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과학과 미켈란젤로의 영혼>(미술문화)에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 사고와 감정이 전달되어야 한다

레오나르도는 잠시 고향을 여행한 후 피렌체로 돌아왔다.
그가 베로키오의 작업장에서 창조적인 작업을 했음이 틀림 없을 텐데 현존하는 작품이 없다.
레오나르도는 곧 베로키오 작업장의 반장이 되었다.
그래서 그는 메디치 궁전에 들어갈 수 있었으며 그들이 어떤 생활을 하는지 직접 볼 수 있었다.
로렌초는 베로키오에게 공작을 위해 로마 스타일의 갑옷과 헬멧을 디자인하라고 했다.
레오나르도가 전사의 옆모습을 그렸는데 아마 그런 갑옷과 헬멧이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갑옷은 소용돌이 무늬, 사자의 얼굴과 발톱, 잇빨, 독수리 날개 등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었을 것이다.

밀라노 공작이 피렌체를 방문하는 중에 베로키오는 레오나르도를 포함한 조수들과 함께 종교적 축제 행렬과 함께 교회 상 펠리체에 <수태고지 Annunciation>를, 산타 마리아 델 카르미네에 <그리스도의 승천 Ascension of Christ>을, 산토 스피리토에 <사도들에게 성령의 내림 Descent of the Holy Ghost to the Apostles>을 걸었다.
3월 21~22일 그림을 모두 걸었을 때 재앙이 닥쳤는데 불이 나서 교회를 전소하고 말았다.
화재의 원인은 어둠을 밝히기 위해 세워놓은 많은 횃불들 가운데 하나가 쓰러져 일어난 것 같았다.
레오나르도에 관해 정통한 학자 케네스 클락Kenneth Clark은 이 시기에 레오나르도의 취미는 "옷을 잘 입고, 말을 길들이며, 류트lute(14~17세기의 기타 비슷한 현악기)를 배우는 것"이라고 했다.
레오나르도는 1472년 견습생활을 마치고 마스터로서 자신의 사업을 시작했는데 20살 때였다.
그 해 그의 이름이 페루지오와 보티첼리 이름과 나란히 성 누가 교회의 지출 명단에 올라 있었다.
성 누가 교회가 레오나르도의 후원자가 된 것은 <동정녀 마리아 Virgin Mary>의 초상을 그린 후부터였다.
레오나르도가 마스터가 되었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 것은 없었다.
수련기간이 끝났다는 것 뿐이지 여전히 베로키오의 조수로 그를 도왔다.
그는 여전히 드로잉하면서 기술에 완벽을 기했는데, 석고로 제작된 "웃음짓는 여인의 머리와 아이들의 얼굴을" 드로잉했다.

바사리는 레오나르도가 마스터가 된 후 처음 제작한 것을 아버지가 싼값에 팔았다고 적었고 이는 유명한 전설이 되었다.
세르 피에로가 지방에 있을 때 소작인 한 사람의 방문을 받았다.
소작인은 자신이 무화과나무로 방패를 만들었다면서 피에르가 피렌체의 유명한 화가에게 장식을 의뢰하면 그 비용을 지불하겠다고 약속했다.
피에로는 그러마하고 그 일을 레오나르도에게 시켰다.
레오나르도는 나무가 거칠게 깍인 것을 보고는 자신이 깍아 매끈하게 한 후 특별한 유약을 발라 광택을 냈다.
그는 방패에 고르곤Gorgon(그리스 신화의 동물로 머리가 뱀이며 보는 사람을 도로 변화시켰다는 세 자매의 괴물)의 머리를 그려 넣었는데 적을 두렵게 만들기 위해서였다고 했다.
그는 고르곤을 그리기 위해 크고 작은 도마뱀, 귀뚜라미, 메뚜기, 박쥐, 그리고 그 밖의 낯선 동물들을 드로잉하며 습작했다.
등골을 오싹하게 하는 괴물을 만들기 위해 그는 "검은 바위의 갈라진 틈으로부터 나와 턱을 크게 벌리고 불을 토해내고 눈에서는 빛이 나며 코에서 독이 있는 김이 방사되는" 모습을 그렸다.

그는 뱅패의 장식을 완성한 후 아버지를 오게 해서 의견을 들으려고 했다.
피에로는 아들의 작업장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그만 놀라서 뒤로 나자빠질 뻔했다.
그는 자신이 마귀를 봤다고 생각했다.
레오나르도는 "방패는 이래야 합니다. 가져가세요"라고 했다.
바사리는 이 말에 덧붙여서 "이것이 바로 사람들이 예술에서 기대하는 점입니다"라고 레오나르도가 말한 것으로 적었다.
피에로는 곧바로 장터에 가서 화살이 방패에 꽂힌 모습으로 장식된 것을 하나 사서 소작인에게 주었고 소작인은 매우 흡족해 했다.
피에로는 아들이 장식한 방패를 몰래 피렌체 상인에세 100두카트를 받고 팔았다.
그 상인은 그것을 미라노 공작에게 300두카트에 팔았다.
이 이야기는 바사리에 의해서만 전해오지만 사실을 그가 기록한 것 같으며 그 방패는 현존하지 않는다.

레오나르도는 자신이 쓴 『회화에 관한 논문』에서 화가는 환상적인 동물을 실재의 요소들에서 구성해야 한다고 적었다.
용을 그릴 경우 그는 "맹견이나 사냥개의 머리에 고양이의 눈, 소마기porcupine의 귀, 그레이하운드(몸이 길고 날쌘 사냥개)의 주둥이, 사자의 눈섭, 늙은 수탉의 볏, 거북이의 목"으로 할 것을 권했다.
이 아이디어는 새로운 것이 아니었는데, 베로키오가 의전에 사용하는 헬멧에 장식한 적이 있었다.
레오나르도는 이를 글로서 분명히 했다.
레오나르도는 미술품이 단지 장식적이서는 안 되고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고 영향을 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레오나르도가 그린 것은 그가 고향의 동굴 앞에서 두려움과 욕망으로 보고 싶어 했던 것을 형상화한 것처럼 보인다.
그는 예술이라는 미지의 동굴 속에 이런 것이 자리잡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그는 『회화에 관한 논문』에서 드로잉을 시에 비유하면서 느낌, 인상, 아이디어를 전달하는 매개이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드로잉의 기능을 기교적, 과학적 화제에 시각적으로 시사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는 드로잉을 시인의 언어에 비유하면서 객관적 실재를 가장 정확하게 서술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는 적었다.

"드로잉을 하는 사람은 이야기적 회화를 구성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사물의 외양을 예리한 선으로 종료시키는 것을 억제해야 하며 대부분의 화가들이 목탄으로 세심하게 묘사하는 데 이런 방법을 억제해야 한다. 세심하게 묘사하는 것이 완벽하게 보일런지는 몰라도 예술적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데 살아 있는 생명체가 갖고 있는 사고나 감정을 전달해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드로잉을 완성시키고, 아름답게 하며, 모양을 잘 배열하기 위해서 화가는 터무니 없는 모양을 그리기도 하고 높거나 낮게 또는 멀리 있거나 바로 앞에 있는 것인양 그려야 한다. 이렇게 하지 않는 사람은 그가 보여주는 지식에 대해 칭찬을 받을 자격이 없다. 자, 시인들이 어떻게 시를 짓는지 생각해본 적이 없는가? 아름다운 언어로 시를 쓴 시인들에게는 몇 구절을 삭제해서 나은 문장으로 새롭게 쓰는 것이 문제 될 게 없다. 그러므로 화가는 오브제의 부분을 대충 그려야 하며 인물의 아름다움과 장점에 깊이 생각하기 전 인물의 동작을 적절하게 재현하는 데 숙고해야 하고 이야기적 회화의 형상으로 나타나는 정신적인 점을 유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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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우의 <뒤샹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문제는 뒤샹이 안전하게 프랑스를 빠져 나오는


뒤샹은 첫 번째 제작한 <상자>를 페기에게 팔았다.
페기는 그때 프랑스 영토 알프스산 아래 메제브에 있었는데 전 남편 배일이 일곱 자녀와 함께 그곳에 살고 있었다.
그들 가운데 둘은 페기가 낳은 자식이고, 배일은 새 아내 케이 보일과 살고 있었다.
뒤샹은 나머지를 각각 4천 프랑에 팔려고 했다.

이 시기 뒤샹의 친구들이 그를 프랑스에서 빠져나올 수 있도록 애를 썼다.
이 일에는 아렌스버그가 앞장섰다. 아렌스버그는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프란시스 베이컨 도서관의 미술담당 큐레이터로 하여금 뒤샹을 초청하도록 서류를 꾸몄는데, 도서관은 아렌스버그의 소장품들을 관리하고 있었다.
아렌스버그는 워싱턴에 있는 친구를 통해 뒤샹이 비자를 받을 수 있도록 비자신청서를 제출했다.
문제는 뒤샹이 안전하게 프랑스를 빠져 나오는 것이었다.
그는 독일 공무원에게 1,200프랑의 뇌물을 주고 마르세이유로 치즈를 구입하러 갈 수 있도록 조처를 취하게 했다.
1941년 봄 세 차례에 걸쳐 치즈를 구입했으므로 공무원은 그가 마르세이유로 갈 때 더 이상 질문을 하지 않았다.
그는 가방에 치즈 대신 <상자>를 50개 제작할 수 있는 만큼의 재료를 담고 4월에 그렌노블로 가서 로세와 페기를 만났으며, 그곳에서 여권을 신청했고, 페기의 도움으로 <상자>를 제작하는 데 필요한 재료를 미국으로 보낼 수 있었다.

당시 많은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이 나치의 위협을 피해 미국으로 도피했다.
브르통과 금발의 아내 재클린 람바 그리고 두 사람 사이에 태어난 5살난 딸은 페기의 도움으로 미국으로 갈 수 있었다.
브르통의 그룹 멤버들인 마송, 빅터 브라우너, 오스카 도밍케즈, 한스 벨머, 윌프레도 람, 르네 샤, 그리고 에른스트도 미국으로 피신했다. 초현실주의 예술가들뿐만 아니라 샤갈과 레제 그리고 몬드리안을 포함해서 많은 예술가들이 미국으로 피신했으며, 작가와 미술품 딜러들도 미국으로 향했다.
페기는 이 시기 에른스트와 사랑에 빠졌고 에른스트는 그녀의 사랑을 배척할 이유가 없었다.
그는 독일인이었기 때문에 전쟁이 나자 적국자란 이유로 수개월 동안 감금당했으며, 1940년에는 체포된 적도 있었다.
에른스트는 1937년에 프랑스로 온 후 아비뇽 북쪽에서 영국인 화가 레오노라 캐링턴과 동거하고 있었는데, 캐링턴은 에른스트가 체포된 후 과음하기 시작하여 그가 구금에서 풀려나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브랜디를 마시기 위해 독일인에게 집을 헐값에 팔아치운 후였다.
에른스트는 케링턴을 알코올 중독자들 수용소에 넣었다.
캐링턴은 나중에 마드리드로 갔는데 그곳에서 정신질환을 일으키고 정신병원에 입원하고 말았다.

애인도 돈도 없는 상태에서 파리에 고립된 에른스트는 페기의 사랑을 받자 거부할 일이 아니었다.
페기는 자신이 소장한 미술품들을 모두 뉴욕으로 발송한 후 에른스트에게 함께 뉴욕으로 가자고 권했고, 에른스트는 선뜻 응했다.
마르세이유에 있는 어느 레스토랑에서 에른스트의 50회 생일을 축하하는 파티가 있었다.
에른스트는 페기의 귀에다 대고 “언제, 어디에서, 그리고 왜 내가 너를 만나지?”고 속삭였다.
페기는 “내일 4시에 카페 파이로 오세요. 왜 오시는지는 알잖아요” 하고 대답했다.
페기는 많은 사내들과 섹스를 했지만 파란 눈을 가진 에른스트만큼 자신을 황홀하게 만든 사내는 처음이었다.
그녀는 유부남 이브 탕기와도 사랑에 빠졌지만, 탕기는 하는 짓이 아들 같아서 아버지처럼 어른스러운 에른스트가 훨씬 마음에 들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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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우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과학과 미켈란젤로의 영혼>(미술문화)에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두려움과 욕망


레오나르도는 "과거에 대해 거짓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지만 자신에 과한 기록을 많이 남겼더라도 과거에 관해서는 별로 기술하지 않았다.
그는 30살 가량 되었을 때 자신의 생각을 체계적으로 적기 시작했다.
그는 노트북을 갖고 다니면서 자신이 바라본 것에 대한 설명, 대상에 대한 절밀한 관찰, 어떻게 그릴 것인가에 대한 계획 등을 왼손잡이 필기로 적었다.
당시 그는 왼손잡이mancino(오늘날의 영어로 lefty 또는 southpaw에 해당한다)로 알려졌다.
피렌체인 조각가이며 건축가 라파엘로 다 몬텔루포는 자서전에서 미켈란젤로가 타고난 왼손잡이라고 적었지만 미켈란젤로의 일대기를 쓴 콘디비와 바사리는 이 점을 언급하지 않았다.
미켈란젤로가 오른손으로도 작업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러나 많은 르네상스 작가들이 레오나르도가 왼손잡이였음을 적은 걸로 봐서 그리고 그가 왼손으로 드로잉했음이 분명하므로 왼손잡이였다는 사실은 당시에 익히 알려졌던 것 같다.
레오나르도가 왼손잡이라고 적은 최초의 기록은 레오나르도의 가까운 친구이자 수학자 그리고 이론가 프라 루카 파치올리에 의해서였다.
파치올리와 레오나르도가 우정을 나눈 시기는 두 사람 모두 1496년부터 1499년까지 밀라노에 체류할 때였지만 두 사람은 그 이전부터 알았던 것 같다.
두 사람 모두 1499년에 밀라노를 떠날 것을 강요당했으며 두 사람은 함께 여행하기도 했다.

레오나르도는 개인적인 내용도 기술했는데 지출내역, 편지초안, 어떤 사람의 이름, 공리, 빌려봐야 할 책의 리스트, 잊지말아야 할 것 등이었다.
그는 강에 대한 기하적 설명과 함께 숫치를 적은 종이 아래에 "화요일, 빵, 고기, 포도주, 과일, 미네스트라minestra,샐새러드"라고 적었다.
그는 자신의 느낌을 직접적인 표현으로 적기도 했다.
그는 고백 형식으로 자신의 감정을 적었는데, 이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에 드문 일이었다.
그가 남긴 글을 제대로 파악하는 일은 그를 바로 이해하는 지름길이 된다.

앞서 언급한 대로 연의 꼬리가 요람에 있던 자신의 입술을 여러 차례 쳤다는 기록 외에 그가 자신의 어린 시절에 관해 적은 기록은 없다.
그러나 어린 시절을 보낸 빈치의 언덕에서 내려다본 장면을 그린 드로잉이 몇 남아 있다.
그가 펜으로 이 드로잉을 그렸을 때는 21살이었다.
이 드로잉은 아카데믹한 요소가 있어 그의 고유한 양식이 생기기 전에 그린 것임을 알 수 있는데, 그에게는 특별한 드로잉으로 왼쪽 상단에 "순결한 성 마리아의 축제날 1473년 8월 5일"이란 날자를 명기했다.
레오나르도가 날자를 명기한 것은 집안의 전통적 내력인 것 같다.
아버지가 공증인이었기 때문에 꼼꼼하게 날자를 기록하는 버릇이 생긴 것 같다.
이 드로잉은 서양미술에서 최초의 풍경화 드로잉이란 평가를 받고 있다.
동양에서는 풍경화가 흔히 다루어졌지만 서양에서는 배경으로만 사용되고 있었다.
더러 미술사학자들은 풍경화가 레오나르도의 상상력으로 그려졌다고 하지만 특별히 날자를 기록한 것으로 봐서 베로키오의 작업장을 잠시 떠나 고향을 찾았을 때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견습생들이 잠시 여름 휴가를 얻는 것은 보통 있는 일이었다.
이 드로잉 뒤에는 언덕 아래 돌로된 아치가 보이고 하늘에 남자 누드가 그려져 있다.
누드 왼쪽 웃는 얼굴 위에는 "난 안토니오의 집에 묵었는데 만족스럽다"고 적혀 있다.
안토니오는 의붓아버지로 레오나르도가 어머니와 한동안 지냈음을 알 수 있다.

이 드로잉은 기분이 좋은 상태에서 그린 것이며 흘려 쓴 글씨에서도 그의 기분이 매우 상쾌했음을 알 수 있다.
안토니오는 할아버지의 이름이기도 해서 과연 레오나르도가 누구의 집에 묵었는지 분명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1473년이면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지 수년이 지났다.

레오나르도의 드로잉에 나타난 장면은 길에서 내려다보이는 사람들이 종종 찾는 곳으로 보이지만 토스카니의 시골은 숲이 많아 야생동물들이 살고 있으며 사냥을 즐길 수 있어 사냥꾼들에게는 낙원이었다.
레오나르도의 드로잉에는 바위, 산, 강이 보이는데, 어린 시절을 보낸 그의 개인적인 이 풍경은 그가 마음 속에 깊이 담아둔 정신의 휴식처였다.
그는 이런 장면을 <바위의 동정녀 Virgin of the Rocks>, <동정녀와 성 앤 Virgin with Saint Anne>, <모나리자 Mona Lisa>의 배경에 사용했다.
이 드로잉을 그릴 시기에 그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격렬한 욕망과 함께 불안한 마음으로 조물주 자연이 창조한 다양하고도 낯선 풍부한 것들을 보려고 위에 매달린 바위를 지나 한참을 걸어서 커다란 동굴 입구에 당도하고 잠시 선 채로 놀라움에 휩싸였는데, 난 그런 것이 존재하리하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집중적으로 바라보려고 나는 왼손을 무릎에 올려놓고 오른손을 눈 위에 올려 그늘을 만들고 안을 응시하면서 안이 캄캄한 데도 어떤 것이 있는지 보려고 했다. 난 잠시 그러고 있었는데 두 가지 감정이 불현듯 생겼는데 두려움과 욕망이었다. 위협하는 동굴, 캄캄한 데 대한 두려움과 놀라울 만한 것이 안에 있다면 그것을 보고 싶은 욕망이었다."

두려움과 욕망은 그의 그림을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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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샹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뒤샹의 <가방 안에 있는 상자>

독일군대가 파리를 점령한 것은 1940년 6월이었다.
나치가 프랑스의 마샬 앙리 페탱의 정부와 휴전조약을 맺은 조건은 프랑스의 3분의 2를 독일이 차지하고 나머지 3분의 1을 프랑스 정부가 통치하는 것이었다.
프랑스 정부는 물론 나치의 간섭을 받아야 했다. 뒤샹이 전란을 피한 곳은 프랑스 정부의 통치지역인 아르카총이었다.
뒤샹은 7월 중순 아렌스버그에게 보낸 편지에 “시민들의 생활은 독일인의 간섭을 별로 받지 않는 편이다.
벨기에와 북쪽으로부터 많은 피난민이 왔고, 독일인들이 쉬러 온다”라고 적었다.
아르카총과 파리로 연결하는 철도다리가 폭파되었으므로 아르카총은 고립되었다.

뒤샹은 이 시기 <가방 안에 있는 상자>를 만드느라고 고심했으며, 전에 제작한 <푸른 상자>와는 달리 자신이 과거에 제작한 작품들을 소형으로 상자 안에 담아 운반할 수 있는 ‘뮤지엄’으로 제작하려고 했다.
기술적인 문제는 <푸른 상자>를 제작한 경험이 있어 자신은 있었지만 실질적인 문제는 돈이었다.
뒤샹은 수표를 이용한 레디 메이드 작품과 <모나리자>에 수염을 그려 넣은 레디 메이드 작품을 가지고 있었는데 아렌스버그에게 <모나리자>를 사라고 권하면서 “100달러가 너무 비싼 가격이라 생각하오?”라고 물었다.
뒤샹의 대부분의 작품을 사들인 아렌스버그는 이상하게도 그 것 만큼은 100달러에 구입하려고 들지 않았다.

9월 독일의 전투기가 무차별 폭탄을 투하하면서 런던을 잿더미로 만들 때 뒤샹과 메리는 파리로 갔다.
독일군이 파리의 여기저기에 깔렸는데 메리의 집은 부서지지 않은 채 무사했고, 뒤샹과 로세가 공동으로 구매하여 메리의 집에 보관한 브랑쿠시의 조각들도 안전했다.
뒤샹은 그해 가을 <상자>를 만드느라고 분주했는데 그가 6년 전부터 구상해온 일이었다.
그는 20점으로 한정하여 가죽가방 안에 담을 수 있도록 호화스럽게 만들기로 하고 첫 번째 작품을 1941년 1월에 완성했다.
이 작품은 가죽손잡이가 달린 가죽가방 안에 나무로 제작한 상자가 들어 있는 것으로 말 그대로 가방 안에 있는 상자였다.
상자 안에는 뒤샹의 작품 69점이 소형사진으로 담겨 있고, 프랑스어로 뒤샹이 직접 쓴 글이 ‘of or Marcel Duchamp or Rrose Selavy’라고 적혀 있었다.
가죽가방을 열고 수직으로 선 나무상자 뚜껑을 양쪽 옆으로 잡아당기면 뒤샹의 중요한 그림들이 나타나는데 <큰 유리>의 이미지를 투명한 셀룰로이드에 찍은 사진이 중앙에 있고, 왼쪽에 <신부>와 <빠른 누드들에 의해 에워싸인 왕과 왕후>가 있으며, 오른쪽에는 <텀>, <아홉 개 능금 주물들>, 그리고 <글라이더>가 있었다.
<아홉 개의 능금 주물들>과 <글라이더>도 마찬가지로 투명한 셀룰로이드에 인화한 사진이었다.
<큰 유리>를 특별히 부각시킨 이 <상자>는 운반할 수 있는 소형 뮤지엄과 다름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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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과학과 미켈란젤로의 영혼>(미술문화)에서   
 
교황이 메디치 가를 공격하다


교황은 몹시 분노하면서 메디치가와 맞먹는 부와 권력을 쥔 파지가, 리아리오가, 살비아티가로 하여금 로렌초를 전복시켜도 좋다는 뜻을 전했다.
교황은 젊은 로렌초를 살해하는 것은 원치 않았지만 이들 가문은 1478년 4월 26일 부활절 날 대성당에서 미사를 드리고 있던 로렌초와 줄리아노를 살해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베키오 궁전을 점령하고 의회를 쫓아냈다.
부활절 로렌초는 여느 때와 같이 경호원을 대동하지 않은 채 성당 미사에 참석했다.
줄리아노는 그날 늑장을 부리고 있었는데, 프란체스코와 베르나르도 반디니가 그의 집으로 가서 농담을 해가면 그로 하여금 성당으로 오게 했다.
신부가 미사를 위해 성병(빵)을 들어올릴 때 반디니가 줄리아노의 가슴을 칼로 찔러 죽였다.
줄리아노는 바닥에 쓰러졌고 프란체스코는 줄리아노에 달려들어 어찌나 정신없이 그를 찔러댔던지 그만 자신의 다리를 찌르기도 했다.
한편 안토니오 다 볼테르라와 신부 스테파노는 대검으로 로렌초를 공격했다.
로렌초는 자신이 갖고 있던 무기로 방어했고 칼로 조금 베이는 정도였다.
친구들이 로렌초의 주위로 몰려들었고 그를 성물실로 데리고 갔다.
공격자들은 군중 틈으로 유유히 빠져나갔으며 줄리아노의 시신은 메디치 궁전으로 옮겨졌다.
대성당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는 동안 대주교 살비아티, 아이아코포 데 파지는 무장한 공모자 백 명을 거느리고 베끼오 궁전을 덮쳤다.
그러나 시민은 메디치가의 편에 섰다. 살비아티가 궁전 안에 들어서자 장관 체사레 페트루치가 그를 때려눕혔고, 인문주의자의 아들 아이아코포 디 포지오는 궁전 창문에 목을 매달았으며, 계단을 오른 몇 명의 공모자들은 붙잡혀 창문 밖으로 던져져서 돌이 깔린 바닥에 떨어져 죽었다.
로렌초가 많은 사람들의 보호를 받으며 나타나자 시민들은 그가 무사함을 알고 환호하며 메디치가를 공격한 수상쩍은 모든 공모자들에게 공격했다.
시민들은 프란체스코를 잡아다가 대주교 옆에 목을 매달았으며 죽은 아이아코포 데 파지의 시신을 벌거벗겨 아르노 강물에 던졌다.

대주교를 목매달아 교살했다는 소식을 듣고 교황 식스투스는 충격을 받았다.
교황은 로렌초를 카톨릭, 도시장관, 행정판사, 그리고 피렌체의 모든 종교적 행사에서 추방했다.
일부 성직자들은 교황의 이런 금지령에 반대하여 시위했고 교황의 매도를 비난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식스투스의 명을 받고 나폴리의 왕 페르디난드 1세는 피렌체에 사절을 보내 의회와 시민들에게 로렌초를 교황 앞에 끌고가든지 아니면 피렌체에서 추방하라고 강요했다.
피렌체 의회는 지도자를 배신하느니 어떤 사태에도 대처하기로 결의했고 식스투스와 나폴리 왕은 1479년에 피렌체에 선전포고를 했다.
나폴리 왕의 아들 알퐁소는 포지본시 근처에서 피렌체 군대를 섬멸하고 피렌체의 지방을 황폐하게 만들었다.
피렌체 시민들은 전쟁으로 인해 과중한 세금을 물게 되자 불평하기 시작했고 로렌초는 자신 한 사람을 위해 피렌체가 더이상 희생하지 않을 것임을 알았다.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그는 결심을 해야 했다.
그는 피사에서 배를 타고 나폴리로 가서 자신을 왕에게 데리고 가달라고 했다.
왕은 그의 용기에 탄복했다.
로렌초는 피렌체가 직면한 어려움을 설명하면서 나폴리 왕에게 교황이 지나치게 권력을 행사하게 되는 것은 나폴리에게도 위험하다고 말했다.
교황이 피렌체에 권력을 행사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했다.
그때 터키족이 지상과 바다로 내려오면서 곧 이탈리아를 침략할 기세였고 나폴리가 장악한 아드리이틱을 칠 태세였다.
로렌초는 포로이면서 고귀한 손님의 상태로 있게 되었다.

로렌초의 입장은 불리해지고 있었고 알퐁소가 계속해서 피렌체 군대와 싸워 승리를 거두고 있었으며 식스투스는 계속해서 나폴리 왕에게 로렌초를 로마로 보내 자신의 포로로 삼아야 한다고 종용했다.
피렌체인들은 로렌초가 처형될 경우 피렌체의 독립은 끝장나게 되므로 석달 동안 불안해 했다.
로렌초는 나폴리에 머무는 동안 친절과 온화함으로 친구들을 만들었으며 나폴리 장관이며 공작 카라파를 설득해서 자신의 문제를 도와주게 만들었다.
나폴리 왕도 로렌체의 인격을 마음에 들어 했는데 나폴리 왕 역시 품위가 있고 고결한 인물이었다.
그는 로렌초와 화평하게 지내는 것이 그가 통치자로 있는 동안 피렌체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는 로렌체와 평화조약을 맺고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말 한 필을 선물로 줬으며 나폴리에서 배를 타고 돌아갈 수 있도록 했다.
로렌초가 나폴리와 평화조약을 맺었다는 소식을 듣고 피렌체 사람들은 그를 대대적으로 환영했다.
식스투스는 몹시 분해하면서 자신 혼자서라도 그와의 전쟁을 계속하려고 했지만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모하메드 2세가 1480년 군대를 이끌고 오트란토에 진입하면서 이탈리를 완전히 장악할 태세였다.
식스투스는 라틴 기독교 왕국이 위기에 처한 것을 알고는 피렌체 시민 대표들과 이 문제를 논의하면서 피렌체 시민을 용서하는 대신 터키족을 대항해 군함을 15척 만들게 하고 평화를 유지했다.
이로 인해 로렌초는 타의 도전을 받지 않는 명실공히 토스카니의 군주가 되었다.

로렌초는 이제 30살이 되었고 성격은 젊었을 때보다 한결 부드러워졌다.
그는 선물을 받으면 반드시 그보다 더한 것으로 갚았으며, 십여 개의 종교적 사업에 재정적으로 지원했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예술가, 학자, 시인들을 후원했으며, 국가에 큰 돈을 빌려줬다.
1480~90년은 피렌체의 정치, 문학, 예술이 절정을 이룬 시기였다.
로렌초는 자신이 수집한 건축적 유물과 조각품들을 코시모와 피에로가 수집한 것들과 함께 메디치 궁전과 상 마르코수도원 사이의 정원에 장식했다.
바사리는 로렌초의 후원 아래 이 정원에서 공부한 사람들은 모두 훌륭한 예술가가 되었다고 적었다.

예술 후원가로서의 로렌치의 성격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베르톨도 디 조반니Bertoldo di Giovanni(1420년경~91)와의 관계이다.
베르톨도는 비주류에 속하는 소품 조각가였지만 도나텔로로부터 수학한 후 조수로 그를 도왔고 미켈란젤로의 스승이었다.
그가 15세기위 위대한 조각가 도나텔로와 16세기의 위대한 조각가 사이에 교량적인 역할을 했다.
로렌초는 예술가들 가운데 베르톨도를 가장 가까이 했다.
베르톨도는 로렌초와 한 집에 살면서 매일 함께 식사를 하고 로렌초가 여행을 갈 때 동행했으며 로렌초의 미술 자문으로 로렌초가 세운 미술 아카데미의 첫 원장이었다.
그는 유머가 있었고 요령이 있었으며 임기응변에 재주가 있었고 로렌초가 가까이 했지만 주인과 적당한 거리를 두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에게는 로렌초의 예술에 대한 견해와 소망을 재빨리 알아채고 공감하는 재능이 있었으며 이는 곧 궁정 예술가의 이상형이다.
재료를 유연하며 오래보존되는 최상품 청동에 국한시켜 작은 크기의 장식적이며 우아한 형상의 작품을 제작하는 베르톨도의 양식이 로렌초의 취향에 가장 부합되었던 것 같다.
로렌초는 소품을 좋아했으며 그가 수집한 커다란 조각품은 드물다.
로렌초 수집품의 주류를 이루는 것이 5, 6천 점으로 조각 또는 부조가 있는 보석류였다.
이 장르는 고대부터 있어왔고 베르톨도는 고대 기술과 고대 모티프를 사용했다.
로렌초의 예술적 취향은 장식적인 것과 값비싼 것, 유희적인 것과 기예적인 것으로 소군주국 영주들의 로코코적 취향과 매우 흡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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