제, 혹은 인간 존재를 세밀한 시지각을 통해 해부학적 대상으로 변화시켰다.
그는 자신에게는 모델이나 모델이 앉아 있는 의자나 전혀 차이가 없다고 말한 바 있다.”

1975년 런던의 김펠 피스 화랑에서 있었던 전시회 카탈로그 서문에 펄스타인은 적었다.
“나는 20세기 회화의 인본주의에 공헌했다.
나는 표현주의 예술가들, 입체주의적 해부자들, 인간을 왜곡시키는 자들에 의해 고통 받고 있던 인간의 형상을 구조해냈기 때문이다.
또 한편 나는 성적 암시를 위해 인간 형상을 손쉽게 이용하는 포르노그래피 제작자들로부터 인간의 모습을 보호했다.
나는 자연의 여러 형태 중 하나로서 존엄성을 부여받은 인간 형상 그 자체를 표현하여 왔다.”

펄스타인은 발이나 이마처럼 신체의 끝부분을 절단하는 방법 이외에는 아무런 기교 없이 그렸다.
따라서 그의 인물화는 캔버스의 한계를 뛰어넘는 듯한 기념비적인 느낌을 준다.

수퍼리얼리즘 조각가로 두에인 핸슨과 존 디 앤드리아가 있다. 미시간 주의 크랜브룩 미술아카데미를 1951년에 졸업한 두에인 핸슨Duane Hanson(1925~96)은 1953~60년 독일에 거주하면서 여러 미술학교에서 강의했고 1965년 마이애미로 이주했다.
1960년대 후반부터 유리섬유로 실제 사람의 형상을 떠서 매우 세밀하게 묘사하고 옷을 입혀 버팀목으로 받친 인물상을 만들고 이것을 극적으로 배열한 거대한 작업으로 관심을 끌었다.
핸슨은 대부분 감정적이거나 격렬한 주제를 택했는데, 주로 베트남 전쟁이나 인종 폭동과 같은 정치적 문제를 다뤘다.
그러나 1970년에 그 자신이 표현주의적이라고 말한 이런 작업을 그만두고 평범한 인물을 주재로 하는 작업에 몰두했다.
쇠약한 사람, 쇼핑에 지친 사람, 그리고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인 <관광객>(1970)처럼 살찌고, 늙고, 지나치게 화려한 의상을 한 관광객 부부를 표현한 작품을 통해 미국의 일상적인 삶이 지니는 울적하고 무미건조한 면모를 날카롭게 지적했다.

핸슨은 말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소재는 오늘날 우리에게 매우 친숙한 미국 중하류 계층의 사람들을 다루는 것이다.
내게 있어서 그들 존재가 지닌 체념, 공허함, 외로움은 이 계층 사람들의 삶의 진정한 현실을 포착해낸 것이다.
따라서 사실주의자인 나는 인간의 형상에는 관심이 없고 ...
대신 마치 비바람에 상한 풍경처럼 시간이 부식시킨 고통을 겪는 얼굴이나 신체에 더욱 관심이 있다.
삶의 이런 면을 묘사하면서 나는 우리 시대의 매우 흥미로운 특징을 말하는 일종의 강력한 사실주의를 구현하고 싶다.”

콜로라도 주 덴버 태생으로 줄곧 덴버에서 활동한 존 디 앤드리아John De Andrea(1941~)는 1961~65년 볼더에 있는 콜로라도 대학에서 공부했고, 1970년 뉴욕의 O. K. 해리스 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이후 그는 수퍼리얼리즘 조각에서 두에인 핸슨 다음가는 2인자로서 명성을 굳혔다.
핸슨의 작품과 마찬가지로 디 앤드리아의 인물 조각은 실물로부터 주조되고 세부까지 완벽한 사실적인 것이지만 그가 주로 다룬 모티프는 헨슨의 모티프와는 다르다.
그는 누드의 인물을 집중적으로 다뤘는데, 그의 모델들은 <휴식을 취하는 모델>(1981)에서와 같이 활기는 없으나 젊고 매력적이다.
그는 말했다.
“나는 늘 어떤 미의 관념을 향해 작업한다.
이런 작업의 결과 아무 소득을 거두지 못한다고 해도 최소한 아름다운 인물을 만들어낼 수는 있다고 생각했다. ...
나는 내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는데 이는 무척 평화로운 세계이다.
적어도 내 조각에는 그렇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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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홀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워홀은 백인 경찰관과 흑인 시위자들의


워홀의 〈붉은 인종폭동〉(그림 90)은 앨라배마 주 버밍햄에서 실제 있었던 평화시위 장면을 재현한 것이다.
백인 경찰관들이 사나운 개를 끌고나와 평화롭게 시위하는 흑인들을 진압하는 장면을 찍은 사진작가 찰스 무어의 사진이 1963년 5월 17일자 《라이프》 잡지에 실렸다.
독일산 셰퍼드가 으르렁거리는 모습은 평화시위와 매우 대조적이다.
워홀은 백인 경찰관과 흑인 시위자들의 대치 장면에 붉은 색을 사용하여 따뜻함과 차가움을 동시에 느낄 수 있도록 했다.

〈원자폭탄〉(그림 106)은 원자폭탄이 버섯 모양으로 피어오르는 장면으로 그림의 버섯구름은 많은 사람들을 한꺼번에 살상할 수 있는 위력을 과시하는 것 같았다.
루wm벨트 대통령 시절 아인슈타인을 비롯한 물리학자들은 대통령의 인가를 받아 맨해튼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비밀리에 원자폭탄을 제조했고, 그 뒤를 이은 트루먼 대통령은 세계대전을 빨리 종식시키기 위해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이 가공할 현대의 첨단무기로 많은 사람들이 무차별 살상되었으며 그들의 후손들도 핵 휴유증으로 신체에 이상이 생겨 고통당하고 있다.
이로 인해 과학이 인류를 살상할 것이라는 우려가 현실로 다가왔고 이러한 우려는 지금까지 우리에게 숙제로 남아 있다.
워홀은 〈원자폭탄〉에서 인류의 자멸을 경고했다.

워홀이 재키 시리즈를 제작하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1963년 11월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당했다.
뉴 프론티어 정책을 폈던 젊은 대통령은 차에 승차한 채 총에 맞아 쓰러졌는데 세계를 경악케 한 이 사건이 당시 부통령 존슨의 무혈 쿠테타라는 설도 있다.
워홀은 이듬해 〈재키의 스무 장면들〉(1964)과 〈재키의 열여섯 장면들〉(1964)을 제작하면서 미망인이 된 재키의 슬픈 모습과 즐거워하는 모습을 병렬하기도 했으며 재키의 한 가지 모습을 재현하기도 했다.
워홀은 “나는 케네디가 대통령으로서 핸섬하고 젊고 또 영리했기 때문에 감동했다.
그가 암살당한 것이 내게 괴로움을 준 것은 아니었다.
나를 괴롭힌 것은 텔레비전과 라디오가 슬픔을 강요하듯이 그의 사망소식을 전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전기의자〉는 관람하는 사람들을 침묵하게 만들었다.
이 작품은 부주의로 인한 사고들이 많지만 사형집행 또한 부주의로 일어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을 시사하는 것 같았다.
붉은 색을 사용한 〈라벤더빛 재난(전기의자)〉(그림 107)은 사람을 살해하는 의자가 두려운 물체임에도 불구하고 환상적인 느낌을 주었다.
이러한 아이러니는 워홀의 작품에 흔히 나타나는 요소이다.
비록 흉악범일지라도 정부가 시민을 살해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은 오늘날 사형제도의 문제이기도 한데, 무고한 사람을 사형시킨 후 뒤늦게 범인을 찾아낸 경우도 있어 사형도 사람의 부주의로 집행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워홀은 사형을 집행하는 데 쓰이는 고압 전류가 흐르는 의자를 마치 자동차 사고 현장처럼 재현했다.

워홀은 실크스크린을 제작한 지 오래되었으므로 제작 기교가 뛰어났으며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도 원하는 대로 제작할 수 있게 되었다.
〈모나리자〉는 익히 알려진 작품이지만 1963년 2월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에서 소개된 후로 더욱 사람들에게 화제의 대상이 되었다.
워홀뿐 아니라 많은 예술가들이 이 아름다운 이탈리아 여인을 보고 싶어 했으며 모나리자의 수수께끼 같은 표정을 직접 보기를 원했다.
워홀은 마를린과 엘비스의 초상화를 제작할 때와 마찬가지로 지나치게 신성시된 모나리자의 이미지를 평범한 여인의 모습으로 격하시켰다.
그러한 점은 30개의 모나리자의 초상화를 반복한 〈서른 개가 하나보다 낫다〉(1963)에서도 발견되었다.
조수 말랑가의 말로는 워홀이 모나리자를 가지고 실컷 놀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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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디 워홀의 <브릴로 상자>

앤디 워홀의 <브릴로 상자>는 훌륭한 목공의 솜씨로 제작되었다.
슈퍼마켓에 있는 가장 대중적인 비누상자를 주문 생산한 것이다.
이 작품은 우리에게 미술작품과 실재 비누상자 사이의 차이를 더 이상 순수하게 시각적인 견지에서는 이해할 수 없다는 점을 극명하게 보여준 사례였다.
시각예술이 시각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점이 드러난 것이다.
이는 또한 미술작품의 의미를 실례를 보여주면서 가르친다는 것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음을 분명히 밝혀준다.
워홀과 Pop artists은 철학자들이 미술에 관해 쓴 글 모두를 거의 무가치한 것으로 만들었거나 아니면 국지적인 중요성만을 갖는 것으로 만들었다.
단토는 팝아트를 통해 비로소 미술이 자기 자신에 대한 진정한 철학적 물음이 과연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었다고 말한다.
물음이란 다름 아닌 미술작품과 미술작품이 아닌 것 사이의 차이를 만드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단토는 <브릴로 상자>를 보고 미술에 관한 철학적 문제가 미술사 내부로부터 해명되었으며 역사가 종말에 도달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단토가 말하는 종말이란 미술이 죽었다거나 화가들이 그림 그리기를 중단했다는 것이 아니라 내러티브적으로 구성된 미술사가 종말을 맞았다는 것으로 이는 같은 시기에 독일인 한스 벨팅이 주장한 바와 일맥상통한다.
벨팅도 미술사의 종말을 주장했다.
여기서 말하는 내러티브적 혹은 이야기적이란 바자리와 그린버그의 역사관 혹은 두 사람이 본 미술사를 말한다.

팝아트란 말은 단토에 앞서 미술 잡지 <네이션 Nation>의 미술비평을 담당했던 로렌스 앨러웨이가 만든 말이다.
단토는 팝아트가 좋은 말이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이미 사용되고 있고, 앨러웨이가 그 말을 사용하게 된 동기를 이해한다.
다만 몇 가지를 첨가하고자 한다.

“고급 미술 속의 팝, 즉 고급 미술로서의 팝과 팝 미술 자체 사이에는 하나의 차이가 있다.
팝의 선구자들을 추적하고자 할 때는 특히 이 차이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마더웰이 자신의 몇몇 콜라주에 골와즈Gauloise 담배갑을 이용했을 때, 혹은 호퍼와 호크니가 팝과는 거리가 먼 그림들에다 광고계로부터 나온 요소들을 사용했을 때, 이런 것이 바로 고급 미술 속의 팝에 해당한다.
대중적인 미술을 진지한 미술로 취급하자는 것이 앨러웨이가 진정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였다.”

1980년대 초의 기이한 현상과 다원주의

예술의 종말이 예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1980년대 초에 갑자기 회화가 성행하는 징조가 나타났다.
줄리앙 슈나벨과 데이브드 살레를 선두로 한 신표현주의Neo-Expressionism이 유행한 것이다.
단토를 이를 “한몫 챙기기”의 현상으로 본다. 추상 표현주의 작품 값이 앙등하자 “돈 벌 기회를 놓친” 사람들 혹은 재산이 될 정도로 급등한 작품을 싼 값으로 살 수 있었을 때 미술시장의 언저리를 기웃거리지 않았던 사람들이 때늦게 작품에 투자하기 시작하자 이를 노린 화가들이 마구 작품을 양산해낸 것이다.
슈나벨과 살레는 많은 돈을 벌었는데, 이는 예술의 종말 이후의 당연한 징조가 아니라 미술품 투자를 노린 지각생 구매자들의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기회주의 화가들의 한탕주의로 보아야 한다.
지속될 내러티브가 없자 자기표현을 한 것이다.

1970년대 후반 파리에서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담론이 활발했으며 미셸 푸코, 자크 데리다, 장 보드리야르, 장 프랑수아 료타르, 자크 라캉, 그리고 엘렌 식수와 루스 이리가래 같은 프랑스 페미니스트들의 텍스트가 영어로 번역되어 미국에 널리 보급되었다.
료타르에 의하면 거대 내러티브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포스트모더니즘의 주제로 본다.
해체론의 정신은 내러티브를 진리나 허위의 견지에서가 아니라 권력과 억압의 견제에서 바라본다.
어떤 이론이 받아들여진다면 과연 누가 이득을 보게 되며, 그 이론에 의해 억압받는 사람은 누구인가 하는 것이 제기되는 표준적인 물음이 되게 됨에 따라 이런 물음이 모더니즘 자체에까지 확대되어 적용되었다.
단토는 해체론에 타당성은 있지만 문제의 핵심이 되는 컨템퍼러리 미술사의 심층구조에는 육박하지 못하는 것으로 본다.
그가 말하는 심층구조란 다원주의를 말한다.
다원주의는 매체들의 열린 연접성에 의거해야만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면서 단토는 이 열린 연접성이 한때 예술적 동기들의 연접성에 상응했으며, 또한 바자리와 그린버그의 내러티브에 의해 예증되는 종류의 진보 발전적 내러티브의 가능성을 봉쇄했음을 지적한다. 단토는 말한다.

“이제 발전을 끌고 갈 선호되는 운반체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데, 내가 보기에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은 회화가 갈 수 있는 데까지 가버렸으며 미술의 철학적 본성이 마침내 이해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예술가들이 해방되어 그들 마음대로 다양한 길을 걸어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예술활동의 전 영역에 걸쳐 나타난 주목할 만한 연접성이 단토로 하여금 미술사의 종말을 감지하게 했다.
연접성이란 퍼포먼스와 설치, 사진, 대지미술, 공항작품, 섬유작품, 온갖 띠무늬와 질서의 개념적 구조물 등이 회화의 동료가 된 것을 의미한다.
탈역사적 미술에는 엄청난 메뉴가 있고 예술가들 자신들은 원하는 대로 이런 많은 선택을 골라내는 데 방해받지 않는다.
이런 호의적이고 신축성 있는 연접성 속에는 회화를 위한 추상화와 모노크롬 회화의 여지도 있다.
모더니즘으로부터 해방된 회화는 현재 많은 기능을 수행하고 있으며 수많은 양식들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단토가 말하는 수많은 양식들 속으로 들어간다는 말은 양식 자체가 작품의 질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양식은 동등한 가치를 지니며 단지 수단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과거에는 양식이 질적 가치 혹은 유일한 지고의 가치로 인식되었지만 오늘날에는 단순히 수단 그 이상이 아니다.
20세기를 선언문의 시대라고도 하는데 많은 선언문이 쏟아졌고 각 선언문은 자신들의 양식이 우월함을 주장했다.
그린버그는 컬러필드를 미술사의 필연적인 귀결로서 미술사의 과정으로 인식했지만 오늘날 컬러필드는 단순히 하나의 가능성으로 누구든지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것에 불과하다.
오늘날 화가는 바로크 양식으로 혹은 인상주의 양식으로 작품을 제작할 수 있으며 그런 것에 싫증이 나면 표현주의 양식으로 바꿀 수 있다.

1963년 한 인터뷰에서 워홀은 이런 놀라운 예견을 피력했다.
“어떻게 하나의 양식이 다른 것보다 더 낫다고 말할 수 있는가?
당신은 다음 주면 추상표현주의자나 팝아티스트, 아니면 사실주의자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것도 무엇인가를 포기했다는 느낌을 받지 않으면서도 말이다.”

이는 선언문에 의해 추동되는 예술을 겨냥한 반응이라고 할 수 있다.
20세기는 선언문의 시대였으며 각 선언문은 자신들의 양식이 올바른 양식이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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