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미니멀리즘과 프로세스 아트


포스트미니멀리즘Post-Minimalism
1960년대 성행하던 미니멀리즘의 뒤를 이어 나타난 경향을 지칭한 명칭으로 미국의 평론가 로버트 핑커스 위튼Robert Pincus Witten(1935~)이 1971년 11월호 <아트 포럼>에 기고한 글 '에바 헤세: 숭고함으로의 포스트미니멀리즘'에서 이 용어가 처음 등장했다.
이 용어는 미니멀리즘의 가치에 대한 반동을 함축하지만 '반미니멀리즘'이라는 용어보다는 중립적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 용어가 광범위한 의미로 사용되다 보니 1980년대 후반까지 대지미술, 퍼포먼스 아트, 프로세스 아트, 비디오 아트 등과 같은 현상들 모두 다뤘다.
이러한 현상들이 포스트미니멀리즘이란 말로 한 데 묶어지게 된 점은 미술계를 장악해 온 상업주의, 미니멀리즘의 두드러진 물질적 특성들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이었다.
예술이 상업화된 데 대한 반성으로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이 추구했던 도덕성을 회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이해할 수 있다.
반미니멀리스트들은 콜렉터들의 수집품이 되는 오브제를 가능한한 만들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핑커스 위튼은 다양한 미술 경향의 특징을 나타내기 위해 맥시멀리즘Maximalism이란 새로운 용어를 창안해 사용하기도 했는데, 이 용어는 막연히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유사어로 사용되었다.

프로세스 아트Process art
1960년대 후반과 70년대 초 작품의 형식적 측면이 아닌 창조와 관련된 과정 그리고 뒤따라 일어나는 변화와 쇠퇴의 과정을 강조한 경향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이같은 일시성에 대한 강조는 미니멀 아트의 비개성성, 형식주의, 상업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일어난 포스트미니멀리즘적인 측면을 보인다.
프로세스 아트 예술가들은 재료를 선택할 때 소멸을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삼고 시간의 경과를 주용 방법으로 삼는다.
그들의 행위는 얼음, 풀, 흙, 펠트, 눈, 톱밥, 기름, 물감, 심지어 콘플레이크와 같은 물질을 작품의 재료로 선택하며 이런 재료를 뿌리거나, 쌓고, 바르는 등 임의적이고 구조가 없는 방법으로 한 장소에 놓고 작품을 완성시킨다.
나머지는 중력, 온도, 공기 등과 같은 자연의 힘과 시간에 맡긴다.
프로세스 아트의 예로 뉴욕 레오 카스텔리 화랑에서 벽 아랫쪽에 녹은 납을 뿌리는 리처드 세라의 <뿌리기>(1968), 수증기 구름으로 만들어진 로버트 모리스의 <무제>(1967~73) 등이 있다.
어떤 프로세스 아트 작품은 좀더 영속적인 수명을 가지지만 고정된 형태를 취하지 않는 부드러운 물질로 만들어지는 조각을 여기에 포함시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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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홀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미국 취향의 데이비드 호크니


영국에도 일찍부터 상업미술로부터 영감을 받아 그림을 그린 예술가들이 있었는데 그들 가운데 데이비드 호크니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그 밖에도 피터 블레이크, 알렌 존스, 패트릭 콜필드, 런던에서 활약한 미국사람 로널드 키타이가 있다.
동성애자 호크니는 자신은 예술가가 아니라고 했지만 화가로 할 짓은 다 한 예술가였다.
1959년 런던으로 가서 로얄 아카데미에 입학한 호크니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내가 로얄 아카데미에서 막 공부하기 시작할 때 학생들은 두 그룹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한 그룹은 전통적인 그룹으로 미술학교 학생들 대부분이 그러했듯이 정물화와 사람들의 모습을 주로 그렸고 형태를 사용한 회화적 구성을 시도하기도 했다.
그리고 진보적인 사고를 가진 다른 그룹의 학생들은 추상표현주의 회화를 추구했다.

호크니는 같이 로얄 아카데미에 재학하던 유태인 로널드 키타이와 함께 실험적인 회화에 관해 의논했다.
키타이는 시를 무척 좋아했고 화가로 성공한 후에도 드로잉에 집념을 보이며 르네상스 대가들의 잃어버린 드로잉을 부활시키려고 노력한 예술가다.
호크니는 키타이를 무척 따랐으며 키타이로부터 그림에 글자를 써넣는 방법을 배워 자신의 그림에 응용했다.

추상을 시도해본 호크니는 별로 만족할 만하지 못해 실망했지만 자신의 고유한 회화방법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사람의 모습을 그리는 것은 시대에 뒤떨어진 행위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회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주제인 인간의 모습을 주로 그리면서 장 뒤뷔페로부터 영향을 받아 거칠고 초보적인 회화방법을 구사했다.
호크니는 사람을 힘 있게 그리는 프란시스 베이컨의 회화방법에 매료되기도 했다.
〈3월 24일 이른 시간에 춘 차차차〉(그림 130)에는 베이컨의 영향이 많이 나타났다.
동시에 추상도 사용했는데 그의 추상은 잭슨 폴록과 알렌 데이비드, 입체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1961년 1월 참여한 젊은 예술가들을 위한 전람회는 영국에 팝 아트를 고지한 전람회로 호크니가 팝 아트의 선두주자들 가운데 한 사람임을 보여주었다.
〈환상주의 스타일로 그린 차 그림〉(그림 128)은 그가 팝 아트와 연계되어 있음을 알리는 계기가 된 작품으로 광고 포스터와 어린아이의 드로잉과 관련이 있다.

1961년 뉴욕을 방문한 호크니는 자유로운 미국사회로부터 자극을 받아 머리카락을 하얗게 표백하면서 새로운 이미지를 보여주었는데, 이는 월트 휘트먼과 카바피의 시를 읽고 영감을 받은 까닭이기도 하다.
시인 휘트먼을 좋아해 그를 주제로 동판화 〈나와 나의 영웅들〉을 제작하기도 했다.
동판화를 여러 점 제작한 호크니는 24세에 동판화로 기네스(Guinness) 상을 수상했다.

영국으로 돌아와서는 호가스의 〈레이크의 진전〉의 현대판 그림을 연속해서 그렸는데 미국에 체류할 때의 경험이 그림에 나타났다(그림 132).
1962년 〈첫 결혼〉(그림 131)을 그리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모호한 분위기 속에 두 사람을 삽입시켰다.
두 사람은 하얀 모래와 야자수가 있는 섬의 사막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나는 배경을 일부러 흐리게 했다.
두 사람이 신랑 신부처럼 보였으므로 제목을 〈첫 결혼〉이라고 붙였다.

1963년부터 77년까지는 오일보다 아크릴을 주로 사용했는데 아크릴은 냄새가 나지 않을 뿐 아니라 금세 말라 사용하기 수월했기 때문이다.
1960년대 중반부터는 드로잉 대신에 사진을 이용하여 그림을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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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

 
자화상의 효시로 알베르티(1404-72)가 그린 것을 꼽는다.
<미술가 열전>의 저자 바자리에 의하면 플로렌스의 팔라 루첼라이 가의 저택에 그의 자화상이 있었다고 한는데 이것은 현존하지 않고 그의 옆모습을 청동으로 부조한 고대 메달 형식의 부조상은 현존한다.
현존하는 또 다른 자화상으로 1450년경에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장 푸케(1420년경-77/81)의 것이 있다.
두 사람에 의해서 자화상이 하나의 장르로서의 가능성이 점쳐졌다.
하지만 자아의식이 명료하게 표현된 자화상은 뉘른베르크 출신의 독일인 알브레히트 뒤러(1471-1528)가 그린 것이다.
그를 가리켜서 자화상의 아버지라 일컫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이다.
뒤러는 13살 때 자화상을 그려 더욱 유명하다.
그가 1484년에 그린 자화상은 독일 최초의 자화상이자 최연소자의 것이란 점이 특기할 만하다.
그는 데생 오른쪽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이것은 1484년 내가 소년일 때 나의 모습을 거울에 비춰 그린 것이다.
알브레히트 뒤러"

뒤러의 자화상에 나타난 자기 과시적 표현을 통해 우리는 최초의 자화상이 자기 자신에 대한 자긍심 내지는 자부심에서 비롯되었다고 추론할 수 있으며 이런 성격은 후세에 나타난 많은 자화상에서도 발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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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화

 
초상을 영어와 프랑스어로는 Portrait 내지는 Portraiture라 하고,
독일어로는 Blidnis 내지는 Portrat라고 하는데,
Bildnis를 제외하고 모두 라틴어 Protraho에서 유래했으며 '끌어내다' '노출시키다'라는 뜻이다.
상상의 인물 묘사는 예외이지만 사람의 모습을 묘사할 경우 그 인물과 닮은 점, 즉 초사성이 요구된다.
인물의 독자성과 개성을 표현하는 것이 초상화의 목적이라 할 수 있으므로 이목구비와 신체의 특징과 더불어 표정이나 제스처가 개성을 나타내는 요소로 사용된다.

초상화에서는 묘사대상인 인물에 얼마만큼 충실해야 하는가가 과제이다.
인물의 결점도 묘사되어야 하는지, 아니면 다소 수정을 가해 이상화해야 하는지가 문제이다.
1920년에 신설된 함부르크 대학에서 미술사를 강의한 파노프스키는 초사성과 이상화의 양극 사이에서 화가가 균형을 잃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작품의 형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제와 의미가 중요함을 역설한 것이다.

초상을 전문으로 그린 초상화가가 출현한 것은 16세기이며 한스 홀바인 2세(1497/98-1543), 이탈리아의 모로니(1525년경-1578), 네덜란드의 모르(1517/21-1576/77), 스페인의 산체스 코엘로(1531/32-1588) 등이 있다.
이들 대부분은 궁정에 살면서 궁정초상화를 발전시켰다.
17세기에 초상화를 세련되게 더욱 진전시킨 화가들로는 반 다이크(1599-1641)와 벨라스케스(1599-1660)를 꼽을 수 있다.
초상화의 여러 가지 기본형식은 르네상스로부터 비롯되었는데 다 빈치(1452-1519), 라파엘로(1483-1520), 티치아노(1488/90-1576)가 여러 종류의 초상을 그렸다.
뒤러(1471-1528)가 1500년에 그린 <자화상>은 위의 계열에 속한다.
이는 화가가 자기 자신을 의식했다는 증거이다.
정신성을 강하게 표현한 많은 자화상을 남긴 사람으로 17세기의 대가 렘브란트(1606-1669)를 꼽을 수 있다.
프랑스 혁명 이후에는 엄격한 인물묘사로 유명한 고야(1746-1828), 빼어난 데생력으로 초상을 그린 앵그르(1780-1867), 광인의 초상을 그려 유명한 제리코(1791-1824)가 있다.
이후 카메라의 발명으로 초상화의 위상은 크게 달라졌다.
사진이 초상화를 대신하게 되자 인상 통찰을 심화시킨 표현주의 초상화가 두드러졌는데 뭉크, 클림트, 쉴레의 초상화가 대표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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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홀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팝 아트의 고전 리처드 해밀턴


리처드 해밀턴은 ‘독립 그룹’ 창설 멤버이다.
그가 사용한 재료와 내용에는 미국문화에 관한 요소들이 많아 사람들은 그가 미국사람인 줄 알 정도였다.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미국은 서양에서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으로 맏형노릇을 했다.

1956년 런던 화이트 채플(White Chapel)에서 가진 ‘이것이 내일이다 This is Tomorrow’라는 그룹전은 반응이 아주 좋았다.
해밀턴은 작은 콜라주 작품을 출품했는데 팝아트의 특징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작품이다.
이제 고전이 된 그 작품은 제목부터가 팝 아트적인데 〈도대체 무엇이 오늘날의 가정을 그토록 다르고 두드러지게 하는가?〉(그림 127)라는 긴 제목이다.
이 작품에서 해밀턴은 현대인들이 거주하는 아파트의 내부를 소개하면서 오만한 여인의 누드와 활력을 과시하는 남자의 누드를 함께 보여주었고, 아파트에 널려 있는 근래의 대량생산품들, 즉 TV, 축음기, 만화 포스터, 포드사 로고, 전기청소기 광고문, 햄 통조림 등으로 현대인들의 생활모습을 그대로 나타냈다.
아파트 창밖으로 보이는 극장 간판에는 인기 있는 영화배우이자 재즈 가수 알 졸손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1956년에 가진 작은 규모의 개인전에서 대중적인 이미지들을 다룬 작품이 소개되었다.
해밀턴의 주요한 개인전은 1964년에야 런던의 하노버(Hanover) 화랑에서 열려 그때부터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그 후 카셀, 뉴욕, 밀라노, 함부르크, 베를린에서 개인전이 열려 팝아트의 대명사로 세계전역에 알려졌다.

〈나는 눈오는 크리스마스를 꿈꾼다〉(1968)는 영화의 한 장면을 재현하면서 사진의 네거티브를 포지티브로 바꾸어 사용한 것이다.
그림의 주제인 백인 남자가수의 얼굴이 그의 기교에 의해서 흑인의 얼굴로 달라졌다.
그는 새로운 예술의 바람직한 내용으로 “대중성, 일시적인 것, 소비성, 위트, 성적 호감, 비밀장치, 매혹”이라고 말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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