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관식과 동갑 노수현


변관식과 동갑 노수현(1899~1978)은 다복한 인생을 살았다.
해방 후 국전이 신설되자 심사위원으로 받들어졌고, 서울대 교수로 재직했으며, 문화훈장 등 많은 상을 수상했고, 80세의 장수를 누렸다.
노수현은 황해도 곡산에서 3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나 15살 때 서울 보성중학교에 입학했지만 곧 서화미술회 강습소에 입학하여 이상범과 최우석과 함께 4기생으로 조석진과 안중식으로부터 전통 동양화를 수학했다.
그는 1918년 19살 때 서화미술원을 졸업한 후 안중식의 사저 경묵당耕墨堂에 기거하며 계속해서 스승의 가르침을 받았다.
그의 호 심산의 심자는 안중식의 아호 심산에서 심자를 받아 사용하게 된 것이다.

노수현은 1920년 21살 때 창덕궁 대조전 벽화를 이상범과 함께 산수화로 장식했으며 1921년 동아일보에 입사하여 삽화와 만화를 그렸으며 그 해 협전이 개최되자 창립전부터 출품하기 시작하여 1936년 제15회로 마칠 때까지 계속해서 출품했다.
1922년 선전 창립전에 <고산유수 高山流水>와 <성재수간 聲在樹間>을 출품했으며 이듬해 10월에는 이상범과 함께 서울 보성학교에서 산수화 1백여 점을 전시한 2인전을 열었다.
이 전람회는 동연사 그룹의 활동 중 하나로 추진되었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아 2인전으로 변경된 것이다.
당시 보도에서 26살의 이상범과 24살의 노수현은 화백이라는 칭호를 받으며 미술애호가들의 관심을 받았다.
언론은 이렇게 보도했다.
“백여 폭의 산수인물은 보는 이의 마음을 끌었다. 당일의 입장자는 천여 명에 이르렀으며 출품점 수의 10분의 9가 매약이 된 것만 보아도 당일의 성황을 짐작할 수 있다.”
그 해 그는 직장을 조선일보로 옮겨 삽화와 만화를 그렸고 제2회 선전에 <귀초>를 출품하여 3등상을 수상했다.

이상범은 선전에서 연속 특선으로 각광을 받았지만 노수현은 제5회 선전에서 <고사영춘 古舍迎春>으로 특선을 받았을 뿐 이상범에 비해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두 사람의 회화는 달랐는데, 이상범은 실경에 입각한 평범한 산야를 즐겨 그린 데 비해 그의 그림은 이상경으로서 정신미를 추구한 관념 산수화였다.
그는 선전 제1회부터 제11회까지 제10회전에서 출품작이 누락된 것을 빼면 열 차례에 걸쳐 모두 13점을 발표했지만 한 번의 특선과 한 번의 3등상으로 별로 성과를 얻지 못하자 그 후 선전에 출품하지 않았다.
특기할 만 한 점은 제4회전에 출품한 <일난 日暖>으로 전형적인 산수화를 그린 그가 당시의 서민상을 그린 것이다.
고목 아래서 휴식을 취하는 여인과 소년을 사실주의 기법으로 화면이 가득 차게 그린 것이다.
한복 차림의 여인은 바구니를 앞에 놓고 앉은 채 치마에 쏟아놓은 나물을 다듬고 있고 그 옆 소년은 짐을 진 지게를 눕혀 놓은 채 팔베개를 하고 누워 하늘을 바라보는 모습이다.
삶의 현상을 생생하게 묘사한 작품이다.

그는 1940년에 심산화숙心汕畵塾을 설립하여 1948년까지 후진 양성에 힘썼으며, 해방 후 1945년 조선문화건설본부 동양화부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1948년에는 서울대학교 예술학부 미술과에 출강하면서 이듬해 제1회 국전에 심사위원으로 참가한 이래 제9회 때까지 계속 참가했다.
그는 1955년에 서울시문화상을 수상했고, 그 해 예술원 회원으로 피선되었으며, 이듬해에 예술원상 공로상을 수상했다.
1961년 국전기구 개편에 따라 고문에 추대되었고 이듬해 대한민국 문화훈장 대통령장을 수장했다.
1964년 제13회 국전부터 심사위원으로 참가하여 제16회전까지 출품했다.
1971년 서울신문 주최 동양화 6대가전에 출품했으며 1978년 9월 6일 제주도에서 타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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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을 억제하고 순화하려는 박서보의 기질에 

앵포르멜Informel은 말 그대로 비형식적이란 뜻이다. 무의식적 혹은 즉흥적으로 작업을 하다보니 형식을 갖출 여유가 없는 걸 의미하기도 하고 달리 말하면 형식에 매이지 않으려고 자신의 행위를 자유스럽게 하는 작업이다. 1940년대와 50년대 이런 창작이 유럽에서 성행하자 평론가 미셸 타피에Michel Tapie가 앵포르멜이란 말로 분류했다. 2차세계대전의 발발은 예술가로 하여금 기존의 가치 혹은 형식에 반발하게 만들었고 그런 형식에서 벗어나는 것 자체만으로도 과거와의 단절이었으므로 창작의 자유를 맛볼 수 있었다. 같은 시기에 뉴욕에서는 추상표현주의가 성행했는데 유사한 미학으로 따로 주제가 되는 오브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화면 전체를 하나의 구성으로 삼는 비형식적 방법이었다. 1912년 조르주 브라크에 의해 콜라주 기법이 등장한 이래 유럽 예술가들에게는 콜라주가 보편적 방법이 되었으며 앵포르멜 회화에 콜라주가 많이 사용되었다. 그리고 추상표현주의와 앵포르멜 모두 무의식적 혹은 즉흥적 작업이라서 예술가 자신의 감정에 크게 의존하게 되는 바 서정성이 두드러진다. 앵포르멜을 '서정적 추상'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이다. 예술가들이 이런 류의 작품을 오래 추구하지 못한 이유는 충동적인 감정도 다양함에 한계가 있고 결국 반복하게 되며 그렇게 되면 다시금 형식에 치우치게 되기 때문이다. 추상표현주의와 앵포르멜은 화가가 평생 추구하기에는 한계가 있는 양식이다. 
 

박서보는 1956년 6월 스물다섯 살 때 동료 예술가들과 함께 국전과 결별하겠다는 선언문을 발표했다. 기존의 가치 혹은 형식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다짐은 앵포르멜을 추구한 예술가들의 기본 자세였다. 초기 앵포르멜 작품 <작품 No.18-59>(1959)는 캔버스에 시멘트와 마를 부착하여 오일물감을 칠한 것으로 실험적인 작품이다. 실험적이라고 하는 이유는 재료를 그렇게 사용한 것일 뿐 재료의 특성이 제대로 나타나지도 못했고 감정이입이 될 만한 서정성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화면을 위아래로 이등분하여 지나치게 안정을 찾았는데 이런 안정은 이후의 작품에 일반적 경향으로 나타나 그가 퍽 자신의 감정을 억제하고 순화시키려고 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흥미로운 점은 유럽 예술가들은 이성의 붕괴와 미학의 한계를 실감하고 비형식을 돌팔구로 제시한 데 반해 그는 새로운 추상의 양식으로 받아들인 점이다. 그러나 유럽 예술가들과 공유한 시대적 요구가 그에게도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그는 훗날 술회했다. "대량학살, 집단폭력으로부터의 희생, 정신적 핍박, 부조리, 불안과 고독 그리고 미래가 보이지 않는 암담한 속에서 자폭하듯 그렇게 결행한 실천의 산물이 57년에 제작된 앵포르멜이라고 불리는 나의 그림이다." 
 

감정을 억제하고 순화하려는 박서보의 기질에 앵포르멜은 처음부터 어울리지 않았다. 1967년부터 제작하기 시작해서 삼십여 년 지속적으로 추구한 묘법 시리즈를 보면 이전 작품들은 실험적이었고 걸출함이 없음을 알 수 있다. 박서보의 고유한 회화는 묘법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캔버스에 연필로 수없이 많은 사선을 긋는 묘법에 깔린 미학을 그는 정연한 논리로 말했다. "나는 연필을 그리는 도구로서 쓰는 게 아니라 행위의 도구로서 연필을 선택한 것이다. 그 이유는 예술의 가장 순수한 상태를 위해서이다. 예술의 가장 순수한 상태를 '탈이미지'라고 표현할 수 있는데 그것은 무목적적이어야 한다. 다시 말해 그 행위 자체에서 살고자 해야 한다. 이미지나 형상, 어떤 환상을 쫓지 않는다는 그런 탈이미지의 무목적적성은 ... 순수무위행위라고 해도, 무위순수행위라 해도 좋다."
그는 자신의 묘법 시리즈를 순수무위행위라고 했지만 1973년 이전 작품들을 보면 형식에 매였음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그는 화면을 바둑판처럼 분할하거나 이등분 또는 사등분했으며 전체를 하나의 화면으로 사용할 때도 형식을 갖추었다. 화면 전체를 사선 또는 격자무늬로 채울 때도 매우 치밀하게 인위적으로 구성했음을 본다. 그는 연필과 흰색을 자신을 허무는 도구 또는 극기의 도구로 삼았다고 했는데 이미지를 배척하면서 반복적 행위를 통해 행위 자체를 매체 그리고 내용으로 삼았음을 의미한다. 고정되지 않고 끊임없이 지속되는 과정을 보여주려고 한 것이다. 이와 유사한 미학을 마크 토비Mark Tobey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데, 1934~5년 중국과 일본을 여행한 토비는 동양의 서예를 응용하여 소위 말하는 '흰색 쓰기 white writing'를 반복적으로 했다. 토비는 회화가 행위보다는 명상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고 본 데 비해 박서보는 회화를 자신을 다스리기 위한 수단으로 보았으며 그러한 과정으로 이해했다. 두 사람 모두 동양적인 내적 세계에 근거해 작업했는데, 상이한 점은 토비는 자유를 누리며 작업한 데 반해 박서보는 엄격한 고행의 방법으로 한 것이다. 그래서 거의 모든 그의 묘법 작품들은 매우 규칙적이고 엄격한 구성을 띤다. 순수무위행위라는 그의 주장과는 달리 인위적이며 의도적이다. 규칙적이고 엄격한 구성이 1995년 이후의 작품에서 절정을 이룬 것을 보면 그는 완벽주의자였음이 틀림 없다. 
 

재료에도 관심이 많아 그는 마와 면에 그렸으며 80년대 들어서는 한지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안료가 한지에 흡수되는 것을 그는 서양 종이와 달리 "행위의 신체성을 ... 밖으로 내뱉지 않고 빨아들이듯 합일"하는 것으로 보았다. 모노크롬 물감을 촉촉히 젖어들게 하는 데 한지가 적당했던 것이다. 1980년대 후반 이후 한지에 제작한 작품들은 매우 뛰어났다. 단색의 선택과 채색도 뛰어나지만 반복하더라도 똑같을 수 없는 행위를 엄격한 기하적 구성에 적용시키는 데서 인쇄한 선물포장지와는 달리 인위적이고 시간적인 요소가 두드러진다. 반복적 행위와 한지의 특성이 그가 말한 절묘한 '신체적 궤적'을 낳았다. 신체적 궤적은 반복으로 인해 잔잔한 율동을 화면에 일게 하는데 이런 율동을 동양인은 자연의 절경으로 받아들인다. 잔잔한 수면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다만 1995년 이후 그가 자를 사용하여 선을 경직되게 사용하기 시작하고 인위적으로 반복을 동일하게 했으므로 원래 추구하려던 미학이 퇴조를 이루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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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관식이 금강산을 본격적으로 그리기 시작한 것은


금강산 시리즈는 변관식의 평생 작업 중 가장 탁월하며 다양한 구도의 변화와 바위의 괴량감은 빼어난다.
그가 금강산을 본격적으로 그리기 시작한 것은 1959년 원각사 극장 벽화로 그린 <내금강 지주담> 이후이다.
이 작품이 불에 타 사라지자 그가 통곡했다는 데서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지 짐작이 된다.
그의 기량은 같은 해에 그린 <외금강 삼선암 추색 外金剛三仙巖秋色>에서 볼 수 있는데, 금강산 시리즈 중 걸작으로 화면 왼편에 수직으로 한 가늘고 긴 삼선암 봉우리의 구도는 역동적이며 하늘의 흰 여백과 심한 대비를 이룬다.
실경을 묘사한 것이지만 자연의 놀라운 힘을 표현하기 위해 그는 하늘을 향해 뻗은 바위 아래의 계곡을 모티프로 삼았다.
이 작품은 이상향의 산수화에서는 느낄 수 없는 실재감이 있어 관람자에게 한층 더 자연에 대한 경외심을 심어주는데 철저한 사생과 강렬한 표현적 구도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그가 절정기에 사용한 적묵법은 재질감의 효과를 위한 것으로 농담을 달리 하는 먹을 겹쳐 긋고 쌓아올린 적묵법과 먹이 뭉쳐진 부분에 다시 진한 선을 긋고 점을 찍어서 깨는 파선법을 사용해 강렬한 표현주의 그림이 되게 했다.

이후 변관식의 금강산 그림은 다양한 소재로 확대되어 1960년에 <내금강 진주담內金剛眞珠潭>과 <외금강 구룡춘색 外金剛九龍春色>, 1963년에 <외금강 옥류천 外金剛玉流泉>으로 이어지면서 절정에 다달았다.
<외금강 구룡춘색>은 1960년 가을에 그린 것으로 전 해에 그린 <외금강 삼선암 추색>과 이로부터 3년 후에 그린 <외금강 옥류천>과 비교할 때 먹의 풀림이 그 중간에 위치하는 특색을 갖추고 있다.
세 작품 모두 외금강의 절경을 묘사한 것으로 <외금강 삼선암 추색>은 구도와 먹의 사용이 매우 강하고, <외금강 옥류천>은 강약의 변화가 조화를 이루고 있는 데 비해 이 작품은 꽉 찬 구도의 짜임새와 힘찬 붓놀림에서 그 특징이 더욱 살아났다.

그는 1960년대 후반에 새로운 기법 중묵법을 사용했다. 적묵과 파선에 태점을 사용하여 바위와 토파 부분에 먹을 중첩시켜 칠해지지 않은 부분과 강한 대비가 되게 했으므로 깊이를 느끼게 하는 특유의 적묵법이 되었다.
한편 그가 다른 방법으로 시도해온 정형산수는 두 가지 형식을 혼용하는 것으로 특정한 풍경을 사생하면서 이를 전통 관념 산수의 형식으로 완성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부항춘일>의 경우는 왼편에 부산항의 실경을 살리면서 오른편에 관념 산수의 요소를 가미하여 독특한 멋을 낸 작품이다.
이런 실경과 관념 산수의 혼용이 부산 항구 같은 특정한 실경이 아니라 평범한 산촌의 풍경일 경우 <촉촉 청산>으로 나타난다.
그의 정형산수는 일정한 틀을 갖추고 있는데 화면 중앙에 바위언덕이 자리 잡고 거기에는 운치 있는 정자와 소나무가 있으며, 한쪽에는 강이 흐르고 한편으로는 구불구불 시골길이 뻗어간다.
거기에 복숭아꽃이 만발하며 노란 초가집이 옹기종기 모여 있고 두루마기 입은 노인이 바삐 걸어가는 것이 그의 정형산수이다.
화제는 다르지만 서정적인 당시 한 구절을 인용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의 애송시 중 하나는 이태백의 <산중문답>으로 속세를 떠나 사는 선인에게 왜 깊은 산 속에서 사느냐고 물어도 대답은 않고 미소만 지을 뿐이라는 칠언시이다.
그는 탈속의 경지를 노래한 중국 시구를 쓸쓸한 산야가 펼쳐진 우리나라의 정경을 그린 그림에 화제로 사용했다.
이런 부조화가 그의 회화의 한계였으며 현실에 대한 투철한 수용이 결여된 실경은 가상적인 풍경일 뿐이다.
1965년 이후 그의 그림은 상투적이 되었다. 그가 태점과 중묵의 기법을 구사하면서 보여준 산수화는 금강산이든 산천의 정형산수이든 현장감보다는 선, 먹, 여백의 조형적 조화를 추구하는 데만 그쳤다.
그는 1976년 2월 17일 서울 자택에서 타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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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관식은 아리랑고개 근처에 자리를 잡고

변관식은 5년 동안의 유학을 마치고 1929년 가을에 귀국했고 귀국 후 창작활동은 일단 움츠러들었다.
그는 이미 퇴색되어가고 있던 서화협회의 간사직을 맡기도 했지만 작품활동은 별로 없었다.
그는 선전에 출품하지도 않았는데 1930년대 들어서 선전의 동양화부는 일본 동경미술학교 계열의 신일본화풍의 화가들이 심사를 맡게 되어 변관식의 입상은 기대되기 힘들었다.
그는 1930년대의 퇴폐적인 분위기에서 말술을 마셨고 부잣집에서 초대하면 병풍을 그려주고 한 달이고 두 달이고 거기에 머물면서 세월을 보냈다.
그는 1937년에 서울을 떠나 팔도강산을 돌아다녔고 금강산을 비롯하여 명산을 유람하면서 자연 승경에 탐닉했다.
이때의 체험과 자연에 대한 감동은 훗날 걸작으로 나타나지만 당시로서는 방랑의 연속이었다.

1939년 가을 41살의 그는 방랑 끝에 진주에 이르러 28살의 강씨를 만나 결혼하고 거기에 정착했다.
생활에 안정을 찾자 그는 1940년 선전 주최 ‘10명가 산수·풍경화전’에 출품하며 작품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1942년에 개성 김부자의 주선으로 작품전을 가졌는데 그의 첫 개인전이었다.
1943년에는 당시 유력한 그림시장이던 전주로 이사하여 7년 동안 그곳에서 생활하면서 이따금 작품전을 가졌다.
해방 후 그는 고희동이 이끈 조선미술건설본부에 참여하고 1949년 국전 창립전이 개최될 때 동양화부 심사위원을 맡았다.
그러나 6·25동란이 발발함에 처가인 진주로 피난 가서 그곳에서 4년 동안 지냈다.
부산 영도에 있던 도자춘陶磁春이라는 도자기회사의 부탁을 받아 도화를 그리기도 했고, 1951년 부산에서 개최된 대한미술협회 주최 전시미술전 등에 출품하면서 피난 중에도 작품을 제작했다.
정부가 영국 왕실에 선물할 그림으로 <외금강 옥류천>을 그리기도 했다.

1953년 휴전 후 제2회 국전이 열리자 그는 다시 심사위원을 맡았고, 이듬해 부산 국제구락부에서 개인전을 가졌으며, 제3회 국전에서는 초대작가로 출품했다.
그 해 겨울 그는 진주를 떠나 서울로 왔다.
그는 서울 변두리 아리랑고개 근처에 자리를 잡고 돈암산방敦岩山房이라 당호를 붙였다.
그는 타계할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그는 1957년 파벌과 이권의 비리로 얼룩진 국전의 양상에 대해 『조선일보』에 ‘공정잃은 심사’라는 고발문을 발표했다.
그의 고발은 반국전운동으로 전개되었다.
1957년은 한국 현대미술이 출발된 해란 점에서 그의 고발은 시기적으로도 큰 의미를 지니며, 또한 변관식 자신의 회화적 전환과 완성에 있어서도 획기적인 의미를 지닌다.
그의 전환을 반영하는 기념비적인 작품이 그가 1957년에 그린 <농가의 만추>이다.
부감법의 시각으로 하늘 공간을 대담하게 끊고 가을 농가의 정경을 묘사한 이 작품은 이후 다시 나타나지 않는 독특한 구도를 취하고 있지만, 적묵법積墨法과 파선법破線法이 성공적으로 사용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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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응로의 감정 표현은 발산적이라서 다분히 서양적이지만 

 
이응로는 1976년 서울 신세계 미술관에서 열린 개인전 카탈로그에 적었다.
“내가 그림을 시작한 것이 벌써 70년이 되었다.
그 지나온 70년을 되돌아보니 소년기의 자유자재했던시절을 제하고 약 10년을 주기로 하여 여섯 번으로 나뉘어 변화하였음을 발견하게 된다.
20대를 우리나라 전통의 동양화와 서예적 기법을 기초로 한 모방시기라 하면, 30대를 자연물체의 사실주의적 탐구시대, 40대를 반추상적 표현이라 할 수 있는 자연사실에 대한 사의적 표현, 그리고 50대에 유럽에 와서 추상화가 시작된다.
그로부터 오늘까지 다시 나누어 전기 10년을 ‘사의적 추상’이라 하면 후기 10년을 ‘서예적 추상’이라 이름지어 보겠다.” 

 그때로부터 1989년 86세로 타계할 때까지 한 차례 더 창작에 변화가 생겼으므로 모두 일곱 차례에 걸친 변화이다.
40대의 반추상에서부터 이응로의 감정 표현과 조절이 회화적 장점으로 나타났으며 오브제를 사의적으로 표현하고 자연의 기운을 역동적으로 다룬 점이 주목할 만하다.
<분출>(1950)과 <산>(1954)은 자연의 기운에 대한 느낌을 표현하고 조절해 회화적 균형 혹은 구성을 창작한 것들로 장차 그릴 일련의 <문자추상>과 미학적 공통성이 있다. 

그는 1958년 크리스마스 다음 날 프랑스로 향했으며 환경의 변화가 그로 하여금 창작의 태도를 바꾸게 만들었다.
유럽 미술의 본고장에서 종이콜라주paper collages와 앵포르멜Informel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종이콜라주는 조르주 브라크가 1912년 처음 발견한 방법으로 우연히 벽지를 파는 상점 앞을 지나다가 나무결처럼 생긴 벽지를 잘라 붙이면 환상의 효과가 생길 것이라고 생각했다.
종이콜라주는 종이를 풀로 붙인다는 뜻이며 브라크는 자신과 더불어 입체주의를 창안한 피카소와 함께 이 기교를 회화에 이용해 환상적 삼차원의 효과를 한층 높였다.
앵포르멜은 미셸 타피에Michel Tapie가 1940년대와 50년대 유럽 주요 화가들의 즉흥적 완전추상화에 붙인 명칭으로 영어로는 ‘형식이 없는 without form’이란 뜻이며 비형식주의Informailsm란 말로 통용되기도 한다.
하지만 앵포르멜은 단순히 형식을 무시한다는 의미보다는 좀더 넓은 의미로 서정적 추상lyrical abstraction을 말하며, 가벼운 붓질로 색을 칠해 불규칙한 얼룩을 남긴다고 해서 붙여진 명칭 타시즘Tachisme(프랑스어 타시tache는 얼룩blotch이란 뜻이다)과 동일한 양식이다.
특정한 주제가 없이 화면 전체를 하나의 구성으로 하는 올-오버 회화all-over painting를 <분출>을 통해 실험한 적이 있고, 또한 감정 표현과 조절을 통해 서정적 반추상을 추구해온 이응로에게 당시 유행한 앵포르멜 양식은 매우 친숙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그는 1960년에 여러 점의 <문자추상>을 그렸으며 한동안 이 주제에 집착했다.
캔버스에 종이를 잘라 구긴 다음 풀로 붙이고 그 위에 색을 칠한 것들로 대부분의 작품에 문자를 유추할 만한 형상이 없어 제목에서 문자란 말을 빼고 추상 혹은 구상으로 불러야 타당하다.
종이콜라주가 주는 입체감과 오십 후반에 이르도록 훈련해온 채색기술 그리고 올-오버 구성이 한데 어우러져 유행에 있어 프랑스 주요 화가들의 작품에 뒤지지 않았다.
종이콜라주의 부드러운 질적 장점을 십분 활용해 부조와 같은 입체감을 한껏 드러낸 완전추상 작품으로 1961~81년작 <문자추상>을 꼽을 수 있다.
대표작으로 꼽을 만한 이것은 <도시>(1970)와 <태양>(1972)과 관련 있으며 회화의 평면성에 갑갑함을 느끼고 좀더 자유로운 삼차원의 표현으로 나아가기 시작한 이정표가 된다.
그는 결국 입체적 표현을 위해 조각을 제작하기 시작했는데, <세 얼굴>(1964)과 <토템>(1964)은 이그러진 얼굴 그리고 풍상에 깍여 형상을 알아볼 수 없는 원시적 형태를 주제로 한 것이다.
창작 중심에 사람이 있다는 점이 특기할 만하며 사람은 그의 작품에서 다양한 형상들도 나타나다가 60년대 후반부터는 군상으로 큰 무리를 이룬다.
조각의 재료로 흙과 나무를 주로 사용했는데, 서정성을 나타내기에 매우 효과적인 재료이다.
이런 재료는 인간에게 가장 친근한 물질이라서 부드럽고 포근한 느낌을 주기 때문에 사람의 형상을 표현하기에 안성맞춤이다. 

이응로의 감정 표현은 발산적이라서 다분히 서양적이지만 조절 방식은 부드러워 동양적이어서 과격하게 치우치지 않고 절제된다.
감정을 지나치게 과장하거나 절제하여 서정성이 떨어지고 진부한 조형에 머물고 만 작품들도 없지 않지만 일관성을 유지하며 그가 추구하려고 한 점은 젊었을 때부터 창안한 사의적·서예적 추상이며, 이는 이응로 미학의 근간을 이룬다.
<문자추상>이란 제목으로 많은 작품을 제작했는데 문자적 커뮤니케이션을 위해서가 아니라 회화에서만 가능한 조형문법이며 이를 감정 표현의 수단으로 삼아 이응로 고유의 추상문법이 되게 했다.
그의 문법이란 다름 아닌 사의적·서예적 추상을 말한다.
흥미로운 점은 문자를 구상적 인간의 형상으로 변형시켜서 궁극적으로 인간 자체를 모티프로 삼은 점이다.
이렇게 하게 된 동기로 그는 1980년 5월의 광주민주화운동을 꼽았다. 

 1967년 ‘동베를린사건’에 연루되어 2년 반 동안 옥고를 치룬 적이 있는 그에게 민중운동은 감동을 주었고 77살의 노화가에게 마지막 창작 동기를 주었다.
그는 <군상>이란 제목으로 민중의 힘을 여러 점으로 표현했는데, 그의 역사관·정치관과 관련이 있다.
그는 1986년 동경도 미술관에서 초대전을 열었을 때 말했다. 
“나의 그림은 추상적 표현이었으나, 1980년 5월의 광주사태가 있은 뒤로 좀 사람들에게 호소되는 구상적인 요소를 그림 속에 가져왔다.
2백 호의 화면에 수천 명 군중의 움직임을 그려넣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 그림을 보고 이내 광주를 연상하거나 서울의 학생데모라고 했다.
유럽 사람들은 반핵운동으로 보았지만, 양쪽 모두 나의 심정을 잘 파악해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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