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우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과학과 미켈란젤로의 영혼>(미술문화)에서
 
<최후의 심판>에서 미켈란젤로의 목적이 달라졌다

 

미켈란젤로는 말했다.
"나의 영혼이 눈을 통해 처음 접한 아름다움에 다가가는 동안
정신적인 영상은 커지지만 물질적인 영상은 움츠러든다.
마치 천하고 별 가치 없는 사물인양."

미켈란젤로에게 있어 예술가란 자연에 의해 직접적으로 영감을 받기는 하지만 자연 안에서 보는 것을 그 자신의 마음 속에 품고 있는 이상적인 기준에 맞춰야 한다는 것이다.

물리적 세계의 가시적 미를 직접적으로 표상해내지 않은 대표적인 작품이 그가 1534년과 1541년 사이 교황 클레멘트 7세와 바오로 3세를 위해 그린 시스티나 예배당 제단 위에 있는 프레스코화 <최후의 심판>이다.
그가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에 아담의 형상을 그릴 때만 해도 실재보다 훨씬 더 이상화시켰지만 실재 생활에서 아름다운 인체라고 생각할 수 있는 형상을 묘사하려고 했다.
하지만 <최후의 심판>에서 그의 목적이 달라졌다.
여기서의 인체는 무겁고 무기력해 보이며 사지는 두껍고 우아함이 결여된 양상으로 나타났다.
사람들이 종종 말하는 것처럼 미켈란젤로가 손을 떨기 시작해서 그렇게밖에는 그릴 수 없었던 것이 아니라 그가 더이상 물질적인 미를 그 자체로 추구하기를 중단한 때문이다.
그는 관념을 전달하는 수단으로서 또는 정신적인 상태를 드러내기 위한 수단으로서 물질적인 미를 이용한 것이다.
<최후의 심판>에서 실재 세계의 공간이나 원근법, 전형적인 비례조차 찾아볼 수 없는 것으로 봐서 성기 르네상스의 가장 기본적인 원리가 무시된 듯하다.
그가 물질적인 데서 멀어지고 정신적인 것으로 향한 경향은 늙어가고 있었기 때문인 것도 부분적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당시 종교개혁으로 교회가 분열되었고 교황의 위상은 매우 약화되었다.
게다가 경제적 혼란까지 가중되었으며 1527년에는 로마가 약탈당하는 일이 벌어져 클레멘트 7세는 더욱 더 무력해졌다.
카톨릭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사회 전체의 존폐가 위협당하는 사건들로 사람들이 동요되었다.
미켈란젤로의 신비주의 사상은 이렇듯 이탈리아가 무너져내리는 것을 확인하기가 두려운 나머지 선택한 하나의 강구책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미켈란젤로는 예술의 종교적 기능에 대해 무엇보다도 명백히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그는 종교적 화가는 예술에 있어서도 능숙할 뿐더러 매우 경건한 인생을 살아감에 틀림 없다고 생각하면서 종교적 화가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밝힌 바 있는데, 홀란다는 그가 말한 내용을 기록으로 남겼다.
"하느님의 장엄한 모습을 어느 정도 묘사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화가인 것만으로는 불충분하고 위대하고 능숙한 거장이어야 한다.
생각컨대 그 사람의 인생은 더 나아가서 성령으로 그의 이해력이 높아질 수 있도록 성인까지는 되지 않더라도 흠이 없어야 한다.
왜냐하면 잘못 그려진 하느님의 모습은 신자의 마음을 분산시키며 가뜩이나 신앙심이 없는 사람들의 신앙심마저 잃게 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반면 하느님의 모습을 연상시키는 그림들은 신앙심이 거의 없는 사람들조차 움직여 신앙심을 일게 하여 명상에 잠기게 하고 눈물을 흘리게 한다.
그 모습에서 나오는 참된 아름다움으로 인해 신에 대한 외경심과 존경심이 절로 우러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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