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영섭은 객관적·사실적 서양미술이


심영섭은 객관적·사실적 서양미술이 주관적·상징적 동양 미술로 돌아가고 있는 것으로 보고 이것이 표현주의 운동으로 가능하게 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을 편 것은 자신의 가치판단에 의한 것으로 그는 서양이 상대적·객관적·과학적 진화의 상태에 있다고 보았으며 이에 반해 동양은 절대적·주관적·본능적 상징의 상태에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루소와 고갱의 작품에 나타난 원시주의가 아시아에 대한 동경으로 간주했을 뿐만 아니라 마티스, 에드바르트 뭉크, 빈센트 반 고흐 등의 작품에서 발견되는 선을 그들이 태어나기 훨씬 전부터 동양인이 추구한 선을 통한 생명의지의 표현과 일치하는 것으로 보고 이를 아시아 미술의 승리로 인식했다.  

심영섭은 현대 세계의 현실을 지배하는 서양 문화의 종말적 한계를 명확히 인식하여 동양 사상과 동양적 생활원리에 입각한 새로운 아시아 미술을 창조하자는 논리를 펴면서 적었다.
“나는 서양미술의 진화가 이미 표현주의에 도달한 것을 아는 동시에, 그 표현주의 미술이 절대적인 주관 확대와 표현창조의 자아적 의욕에서 무한대한 우주와 조화하려는 대담한 혁명의 기세로서 서양의 재래·기성 미술인, 자연의 재현과 인상을 위주로 사상을 돌파하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진화한 서양미술이 동양 미술의 주관 표현과 우주화의 창조원리로 돌아가는 것을 용이하게 알 수 있다.
즉 표현주의는 아세아주의의 출현을 암시해주는 것이다.”

심영섭은 서양미술에 대한 동양 미술의 우월, 사실적·객관적 재현 미술에 대한 상징주의적·주관적 재현 미술의 우위를 강조하면서 서양 현대미술이 동양으로 회귀하고 있다는 주장은 전혀 타당성이 없지만 동양 미술을 재인식하고 서양 양식을 무턱대고 모사할 것이 아니라 자주적인 작품을 창작해야 한다는 의미에서는 주의를 기울일 만하나, 그의 아시아주의 미술론은 일본의 대동아주의에 토대를 두고 무리하게 개진되었다는 점에서는 일본 식민지 정책의 산물로 가치가 없다.
아시아주의를 주창한 사람은 오카쿠라 덴신으로 그는 1903년 런던에서 출간된 『동양의 사상 The Ideals of the East』에서 인도와 중국을 중심으로 한 아시아의 문명은 일본에서 종합되었다고 주장했다.
‘아시아는 하나’라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이 책은 1920년대에 일본에서 『동양의 사상』이란 제목으로 일어로 번역되면서 ‘아시아는 하나’는 1930년대 대동아공영건의 이데올로기의 가장 유명한 캐치프레이즈catch phrase가 되었다.
따라서 이 시기의 서양미술에 대한 논의는 일본 식민지 정책 하에서 일어난 것으로 학술적 기반을 형성하지 못한 채 지속되어 오히려 학문적 성장을 저해했다. 


참조
에드바르트 뭉크Edvard Munch(1863~1944)
노르웨이 화가 에드바르트 뭉크는 고대 북유럽 정신을 현대적으로 해석한 인물로 독일 표현주의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었다.
고갱, 반 고흐, 출루즈 로트렉의 영향을 받은 그는 거의 신경증에 가까운 감정을 드러내는 그림을 그려 후에 출현할 표현주의를 예견했다.
그는 에칭, 석판화, 목판화, 동판화를 많이 제작했는데, 여기에서도 회화에 나타난 폭력성과 히스테리가 표출되었다.
1890년대에 그는 ‘삶과 사랑과 죽음의 시’라는 부제와 함께 ‘인생 프리즈’ 연작 22점을 제작했는데, 자신이 영향 받은 초기 아르누보 양식과 유사한 작품이지만 대부분 아르누보 양식에서는 볼 수 없는 격렬한 감정이 표출되었다.
노르웨이로 돌아온 1908년 이후 그의 구도는 단순해졌으며 색채가 밝아져 활기를 띠게 되었다.
그러나 1920년대 그의 작품은 다시 격렬한 감정으로 넘치게 되었으며 초기의 상징주의로 되돌아갔다.
강렬한 감정을 표현하는 시각적 상징주의에 대한 정열은 수많은 자화상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는 반 고흐와 더불어 표현주의의 창시자였다.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1853~90)
네덜란드 태생 빈센트 반 고흐는 1881년에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고 1890년 스스로 목숨을 끊기까지 10년 동안 많은 걸작을 남겼다.
그는 800여 점의 유화를 그렸고 850점의 소묘를 남겼다.
그가 파리에 온 것은 1886년 2월이었고, 이 시기에 인상주의와 일본 목판화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상징적인 표현력이 풍부한 색채의 가치에 사로잡혀 이런 목적을 위해 색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는 대상을 정확하게 재현하기보다는 자신을 좀 더 강력하게 표현하기 위해 색을 더욱 자유롭게 사용했다.
그의 유명한 작품 <밤의 카페>를 그린 후 그는 동생에게 보낸 편지에 적었다.
“나는 빨강색과 녹색으로 인간의 무시무시한 열정을 표현하려고 했다.
… 보라! 미묘한 분홍, 핏빛 빨강, 포도나무 잎의 색, 루이 15세풍의 감미로운 녹색, 공작석의 녹색, 이런 색의 대조를 통해 여기에 초석硝石 같은 지옥의 암흑과 과열된 분위기 안의 모든 것과 대립한다.
이러한 모든 것을 사용하여 나는 카페 내부에 있는 소용돌이치는 어둠의 힘을 표현하고 싶었다.”

기법에 있어서도 반 고흐는 소용돌이치는 붓질을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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