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관식은 아리랑고개 근처에 자리를 잡고

변관식은 5년 동안의 유학을 마치고 1929년 가을에 귀국했고 귀국 후 창작활동은 일단 움츠러들었다.
그는 이미 퇴색되어가고 있던 서화협회의 간사직을 맡기도 했지만 작품활동은 별로 없었다.
그는 선전에 출품하지도 않았는데 1930년대 들어서 선전의 동양화부는 일본 동경미술학교 계열의 신일본화풍의 화가들이 심사를 맡게 되어 변관식의 입상은 기대되기 힘들었다.
그는 1930년대의 퇴폐적인 분위기에서 말술을 마셨고 부잣집에서 초대하면 병풍을 그려주고 한 달이고 두 달이고 거기에 머물면서 세월을 보냈다.
그는 1937년에 서울을 떠나 팔도강산을 돌아다녔고 금강산을 비롯하여 명산을 유람하면서 자연 승경에 탐닉했다.
이때의 체험과 자연에 대한 감동은 훗날 걸작으로 나타나지만 당시로서는 방랑의 연속이었다.

1939년 가을 41살의 그는 방랑 끝에 진주에 이르러 28살의 강씨를 만나 결혼하고 거기에 정착했다.
생활에 안정을 찾자 그는 1940년 선전 주최 ‘10명가 산수·풍경화전’에 출품하며 작품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1942년에 개성 김부자의 주선으로 작품전을 가졌는데 그의 첫 개인전이었다.
1943년에는 당시 유력한 그림시장이던 전주로 이사하여 7년 동안 그곳에서 생활하면서 이따금 작품전을 가졌다.
해방 후 그는 고희동이 이끈 조선미술건설본부에 참여하고 1949년 국전 창립전이 개최될 때 동양화부 심사위원을 맡았다.
그러나 6·25동란이 발발함에 처가인 진주로 피난 가서 그곳에서 4년 동안 지냈다.
부산 영도에 있던 도자춘陶磁春이라는 도자기회사의 부탁을 받아 도화를 그리기도 했고, 1951년 부산에서 개최된 대한미술협회 주최 전시미술전 등에 출품하면서 피난 중에도 작품을 제작했다.
정부가 영국 왕실에 선물할 그림으로 <외금강 옥류천>을 그리기도 했다.

1953년 휴전 후 제2회 국전이 열리자 그는 다시 심사위원을 맡았고, 이듬해 부산 국제구락부에서 개인전을 가졌으며, 제3회 국전에서는 초대작가로 출품했다.
그 해 겨울 그는 진주를 떠나 서울로 왔다.
그는 서울 변두리 아리랑고개 근처에 자리를 잡고 돈암산방敦岩山房이라 당호를 붙였다.
그는 타계할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그는 1957년 파벌과 이권의 비리로 얼룩진 국전의 양상에 대해 『조선일보』에 ‘공정잃은 심사’라는 고발문을 발표했다.
그의 고발은 반국전운동으로 전개되었다.
1957년은 한국 현대미술이 출발된 해란 점에서 그의 고발은 시기적으로도 큰 의미를 지니며, 또한 변관식 자신의 회화적 전환과 완성에 있어서도 획기적인 의미를 지닌다.
그의 전환을 반영하는 기념비적인 작품이 그가 1957년에 그린 <농가의 만추>이다.
부감법의 시각으로 하늘 공간을 대담하게 끊고 가을 농가의 정경을 묘사한 이 작품은 이후 다시 나타나지 않는 독특한 구도를 취하고 있지만, 적묵법積墨法과 파선법破線法이 성공적으로 사용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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