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빈치의 과학과 미켈란젤로의 영혼>(미술문화)에서  
  

대단한 상상력의 소유자, 미켈란젤로

콘디비에 의하면 미켈란젤로는 "대단한 상상력의 소유자"였다.
그래서 "미켈란젤로는 자신이 마음 속에 품은 관념들을 손이 제대로 전하지 못한다면서 자신이 제작해놓은 작품들에 대해 늘 만족해 하지 못하고 낮게 평가했다"는 것이다.
미켈란젤로가 추구한 미는 형이상학적 미였으므로 눈으로는 감지되지 않고 정신으로서만 감지될 뿐이다.
그에게 모든 미의 근원은 신이었다.

그는 말했다.
"그러나 하늘에 살고 있는 이 신적 존재는
다른 존재들을 아름답게 해줄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함으로써 그 자신이 더욱 더 아름다워진다."

그는 예술을 예술가가 천상으로부터 부여받은 선물로 보았다.
"... 만약 예술을 천상으로부터 부여받을 수만 있다면
예술은 자연을 능가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신의 선물을 통해 예술가는 조각상을 새기기 위한 돌에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게 된다.
"어떤 이가 얼굴과 행동거지에
예술가로서의 신적 기운이 서려 있다면
비록 하찮고 보잘 것 없는 모델을 놓고서라도
그는 정신과 손으로 돌에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다."

그에게는 물질의 부분인 돌 자체는 상상력이 거기에 작용하지 않는 한 쓸모 없는 죽은 상태이다.
"펜과 잉크에서
숭고한 양식, 하찮은 양식, 평범한 양식이 나오듯
대리석에서도 조각가의 재능 여하에 따라서
훌륭한 형상과 보잘 것 없는 형상이 생겨난다."

이상과 같이 미켈란젤로의 예술론은 그의 시를 통해 알 수 있는데, 그의 조각이론은 다음의 시에 나타나 있다.
"아무리 위대한 예술가라 하더라도
대리석 덩어리 안에 어떤 관념이 잠재해 있어야
손의 힘으로 정신에 따라
그 관념을 돌로부터 끄집어낼 수 있는 것이다."

바사리는 "미켈란젤로는 인체의 형상을 만드는 데 있어 자연이 제공해줄 수 없는 전체로서의 조화로움, 우아함이 깃든 조화로움만을 추구한 결과 9등신, 10등신, 심지어는 12등신까지의 비례법을 적용하곤 했다"고 적었다.
이는 미켈란젤로가 나중에 가서 미의 어떤 일정한 기준에 무조건 따르기보다는 상상력과 개별적인 영감에 얼마나 의존했는가를 입증해준다.
건축에 관한 미켈란젤로의 사고 또한 이와 같았는데, 바사리는 <비술가 열전>에 적었다.
"비트루비우스와 고대인들이 해놓은 일에 따라 그리고 내려오는 관례에 따라 사람들이 그동안 완성시켰던 척도, 규칙이 좌우하는 일로부터 여하튼 그는 박차고 나왔다.
그러므로 장인들은 그에게 무한히 감사함을 느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미켈란젤로가 장인들이 일할 때 늘 밟아야만 했던 상도의 굴레와 속박을 내팽겨쳐주었기 때문이다."

미켈란젤로의 생애에 있어 15년 내지 20년 동안은 그의 예술과 사상면에서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이는 여러 면에서 관찰할 때 1530년대 후반부와 1540년대 초에 보여준 예술과 사상의 특징들이 좀더 강화된 양상으로 나타난 것 뿐이다.

1545년경 이후 교황권의 위상에 변화가 생겼다.
프로테스탄트와의 분열이 극에 달해 라티스본 회의Diet of Ratisbon 이후부터는 타협이란 말조차 꺼낼 수도 없을 정도로 극한 상황으로 치닫게 되었다.
그렇게 됨으로써 미켈란젤로가 속해 있던 온건파는 점차 그 힘이 약해지게 되었다.
온건파의 신비주의는 날로 내성적 성격을 더해 가게 되었다.
이런 격동기에 나온 미켈란젤로의 대표작이 그가 마지막으로 조각한 군상조각이자 죽는 순간까지도 완성하지 못한 <론다니니 피에타 Pieta Rondanini>이다.
그는 이 조각을 통해 모든 육체적 특성들을 나타내주는 인체의 상징요소들을 박탈하여 끝내 순수한 정신적인 관념을 직접적으로 전하는 데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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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예가로 명성을 날린 김규진

김규진(1868~1933)은 1868년 평안남도 중화군 상원면 흑우리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고 18살 때 청나라로 가서 8년 동안 체류하며 글씨와 그림을 배워 대륙기질의 서화가가 되었다.
그는 북경에서 중국인 진씨의 도움을 받아 서화를 배우며 북경 화가들과 교류했고 명가의 방문과 지도를 받게 되었다.
1893년 가을에 귀국한 고향에서 활동하다가 1896년 29살 때에 서울로 진출했다.
그는 청국어에 능통했으므로 상경 즉시 궁내부 주사 관직을 얻었고 그 후 1907년까지 궁내부 부서였던 내장사 주사, 예식원 문서과장, 비서관, 시종원 시종 등을 거쳐 경리원 기사직을 지냈다.
그는 1901년부터 어린 왕세자였던 영친왕(이근)의 서사書師선생)로서 왕실에 접근해 있었다.
궁내부에서 여러 관직을 역임하면서 왕세자의 글씨 선생으로 시어侍御라는 직함도 받아 수시로 궁중을 출입하면서 서예가로서 명성을 얻었으며 화가로서도 활동했다.
그가 1920년 창덕궁 희정당 내부에 그린 벽화는 <금강산 만물초 승경 金剛山萬物肖勝景>과 <해금강 총석정 절경 海金剛叢石亭絶景>이었다.

그는 글씨에서 행서, 초서, 대필서에서 특출한 필력을 발휘했고 그림은 분방한 용필의 묵죽을 위주로 하여 묵란, 묵국 등 사군자 범주의 묵화에 치중했다.
그러나 산수화와 화조화도 종종 그렸으며 말을 그리기도 했다.
1914년에 그린 <유하백마 柳下白馬>는 소품이지만 그의 역량과 자유로운 표현을 알 수 있는 작품이다.
수묵필치로 대범하게 표현한 고목 버드나무의 형상, 강한 바람에 의해 온통 오른편으로 심하게 흔들리는 버들가지의 소란스러운 움직임, 청록색 담채의 신선한 생동감이 현대 화가의 참신한 표현주의를 방불케 한다.
버드나무를 배경으로 엷은 황록색 담채의 풀언덕에 뛰어든 백마의 사실주의 묘사에서 보이는 명쾌한 묵선과 선명한 흰색 표상미도 더할 나위 없는 표현기량을 엿보게 한다.
심하게 바람을 탄 버들가지의 움직임과 반대 방향으로 백마를 달리게 함으로써 시각적인 속도감을 더하여 준다.
버들가지의 투명한 청록색조와 백마의 흰색이 상쾌한 대비를 이루는 것도 지적할 만하다.
언덕 너머 공간에도 전면 푸른 색조로 깊이감이 생기게 담채를 부여해 근대적 화면을 창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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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우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과학과 미켈란젤로의 영혼>(미술문화)에서
 
<최후의 심판>에서 미켈란젤로의 목적이 달라졌다

 

미켈란젤로는 말했다.
"나의 영혼이 눈을 통해 처음 접한 아름다움에 다가가는 동안
정신적인 영상은 커지지만 물질적인 영상은 움츠러든다.
마치 천하고 별 가치 없는 사물인양."

미켈란젤로에게 있어 예술가란 자연에 의해 직접적으로 영감을 받기는 하지만 자연 안에서 보는 것을 그 자신의 마음 속에 품고 있는 이상적인 기준에 맞춰야 한다는 것이다.

물리적 세계의 가시적 미를 직접적으로 표상해내지 않은 대표적인 작품이 그가 1534년과 1541년 사이 교황 클레멘트 7세와 바오로 3세를 위해 그린 시스티나 예배당 제단 위에 있는 프레스코화 <최후의 심판>이다.
그가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에 아담의 형상을 그릴 때만 해도 실재보다 훨씬 더 이상화시켰지만 실재 생활에서 아름다운 인체라고 생각할 수 있는 형상을 묘사하려고 했다.
하지만 <최후의 심판>에서 그의 목적이 달라졌다.
여기서의 인체는 무겁고 무기력해 보이며 사지는 두껍고 우아함이 결여된 양상으로 나타났다.
사람들이 종종 말하는 것처럼 미켈란젤로가 손을 떨기 시작해서 그렇게밖에는 그릴 수 없었던 것이 아니라 그가 더이상 물질적인 미를 그 자체로 추구하기를 중단한 때문이다.
그는 관념을 전달하는 수단으로서 또는 정신적인 상태를 드러내기 위한 수단으로서 물질적인 미를 이용한 것이다.
<최후의 심판>에서 실재 세계의 공간이나 원근법, 전형적인 비례조차 찾아볼 수 없는 것으로 봐서 성기 르네상스의 가장 기본적인 원리가 무시된 듯하다.
그가 물질적인 데서 멀어지고 정신적인 것으로 향한 경향은 늙어가고 있었기 때문인 것도 부분적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당시 종교개혁으로 교회가 분열되었고 교황의 위상은 매우 약화되었다.
게다가 경제적 혼란까지 가중되었으며 1527년에는 로마가 약탈당하는 일이 벌어져 클레멘트 7세는 더욱 더 무력해졌다.
카톨릭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사회 전체의 존폐가 위협당하는 사건들로 사람들이 동요되었다.
미켈란젤로의 신비주의 사상은 이렇듯 이탈리아가 무너져내리는 것을 확인하기가 두려운 나머지 선택한 하나의 강구책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미켈란젤로는 예술의 종교적 기능에 대해 무엇보다도 명백히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그는 종교적 화가는 예술에 있어서도 능숙할 뿐더러 매우 경건한 인생을 살아감에 틀림 없다고 생각하면서 종교적 화가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밝힌 바 있는데, 홀란다는 그가 말한 내용을 기록으로 남겼다.
"하느님의 장엄한 모습을 어느 정도 묘사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화가인 것만으로는 불충분하고 위대하고 능숙한 거장이어야 한다.
생각컨대 그 사람의 인생은 더 나아가서 성령으로 그의 이해력이 높아질 수 있도록 성인까지는 되지 않더라도 흠이 없어야 한다.
왜냐하면 잘못 그려진 하느님의 모습은 신자의 마음을 분산시키며 가뜩이나 신앙심이 없는 사람들의 신앙심마저 잃게 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반면 하느님의 모습을 연상시키는 그림들은 신앙심이 거의 없는 사람들조차 움직여 신앙심을 일게 하여 명상에 잠기게 하고 눈물을 흘리게 한다.
그 모습에서 나오는 참된 아름다움으로 인해 신에 대한 외경심과 존경심이 절로 우러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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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화연구회


서화연구회가 정식으로 발족한 것은 1915년 5월이었다.
이것은 해강 김규진이 주동이 되어 설립한 것으로 그의 지도이념은 전통 서화의 올바른 계승에 있었다.
그러나 이 회를 뒷받침한 사람들은 서화를 즐기던 친일 귀족들이었다.
서화연구회 회장에 친일 귀족인 자작 김윤식이 추대되었고 부회장에는 이완용과 조중응이 담당했다.
고문에는 이왕직, 차관이던 고미야小宮을 추대했다.
김규진의 서화연구회 취지문은 다음과 같다.
“서화는 문명을 대표하는 것이요, 문명은 국가의 발전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렇다면 서화가 발전하는 것이 국력의 발전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말로서는 다 나타낼 수 없는 것은 글씨로 이를 나타내며 글씨로서 다 나타낼 수 없는 것은 그림으로 나타낼 수 있다.
그러므로 글씨는 문체를 묘사하는 용한 기술이며 그림이란 정신을 전달하는 살아 있는 방법이다.
옛 사람이 정신을 수양하거나 사람의 관계에 있어서 서화를 이용하는 경우가 많았으니 그런즉 이는 급히 서둘러 열어야 되며 조금이라도 허술히 여겨서는 안 될 것이다.”

김규진이 서화연구회를 설립한 것은 화단의 주도세력인 안중식과 조석진 체제에 대한 도전으로 볼 수 있다.
왜냐면 그의 취지가 서화협회의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이 단체는 가난한 젊은이가 장차 화가가 되기 위해 가는 곳이기보다는 선비와 한량들이 기技를 닦는 곳으로 이용되었다.
정치적으로 몸을 망친 친일 귀족들은 다소나마 생의 의미를 서화의 세계에서 찾고자 했다.
이곳에서는 문인화와 사군자를 가르쳤다.
이곳 출신으로 이승직과 김진우는 사군자에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1920년 창덕궁 왕실은 3년 전에 불탄 대조전·희정당·경훈각의 복원에 따른 내벽 장식화 제작을 김은호를 비롯하여 오일영, 이용우(1902~52), 이상범, 노수현 등 서화미술회 출신 신진들과 안중식과 조석진의 타계 후 화단의 원로가 된 김규진에게 위촉했다.
그 때 대조전 안의 서벽을 위해 김은호가 그린 월경月景은 <백학>이었고 이와 조화시킨 동벽의 일경日景은 오일영과 이용우가 합작한 <봉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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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빈치의 과학과 미켈란젤로의 영혼>(미술문화)에서  
 
시스티나 천장 프레스코화는 도상학적 면에서 보면
 

미켈란젤로는 장수했기 때문에 그의 사고는 끊임 없이 발전하고 변했으므로 이를 체계적으로 한 줄기로 명료하게 정리하기는 가능하지 않다.
그가 로마에서 제작한 초기 작품들은 성기 르네상스가 한창 꽃핀 상태의 양식을 보여주지만 1564년 사망하기 전에는 매너리즘 양식이 뿌리 깊게 자리잡고 있었다.
따라서 그의 작품들과 이론을 정확하게 구획지어 나누기란 가능하지 않다.

1530년경까지의 첫 번째 시기에 나타난 미켈란젤로의 예술관은 성기 르네상스의 인문주의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장화, 성 베드로 성당의 <피에타> 그리고 초기에 쓴 사랑을 주제로 한 시들은 이런 그의 예술관을 잘 말해주는 전형적인 예라 하겠다.
미켈란젤로 역시 레오나르도와 마찬가지로 피렌체 회화의 과학적 전통을 고수했지만 신플라톤주의에 접하면서부터 그 영향권 하에서 성장했다.
그가 추구한 것은 레오나르도가 추구한 과학적 진실이 아니라 바로 미 자체였다.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에 묘사된 인물상들의 웅대함은 자연 현상의 단순한 모방 그 이상인데, 인체에 대한 이상화하는 작업은 자연 현상을 면밀히 연구한 끝에 얻어진 지식에 근거한 것이다.
그의 작품에는 인체미에 대한 숭배의 요소가 깊게 자리잡고 있다.

로마의 성기 르네상스는 사상면에서는 기독교와 이교라는 상반된 두 요소가 조화를 이루며 융합되는 양상을 보여준다.
시스티나 천장 프레스코화는 도상학적 면에서 보면 가장 박식한 신학에 근거한 것이지만 인물상들의 외양은 이교 신들의 모습을 띠고 있다.
신플라톤주의의 영향을 받은 미켈란젤로에게는 기독교와 이교 둘 다 소중했다.
그는 처음부터 말년의 신앙생활을 물들인 열정적인 자기 포기의 정신을 가졌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사보나롤라Girolamo Savonarola(1452~98, 순교한 종교개혁가)의 가르침에 영향을 받아 아주 신실한 카톨릭 신자가 되었다.
물질계의 미에 대한 그의 믿음은 대단했는데, 초기에 사랑을 주제로 쓴 시에는 신플라톤주의자들이 말하는 정신미와 가시적 미를 향한 진한 열정이 종종 육체적인 정열과 어우러진 표현 속에 잘 드러나 있다.
이는 그의 그러한 믿음을 보여주는 한 예가 된다.
바사리와 콘디비 두 사람 모두 미켈란젤로가 해부학을 간접적으로 배우는 데 만족해 하지 않고 자신이 직접 인체를 해부해가면서 매우 열심히 해부학을 공부했음을 기록했다.

그렇지만 미켈란젤로는 자연의 정확한 모방을 믿지 않았다.
바사리에 의하면 그는 토마소 데 카발리에리의 연필소묘를 한 번 했을 뿐 "특별히 아름답지 않은 한 살아 있는 대상을 그대로 옮기는 자체를 싫어했기 때문에 그 이전이나 이후에도 초상화를 그리지 않았다"고 한다.
홀란다는 미켈란젤로가 바로 이런 이유로 해서 플랑드르 회화를 경멸한 것으로 보았다. 콘디비는 제우시스가 그린 크로톤의 <비너스>에 관해 언급하면서 미켈란젤로의 방법을 서술했다.

"미켈란젤로는 인간의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세상에서 발견되는 모든 아름다운 사물을 좋아한다.
...
회화세계에서 자취를 남긴 모든 예술가들이 그렇게 한 것과 마찬가지로 벌꿀이 꽃에서 꿀을 모으듯 자연 안에서 아름다운 것들을 골라내 작품에 나타나도록 한다.
저 나이든 스승은 비너스를 그리는 데 있어 한 처녀만을 보고 그리는 데 만족해 하지 않고 많은 처녀들을 보고 다각도로 연구하여 각자로부터 가장 아름답고 완벽한 특징들을 골라내 자신의 비너스로 만들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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