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우의 <폴록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폴록, “음, 안 될 게 뭐가 있겠소”

 

1950년 6월 어느 날 사진작가 루돌프 벅카트(Rudolf Burckhardt)와 화가이며 평론가인 로버트 굿나우 두 사람이 스프링스로 폴록을 방문했다.
『아트 뉴스』 잡지가 폴록에 관한 기사를 준비하면서 두 사람을 폴록에게 보냈던 것이다.
폴록은 전화로 그들에게 새 그림을 그리는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보여주겠다고 약속했었는데 그곳에 당도한 두 사람은 폴록이 약속을 지키지 않을 것을 곧 알아챌 수 있었다.

그때 폴록은 457×274㎝ 크기의 벽화를 막 완성했는데, 이것은 그가 6년 전에 페기를 위해 그렸던 것에 이은 두 번째 벽화였다.
그는 나중에 제목을 라고 붙였다.
폴록은 벅카트에게 그림을 그리는 것처럼 제스처를 취할 테니 사진을 찍도록 하라고 말했다.
폴록은 마른 붓을 들고 이미 완성되어 있는 그림의 주위를 돌면서 물감을 뿌리는 시늉을 했는데 그만 붓에 남아 있던 물감이 그림에 떨어지고 말았다.
나중에 폴록은 그 그림이 완성되었는지 미처 모르고 있었는데 물감이 더 칠해짐으로써 완성되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 그림은 폴록의 개인적인 정신세계를 재현한 듯했으며 미국미술을 거미줄로 쳐놓은 것 같기도 했다.
그는 30년대에 “선이 모든 것의 근원이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이는 프랑스의 위대한 고전주의 화가 앵그르의 미학으로서 새로운 것은 아니었지만 검은 선들을 주로 사용한 이 그림과 앵그르의 그림을 비교하면 회화에서의 선의 사용이 얼마나 달라졌는지를 알 수 있다.

1950년 7월 1일 폴록은 이스트 햄프턴에 있는 길드 홀(Guild Hall)로 갔다.
메인 스트리트에 있는 하얀 벽돌건물에서는 그를 포함한 ‘열 명의 이스트 햄프턴 추상예술가들’을 위한 전람회가 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폴록이 혼자 그곳에 서 있었는데 젊은 사진작가 한 사람이 다가와 자신을 『하퍼스 바자 Harper's Bazaar』 잡지사에 근무하는 한스 나무스라고 소개했다.
독일어 억양을 쓰는 나무스는 폴록의 그림들로부터 감명을 받았다고 말하면서 가까운 시일 내에 폴록의 사진을 찍고 싶다는 의사를 표시했다.
“음, 안 될 게 뭐가 있겠소”라고 폴록이 말했다.

며칠 후 나무스가 전화로 폴록을 방문하겠다고 말하고, 그날 오후 목에 두 대의 카메라를 걸고 나타났다.
폴록은 그에게도 마찬가지로 그림을 처음부터 그리는 장면들을 보여주겠다고 약속했었는데, 막상 그가 나타나자 피곤한 모습으로 그림은 벌써 완성되었으므로 약속을 지킬 수 없어 미안하다고 말했다.
나무스가 폴록의 화실을 직접 보고 싶다고 하자 폴록과 리는 그를 헛간으로 안내했다.

나무스가 화실에 들어서니 아직 물감이 젖어 있는 그림 한 점이 바닥에 놓여 있었다.
그는 카메라를 통해 그림을 자세히 관찰했다. 곁에 있던 폴록도 그와 마찬가지로 그림을 자세히 바라보았다.
그런데 폴록이 갑자기 물감 깡통을 들더니 붓으로 물감들을 그림에 뿌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나무스는 연신 폴록의 모습들을 찍기 시작했고, 한 통을 다 찍은 후에는 두 카메라에 각각 새 필름을 장진했다.
30분 동안 폴록은 그림 그리기에 여념이 없었고 나무스는 찰칵찰칵 사진을 찍었는데 마치 무대 위에서 열연하는 배우를 향해 갈채를 보내는 것 같았다.
리는 말없이 서서 두 사람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잭슨은 마치 그 그림이 완성되지 않았음을 막 알게 된 것처럼 그림을 그렸다”고 나무스가 나중에 말했다.
이 그림은 이라는 제목을 붙였다가 나중에 <가을 리듬 Autumn Rhythm>이라고 고쳐 부른 그림이었다.
이 그림 또한 그가 검정색, 흰색, 그리고 황갈색을 사용하여 선의 리듬을 창조한 작품으로서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고양이가 검은색으로 마구 할퀸 듯이 보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뭉크를 유명하게 해준 '뭉크 스캔들'
 

김광우의 <뭉크, 쉴레, 클림트의 표현주의>(미술문화)에서 

 

앞서 언급한 대로 노르웨이는 문화적으로 변방이었습니다.
우리가 아는 노르웨이 화가는 뭉크 한 사람이고 작가로는 당대 활약했던 입센 한 사람뿐이지 않습니까?

뭉크는 29살 때 베를린에서 개인전을 여는 행운을 갖게 됩니다.
베를린의 보수적인 그룹 ‘예술가 연합’의 디렉터로 있던 노르웨인 사람 노만이 그를 베를린으로 초대한 것입니다.
뭉크가 베를린에서 55점이나 소개한 것으로 봐도 그가 이 개인전에 얼마나 큰 기대를 걸고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베를린 대부분의 언론이 뭉크의 그림을 비난했습니다.

비난은 예술가 연합 내에서 먼저 일어났는데, 연합의 총재이며 아카데미 부속 미술학교 교장으로 있던 궁정화가 폰 베르나는 전시장을 휙 둘러보고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이런 오물을 당장 철거하라”고 호통을 쳤습니다.
어느 비평가는 “습작이라고도 말할 수 없는 아주 졸작들이다”라고 혹평했습니다.
이는 훗날 ‘뭉크 스캔들’로 불리어졌습니다.
그러나 이 스캔들로 뭉크는 일약 유명한 화가가 될 수 있었습니다.

개인전이 열린 지 일주일만에 수백 명이 참석한 가운데 회원총회가 열리고 개인전을 계속 열게 할 것인가에 대한 찬반을 표결에 붙였습니다.
개인전을 폐쇄해야 한다는 찬성표가 120표 반대가 105표가 나와 전시는 8일만에 중단되었습니다.
‘뭉크 스캔들’은 예술가 연합을 분열시키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예술가 연합을 탈퇴한 이들은 막스 리베르만을 중심으로 새로운 연합을 형성했는데, 이것이 ‘베를린 분리파’입니다.
연합이 둘로 갈라진 것은 뭉크의 승리라기보다는 독일에서의 인상주의의 승리를 의미하는데, 노화가들이 파리에서 불어닥친 새로운 경향인 인상주의에 거세게 반발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뭉크는 젊은 화가들에게 새로운 경향에 대해 보다 적극적이어야 한다는 교훈을 심어주었습니다.

뭉크는 딜러 슐테의 호의로 쾰른과 뒤셀도르프에서 순회전을 가졌으며 1892년 12월 다시 베를린으로 돌아왔고 베를린에서 여러 점을 팔았습니다.
1년 뒤 다시 베를린에서 개인전을 열었을 때는 언론의 반발이 없었습니다.
베를린은 1년만에 엄청난 변화를 수용한 셈이 되었으며 뭉크는 이후 베를린을 제2의 고향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폴록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미니멀리즘의 선구자 애드 라인하트

애드 라인하트(Ad Reinhardt 1913~67)를 여기서는 추상표현주의 예술가의 한 사람으로 소개하지만 만약 필자가 미니멀리즘(Minimalism)에 관해 글을 쓴다면 그의 이름을 수없이 언급해야 할 것이다.
그는 이성주의로 치달아 건조하고 갑갑해지고 말았던 미니멀리즘 회화의 창시자였다.
클리포드 스틸이 추상표현주의 예술가들 중 가장 낭만적인 예술가였다면 라인하트는 그와 반대로 가장 완전주의를 추구한 이성주의 예술가였다.
스틸은 과거의 미술을 “죽음의 축하”라고 말했고, 라인하트는 추상표현주의 예술가들이 “초자연적인 무의미함을 사랑하고, 자연 이면의 그림을 사랑한다”고 말했다.

그는 폴록보다 한 해 늦은 1913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러시아에서 온 유태인이었으며 어머니는 독일에서 온 사람이었다.
자서전에 의하면 그는 1920년에 꽃그림 경연대회에서 수상했고, 1927년에는 연필로 초상화를 그려서 상을 받았다고 한다.
1931년에는 명문 컬럼비아 대학에 입학했는데, 그를 가르쳤던 교수들 중에는 중요한 미술사학자 마이어 샤피로가 있다.
샤피로는 그때 과격한 미술 지망생들을 지도하고 있었다.

1935년 그는 학교 내에서 출판하는 잡지 『제스터 Jester』의 편집자가 되었다.
그가 진지하게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그 다음해인 스물세 살 때부터였다고 한다.
그는 “나는 추상을 위해 태어났다.
그리고 추상은 나를 위해 태어났다”고 말했다.
이차대전이 일어나자 징집되어 일 년 동안 항해했다.

1945년 해군에서 제대한 후 그는 가르치는 일자리를 얻었고, 그때부터 남은 인생을 가르치는 일에 종사했다.
1966년 그는 “내가 가르치는 일을 한 지 거의 20년이 되었다.
나는 결코 좋은 교사가 아니라는 투서를 받아본 적이 없는데 이 점을 자랑스럽게 여긴다”고 말했다.

1955년 비즈니스 잡지 『포춘』은 미술시장에서 가장 투자가치가 있는 예술가 열두 명을 선정하여 보도할 때 거기에 라인하트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 시기에 그는 몬드리안의 신조형주의로부터 영향을 받아 자유롭고 전체적인 구성을 하면서 색들을 단순화시켰다.
그는 처음에는 붉은색을 사용했고, 다음에는 파란색을, 그리고 나중에는 검정색을 주로 사용했다.
그의 그림에서 낭만적인 요소들이 차츰 제거되더니 나중에는 30년 전에 말레비치가 그렸던 신비적인 그림들과 유사해졌다.
그의 제한주의 미학과 과정들은 당시 진보주의 예술가들의 새로운 기류였으며, 특히 그가 추구한 극도로 단순화한 그림들은 60년대에 두드러지게 등장할 미니멀리즘의 예고이기도 했다.

그는 회화의 유일한 목표가 기하학적 추상이라고 생각했다.
이는 몬드리안에게 받은 영향 때문이었다. 40년대에 그는 수평과 수직선을 단순하게 배열하는 구성을 사용하면서 제한주의를 추구했다.
또 본래의 색들을 공간에 대한 구분으로 사용하면서 고의적으로 그리고 감성적으로 그러한 미학을 추구했는데 결과는 ‘색채추상’으로 나타났다.
그는 지성인이었으므로 추상을 가장 논리적인 결론으로 끌어내었는데 아주 건조한 그림이 되고 말았다.
그는 정치, 종교, 야망, 그리고 탐욕스러운 부패한 미술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서 그림을 침묵으로 제한했다고 말했다.
평론가 토마스 헤스는 그를 잘 이해하고 “라인하트는 동기들을 창조한 것처럼 보이지만 형태들에서는 그러하지 않았다”고 기술했다.

라인하트는 1957년에 ‘새 아카데미를 위한 열두 법칙들’이란 제목으로 글을 발표했다.
거기에서 그는 이렇게 적고 있다.

“전통미술은 예술가들에게 무엇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미술 안에서 이성은 무엇이 아닌가를 알게 하고, … 아는 것은 잃어버리는 것이다.

예술가 자신이 자신의 그림에서 덜 주제넘을 때 그의 목표는 더욱 순수해지고 명백해진다.
적은 것(단순함)이 많은 것이고 많은 것은 적은 것이다.”

1960년에 그는 검정색을 사용하여 <추상회화 Abstract Painting>를 그린 후 “예술은 예술이다.
그 외의 것들은 그외의 것들이다”고 말했다.
1966년 유태인 미술관에서 그를 위한 기념 전람회를 열었는데 성공적이었다.
이듬해 그는 쉰네 해의 인생을 마감하고 타계했다. 


댓글(0) 먼댓글(1)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폴록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아돌프 고틀립의 상형문자 회화

아돌프 고틀립(Adolf Gottlieb 1903~74)은 로드코의 이웃 아파트에 살면서 로드코와는 거의 매일 만나다시피 하면서 신화에 관해 토론했다.
두 사람은 신화에서 주제를 구해 그림을 그렸다고 밝힌 적이 있다.
그가 로드코와 우정을 나누기 시작했던 것은 대략 1930년부터였다.
두 사람은 현재의 인간성은 과거와 연속성이 있어야 한다고 믿었고, 이러한 관련성을 그림으로 나타내기 위해서는 우주적 상징을 탐험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 신화들이 적당하다는 공통의견을 갖고 있었다.
두 사람은 원시예술과 고대신화에서 자신들의 출발점을 찾은 후 그러한 요소들을 입체주의와 초현실주의에 접목시키면서 철학, 심리학, 그리고 문학적 요소들로 관련성을 나타냈다.

고틀립은 이 시기에 그의 독특한 상형문자와도 같은 그림들을 진전시켰다.
그의 상형문자들에는 단순한 이미지들과 추상적 상징들이 있었는데 예를 들면 머리, 눈, 손자국, 기하학적 형태, 그리고 선으로 스케치한 것이었다.
더러 그가 사용한 이미지들은 그가 1938년에 아리조나 주 사막에서 발견한 물체들이었으며 그는 그것들을 상자 같은 구성에 병렬시키는 방법을 사용했다.
1967년 그는 자신의 상형문자 회화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캔버스를 직사각 형태들로 나누어서 다양한 이미지와 상징들을 그려 넣는다.
이렇게 하는 데 어떤 논리나 이성적인 디자인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이미지와 상징들을 혼용하여 글자 맞추기처럼 읽을 수는 없다.
그것들에는 서로 직접적인 관련성이 없다.
… 
그것들은 낯선 병렬일 뿐이며 그러한 병렬에서 새로운 독특함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의 말은 새로운 주제를 창조하는 것의 중요함을 웅변하는데 이는 모든 추상표현주의 예술가들이 추구한 점이기도 했다.
이러한 점에 대해 그는 로드코와 뉴먼과 함께 세 사람의 이름으로 새로운 주제들에 대한 창조를 역설하는 글을 써서 『뉴욕 타임즈』에 기고했다.
그들의 글은 1943년 6월에 보도되었는데 현재 유명한 미학이론으로 인정받고 있다.
고틀립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예술가의 역할은 물론 항상 이미지를 만드는 것이다.
다른 시대에는 다른 이미지들을 만드는 것이다”라고 하면서 “내게 있어서 소위 추상은 전혀 추상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우리 시대의 사실주의이다.”

1946년 브루클린에 있는 그의 화실에서 그린 <마술을 위한 표적들 Signs for Magic>(99)을 보자.
이 그림은 종이에 과슈를 사용하여 그린 것인데 여러 개의 이미지들이 상징을 가지고 병렬되어 있고, 하얀 권총이 그려져 있어 그 그림이 근래 사회를 나타내는 그의 상형문자임을 분명히 알 수 있게 한다.
여기에는 아프리카와 미국 인디언들의 회화적 요소들, 입체주의와 초현실주의적 요소들도 동시에 나타난다.
그는 자신의 그림이 “시작도 끝도 없으며 어떤 분명한 점을 시사하지도 않는다”고 말했다.

고틀립은 색채주의와 동력주의 요소들을 혼용하면서 절충한 예술가였다.
그는 색의 커다란 평면을 둥근 형태와 때가 묻은 듯한 자유로운 붓칠로 그려냈다.
또한 그는 빠른 템포로 당황하여 닥치는 대로 그린 듯한 느낌을 주는 그림들을 그렸다.
그가 사용한 배경색은 두드러진 분위기와 어울리는 듯하면서도 대조되어 나타났다.
그는 자신의 그림을 “파열하는 그림들”이라고 명명했다.
그는 로드코와 함께 1943년에 “우리에게 있어서 미술은 모험이며 무지의 땅을 위험을 무릅쓰고 탐험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1950년경에는 동료 예술가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과거 전통을 무지의 소치로 인식하는 가정은 잘못된 것이다.
과거를 부분적으로 부인하면서 그것들에 대해 바르게 알 수 없는 것이 문제가 되고 있다.
우리는 과거와 친숙해야 한다.
우리가 과거와 친숙해지고 그것들로부터 출발하게 된다면 그것은 지식 밖의 일이다.”

그는 1951~53년에 형태들을 더욱 추상화하더니 이후로는 그림을 몇 점밖에 그리지 않았다.
그는 “추상은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뭉크, 쉴레, 클림트의 표현주의>(미술문화) 중에서 
 
뭉크, 실연의 아픔이 나타난 작품


일찍이 겪은 죽음, 내성적인 성격, 사랑에 대한 실연, 정신병력 등 이 모든 것이 그의 작품과 관련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림을 그릴 때는 이런 영향보다는 문학적 영향이 더욱 크게 작용했는데, 예술가가 인간을 해방시킨다는 긍지가 그에게는 있었습니다.

뭉크는 자신의 작품이 모든 인간을 감동시켜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저서 <알파와 오메가>에 삽입한 삽화들은 매우 기괴한데 보통사람들이 생각할 수 없는 이미지들로 시인의 감성으로 그려낼 수 있는 것들이라고 생각됩니다.
29살 때 그린 <여자 가면 아래의 자화상>과 32살 때 그린 <지옥에서, 자화상>을 예로 들면 기괴한 가면과 화염이 캔버스를 크게 차지하고 있지만 매우 시적인 느낌을 줍니다.

다윈이 <종의 기원>(1860)과 <인간의 유전>(1871)을 발표한 후 무신론이 유럽 전역에 빠르게 확산되었습니다.
오슬로에도 무정부주의자들의 그룹이 있었으며 뭉크도 이 그룹에 속했습니다.
이들은 칼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문>(1848)의 영향을 받아 부르주아에 대적했으며 남녀가 동등한 위치에서 사랑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오슬로의 보헤미안으로 알려진 이들은 자유연애를 즐겼는데, 뭉크는 자유연애를 통해 사랑의 쓴 맛을 보았습니다.

뭉크는 자신의 일기에 ‘하이베르크 부인’이라고 적은 해군 군의관의 부인과 불륜의 사랑을 나눴습니다.
그는 그녀에게 첫 키스를 바쳤고 매우 순정적인 사랑을 했지만, 뭉크보다 세 살 많은 하이베르크 부인은 자신의 욕망대로 행동하는 자유분방한 보헤미안 기질의 여인이었습니다.
그녀의 이런 기질이 뭉크를 격분시켰으며 끝없는 의심과 질투로 정신적 고통에 시달리게 했습니다.
1889년 26살 때 파리로 유학을 떠날 때까지 6년 동안 연애하면서 뭉크는 여인의 거짓말과 이중적인 태도를 통해 궁극적으로 여성 전체에 대한 가증스러운 관념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에게 하이베르크 부인은 마돈나이면서 동시에 메두사였던 것입니다.

1900년을 전후해서 뭉크는 툴라 라르센을 통해 여성에 대한 또 다른 체험을 하게 됩니다.
뭉크가 그녀를 만난 것은 1898년 9월이었고 뭉크의 여동생 라우라가 정신분열증으로 병원에 입원했을 때였습니다.
부유한 상인의 딸 라르센은 성격이 매우 강한 여자였고 가정을 이루어 구속받기를 거부한 뭉크는 결혼을 원치 않았습니다.
하지만 라르센은 집요하게 결혼을 요구했고 뭉크는 더이상 그녀를 만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라르센은 병이 난 것처럼 꾸며 뭉크의 친구를 통해 뭉크를 만나고 싶다는 말을 전했습니다.
뭉크는 그녀에게로 갔습니다.

뭉크가 방에 들어서자 침대에 누워 있던 라르센은 숨겨둔 권총을 꺼내들고 자기와 결혼하지 않으면 자살하겠다고 위협했습니다.
뭉크는 권총을 빼앗으려고 그녀와 옥신각신했으며 이런 와중에 권총이 발사되어 그의 왼쪽 가운데 손가락을 관통했습니다. 1902년 그의 나이 서른아홉 살 때 일어난 이 사건으로 인해 여성에 대한 혐오감이 더욱 강해졌습니다.

하이베르크 부인과 관련 있는 작품이 <달빛>입니다.
그리고 부유한 상인의 딸 라르센은 뭉크의 채색석판화 <붉은 머리의 누드>에 허리에 닿을 정도로 붉은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모습으로 나옵니다.
5년 후 그린 유명한 그림 <마라의 죽음>은 바로 그 날의 기억을 되살려 그린 것입니다.
사랑과 미움 그리고 죽음이 뒤섞인 모티프입니다.
그는 동일한 제목으로 두 점 그렸습니다.

이후 뭉크의 정서가 더욱 불안정해지면서 불미스러운 사건들이 일어났는데,
1902년에는 한 남자를 구타하여 말썽을 일으켰으며,
1904년에는 코펜하겐의 한 술집에서 결투를 벌인 죄로 구속되었고,
이듬해에는 노르웨이 화가 루드비히 카스테른과 격렬한 싸움으로 사람들의 입방아에 올랐습니다.

1935년에 그린 <결투>와 <초대받지 않은 손님>은 카스테른과의 결투를 소재로 한 작품들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