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과학과 미켈란젤로의 영혼>(미술문화) 중에서 
 
우르비노에서 태어난 이탈리아 화가, 건축가, 디자이너 라파엘로 산지오 


우르비노에서 태어난 이탈리아 화가, 건축가, 디자이너 라파엘로 산지오Raffaello Sanzio(1483~1520)는 성기 르네상스에 활약하면서 표현이 강한 작품을 제작했다.
그의 아버지 조반니 산티Giovanni Santi는 작가이면서 화가였으며 그가 아들에게 인문학적 지식을 제공했다.
바사리에 의하면 조반니는 우르비노에서 활약하면서 많은 작품을 제작했고 아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아버지는 1494년 라파엘로가 열한 살 때 타계했으며 라파엘로의 초기 작품에는 페루지노의 영향이 두드러졌다.
전하는 말로는 라파엘로가 페루지노의 제자였다고 하지만 학자들은 이를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라파엘로가 화가로 활약하기 시작한 것은 1500년 열일곱 살 때였고 그가 페루지노와 가깝게 지낸 것은 조금 후 1502년경부터였다.
그는 페루지노의 조수로 그를 도운 것이 아니라 동료 화가로 협력한 것 같다.
그는 곧 페루지노를 능가했는데, 1504년에 그린 현재 밀라노 브레라에 소장되어 있는 <동정녀의 결혼 Marriage of the Virgin>(R1)은 동일한 제목으로 페루지노가 그린 것보다 빼어났다.
두 사람의 작품은 구성에 있어서 유사한 점이 많지만 라파엘로의 것이 훨씬 훌륭했다.

라파엘로는 초기에 토스카니와 우르비노의 여러 곳에서 활동했고 1504년과 1508년 사이에는 대부분 피렌체에서 활동했으며 그가 피렌체에 영주하지는 않았지만 이 시기를 그의 피렌체 시기로 분류한다.
레오나르도와 미켈란젤로의 영향을 받고부터 그의 작품은 좀더 장려해지고 복잡해졌다.
피렌체 시기에 그는 성모자를 주제로 여러 점 그렸으며 일부 대표작이 되었다.
성모자와 성가족을 그리면서 구성과 표현력이 매우 진보되었다.
그는 인물을 우아하고 건강미가 넘치게 묘사하면서 평온하고 내면적 자긍심이 드러나게 표현했으며 성스러운 이미지를 나타내려고 하지는 않았다.
그는 온화하고 동정심이 많아 바사리는 동물들조차 그를 잘 따랐다고 적었다.

1508년 그는 불과 스물다섯이었지만 명성을 얻었으며 교황 율리우스 2세가 그를 초청해 바티칸 자신의 방 스탄자 델라 세나투라Stanza della Segnatura에 프레스코화를 그리게 했다.
그는 1515년에 피렌체에 잠시 머문 것 외에 1520년 서른일곱 살로 타계할 때까지 로마에서 활동했다.

스탄자 델라 세나투라 프레스코화는 복잡한 신학을 주제로 한 것으로 여기에 유명한 <아테네 학파 The School of Athens>가 그려져 있는데,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이끄는 아테네 학파가 철학자들을 중심으로 건축적 구성으로 묘사되어 있다.
반대편 벽에는 <논쟁 Disputa>이 그려져 있는데, 성례전에 관한 논쟁을 모티프로 한 것으로 카톨릭의 대표적인 신학자들의 논쟁이며 그 위에는 성인과 순교자들에 에워싸인 삼위일체가 묘사되어 있다.
라파엘로가 이 작업을 마친 것은 1511년이었고 그후 바티칸의 아파트 세 곳을 더 장식했다.
그는 초상화도 많이 그렸는데 그의 작품은 인물의 성격을 섬세하게 나타낸 점에서 레오나르도에 필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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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샹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뒤샹의 <회전하는 유리판들>


뒤샹은 만 레이와는 거의 매일 만나다시피 했다.
상업사진에 심취해 있는 만 레이는 무명사회의 공식 사진사였고, 설치장면들을 기록으로 남겼으며, 엽서와 보도 자료를 위한 사진도 찍었다.
캐서린은 그에게 뒤샹의 <큰 유리>를 찍으라고 했다.
뒤샹은 <큰 유리>의 아랫부분에 쌓인 먼지를 그냥 둔 채 먼지 위에 드로잉을 하고 있었는데 만 레이가 커다란 뷰카메라를 가지고 와서 바닥에 놓인 유리 아랫부분을 천장으로부터 빛을 비춘 후 찍었다.
그렇게 해서 인화한 이미지는 달빛에 비추어진 한 폭의 풍경화처럼 보였다.
뒤샹과 만 레이의 합작으로 나타난 그 사진에 뒤샹은 <먼지 번식>이란 제목을 붙였다.

하루는 뒤샹이 만 레이의 협조를 받아 유리로 광학적 기계를 제작하여 <회전하는 유리판들(정밀한 광학)>을 완성하였다.
삼각형 모양의 쇠 받침대에 모터를 부착시킨 후 뒤샹은 길이가 다른 다섯 개의 기다란 직사각형 유리판을 매달아 회전하도록 했다.
그는 각 유리판에 약간의 곡선을 반복하여 유리판들이 빠른 속력으로 회전할 때 수많은 원형들이 유리판에 나타나도록 했다.
만 레이는 뒤샹의 실험장면을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카메라를 들고 기계 앞에 섰다.
뒤샹이 모터의 스위치를 켰다. 만 레이는 “유리판들이 회전하기 시작하자 나는 사진을 찍었다.
유리판들은 원형을 그리며 빠르게 움직였는데 뒤샹이 재빨리 스위치를 끄고 결과를 보려고 카메라가 있는 곳으로 왔다.
그는 나더러 스위치를 다시 켜라고 했으므로 나는 모터 뒤로 갔다.
유리판들은 다시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하여 곧 비행기의 프로펠러처럼 빠르게 회전했다.
그런데 갑자기 킹킹거리는 소리와 함께 모터에 달린 벨트가 떨어져 나갔다.
벨트가 올가미 밧줄처럼 유리판에 걸리자 유리판들은 파편이 되어 사방으로 날랐다.
무엇인가가 내 머리를 스치는 것을 느꼈으며 섬광처럼 번쩍이는 것을 보았는데, 머리카락이 쿠션처럼 그것을 튕겨냈다.
우리는 운이 좋게도 다치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뒤샹은 기계의 결점을 보완하여 완성했다.

<회전하는 유리판들>은 뒤샹이 1911년에 <커피 분쇄기>를 그린 후 갖게 된 기계에 관한 관심의 결정물이었지만 <자전거 바퀴>와 마찬가지로 무료해서 만든 것으로, 그는 그것을 작품으로 간주하지는 않았다.
그의 행위는 전통미학으로부터 계속해서 멀어져 갔는데, 자신이 <큰 유리>를 완성하게 될지 모르지만 만약 완성시키게 되면 그림은 더 이상 그리지 않겠다고 만 레이에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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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과학과 미켈란젤로의 영혼>(미술문화) 중에서 
 
피렌체 건축가이며 조각가 필리포 브루넬레스키

피렌체 건축가이며 조각가 필리포 브루넬레스키Filippo Brunelleschi(1377~1446)는 피렌체에서 가장 유명한 건축가였으며 1420~36년에 대성당의 둥근 지붕을 제작한 후 더욱 더 유명해졌다.
그는 알베르티, 도나텔로, 마사초 등과 함께 르네상스 양식을 창조해냈다.
그는 처음에 금세공을 배웠고 금세공가이면서 조각가 로렌초 기베르티와 피렌체 대성당의 새로운 세례당 문을 놓고 경연(1401~2)을 벌이기도 했다.
두 사람이 경연을 벌인 작품들이 바르젤로Bargello에 남아 있다.
이때 기베르티가 경연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경연에서 진 브루넬레스키는 조각에서 손을 떼고 건축에만 전념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중요한 조각품을 한 점 남겼는데 1412년경 산타 마리아 노벨라Santa Maria Novella를 위해 나무로 십자가처형을 제작하고 채색했다.
그는 화가는 아니었지만 회화에 관한 논문에서 원근법에 관해 언급했으며 이는 선구자적인 일로 바사리에 의하면 하나의 소실점을 사용해서 오브제를 깊이 있게 나타내는 방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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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샹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뒤샹은 불만이 생기기 시작했다


무명사회의 첫 전시회가 열린 것은 1920년 4월 30일이었다.
전시회에서는 반 고흐와 브랑쿠시의 작품이 소개되었고, 뒤샹, 피카비아, 만 레이, 스텔라, 자크 비용, 그리고 샴버그의 작품도 함께 소개되었다.
입장료는 25센트였지만 뒤샹은 평론가들에게는 50센트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관람자가 많지 않았지만 캐서린과 뒤샹은 매 6주마다 전시회를 열기로 했다.
캐서린은 부자친구들을 후원자로 모으느라 파티를 자주 열었다.
무명사회는 20년 동안 85차례의 크고 작은 전시회를 개최했으며, 주로 진보주의 성향의 예술가들의 작품에 호감을 나타냈다.
캐서린은 아렌스버그와 그 밖의 미술품 소장가들로부터 작품들을 빌려서 전시회를 개최하기도 했으며, 아키펭코, 칸딘스키, 클레, 레제, 그리고 자크 비용을 위한 개인전을 열었다.
또한 미국인들에게 별로 알려지지 않은 피에 몬드리안과 쿠르트 슈비터즈를 위한 전시회도 열었다.
그리고 여러 도시를 순회하는 전시회를 기획하고, 예술가와 평론가들이 강의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는 등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제공했다.

무명사회는 1926년에 브루클린 뮤지엄에서 세계대전 후 처음으로 국제미술전시회를 개최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이것은 모마MoMA(Museum of Modern Art)가 태어나기 3년 전 일이었다.
세 부잣집 마나님들이 모마를 탄생시키자 캐서린은 유력한 경쟁자 모마에 대적하느라고 힘에 겨웠다.
캐서린은 모마가 자신의 아이디어를 훔쳤고 이름마저 도용했다고 분개하면서 모마는 무명사회의 부제에 불과하다고 깔보았다.
그녀는 전시장 공간이 좁아 좀 더 넓은 곳으로 이전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재정적인 문제를 자신과 두 여동생이 전적으로 해결해야 했기 때문에 쉽게 행동으로 옮기지는 못했다.
무명사회는 한 여인이 운영하는 미술관으로 소문이 났으며, 세 여인에 의해 운영되는 모마의 부상으로 더욱 운영이 어려워졌지만 미국에 현대미술을 소개한 첫 미술관이라는 명예로운 이름은 국내외에 알려졌다.

무명사회에 참여하고부터 자유로운 시간이 줄어들자 뒤샹은 불만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본느에게 보낸 편지에 그는 뉴욕에서 조용한 삶을 즐길 수 있어 좋으며, 사람들을 만나더라도 누구와도 가까이 하지 않겠다고 적었던 적이 있다.
그는 73번가에서 1916년에 약 1년 동안 거주했던 브로드웨이의 링컨 아케이드 건물로 이사했다.
그곳의 월세는 35달러였는데 넓지는 않았지만 작업하는 데 불편을 느낄 정도는 아니었다.
그는 아렌스버그의 아파트에 미완성으로 남아 있는 <큰 유리>를 가져와 작업하기로 했다.
생활비를 절약해야 했으므로 그는 싸구려 레스토랑에 가서 하루에 한 끼를 사먹었고, 우유나 과자, 캔디 등을 먹어 영양을 보충했다.
이 시절 그는 소유물을 간소화하고 최소한의 즐거움을 추구했으며, 개인적인 감정을 조절하여 어디에도 매이지 않으려고 했다.

우드는 가난에 쪼들리는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캐나다에서 결혼한 벨기에인 남편은 장모의 지나친 간섭에서 벗어나려고 벼르더니 아렌스버그로부터 4천 달러를 빌려 잠적하고 말았다.
우드는 불행한 자신의 결혼에 관해 그에게 모두 털어놓았다.

뒤샹은 7월 말 우드를 데리고 브레부르트로 가서 함께 식사를 했다.
남편이 아렌스버그의 돈을 가지고 달아난 후 경제적으로 어려운 처지에 처한 우드는 사랑하지도 않는 사내와 섹스를 하면서 더욱 불행한 삶을 살고 있었다.
우드는 자서전에 “우리는 저녁식사를 마친 후 워싱턴 스퀘어로 갔다.
그곳에서는 체스 대회가 열리고 있었고, 뒤샹은 그곳 친구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돌아오는 길에 내 아파트에 거의 당도하자 마르셀은 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내 내 손에 쥐어주었다.
그는 ‘방에 혼자 있을 때 읽어 봐’라고 했다. … 그리곤 ‘굿나잇’하며 키스를 한 후 빠른 걸음으로 사라졌다”라 적었다.
우드는 방에 들어서자마자 뒤샹이 준 봉투를 열어보았다.
50달러가 들어 있었다.
우드는 뒤샹이 고마웠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실망했는데, 그녀는 결혼하자는 내용을 적은 편지가 들어 있지나 않을까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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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과학과 미켈란젤로의 영혼>(미술문화) 중에서 
 
피렌체 화가이면서 건축가 조토 디 본도네

피렌체 화가이면서 건축가 조토 디 본도네Giotto di Bondone(1267년경~1337)는 서양 회화에 새로운 지평을 연 인물로 평가받는데, 비잔틴 회화 양식으로부터 새로운 이상, 즉 자연주의와 화화적 공간을 창조했기 때문이다.
조토의 친구 단테는 <신곡 The Divine Comedy>에서 조토가 스승 치마부에를 능가했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1400년경 첸니노 첸니니Cennino Cennini는 “조토가 회화 예술을 그리스어로부터 라틴어로 바꾸어놓았다”고 적었다.
조토의 이전 작품은 전해오지 않고 파두아의 아레나 예배당Arena Chapel에 프레스코화를 그린 후부터 그의 독특한 양식이 나타났다.
이 예배당은 엔리코 스크로베니Enrico Scrovegni가 단테가 언급한 적이 있는 악명 높은 고리대금업자 아버지의 죄를 사함받기 위해 건립했다.
이 예배당이 건립된 해는 1303년이고 조토가 프레스코화를 그린 것은 1305~6년경이다.
조토는 오른쪽 방향으로 성서의 에피소드를 연결시키며 그렸으며 여기에 <최후의 심판 Last Judgement>이 포함되고 성상 안치소 아치 위에는 <수태고지 Annunciation>가 있다.
벽에는 세 가지 주제가 연속적으로 그려졌는데, 동정녀와 그녀의 부모의 삶, 성 앤St. Anne과 성 요아킴St. Joachim의 삶, 그리스도 고난으로부터 전개되는 삶이 묘사되었다.
벽 하단에는 따로 동등한 색채로 릴리프 형식으로 덕과 미덕을 의인화한 그림들이 있다. 그는 입체감이 있게 그리면서 도덕적으로 교훈을 주는 그림을 그렸다.

조토의 또 다른 유명한 프레스코화는 아시시Assisi에 있는 성 프란체스코 교회에 프란체스코의 일생을 묘사한 것이다.
이 프레스코화는 아레나 예배당의 것과 많은 부분에서 상이하여 일부 학자들은 조토가 그린 데 대해 의심하기도 한다.
그러나 피렌체의 산타 크로체에 그린 것을 조토의 작품으로 보는 데 학자들 사이의 이견은 없다.
그가 이 교회의 네 예배당에 프레스코화를 그린 것은 1320년대로 추정된다.
18세기에 프레스코화 위에 흰색이 덧칠되었지만 바르디Bardi 예배당에 남아 있는 성 프란시스의 일생 일부는 매우 훌륭해서 사람들에게 감동을 준다.

일부 패널화에 조토의 서명이 있지만 대부분의 학자들은 그것들이 조토가 직접 그린 것이 아니라 조토의 작업장에서 추종자들이 그린 것으로 추정한다.
현재 바티칸 뮤지엄에 소장되어 있는 스테파네시 제단화Stefaneschi Altarpiece 역시 과거에는 조토의 작품으로 알려졌지만 오늘 날에는 조토의 작품으로 보는 데 회의적이다.
이와는 달리 현재 피렌체의 우피치 뮤지엄의 소장되어 있는 <오니상티 마돈나 Ognissanti Moadonna>에는 조토의 서명이 없고 조토가 그렸다는 문헌도 없지만 작품의 장려함과 인본주의적인 점에서 조토의 작품으로 보는 시각이 두드러진다.
조토의 작품으로 간주되는 패널화가 몇 점 있고 피렌체에 있는 산타 마리아 노벨라의 <십자가처형 Crucifix>도 그의 작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는 화가로 유명했지만 건축에도 조예가 깊어 1334년에는 피렌체 대성당의 건축가로 선임되었다.
그가 타계한 후 그의 양식은 피렌체 회화에 크게 기여했으며 마사초가 그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미켈란젤로 또한 그의 영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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