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샹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뒤샹의 <가방 안에 있는 상자>

독일군대가 파리를 점령한 것은 1940년 6월이었다.
나치가 프랑스의 마샬 앙리 페탱의 정부와 휴전조약을 맺은 조건은 프랑스의 3분의 2를 독일이 차지하고 나머지 3분의 1을 프랑스 정부가 통치하는 것이었다.
프랑스 정부는 물론 나치의 간섭을 받아야 했다. 뒤샹이 전란을 피한 곳은 프랑스 정부의 통치지역인 아르카총이었다.
뒤샹은 7월 중순 아렌스버그에게 보낸 편지에 “시민들의 생활은 독일인의 간섭을 별로 받지 않는 편이다.
벨기에와 북쪽으로부터 많은 피난민이 왔고, 독일인들이 쉬러 온다”라고 적었다.
아르카총과 파리로 연결하는 철도다리가 폭파되었으므로 아르카총은 고립되었다.

뒤샹은 이 시기 <가방 안에 있는 상자>를 만드느라고 고심했으며, 전에 제작한 <푸른 상자>와는 달리 자신이 과거에 제작한 작품들을 소형으로 상자 안에 담아 운반할 수 있는 ‘뮤지엄’으로 제작하려고 했다.
기술적인 문제는 <푸른 상자>를 제작한 경험이 있어 자신은 있었지만 실질적인 문제는 돈이었다.
뒤샹은 수표를 이용한 레디 메이드 작품과 <모나리자>에 수염을 그려 넣은 레디 메이드 작품을 가지고 있었는데 아렌스버그에게 <모나리자>를 사라고 권하면서 “100달러가 너무 비싼 가격이라 생각하오?”라고 물었다.
뒤샹의 대부분의 작품을 사들인 아렌스버그는 이상하게도 그 것 만큼은 100달러에 구입하려고 들지 않았다.

9월 독일의 전투기가 무차별 폭탄을 투하하면서 런던을 잿더미로 만들 때 뒤샹과 메리는 파리로 갔다.
독일군이 파리의 여기저기에 깔렸는데 메리의 집은 부서지지 않은 채 무사했고, 뒤샹과 로세가 공동으로 구매하여 메리의 집에 보관한 브랑쿠시의 조각들도 안전했다.
뒤샹은 그해 가을 <상자>를 만드느라고 분주했는데 그가 6년 전부터 구상해온 일이었다.
그는 20점으로 한정하여 가죽가방 안에 담을 수 있도록 호화스럽게 만들기로 하고 첫 번째 작품을 1941년 1월에 완성했다.
이 작품은 가죽손잡이가 달린 가죽가방 안에 나무로 제작한 상자가 들어 있는 것으로 말 그대로 가방 안에 있는 상자였다.
상자 안에는 뒤샹의 작품 69점이 소형사진으로 담겨 있고, 프랑스어로 뒤샹이 직접 쓴 글이 ‘of or Marcel Duchamp or Rrose Selavy’라고 적혀 있었다.
가죽가방을 열고 수직으로 선 나무상자 뚜껑을 양쪽 옆으로 잡아당기면 뒤샹의 중요한 그림들이 나타나는데 <큰 유리>의 이미지를 투명한 셀룰로이드에 찍은 사진이 중앙에 있고, 왼쪽에 <신부>와 <빠른 누드들에 의해 에워싸인 왕과 왕후>가 있으며, 오른쪽에는 <텀>, <아홉 개 능금 주물들>, 그리고 <글라이더>가 있었다.
<아홉 개의 능금 주물들>과 <글라이더>도 마찬가지로 투명한 셀룰로이드에 인화한 사진이었다.
<큰 유리>를 특별히 부각시킨 이 <상자>는 운반할 수 있는 소형 뮤지엄과 다름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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