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과학과 미켈란젤로의 영혼>(미술문화)에서   
 
베네치아 이야기

14세기 말 이탈리아의 최강국은 베네치아 공화국이었다.
11세기 초에 이미 베네치아 상선이 아드리아해, 지중해의 해상권을 장악했으며 바다 위에 떠 있는 이 도시를 유럽의 상업 중심지로 만들었다.
융단, 향료, 단자緞子, 노예 등 동방으로부터 상품이 매일 항구에 유입되었고, 그것들과 교체해 양모제품, 직물들이 배에 적재되었다.
선주의 지혜, 선장의 담력, 외교관의 수완이 조화를 이루어 발칸반도와 소아시아의 시장이 베네치아의 수중에 들어갔고 각지에 무역진흥공관을 세웠다.
무역진흥공관은 한 건물이 아니라 은행, 상점, 여관, 교회 등이 연립하는 한 시가의 총칭으로 면세, 치외법권 등 갖가지 특권을 누렸으며 현지 정부도 베네치아 상인들의 집단거주지에 대해서는 관여하지 않았다.
무역진흥공관의 최고 책임자는 본국 총독이 임명한 관장으로 영사의 업무뿐 아니라 사법권을 행사하며 베네치아인들의 생사 여탈권도 갖고 있었다.
이 전선 기지가 본국에 번영을 가져오게 했으며 베네치아 경제 약진의 초석을 쌓았다.

이와 같은 번영의 우위는 본국의 견고한 정치체제에 의해 가능했으며 지속되었다.
베네치아의 최고 수반은 총독이었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귀족계급의 과두체제였다.
12세기 중엽 이후 35명으로 구성된 대평의회가 총독을 보좌했고 그 외에 6명의 현인으로 소위원회가 있었다.
대평의회는 입법뿐 아니라 정치 군사 문제에 결정권을 행사했으며 총독을 선임 또는 해임할 수 있었으므로 총독은 현인의 보좌 하에 법안을 비준할 뿐, 상징적 존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총독은 국민들로부터 존경을 한 몸에 받았고 신처럼 숭배받았다.
총독은 "지극히 귀한 군주"로 불리었으며 베네치아 총대사교와 상 마르코 대성당 참사를 총독이 지명했다.
총독의 궁전은 금과 대리석, 모자이크로 장식되었고 견직물과 융단을 깔았으며 호화찬란한 점에서 비잔틴 궁전을 능가했다.
총독이 외출할 때면 북과 종을 울려 모든 시민에게 알렸다.
악대의 고수, 기수, 고위 관리가 선두에 서고 그 뒤로 호사한 의상을 입은 총독이 탄 금사와 비단으로 덮인 수레가 나타난다.
대평의회 회원들이 총독의 뒤를 따르고 고관, 현인, 외국 사절, 대성당 참사들도 행렬에 참가했다.

베네치아의 원로원
7세기로 거슬러올라가면 베네치아와 주변 섬들의 주민들은 일치단결하며 민주주의적으로 자치하며 살았다.
그후 자치권이 민중에게서 사라졌지만 총독의 외출에 대한 의식은 소박한 민중의 민주주의에 대한 향수를 달래주었다.
동로마제국의 지배에서 벗어난 직후 총독은 민중 집회에 의해 선출되었다.
그러나 계급분화가 생기면서 정책 결정권이 일부 부유층 시민의 손에 넘겨졌고 민주주의는 자취 없이 사라져버렸다.
베네치아는 13세기 말에 과두지배의 색채를 강화해갔지만 여전히 법률상으로는 모든 시민이 대평의회에 선출될 수 있는 권리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현실은 부유한 200~300명 가족의 은행가, 선주, 대상인이 의석을 독점하고 금권 귀족제로 만들어버렸다.
이 도시에서는 혈통의 귀족보다는 금전의 귀족이 판을 쳤다.
이러한 독점은 소외된 시민들에게 불만을 안겨주었으므로 이를 합법화하고 정당화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1297년 총독은 의원에 대한 자격을 규정하는 법안을 평의회에 제출했는데, 여태까지 선거로 공직에 취임한 자와 그의 자손의 자격을 제한하는 내용으로 대평의회가 이 법안을 가결한 후 유자격자의 이름을 정부에 써 보냈다.
1319년에 의원 정수를 대폭 증원하는 한편 매년 행하던 개선제도를 폐지했다.
그 결과 대평의회는 규모가 커져 활동하기 어렵게 되자 그 기능의 대부분을 정부기관에 위임하게 되었으며 따라서 과두지배가 한층 강화되었다.
원로원이 생긴 것은 13세기 중엽으로 처음에는 사무적 기능에 불과했다.
그것이 14세기에 들어오면서 대평의회의 위탁을 받아 정치지도를 담당하게 되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원로원의 권한은 확대되어 항해, 통상, 국방에 관한 모든 문제를 취급하게 되었고 콘스탄티노플 이 외에 파견하는 대사의 임명권까지 맡게 되었다.
원로원의 중요한 임무는 외교로서 화전의 결정, 조약이나 동맹 체결, 대사에 대한 훈령 모두 원로원의 권한에 속했으며, 대사에게는 매주 원로원에 보고할 의무가 있었고, 첩보원의 메모는 원로원에서 낭독되었다.
지금도 남아 있는 보고 기록들을 보면 당시 유럽 제국의 궁정의 상황을 세밀히 묘사했으므로 베네치아와 이들 제국과의 관계를 생생하게 알 수 있다.
여하튼 베네치아 공화국의 전권이 원로원에 집중되었다.

15세기에 이르러 베네치아는 이탈리아 반도에서도 가장 번영하고 화려한 도시로 발전했다.
상인 귀족들의 꿈과 같은 아름다운 건축물들이 대운하의 연안에 연립되어 독특한 매력을 풍기는 도시로 발전했다.
화사한 나선형의 둥근 기둥, 장미의 창을 등지고 섬세하고 우아한 발코니, 나란히 나 있는 아름다운 작은 창문들, 창문에 드리워진 편물 레스의 경쾌함, 세밀한 기교에 의한 금속세공이 환상적 화려함을 주었다.
비잔틴과 고딕, 세련된 극에 달한 두 양식이 여기에서 완벽하게 융화되고 있었다.
내부의 화려함도 외관에 손색이 없다.
실내에는 화려한 가구들이 늘 놓여 있었으며, 벽은 밝고 경쾌한 색의 모자이크로 장식되었고, 직물로 짠 벽걸이, 둥근 천장에는 프레스코화, 벽에 걸린 그림들의 액자는 금으로 도금되어 빛에 강렬하게 반짝였다.
많은 부분이 피렌체의 저명한 예술가들의 솜씨였다.

베네치아는 15세기 미술 최대 전당들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이런 명성을 쌓기 위해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들은 벨레니 일가의 작업장에 속한 사람들이었다.
이 공방의 창시자 야코포 벨리니Jacopo Bellini(1400년경~70/1)는 두 아들 젠틸레Gentile(1429?~1507)와 조반니Giovanni(1430?~1516)와 함께 공방을 운영했고 그는 안드레아 만테냐Andrea Mantegna(1431~1506)의 장인이기도 했다.
젠틸레 다 파브리아노Gentile da Fabriano의 문하에서 회화를 수학하면서 피렌체에서 작업한 적이 있는 벨리니는 각지를 편력하며 수업을 연마한 후 베네치아에 돌아와 공방을 차리고 아들들을 화가로 육성했다.
두 아들은 아버지와 더불어 당대에 가장 유명한 화가가 되었다.
야코포 벨리니는 정부의 어용화가이기도 했으며 역대 총독들의 초상을 그가 독점해서 그렸다.
그러나 오랫동안 장중한 늙은이들을 그리는 데 염증을 느낀 그는 고대 신화에서 주제를 구하여 은유적인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의 <신들의 축제>에는 요염한 미녀들과 반나체의 취한들이 풍경 속에 그려져 있어 이교적이며 관능적 장면으로 15세기 베네치아의 풍속을 충실히 묘사한 듯했다.
큰 아들 젠틸레는 성 조반니 교회로부터 기적의 치유, 성체의 행렬, 성 십자가 단편의 발견을 세 개의 판화로 그리라는 주문을 받았으며 그림이 빼어나서 사람들이 그것들을 보려고 몰려들어 상 마르코 광장에 줄을 섰다고 한다.
그의 마지막 작업은 <알렉산드리아에서 설교하는 성 마르코>였으며 작업 도중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젠탈레의 인물 묘사와 원근법은 빼어났으며 만테냐가 초기에 그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았다.

베네치아의 인문주의는 피렌체와 같이 일찍이 발전되지는 못했고 또한 페렌체 만큼 많은 학교와 아카데미를 갖고 있지는 못했지만 열의에 있어서는 결코 뒤지지 않았으며 15세기에는 문화와 예술에 있어서 더욱 더 진전이 있었다.
책을 소장하지 않은 귀족이 없었고 어느 관저에서도 다투어 문인과 시인에게 문을 활짝 열어놓았고 귀부인들은 신학자와 철학자들을 초대해 강의를 들었다.
학교는 서민 자제들에게도 문호를 개방했다.
활판인쇄의 발전에 따라 문화 보급의 폭이 넓혀졌으며 고금의 명저들이 일반 독자의 손에 들어오기 한결 수월했다.
15세기 후반 베네치아는 인쇄출판의 최대 중심지가 되었고 출판물들은 인쇄의 선명도, 지질의 우량함, 아름다운 자체로 호평받았다.
이 세기 말에 베네치아에서 1만 2천 835점의 서적이 간행되었다.
대부분 알드 마누티오의 손에 의해 출판되었다.
이 천재적 인쇄출판업자는 1449년 출생으로 어려서 로마에서 성장했고 라틴 문학에 정통했다.
그후 페라라에 살면서 그리스 고전의 번역에 치중하면서 풀라톤, 키케로에 관해 강연함으로써 박식함을 피력하기도 했다.
그는 한때 교육에 열을 올려 많은 제자를 가르쳤다.
마누티오의 학식에 감복한 비고는 그의 족하 리오네로와 이르베르트의 교육을 그에게 맡겼고 두 사람이 훗날 마누티오의 출판사업 개시에 자금을 제공했다.

그리스 고전의 염가판을 출판해 만인이 애독하게 하는 것이 마누티오의 이상이었으나 다만 값을 싸게 한다고 되는 일은 아니었다.
원전의 여러 사본의 비교 연구가 큰 작업이었고 판매시장도 개척해야 했다.
그가 베네치아로 이주한 것은 아마도 이런 이유에서였던 것 같다.
그는 고전학자들을 베네치아에서 동원하여 원전 비판과 주석을 청탁했다.
그의 사업은 성공해 사후 아들에게 유업으로 계승하게 했다.
활판인쇄가 이와 같이 신속하고 광범하게 위력을 발휘한 도시는 메디치 치하의 피렌체뿐이었다.
15세기의 유럽에서 문화와 예술 분야에서 베네치아와 대항할 수 있었던 도시는 피렌체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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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희는 우리나라 최초의 비평가이기도 했다 


김정희의 학문과 예술에 걸친 비범한 재능은 일찍부터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어려서 박제가의 지도를 받은 그는 약관의 나이에 청나라의 신유들과의 학문적 교유를 나눌 정도가 되었다.
24세 때에 생원시에 급제한 그는 이듬해인 1810년 호조참판이 된 부친 김노경이 동지겸사은부사冬至兼謝恩副使로 연경에 갈 때 함께 수행하여 노경의 대학자 옹방강翁方綱과 완당을 만나 사제지의를 맺었다.
그 후 평생 이들과 학예의 연을 이어가면서 그는 자신의 학문을 더욱 발전시켜 독자적인 일가를 이루었다.

한편 당시 정치세력에 힘입어 호조판서, 한성판윤, 예조판서, 홍문관 제학, 병조판서 등 고위 관직을 두루 거친 김노경이 73세로 1838년에 작고한 후 김정희 일문의 승승장구를 질시한 안동김씨 세력이 정치적 보복을 가하여 김정희 부자를 탄핵함으로써 김노경은 추삭되고 김정희는 제주로 위리안치圍籬安置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그는 55세인 1840년부터 9년 동안 제주도에서 유배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 유배시절에 그는 한문연구에 잠심하고 예도에 몰두하여 오히려 환로宦路와 속사速寫에 급급하느라 미처 보지 못하였던 많은 책을 읽게 되었으며 익히지 못했던 서화의 제체諸體를 체득할 수 있어 학문과 예술은 그 깊이를 더하게 되었다. 

신위는 시와 그림을 한 가지 이치로 통일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김정희가 그의 화론을 받아들였다.
김정희는 대원군 이하응의 난 그림에 대해 말했다.

“이하응은 난을 치는 것에 깊이 들어가 있는데, 대개 그 타고난 기틀이 맑고 신묘하여 그 묘처에 가까이 가 있는 바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보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이 일 분의 공력일 뿐이다.”

김정희는 회화를 그 사람의 소양, 즉 인격, 학문, 사상 등을 표현하는 것으로 보고 신묘에 이르기 위해서는 학문의 도야, 기법의 수련을 거쳐 “그 나머지 일 분”을 깨우칠 때 가능하다고 보았다.
이는 오늘날의 화가들에게도 귀감이 되는 충고로 당시 엄격한 형식에 치우쳤던 고전주의, 자연주의, 사실주의를 비판한 것이다.
그는 난을 그리기가 가장 어렵다며 “산수, 매죽梅竹, 화훼花卉, 금어禽魚는 옛날부터 잘하는 사람이 많았다”고 했다.
꽃을 예로 들어 그는 꽃의 향까지도 그려야 한다면서 『이심암의 매화소폭시 뒤에 주제하다』에서 “그대는 못 보았나, 시 속의 향이 바로 그림 속의 향일진대, 꽃 그려도 향 그리기 어렵다 말을 마소”라고 했다.
김정희는 우리나라 최초의 비평가이기도 했다.
그는 강이오의 매화 그림을 논하면서 말했다.

“… 여과아천女戈牙川 글자 각 모양 제대로 나타나, 굳세고 부드럽고, 묽고 진한 것이 어찌 그리도 알맞으냐.
가지 하나가 담을 넘어온 것이 가장 재미스러워, 솔 언니 대 동생 찾을 것이 무어냐.”

김정희는 먹과 색채를 나누어 놓았지만 편견을 갖고 있지 않았다.
품격의 높고 낮음을 논하면서 『제조희룡화련 題趙熙龍畵聯』에서 “그 뜻”만 안다면, “비록 청록이나 지금 어느 색채를 쓴다 해도 좋다”고 했다.
난을 그리는 기법에 관해서는 삼전三轉의 묘법을 주장했다.
“난을 치는 데는 반드시 세 번 궁글리는 것으로 묘법을 삼아야 하는데, 이제 네가 그린 것을 보니 붓을 한 번 쭉 뽑고 끝내 버렸구나.
꼭 삼전 하는 것을 힘써 익혔으면 좋겠다.”

특기할 점은 김정희의 제자 우봉 조희룡은 김정희의 문인화 전통 회화론에 반발했다.
그는 서예의 작품성은 결정적으로 손끝의 능력에 다렸다고 주장함으로써 스승의 내용주의 서화미학에 이의를 제기했다.
그는 말했다.

“글씨와 그림은 수예手藝에 속하는 것이어서 그 기술이 없으면 총명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이것을 종신토록 배워 이룰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서예의 본질은) 손끝에 있는 것이지, 가슴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주장은 원론적으로 북송 이래로 내려오는 문인화 전통 이론을 거부하는 것이어서 김정희는 조희룡의 난초 그림에 혹평을 가했다.
“난을 그리는 데 있어서는 화법을 가장 꺼려한다.
조희룡이 내 난초법을 배웠으나 끝내 화법으로만 나아가는 길을 면치 못하였다.”

김정희가 사란寫蘭의 법에 관해 한 말은 형사적形似的 표현을 위한 준칙을 제시한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난초를 그릴 적에는 반드시 세 번 꺾어 돌려야 묘미가 생긴다.
지금 네가 그린 난초를 볼 적에 한 번 붓을 쭉 뽑아내다 멈추고 말았으니, 모름지기 세 번 꺾어 돌리는 곳에 정신을 들이는 거의 가장 묘한 법이다.
그런데 요즈음 난초를 그리는 자는 모두 이 세 번 돌리는 묘한 이치를 알지 못하고 제멋대로 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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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과학과 미켈란젤로의 영혼>(미술문화) 중에서 
 
메디치 집안 이야기

1345년 친토 브란디니와 아홉 명이 사형에 처해졌다.
막노동을 하는 자들로 단체를 결성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1368년에는 소시민들이 혁명을 시도했지만 진압되었다.
십 년 후에는 촘피반란tumulto dei Ciompi(모직에 보플을 일으키는 직공들의 반란)이 미첼레 디 란도에 의해 일어났고 그는 프로레타리아 단체를 결성한 후 단체의 결성을 금하는 법을 폐지시켰다.
그러나 1382년 무력으로 이 반란도 진압되었다.
피렌체는 촘피반란 이전의 상태로 돌아갔고 대시민들이 다시금 지배권을 장악했다.
그들은 시그노리아Signoria를 결성했는데 시그노리signori(혹은 젠틀맨) 8명으로 구성된 최고위원회로 시그노리는 길드의 지도자들이었다.
그들은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들의 이름을 적어 주머니에 집어넣고 제비뽑기식으로 뽑힌 사람들이다.
8명 가운데 4명은 반드시 대길드 출신이어야 했고 나머지 4명은 소길드 출신이었다.
이들 8명이 자신들 가운데 한 사람을 "정의의 기수 gonfaloniere di giustizia"로 선출했는데 달리 말하면 법집행관이다.
21개의 길드 가운데서 대길드에서 4명, 소길드에서 4명을 각각 선출하여 자문위원회인 시의회Consiglio del Popplp를 결성했다.
그리고 모든 길드 멤버들로 코뮌회Consiglio del Comune가 구성되었으며 3천 명에 이르는 이들에게는 8명으로 구성된 시그노리 최고위원회가 제출한 안건에 대해 찬반 투표밖에 할 수 없었다.

종전과 비교해서 달라진 점은 정치권력이 전체 시민계급에 의해서가 아니라 몇몇 부유한 집안에 의해서 행사되고 또한 그들이 장악한 권력이 심각하게 위협을 받지 않게 된 것이다.
이로부터 한 세기 동안 이들 부호계급은 자신들이 위험하다고 느끼고 혁명적 운동으로 간주되는 일체의 정치적 운동을 지체 없이 그것도 힘들이지 않고 진압했다.
3천 명의 상업계층 사람들이 8명의 시그노리들에게 도전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메디치가의 유래를 찾을 수 있는 가장 오래된 인물은 1201년 코뮌 회의의 멤버 치아리시모 데 메디치이다.
메디치란 이름이 어떻게 유래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의사란 뜻의 이 말과 메디치가가 한때 메디컬 길드에 소속되어 있었음을 들어 조상이 의사였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윌 두란트 같은 저명한 학자는 그것만으로는 증거가 불충분하다고 본다.
코시모의 고조할아버지 아베라르도 데 메디치가 가문을 일으킨 장본인으로 그는 대담한 사업과 명민한 재정관리로 큰 돈을 벌었으며 1314년에 도시장관gonfaloniere에 기용되었다.
1378년에는 아베라르도의 손주조카 살베스트로 데 메디치가 도시장관에 기용되어 가문을 빛냈으며 살베스트로의 손주조카 조반니 디 비치 데 메디치가 1421년에 도시장관애 기용되어 메디치가를 사람들의 사랑받는 가문이 되게 만들었다.
조반니 디 비치는 1428년 세상을 떠나면서 아들 코시모에게 훌륭한 가문과 함께 토스카니에 179,221플로린의 재산을 남겨주었으며 이 돈을 달러로 환산하면 448만 525달러에 해당한다.
이때 코시모의 나이 39살로 충분히 재산을 관리할 수 있었다.

코시모는 농장 그리고 실크와 방모사 제품을 생산하는 공장을 상속받아 실크와 방모사 제품을 러시아, 스페인, 스코틀랜드, 시리아 등 이슬람과 기독교 국가들에 수출했으며 터키인이 제조한 제품들을 수입해다 팔았다.
그는 동양에서 양념, 알몬드, 설탕 등을 헐값에 사들여 유럽에 비싸게 팔아 큰 이익을 챙겼다.
코시모는 사업에 전념하면서 정치에도 관심을 가져 10인 전쟁위원회Dieci(War Council of Ten)의 멤버가 되었고, 피렌체가 루카Lucca로부터 전쟁에 승리하는 데 일조했으며, 전쟁 기간중 거액을 정부에 빌려줬다.
코시모의 영향력 하에서 시민계급 일부가 적극적인 정치적 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으며 경제적 특권을 누리며 정부 권력의 주축을 형성해 최소한 시민계급의 테두리 안에서는 어느 정도 사회정의를 실현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기본법은 지배계급의 이익을 위해 변동되는 일은 없었고, 오히려 악용되었으며, 투표함은 조작되었고 관리들은 매수되거나 공갈 협박을 받아 행정장관들은 로보트와도 같았다.
피렌체의 정체는 문벌회사의 우두머리에 의해 지배되는 비공식적 독재정치 체제였다.
이 가문의 우두머리는 외부적으로는 일개 시민으로 자처했으나 실제에 있어서는 형식뿐인 공화국 정치체제 뒤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코시모는 인기 있는 사업가이면서 정치인이었지만 그를 시기한 정적에 의해 추방되어 망명의 길을 떠나야 했다.
리날도 데글리 알비지가 1433년 코시모를 몰아내고 공화국의 독재자가 되었다. 리날도는 행정장관 베르나르도 구아다그니에게 코시모를 체포하라고 명령했고 베르나르도는 코시모를 베키오 궁정에 구금시켰다.
시그노리를 장악한 리날도가 코시모를 사형에 처할 것이 분명했지만 코시모는 베르나르도를 1천 두카트(약 2천5백 달러)에 매수해 아들과 심복들을 데리고 피렌체를 떠나 베네치아로 망명했다.
그곳에는 그를 반기는 많은 친구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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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위는 황산 김유근의 <소송단학도>를 보고 말했다

문인화의 사상과 주제와 화풍 등 전반에 걸쳐 영향을 받은 조선 말기의 이런 회화경향은 사대부 문인인 추사 김정희에 의해 선도되었으나 그 실행세력은 18세기의 조선 후기를 통해 크게 성장한 여항문인들이었다.
여항문인이란 역관, 의원 등 기술직 중인과 중인 출신 중심으로 형성된 비양반 계층의 시인들을 말한다.
이들은 조선 후·말기를 통해 문필과 관련된 왕정실무를 담당하면서 배양된 한문학 실력을 토대로 사대부들에 버금가는 새로운 문화 담당층으로 성장·활약했다.
특히 19세기에 이르러 사대부 문화권 진입을 위한 문학운동의 성공과 이를 통해 획득된 자신감의 기반 위에서 그동안 사대부 문인들에 의해 독점되어 오던 중세 문인문화 전개의 중추적 구실을 하게 되었다.
여항문인들은 문화적 측면에서 사대부 문인들과 동렬에 오르게 되면서 문인문화의 묵수와 강화에 앞장섰으며 이에 수반하여 갖추어야 할 사대부 문화 중 하나인 감상물 회화의 창작과 향유활동에도 적극 참여했다.

김정희는 만 권 서적을 읽거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흉중일기胸中一氣 문자향文字香과 서권기書卷氣를 그림에 표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소양과 사의를 중시했으며 기교를 익히기 위해서는 고단한 수련이 필요하지만 단순히 형상을 비슷하게 그리는 것은 창작이 될 수 없다고 제자들에게 가르쳤다.
선대 대가의 화풍을 답습하거나 판에 박은 자연주의를 그는 비판했다.
그에 의해서 본격적으로 회화란 무엇인가 하는 본질적인 질문이 제기된 것이다.
그는 자신이 추구한 세계를 신기神氣 혹은 유가에서 말하는 사물의 이치로부터 얻은 깨달음, 선가의 ‘선지禪旨의 오묘한 것’으로 표현했다.
그것을 그는 ‘그 나머지 일분一分’이라고 했다.
그는 『제석파난권 題石坡蘭卷』에서 적었다.

“비록 구천구백구십구 분에까지 이를 수 있다 하여도 그 나머지 일 분은 가장 원만하게 이루기 힘드니, 구천구백구십구 분은 거의 모두 가능하나 이 일 분은 사람의 힘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며, 역시 사람의 힘 밖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다.”

앞서 강세황은 진경산수화가 실재 경관을 닮아야 한다고 강조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선의 진경화풍이 획일화·상투화되었다고 비판했는데, 김정희의 말로 하면 ‘그 나머지 일분一分’이 빠진 것으로 작가의 소양이 표현되어야 한다는 데서 김정희는 강세황의 회화론에 동조한다.
김정희의 회화론은 강세황의 제자로서 문인화가 신위의 것을 따랐음을 알 수 있는데 신위는 사대부 문인 황산 김유근의 <소송단학도 疎松短壑圖>를 보고 말했다.

“… 황산의 영특한 그 재주는
시와 그림이 한 가지 이치로 통했구나.
먹칠하여 늘어놓으면 그림이 되고
글자로 모아놓으면 시가 된다.
참 정신은 감추고 보여주지 않으니
그 묘한 법은 당신만이 알고 있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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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과학과 미켈란젤로의 영혼>(미술문화) 중에서 
 
피렌체 이야기

프랑스 작가 스탕달Stendhal은 피렌체를 가리켜 "중세의 런던 London of the Middle Ages"이라고 했다.
이탈리아에서 가장 상업이 발달하고 생동감이 넘치는 도시였기 때문이다.
1343년 피렌체 인구는 9만 1천 5백 명이었고 레오나르도가 1470년 그곳으로 갔을 때는 15만 명이 넘었다.
인구의 약 사분의 일은 산업노동자들이었다.
13세기에는 텍스타일이 발달하여 200여 개의 공장에서 3만 명의 남자와 여자가 일했다.

피렌체에는 부호들이 많았으며 막강한 제력을 가진 가문으로 바르디Bardi, 페루지Peruzzi, 스트로지Strozzi, 피티Pitti, 그리고 메디치Medici를 꼽을 수 있었다.
피렌체의 어느 가문은 영국 왕 에드워드 3세Edward III에게 136만 5천 플로린florins(3천 412만 5천 달러에 해당함)을 빌려줬다가 왕이 돈을 갚지 못하자 1345년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플로린은 피렌체의 동전으로 앞면에는 피렌체를 상징하는 백합꽃이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피렌체의 수호 성인 성 요한이 새겨져 있었다.
플로린은 피렌체가 자랑하는 화폐로 매우 안정된 통화수단이었다.
피렌체는 13세기부터 15세기까지 명실공히 유럽의 재정적 수도였다.
유럽 통화에 대한 외환환율이 피렌체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화물을 운송하는 데 대한 보험이 페렌체에서는 일찍이 1300년부터 생겼고 영국에서 이 제도가 생긴 건 1543년에 와서였다.
1200년대 후반에 이미 피렌체와 베네치아 그리고 제노바에서는 복식부기를 사용했다.
1345년 피렌체 정부는 양도가 가능한 채권을 5%의 이자로 발행했다.
1400년의 피렌체 정부의 국고는 엘리자베스 여왕 전성기의 영국 국고보다 많았다.

피렌체는 길드의 도시이기도 했는데, 7개의 대길드arti maggiori(greater guilds)와 14개의 소길드arti minori(minor trades)가 있었다.
Arti란 말은 arts 혹은 trades란 뜻이다.
7개의 대길드는 의복제조, 모직제조, 실크제품제조, 모피제조, 금융, 의사와 약사, 그리고 상인 판사 공증인들의 길드였으며, 14개의 소길드는 옷감, 양말, 푸줏간, 제과, 포도주, 청량음료, 마구, 병기, 대장업, 열쇄제작, 목공업, 투숙업, 벽돌과 돌깍기, 그리고 혼용길드로 여기에는 오일, 돼지고지, 로프제작이 포함된다.
21개의 길드 아래에 72개의 유니온이 있었고 투표권이 없는 노동자들로 구성되었다.
유니온 아래에는 막노동을 하는 수천 명의 노동자들이 있었으며 그들에게는 조직을 결성하는 것이 금지되었고 모두 빈곤층이었다.
이들 아래에는 노예들이 있었다.
7개의 대길드에 소속된 사람들이 정치력을 행사했으며 이들은 포폴로 그라소popolo grasso(살찐 혹은 잘 먹는 사람들)로 대시민들이었고 나머지는 포폴로 미누토popolo minuto로 소시민들이었다.

피렌체를 부호들이 통치했으며 길드의 장관prior이란 기관을 통해 권력을 행사했다.
이 기관은 공화국의 모든 정치기구와 행정기구를 총망라한 하나의 통치기구였다.
이 기관이 형식상으로 길드를 대표하는 기관이었던 만큼 피렌체는 길드의 도시였다.
투표권은 어느 길드에라도 소속된 사람에게만 주어졌으며 공민권은 공적으로 인정된 길드의 소속 여부에 따라 결정되었다.
어느 길드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은 사람은 공민이랄 수 없었다.
길드의 지배권은 7개의 대길드를 통해 연합세력을 이룬 자본가적 시민계급의 독재에 맡겨졌다.

주목할 만한 점은 피렌체의 경제적 대립관계는 대부분의 독일 도시에서처럼 길드와 체계화되지 못한 도시의 시민계급 사이에서가 아니라 직종이 상이한 길드 상호간에 일어났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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