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우의 <워홀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워홀은 영화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워홀은 한두 명의 친구를 대동하고 외출하거나 화랑의 전람회 축하 파티에 참석하기를 좋아했다.
또한 아방가르드와 팝 문화에 관심이 많아 해프닝, 시낭송, 비주류 공연, 춤 발표회, 실험영화 보기를 즐겼다.
그는 팝아트 예술가답게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 자주 갔으며 록뮤직을 특히 좋아했다.
그렇게 분주하게 다니다 보니 영감을 받는 일도 많아 늘 새로운 주제로 작업할 수 있었다.
이 무렵 많은 작품을 제작한 그는 작품의 양이 늘자 렉싱톤 애비뉴에 있는 집이 이제 좁게만 느껴졌다.
벽에는 캔버스들이 잔뜩 기대어 있어 공간은 점점 줄어들었다.
그에게는 이제 커다란 작업실이 필요했다.

1963년 초 워홀은 렉싱톤 근처 이스트 87번가에 있는 월세 150달러짜리 2층 벽돌 건물을 세냈는데 집에서 불과 두 블럭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과거에 소방서였던 이 건물의 내부에는 소방수들이 재빨리 출동하기 위해 설치한 위 아래층을 연결하는 쇠기둥이 있어 쇠기둥에 몸을 감고 미끄러지듯이 아래층으로 내려올 수 있었다.
워홀은 물감, 캔버스, 그리고 실크스크린을 제작하기 위한 도구들을 그곳으로 운반했다.
위층을 작업실로 사용하고 아래층은 가능한 한 넓게 비워두었다가 방문객들에게 둘둘 말아놓은 캔버스를 펼쳐 보여주곤 했다.
작업실에는 전화도 전기도 없었으므로 낮에만 작업해야 했고, 전화가 없으니 작업을 방해할 사람도 없어 이때 워홀은 많은 양의 작품을 제작할 수 있었다.

그해 여름부터 워홀은 영화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지난 한 해 동안 아방가르드 영화에 관심을 가졌던 워홀은 영화배우이자 제작자 잭 스미스를 만나고부터 영화에 대한 관심이 더욱 커졌다.
무비 카메라가 대량생산되었으므로 누구든지 16mm 무비 카메라만 있으면 영화를 제작할 수 있게 되어 영화는 헐리우드에서만 제작한다는 생각이 차츰 사라지기 시작했다.
돈이 넉넉하지 않은 사람은 흑백 필름으로 무성영화를 제작할 수 있었으며 여유가 있는 사람은 컬러 필름에 소리까지도 녹음할 수 있었다.
아마추어 제작자들은 주로 언더그라운드에서 활약하면서 실험적인 영화를 제작했고 에로틱한 주제나 과격한 장면들을 다루기도 했다.

워홀도 언더그라운드 영화제작자였으나 언더그라운드라는 말의 의미를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늘 사람들의 눈에 띄기를 바라는 자신이 왜 언더그라운드 영화제작자로 불리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워홀이 언더그라운드라는 말의 의미를 모른다는 말은 믿기 어렵다.
그는 일찌감치 언더그라운드 예술가들과 자주 어울렸으며 언더그라운드 록그룹과 연계하여 무대를 장식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언더그라운드에서 워홀의 위상은 확고해갔다.
이 시기에 언더그라운드에서 두드러졌던 영화제작자로는 케네스 앵거, 스턴 브라케이지, 그레고리 마코풀로스를 꼽을 수 있다.
그들은 컬러 필름에 동시 녹음되는 영화를 제작했다.

1963년 워홀은 친구의 초대를 받아 코네티컷 주 올드림에서 여름을 보냈다.
윈 챔벌레인의 농가가 있는 그곳에는 일레노 와드가 세낸 별장도 있었다.
주말이면 뉴욕에서 온 친구들이 챔벌레인과 일레노를 방문했는데 그 가운데 영화제작자 잭 스미스도 있었다.
스미스는 언더그라운드에 잘 알려진 아마추어 제작자로 워홀은 그가 만든 60분짜리 영화를 보고 감동한 적이 있었다.
스미스가 올드림에서 영화 〈보편적인 사랑〉을 촬영하는 것을 보고 워홀은 자신도 영화를 제작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스미스의 영화제작 방법은 헐리우드의 일반 영화와 달랐다.
연출 없이 그저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필름에 담았으며 촬영도중에 무슨 일이라도 벌어지면 그러한 장면도 필름에 담았다.
이처럼 그가 우연을 영화의 요소로 사용한 데 워홀은 감동했다. 16mm 볼렉스 무비 카메라를 구입한 워홀이 처음으로 제작한 영화는 3분짜리 뉴스였고 내용은 스미스가 〈보편적인 사랑〉을 촬영하는 장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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