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과학과 미켈란젤로의 영혼>(미술문화) 중에서 
 
프라 필리포 리피Fra Filippo Lippi 


프라 필리포 리피Fra Filippo Lippi(1406년경~69)는 버려진 아이로 카르미네 수도원에서 자랐고 1421년에는 수사가 될 것을 맹세했다.
도미니칸 소속 프라 안젤리코와는 달리 그는 마지못해서 하는 탁발수사였으며 수녀 루크레지아 부티와 사랑에 빠져 스캔달을 일으켰고 부티는 그의 아들 필리피노Filippino(1457년경~1504)와 딸 알레산드라Alessandra를 낳았다.
필리피노는 열두 살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아버지로부터 그림을 배웠고 그후 보티첼리에게서 배운 후 피렌체의 유명한 화가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리피는 부티와의 결혼을 허락받았지만 여전히 서명을 할 때 수사로서 '형제 필리포스 Frater Philippus'라고 했다.

바사리에 의하면 리피가 화가가 된 것은 마사초가 카르미네 교회에서 그림을 그리는 것을 보고부터였다.
리피가 1437년에 그린 <타르퀴니아 마돈나 Tarquinia Madonna>는 마사초의 영향을 받아 그린 것이다.
그러나 1440년부터 그의 양식에는 변화가 생겼으며 좀더 선을 사용하면서 장식적 모티프를 선호했다.
그는 <동정녀와 아이 Virgin and Child>의 주제에 집착했으며 이를 둥근 원형tondi에 그렸으며 이런 포맷에 그린 최초의 화가들 중 한 명이었다.
프레스코 화가인 그의 유명한 작품은 1452~66년 프라토 대성당에 그린 성 스데반과 세례 요한의 일대기이다.
리피는 메디치의 후원을 받았으며 사기행위로 투옥되어 고문을 받을 때 메디치가의 도움을 받았다.
리피는 당대의 유명한 화가로 많은 화가들이 그의 영향을 받았고 특히 보티첼리가 그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아마 그로부터 수학한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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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중요 재벌인 미츠이, 미츠비시, 노구치 등은


1929년 10월 뉴욕 증권시장의 주가폭락으로 세계가 경제공황에 빠졌다.
세계대공황은 미국, 영국, 프랑스 등에 비해 취약한 일본 경제에 더 큰 타격을 주었다.
1929~31년 일본의 공장 총생산액은 삼분의 일로 줄었고 1930년 한 해만도 3백여만 명의 노동자가 직장을 잃었다.
일본 농업은 공황에 이어 닥친 농업공황으로 농산물 가격이 폭락함으로써 다른 부문보다도 심한 타격을 받았다.
일본 노동자와 농민은 독점자본가와 지주계급이 공황의 손실을 자신들에게 떠넘기려는 데 대해 격렬히 저항했다.
일제는 정치적·경제적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대륙침략을 감행했다.
일제는 1931년 9월 그들이 조작한 유조구柳條溝의 철도폭파사건을 빌미로 만주를 침략하고 이듬해 괴뢰정권인 만주국을 세웠다.
그 밖에도 상해, 열하를 차례로 침략하고 국제연맹을 탈퇴하는 등 대륙침략의 길로 나섰다.
경성제대 학생들은 반제동맹을 결성하고 행동에 나섰고 일제는 경찰을 풀어 이들을 검거하느라 혈안이 되었다.
윤봉길 의사가 상해에서 일본 천황의 생일축하장에 폭탄을 던진 사건이 일어난 것도 이 무렵이었다.

일제는 만주침략을 개시하면서 조선을 전진기지로 이용하는 동시에 독점자본의 수탈을 안정적으로 보장하고자 했다.
일제는 조선을 대륙병참기지로 삼고 조선의 모든 자원을 끌어내 침략전쟁에 동원했다.
일제는 공황의 위기 속에서 활로를 모색하던 일본 독점자본가들에게 유리한 투자시장을 확보해주는 한편 농업지대인 만주지방을 효율적으로 지배·수탈하기 위해 조선에서 공업화정책을 추진했다.
조선에는 공장법 등을 적용하지 않음으로써 독점자본가들에게 풍부한 노동력을 자유롭게 수탈할 수 있게 해주었다.
일본의 중요 재벌인 미츠이, 미츠비시, 노구치 등은 방직, 화학, 기계, 금속공업, 광업부문에 본격적으로 진출한 후 값싼 전기, 풍부하고 저렴한 원료와 노동력을 독점적으로 이용하여 생산과 유통을 전면적으로 지배해갔다.
현저히 불리한 상황에 처한 조선 자본가들은 일제 자본이 침투하지 않았거나 영세한 생산부문인 술, 누룩공장, 철공소를 경영하거나 양말, 직물제조업, 유기, 옹기 등의 생산에 종사했다.
식민지 공업화정책에 따라 노동자의 수는 급속히 증대했는데 공장, 광산, 토목, 건축 노동자 수만도 1933~38년 5년 동안 2.8배나 늘어났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공황 이전보다 30~50퍼센트 인하된 기아임금을 받으면서 열악한 노동조건 속에서 하루 10시간 이상 혹사당했다.
이들 대부분은 숙련노동에서 배제되어 힘든 육체노동을 강요당했으며 일본인 노동자 임금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임금을 받는 등 민족적 차별을 당했다.

일제는 1936년 8월 군부파시스트인 미나미南次郞를 신임 총독으로 파견하는 한편 조선 민중을 철저히 통제하는 일에 착수했으며 이를 위해 시국계몽운동을 벌이는 동시에 경찰력을 증강하고 그 기구를 개편·강화했다.
1938년에는 조선의 인적·물적 자원을 침략전쟁에 동원하기 위해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을 조직한 후 도, 부·군, 읍·면, 동·리에 지방연맹을, 직장에 직장연맹을 설치했으며 지방연맹 아래에 10호를 단위로 한 애국반을 두었다.
일제는 결국 1940년 9월에 독일·이탈리아와 3국 동맹을 체결하게 되고 이듬해에 진주만을 폭격하는 것으로 태평양전쟁을 일으켜 제2차 세계대전에 가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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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우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과학과 미켈란젤로의 영혼>(미술문화)에서 
 

도나텔로Donatello(Donato di Niccolo 


도나텔로Donatello(Donato di Niccolo, 1386?~1466)는 15세기 유럽을 대표할 만한 조각가였으며 그와 우정을 나눈 친구 예술가들 알베르티, 브루넬레스키, 마사초 역시 빼어난 예술가들이었다.
그는 1404~07년에 기베르티의 조수로 그를 도왔지만 대가 기베르티의 고딕 우아함과는 다른 자신의 양식을 창조했다.
그는 기베르티가 중요하게 여긴 표면을 매끈하게 하고 우아한 선을 두드러지게 하며 감성적 요소를 드러나게 하는 방법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의 천재성은 기베르티처럼 일찍이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서서히 드러났다. 그는 22살 때 기베르티와 상대가 될 만한 자신의 고유한 양식을 보여주었는데, 오르 상 미첼레Or San Michele를 위해 제작한 <성 베드로 St. Peter>였다.
그는 27살 때 <성 마가 St. Mark>를 제작했는데, 매우 강렬한 느낌을 주며 단순했고 나중에 미켈란젤로가 극찬해마지 않았다.

도나텔로는 23때 대성당을 위해 <다윗 David>을 제작했으며 나중에 여러 점의 <다윗>을 제작했다.
그가 제작한 <다윗> 가운데 가장 훌륭한 것은 코시모의 주문을 받아 1430년에 청동으로 뜬 것으로 메디치 궁전 안뜰에 세워졌다.
그는 다윗의 몸을 부드럽게 젊은이의 몸으로 묘사했고 얼굴과 헬멧도 그리스인의 형상을 닮게 하여 르네상스 조각의 특징이 되게 했다.
그는 사실주의 방법으로 제작하지 않고 자신의 상상력을 표현했는데 미켈란젤로의 <다윗>과 마찬가지로 표현적인 작품이 되었다.

도나텔로는 1432년 로마를 잠시 방문하면서 옛 성 베드로 성당을 위해 대리석으로 고전적 닫집 달린 감실을 디자인했다.
로마에서 그는 초상 흉상을 제작하는 방법을 익혀 르네상스의 초기 초상 흉상 제작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제노바 사람 장사꾼이 도나텔로에게 초상 흉상을 주문한 적이 있었다.
그는 도나텔로가 요구하는 돈이 너무 비싸다면 흉상을 제작하는 데 30일이 소요되었으므로 하루에 반플로린($12.50)계산해서 15플로린이면 충분하다고 주장했다.
도나텔로는 흉상을 산산조각이 나게 부수면서 음식물을 겨우 살 만한 돈을 받고 지성을 팔 수는 없다고 말했다.
도나텔로가 피렌체로 돌아간 것은 코시모가 그를 필요로 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역시 코시모를 좋아했다.
예술에 깊은 관심이 있는 코시모는 그의 지성을 높이 샀으며 풍족한 가운데 작업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었다.
코시모는 도나텔로의 자문을 받아 고대 조각, 석관, 아치, 기둥, 대접받침 등을 구입해 메디치 정원을 장식하고 젊은 예술가 지망생들로 하여금 공부하는 데 도움이 되게 했다.
그는 코시모가 아끼는 교회 상 로렌초에 두 개의 설교단을 만들고 청동 릴리프로 장식하면서 여러 장면 가운데 예수의 수난을 함께 장식했다.
그는 또 제단에 성 로렌스St. Lawrence의 흉상을 테라코타로 만들어 장식했으며, 성물 안치소에는 두쌍의 청동 문과 코시모 부모를 위한 단순하지만 아름다운 석관을 제작했다.
코시모가 1464년 세상을 떠나면서 아들 피에로로 하여금 도나텔로를 보살필 것을 당부했으며 피에로는 늙은 도나텔로를 위해 시골에 집을 마련해주었다.
그러나 얼마 후 도나텔로는 피렌체로 돌아와 자신이 사용하던 작업장에서 일했다.
단순한 생활로 일관한 도나텔로는 여든 해의 생을 마감했고 그의 장례식에는 피렌체의 예술가들 모두가 참석했으며 그의 유언대로 그의 유해는 상 로렌초 코시모의 무덤 옆 납골소에 안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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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과학과 미켈란젤로의 영혼>(미술문화)에서   
 
로렌초 기베르티

조각가이자 금 세공인인 로렌초 기베르티Lorenzo Ghiberti(1378~1455)는 1401년 브루넬레스키, 쟈코포 델라 퀘르치아등을 물리치고 상인들의 길드가가 위임하는 일을 맡음으로써 명실공히 피렌체의 걸출한 예술가의 자리를 굳혔다.
길드에서 주문한 것은 피렌체 세례당 한쌍의 문을 금박을 입힌 청동문으로 제작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 문을 1424년에야 완성했다.
이듬해 그는 같은 건물의 또 다른 한쌍의 문을 제작했으며 1452년에 완성했다.
이 커다란 작업을 하기 위해 그는 작업장을 확장해야 했고 많은 피렌체 예술가들을 고용했는데 도나텔로, 마솔리니, 그리고 우첼로가 조수로 그를 도왔다.
기베르티는 피렌체 대성당에도 관련하여 창문의 착색유리, 금 세공, 성골함, 실재 사람 크기의 청동상들을 만들었다.
그는 비평에도 일가견이 있어 많은 글을 남겼는데, 14세기 이탈리아 화가와 조각가들에 관한 것으로 가치 있는 자료로 인정받고 있으며 자서전적인 글도 썼다.

고전적 형상은 건축에서보다는 조각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기베르티가 특히 고전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고전 조각들을 수집하면서 고딕 전통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가 제작한 세례당의 문은 이탈리아 조각가이면서 건축가 안드레아 피사노Andrea Pisano(1290년경~1348/9?)가 제작한 문의 형식을 따른 것이지만 스무 점의 그리스도의 삶에 관한 에피소드와 여덟 점의 성인들에 관한 에피소드들은 우아한 선을 강조하는 고딕 양식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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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영섭은 객관적·사실적 서양미술이


심영섭은 객관적·사실적 서양미술이 주관적·상징적 동양 미술로 돌아가고 있는 것으로 보고 이것이 표현주의 운동으로 가능하게 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을 편 것은 자신의 가치판단에 의한 것으로 그는 서양이 상대적·객관적·과학적 진화의 상태에 있다고 보았으며 이에 반해 동양은 절대적·주관적·본능적 상징의 상태에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루소와 고갱의 작품에 나타난 원시주의가 아시아에 대한 동경으로 간주했을 뿐만 아니라 마티스, 에드바르트 뭉크, 빈센트 반 고흐 등의 작품에서 발견되는 선을 그들이 태어나기 훨씬 전부터 동양인이 추구한 선을 통한 생명의지의 표현과 일치하는 것으로 보고 이를 아시아 미술의 승리로 인식했다.  

심영섭은 현대 세계의 현실을 지배하는 서양 문화의 종말적 한계를 명확히 인식하여 동양 사상과 동양적 생활원리에 입각한 새로운 아시아 미술을 창조하자는 논리를 펴면서 적었다.
“나는 서양미술의 진화가 이미 표현주의에 도달한 것을 아는 동시에, 그 표현주의 미술이 절대적인 주관 확대와 표현창조의 자아적 의욕에서 무한대한 우주와 조화하려는 대담한 혁명의 기세로서 서양의 재래·기성 미술인, 자연의 재현과 인상을 위주로 사상을 돌파하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진화한 서양미술이 동양 미술의 주관 표현과 우주화의 창조원리로 돌아가는 것을 용이하게 알 수 있다.
즉 표현주의는 아세아주의의 출현을 암시해주는 것이다.”

심영섭은 서양미술에 대한 동양 미술의 우월, 사실적·객관적 재현 미술에 대한 상징주의적·주관적 재현 미술의 우위를 강조하면서 서양 현대미술이 동양으로 회귀하고 있다는 주장은 전혀 타당성이 없지만 동양 미술을 재인식하고 서양 양식을 무턱대고 모사할 것이 아니라 자주적인 작품을 창작해야 한다는 의미에서는 주의를 기울일 만하나, 그의 아시아주의 미술론은 일본의 대동아주의에 토대를 두고 무리하게 개진되었다는 점에서는 일본 식민지 정책의 산물로 가치가 없다.
아시아주의를 주창한 사람은 오카쿠라 덴신으로 그는 1903년 런던에서 출간된 『동양의 사상 The Ideals of the East』에서 인도와 중국을 중심으로 한 아시아의 문명은 일본에서 종합되었다고 주장했다.
‘아시아는 하나’라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이 책은 1920년대에 일본에서 『동양의 사상』이란 제목으로 일어로 번역되면서 ‘아시아는 하나’는 1930년대 대동아공영건의 이데올로기의 가장 유명한 캐치프레이즈catch phrase가 되었다.
따라서 이 시기의 서양미술에 대한 논의는 일본 식민지 정책 하에서 일어난 것으로 학술적 기반을 형성하지 못한 채 지속되어 오히려 학문적 성장을 저해했다. 


참조
에드바르트 뭉크Edvard Munch(1863~1944)
노르웨이 화가 에드바르트 뭉크는 고대 북유럽 정신을 현대적으로 해석한 인물로 독일 표현주의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었다.
고갱, 반 고흐, 출루즈 로트렉의 영향을 받은 그는 거의 신경증에 가까운 감정을 드러내는 그림을 그려 후에 출현할 표현주의를 예견했다.
그는 에칭, 석판화, 목판화, 동판화를 많이 제작했는데, 여기에서도 회화에 나타난 폭력성과 히스테리가 표출되었다.
1890년대에 그는 ‘삶과 사랑과 죽음의 시’라는 부제와 함께 ‘인생 프리즈’ 연작 22점을 제작했는데, 자신이 영향 받은 초기 아르누보 양식과 유사한 작품이지만 대부분 아르누보 양식에서는 볼 수 없는 격렬한 감정이 표출되었다.
노르웨이로 돌아온 1908년 이후 그의 구도는 단순해졌으며 색채가 밝아져 활기를 띠게 되었다.
그러나 1920년대 그의 작품은 다시 격렬한 감정으로 넘치게 되었으며 초기의 상징주의로 되돌아갔다.
강렬한 감정을 표현하는 시각적 상징주의에 대한 정열은 수많은 자화상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는 반 고흐와 더불어 표현주의의 창시자였다.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1853~90)
네덜란드 태생 빈센트 반 고흐는 1881년에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고 1890년 스스로 목숨을 끊기까지 10년 동안 많은 걸작을 남겼다.
그는 800여 점의 유화를 그렸고 850점의 소묘를 남겼다.
그가 파리에 온 것은 1886년 2월이었고, 이 시기에 인상주의와 일본 목판화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상징적인 표현력이 풍부한 색채의 가치에 사로잡혀 이런 목적을 위해 색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는 대상을 정확하게 재현하기보다는 자신을 좀 더 강력하게 표현하기 위해 색을 더욱 자유롭게 사용했다.
그의 유명한 작품 <밤의 카페>를 그린 후 그는 동생에게 보낸 편지에 적었다.
“나는 빨강색과 녹색으로 인간의 무시무시한 열정을 표현하려고 했다.
… 보라! 미묘한 분홍, 핏빛 빨강, 포도나무 잎의 색, 루이 15세풍의 감미로운 녹색, 공작석의 녹색, 이런 색의 대조를 통해 여기에 초석硝石 같은 지옥의 암흑과 과열된 분위기 안의 모든 것과 대립한다.
이러한 모든 것을 사용하여 나는 카페 내부에 있는 소용돌이치는 어둠의 힘을 표현하고 싶었다.”

기법에 있어서도 반 고흐는 소용돌이치는 붓질을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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