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우의 <뒤샹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문제는 뒤샹이 안전하게 프랑스를 빠져 나오는
뒤샹은 첫 번째 제작한 <상자>를 페기에게 팔았다.
페기는 그때 프랑스 영토 알프스산 아래 메제브에 있었는데 전 남편 배일이 일곱 자녀와 함께 그곳에 살고 있었다.
그들 가운데 둘은 페기가 낳은 자식이고, 배일은 새 아내 케이 보일과 살고 있었다.
뒤샹은 나머지를 각각 4천 프랑에 팔려고 했다.
이 시기 뒤샹의 친구들이 그를 프랑스에서 빠져나올 수 있도록 애를 썼다.
이 일에는 아렌스버그가 앞장섰다. 아렌스버그는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프란시스 베이컨 도서관의 미술담당 큐레이터로 하여금 뒤샹을 초청하도록 서류를 꾸몄는데, 도서관은 아렌스버그의 소장품들을 관리하고 있었다.
아렌스버그는 워싱턴에 있는 친구를 통해 뒤샹이 비자를 받을 수 있도록 비자신청서를 제출했다.
문제는 뒤샹이 안전하게 프랑스를 빠져 나오는 것이었다.
그는 독일 공무원에게 1,200프랑의 뇌물을 주고 마르세이유로 치즈를 구입하러 갈 수 있도록 조처를 취하게 했다.
1941년 봄 세 차례에 걸쳐 치즈를 구입했으므로 공무원은 그가 마르세이유로 갈 때 더 이상 질문을 하지 않았다.
그는 가방에 치즈 대신 <상자>를 50개 제작할 수 있는 만큼의 재료를 담고 4월에 그렌노블로 가서 로세와 페기를 만났으며, 그곳에서 여권을 신청했고, 페기의 도움으로 <상자>를 제작하는 데 필요한 재료를 미국으로 보낼 수 있었다.
당시 많은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이 나치의 위협을 피해 미국으로 도피했다.
브르통과 금발의 아내 재클린 람바 그리고 두 사람 사이에 태어난 5살난 딸은 페기의 도움으로 미국으로 갈 수 있었다.
브르통의 그룹 멤버들인 마송, 빅터 브라우너, 오스카 도밍케즈, 한스 벨머, 윌프레도 람, 르네 샤, 그리고 에른스트도 미국으로 피신했다. 초현실주의 예술가들뿐만 아니라 샤갈과 레제 그리고 몬드리안을 포함해서 많은 예술가들이 미국으로 피신했으며, 작가와 미술품 딜러들도 미국으로 향했다.
페기는 이 시기 에른스트와 사랑에 빠졌고 에른스트는 그녀의 사랑을 배척할 이유가 없었다.
그는 독일인이었기 때문에 전쟁이 나자 적국자란 이유로 수개월 동안 감금당했으며, 1940년에는 체포된 적도 있었다.
에른스트는 1937년에 프랑스로 온 후 아비뇽 북쪽에서 영국인 화가 레오노라 캐링턴과 동거하고 있었는데, 캐링턴은 에른스트가 체포된 후 과음하기 시작하여 그가 구금에서 풀려나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브랜디를 마시기 위해 독일인에게 집을 헐값에 팔아치운 후였다.
에른스트는 케링턴을 알코올 중독자들 수용소에 넣었다.
캐링턴은 나중에 마드리드로 갔는데 그곳에서 정신질환을 일으키고 정신병원에 입원하고 말았다.
애인도 돈도 없는 상태에서 파리에 고립된 에른스트는 페기의 사랑을 받자 거부할 일이 아니었다.
페기는 자신이 소장한 미술품들을 모두 뉴욕으로 발송한 후 에른스트에게 함께 뉴욕으로 가자고 권했고, 에른스트는 선뜻 응했다.
마르세이유에 있는 어느 레스토랑에서 에른스트의 50회 생일을 축하하는 파티가 있었다.
에른스트는 페기의 귀에다 대고 “언제, 어디에서, 그리고 왜 내가 너를 만나지?”고 속삭였다.
페기는 “내일 4시에 카페 파이로 오세요. 왜 오시는지는 알잖아요” 하고 대답했다.
페기는 많은 사내들과 섹스를 했지만 파란 눈을 가진 에른스트만큼 자신을 황홀하게 만든 사내는 처음이었다.
그녀는 유부남 이브 탕기와도 사랑에 빠졌지만, 탕기는 하는 짓이 아들 같아서 아버지처럼 어른스러운 에른스트가 훨씬 마음에 들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