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희는 우리나라 최초의 비평가이기도 했다
김정희의 학문과 예술에 걸친 비범한 재능은 일찍부터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어려서 박제가의 지도를 받은 그는 약관의 나이에 청나라의 신유들과의 학문적 교유를 나눌 정도가 되었다.
24세 때에 생원시에 급제한 그는 이듬해인 1810년 호조참판이 된 부친 김노경이 동지겸사은부사冬至兼謝恩副使로 연경에 갈 때 함께 수행하여 노경의 대학자 옹방강翁方綱과 완당을 만나 사제지의를 맺었다.
그 후 평생 이들과 학예의 연을 이어가면서 그는 자신의 학문을 더욱 발전시켜 독자적인 일가를 이루었다.
한편 당시 정치세력에 힘입어 호조판서, 한성판윤, 예조판서, 홍문관 제학, 병조판서 등 고위 관직을 두루 거친 김노경이 73세로 1838년에 작고한 후 김정희 일문의 승승장구를 질시한 안동김씨 세력이 정치적 보복을 가하여 김정희 부자를 탄핵함으로써 김노경은 추삭되고 김정희는 제주로 위리안치圍籬安置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그는 55세인 1840년부터 9년 동안 제주도에서 유배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 유배시절에 그는 한문연구에 잠심하고 예도에 몰두하여 오히려 환로宦路와 속사速寫에 급급하느라 미처 보지 못하였던 많은 책을 읽게 되었으며 익히지 못했던 서화의 제체諸體를 체득할 수 있어 학문과 예술은 그 깊이를 더하게 되었다.
신위는 시와 그림을 한 가지 이치로 통일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김정희가 그의 화론을 받아들였다.
김정희는 대원군 이하응의 난 그림에 대해 말했다.
“이하응은 난을 치는 것에 깊이 들어가 있는데, 대개 그 타고난 기틀이 맑고 신묘하여 그 묘처에 가까이 가 있는 바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보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이 일 분의 공력일 뿐이다.”
김정희는 회화를 그 사람의 소양, 즉 인격, 학문, 사상 등을 표현하는 것으로 보고 신묘에 이르기 위해서는 학문의 도야, 기법의 수련을 거쳐 “그 나머지 일 분”을 깨우칠 때 가능하다고 보았다.
이는 오늘날의 화가들에게도 귀감이 되는 충고로 당시 엄격한 형식에 치우쳤던 고전주의, 자연주의, 사실주의를 비판한 것이다.
그는 난을 그리기가 가장 어렵다며 “산수, 매죽梅竹, 화훼花卉, 금어禽魚는 옛날부터 잘하는 사람이 많았다”고 했다.
꽃을 예로 들어 그는 꽃의 향까지도 그려야 한다면서 『이심암의 매화소폭시 뒤에 주제하다』에서 “그대는 못 보았나, 시 속의 향이 바로 그림 속의 향일진대, 꽃 그려도 향 그리기 어렵다 말을 마소”라고 했다.
김정희는 우리나라 최초의 비평가이기도 했다.
그는 강이오의 매화 그림을 논하면서 말했다.
“… 여과아천女戈牙川 글자 각 모양 제대로 나타나, 굳세고 부드럽고, 묽고 진한 것이 어찌 그리도 알맞으냐.
가지 하나가 담을 넘어온 것이 가장 재미스러워, 솔 언니 대 동생 찾을 것이 무어냐.”
김정희는 먹과 색채를 나누어 놓았지만 편견을 갖고 있지 않았다.
품격의 높고 낮음을 논하면서 『제조희룡화련 題趙熙龍畵聯』에서 “그 뜻”만 안다면, “비록 청록이나 지금 어느 색채를 쓴다 해도 좋다”고 했다.
난을 그리는 기법에 관해서는 삼전三轉의 묘법을 주장했다.
“난을 치는 데는 반드시 세 번 궁글리는 것으로 묘법을 삼아야 하는데, 이제 네가 그린 것을 보니 붓을 한 번 쭉 뽑고 끝내 버렸구나.
꼭 삼전 하는 것을 힘써 익혔으면 좋겠다.”
특기할 점은 김정희의 제자 우봉 조희룡은 김정희의 문인화 전통 회화론에 반발했다.
그는 서예의 작품성은 결정적으로 손끝의 능력에 다렸다고 주장함으로써 스승의 내용주의 서화미학에 이의를 제기했다.
그는 말했다.
“글씨와 그림은 수예手藝에 속하는 것이어서 그 기술이 없으면 총명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이것을 종신토록 배워 이룰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서예의 본질은) 손끝에 있는 것이지, 가슴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주장은 원론적으로 북송 이래로 내려오는 문인화 전통 이론을 거부하는 것이어서 김정희는 조희룡의 난초 그림에 혹평을 가했다.
“난을 그리는 데 있어서는 화법을 가장 꺼려한다.
조희룡이 내 난초법을 배웠으나 끝내 화법으로만 나아가는 길을 면치 못하였다.”
김정희가 사란寫蘭의 법에 관해 한 말은 형사적形似的 표현을 위한 준칙을 제시한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난초를 그릴 적에는 반드시 세 번 꺾어 돌려야 묘미가 생긴다.
지금 네가 그린 난초를 볼 적에 한 번 붓을 쭉 뽑아내다 멈추고 말았으니, 모름지기 세 번 꺾어 돌리는 곳에 정신을 들이는 거의 가장 묘한 법이다.
그런데 요즈음 난초를 그리는 자는 모두 이 세 번 돌리는 묘한 이치를 알지 못하고 제멋대로 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