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안 로렌초 베르니니 
 

지안 로렌초 베르니니Gian Lorenzo Bernini(1598~1680)는 17세기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조각가이다.
15세기에 이탈리아에는 도나텔로가 있었고 16세기에는 미켈란젤로가 있었으며 17세기에는 베르니니가 이탈리아를 대표했다.
바로크의 대가 베르니니는 1598년 나폴리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조각가로서 그의 스승이기도 했다.

베르니니가 27살 때 완성한 조각 <아폴로와 다프네 Apollo and Daphne>를 보면 아폴로에게 쫒겨 월계수로 변해버린 요정에 고나한 이야기를 대리석으로 8피드 높이로 제작한 것인데 요정의 얼굴 표정에서 배르니니의 감성적 표현의 놀라움을 발견하며, 극도의 사실주의가 관람자로 하여금 신화를 사실처럼 믿게 만든다.
3년 전 이미 <프로세르피나의 유괴 Anduction of Proserpina>(1621~22, 높이 7.425피드)에서 극적인 장면을 열연하는 배우들처럼 실재감을 느끼게 하는 작품을 제작한 그는 대리석을 잘 다루는 귀재였으며, 그는 평생 재료로 대리석을 선호했다.

그는 인간의 벌거벗은 육체를 아름답게 가꿀 줄 알았는데 그의 조각에서 미켈란젤로의 정신적 요소를 발견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그는 단지 육체적 아름다움을 찬양하면서 극도한 자신의 감성을 표현하려고 했다.
그가 1645~52년에 제작한 유명한 작품 <환희에 찬 성녀 테레사 St. Theresa in Ecstasy>(대리석, 높이 11피드 6인치)를 보면 성녀는 종교적 체험으로 의식을 잃고 무의식세계를 헤매는 것처럼 보인다.
테레사는 성적으로 황홀감을 느끼는 젊은 여인의 모습처럼 보인다.
주름진 테레사의 의상과 성적으로 공격하는 듯 보이는 천사의 모습 그리고 가슴을 드라낸 의상이 매혹적이다.

베르니니의 미학은 여러 면에서 루벤스의 것과 같고 인물에 대한 그의 묘사는 루벤스의 그림에 등장하는 모델 같으며 바람에 흩날리는 여자 모델의 머리카락과 남자 모델의 수염은 아주 정교하고 이런 요소들은 자신의 감성을 표현하려는 의지였다.
그의 조각을 보노라면 그것들이 대리석으로 제작했는지 청동으로 제작했는지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미술사학자들은 베르니니가 말년에 제작한 것들을 그의 대표작으로 꼽는데 그것들 가운데 <성 제롬 St. Jerome>과 <가시왕관을 든 천사 Angel with the Crown of Thorns>가 있다.
<환희에 찬 성녀 테레사>와 <성녀 마리아 막달렌 St. Mary Magdalen>에서 보여주었듯이 그는 말년의 두 작품에서도 구겨진 옷자락을 정교하게 사실주의 방법으로 묘사했으며 성자와 천사를 가장 인간적인 모습으로 묘사하여 그들의 품위를 떨어뜨렸다.

1630년대부터 그의 흉상 조각들은 달라지기 시작했으며 초기의 주제들이 신화였고 극적이었던 데 반해 그는 점차 종교적인 주제를 사용하면서 실재에 근사한 모습들을 제작했다.
그가 1635년에 제작한 <코스탄자 부오나렐리의 초상 Portait of Costanza Buonarelli>는 그의 조수의 젊은 아내의 초상으로 그녀는 무엇인가에 심취해 있다.
베르니니는 이때부터 이런 형상의 흉상들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흉상, 무덤, 교회의 제단, 그리고 서 있는 사람의 모습들은 전통적인 조각의 주제들이었으며 베르니니는 이러한 주제들에 고상한 아이디어를 투영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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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희동은 귀국 후 자신의 집에서


일본에서의 서양화에 대한 인기가 커진 것은 유학파에 의해서였다.
1870년대부터 유럽 각지로 유학을 떠난 첫 세대들은 이탈리아, 영국, 프랑스, 독일 등지에서 서양 양식들을 골고루 배웠다.
프랑스가 유학생들의 선망의 대상이 된 것은 구로다 세이키가 1893년 파리에서 귀국한 후 동경미술학교 서양화과의 주임교수가 되고부터였다.
토방정일土方定一이 말한 대로 “행복한 환경에서, 행복한 재능을 가지고 행복한 시대”에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신장시킨 화가였다.
그는 1884~93년 프랑스에서 체류하면서 처음에는 법을 공부하다가 화가가 되었다.
그는 프랑스에서 라파엘Raphael, 콜랭Collin(1850~1917)으로부터 프랑스 아카데미즘의 기초를 배웠다.
구매 개이이치로久米柱一郞(1866~1934)도 콜랭의 문화생이었으며 귀국 후 두 사람이 주축이 되어 조직한 백마회는 정칙파正則派라고도 불리었다.
정칙파로 불리운 이유는 콜랭에게서 습득한 프랑스 아카데미즘의 정칙적 기초기법을 백마회가 따랐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백화 白樺』, 『스팔』 등의 잡지를 발간하여 세잔, 반 고흐, 고갱 등의 인상주의 양식에 관한 바른 지식을 일본에 보급시켰으며 젊은 일본 서양화가들로 하여금 개성의 존중과 주체적인 자신감을 갖고 새로운 회화관을 갖도록 자극했다.
일본 근대 서양화의 가장 중요한 인물로 꼽히는 구로다가 동경미술학교에 부임하면서 이 학교는 미술정책과 교육의 구심점이 되었다.
이후 유학생 대부분이 파리로 유학을 갔고 1920년대 파리로 간 유학생의 수는 2백 명에 달했다.
따라서 일본 근대 서양화에는 파리 화파의 영향이 두드러지게 되었다.

‘조선에 처음 나는 서양화가의 그림’이라는 부제가 붙은 고희동의 졸업작품 <자매>는 신문지상으로밖에는 감상할 수 없지만, 그가 서양의 전형적인 인물화 양식을 배웠음을 알 수 있다.
‘서양화가의 효시’라는 제목의 이 기사는 서양화의 특징을 논한 다음 “일본에는 수십 전 전부터 이 그림이 크게 유행되어 지금은 명화라는 대가도 적지 않건마는 불행히 문화를 자랑하는 우리 반도에서는 한 사람도 이에 뜻을 두는 이가 없더니” 고희동이 처음으로 “구한국 궁내부 예식관의 명예직을 띠운 몸으로 뜻을 결단하고 동경에 건너가 일본의 미술계에 최고학원 되는 상야미술학교”를 졸업하게 되었음을 대서특필했다.

1915년 3월에 동경미술학교 5년의 정규과정을 졸업한 고희동은 귀국 후 자신의 집에서 그림을 가르치면서 회화교육의 필요성을 알게 되었다.
고희동은 자신에게서 서양화를 배운 김창섭, 이제욱, 장발, 안석주 등이 서울에 고려화회를 조직하고 YMCA 회관에 방을 빌어 매주 토요일에 한 번씩 모여 기초 실기 훈련을 쌓을 때 계속 그들을 돌봐 주기도 했다.
그 때 지도에는 서울에 정착해 있던 일본인 화가 산본매애山本梅涯, 고목배수高木背水, 환야풍丸野豊도 관여했다.

고희동은 『신천지』에 기고한 ‘나와 서화협회시대’에서 술회했다.
“본국에 돌아와서 스케치 막스를 메고 교외에 나가면 보는 사람들이 모두가 엿장사니 담배장사니 하고, 어떤 친구들은 말하기를 애를 써서 돈을 들이고 객지에서 고생을 해가면서 저것은 아니 배우겠네, 점잖치 못하게 고약도 같고 닭의 똥도 같은 것을 바르는 것을 무엇이라고 배우느냐고까지 시비하듯 하는 일도 있었다.
그 때에 내가 거주하던 집에 세 칸 되는 사랑방이 있었다.
거기에 6, 7인을 모아서 목탄화를 그리게 한 일이 있었다.
와서 배우는 이 소년들은 재미를 들여서 그리지마는 다른 사람들은 그것이 무슨 그림이냐고 하며 시선 외로 돌려버린다.”

고희동은 당시 기성 중진, 대가들을 회유하여 화단의 필요성을 주장했고 그래서 1918년 6월 19일에 결성된 것이 서화협회였다.
그가 나서서 안중식, 조석진, 오세창(1864~1953), 김규진, 정대유, 현채, 강진희, 김응원, 정학수, 강필주, 김돈희, 이도영 등 13명이 발기했다.
이들은 당시 서화계를 대표할 만한 사람들이었다.
정대유는 1921년 조석진에 이어 3대 회장에 선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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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소는 스위스로 달아났으며
 

루소는 자신의 교육론 <에밀 Emiile>(1762)을 발표하고, 여기서 결론으로 요약한 정치원리를 <사회 계약론>에서 더욱 진전시켰다.
그는 불평등을 돌일킬 수 없는 사실로 인정한 후 무엇이 한 사람으로 하여금 다른 사람에게 복종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는지, 그리고 무슨 권리로 한 사람이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할 수 있는지에 관한 의문들에 답하는 형식으로 논리를 전개해나가면서 "자유의지를 보유하는 가운데 모든 사람이 자신들을 자신 외의 모든 사람에게 구속시키는" 의미로서의 계약이 암묵적으로 그리고 자율적으로 이루어졌다는 결론을 유추해냈다. 루소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다른 사람의 충동에 따르는 것은 노예가 되는 것이지만 자신이 규정한 법에 복종하는 것은 자유이다."

루소는, 백성은 주권자이며 자신들의 주권을 언제라도 무효가 될 수 있는 정부를 통해 행사한다고 결론지었다.
그는 정부 형태를 역사적, 지리적 조건에 적응시킬 필요성을 강조했다.

<에밀>과 <사회 계약론>은 정부와 종교에 반한다는 이유로 1762년 6월에 파리의 국회로부터 불온서적으로 규정받았다.
루소는 스위스로 달아났으며, 그의 저서들은 스위스에서 판매가 금지되었다.
그는 1763년 <크리스토프 드 뷔몽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에밀>을 비난한 파리의 대주교를 공격했다.
이듬해에는 <산에서 쓴 편지>란 제목으로 제네바 공화국의 검찰총장 트론친을 공격했는데, 트론친은 <에밀>과 <사회 계약론>을 불태울 것을 명령한 제네바 원로원의 결정을 옹호했던 사람이다.
코르시카의 독립운동 선두자 파올리는 1764년 9월 루소에게 코르시카를 위해 헌법을 만들어줄 것을 요청했고 루소는 완성하지 못했지만 초안을 작성했다.

1764년 12월 31일 루소는 익명의 발신자로부터 <시민의 느낌>이라는 팜플렛을 받았다.
거기에는 자신을 위선자, 애정이 없는 어버이, 기분 나쁜 친구에 비유하면서 사정 없이 비판한 내용이 들어 있었다.
이것은 볼테르가 쓴 것으로 루소가 받은 충격은 매우 컸다.
루소는 충격에서 벗어나자 자서전 <고백록>을 쓰기로 결심했다.
<산에서 쓴 편지>는 물의를 일으켰는데 개신교 목사들이 더욱 더 그를 공격했으며 폭도들이 그의 집을 부수었다.

루소는 1766년 1월 영국으로 갔다.
영국의 경험론자 데이비드 흄은 루소를 반갑게 맞아주며 자신의 보호 하에 있게 했다.
그러나 고난을 겪는 동안 이성적 판단력에도 이상이 생긴 루소는, 흄이 자신의 명성에 먹칠을 함으로써 파리 철학자들로부터 인기를 누렸다고 의심하기 시작했다.
결국 두 사람은 공개적으로 말다툼을 하게 되었고, 이는 루소에게 불리했지만 유럽인들은 두 사람의 말다툼을 즐기며 즐거워했다.

루소의 사상은 프랑스 혁명의 밑거름이 되었다.
루소가 <사회 계약론>애서 인간은 선천적으로 선하지만 부패한 정부와 부정한 법 아래서는 사악해진다고 한 말과 인간은 자유인으로 태어나서 부자연스러운 문명 하에서 노예가 된다고 한 말은 루이 16세 치하의 프랑스 시민들에게 힘이 되고 희망이 되는 경구였다.
이런 가르침을 로베스피에르와 마라, 그리고 쟈코뱅파 당원들이 기꺼이 받아들였다.
쟈코뱅파들은 권력을 장악하게 되자 시민이 정부의 보호를 받게 되면 암암리에 법에 복종할 것을 서약하게 된다는 루소의 사상을 적용했다.

마라는 1788년 공공장소에서 사람들에게 루소의 <사회 계약론>에 관해 해설했다.
루소가 말한 시민의 주권은 혁명의 시기에 정부의 주권이 되었고, 공안위원회의 주권이 되었으며, 그리고 한 사람의 주권이 되었다.
한 사람이란 농부와 노동자를 말한다.
혁명정부에서 농부와 노동자의 주권은 한층 강화되었다.
1789년을 기준으로 프랑스의 경작농지의 3분의 1이 농부의 재산이었고, 31ㅜㄴ의 1은 귀족, 교회, 부르주아가 소유했으며, 나머지 3분의 1은 소작인들이 경작했다.
그러나 소작인들은 여전히 불만이 많았다.
프랑스 대혁명이 시작된 1789년 7월 프랑스 지방을 여행한 아더 영이 전한 소작농 여인과의 대화내용이 이를 말해준다.
그녀는 세금과 소작료를 바치고나면 살 수 없을 지경이며 무슨 수가 나든지 세상이 달라져야 자기처럼 가난한 사람들도 살 수 잇을 거라고 하면서, 루이 16세가 좋은 사람이라고 들었는데 그분이 가난한 사람들을 보호해주기 바란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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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환기의 조형주의


김환기는 중동 중학교를 중퇴하고 도항해 일본 동경의 니시기시로 중학을 나온 후 귀국했으며, 다시 밀항하여 1933년 스무 살 때 일본대학 예술학원 미술부에 입학했다. 이 시기 동경에는 한국 미술학도들이 적지 않았다. 1935년 그의 처녀작 <종달새 노래할 때>(1935)를 보면 해안을 배경으로 바구니를 이고 가는 한복차림의 시골 처녀 앞모습으로 입체주의 양식으로 각이 지게 그려졌지만, 유럽 입체파 화가들이 추구한 다각도의 시각을 펼친 것이 아니라서 그가 입체주의를 구성의 간결함을 위한 양식으로 응용했음을 알 수 있다. 1937년 귀국한 후 자유전에 소개한 작품들을 보면 오브제를 유추할 만한 추상적 형상과 기하적 구성이 두드러지며 이런 점은 지속된다. 
 

그는 1947년 친구 화가들과 더불어 신사실파를 출범시키고 이듬해 12월 서울 화신화랑에서 창립전을 개최했다. 이 시기의 작품 <나무와 달>(1948)과 <수림(숲)>(1949)을 보면 달과 나무를 파란색으로 표현했는데 톤은 달라도 파란색은 이후 그가 즐겨 사용하는 색이 된다. 색을 평편하게 넓게 칠하며 입체감을 없애고 조형에 치우친 점 역시 그가 지속적으로 추구한 요소이다. 그에게 회화는 실재의 기록이 아니라 조형적 착상이며 시각의 문제가 아니라 정리된 감성의 요약적 표현이었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 그의 작품을 보아야 한다. 
 

6.25동란이 발발하자 아내 김향안과 부산으로 피난간 그는 다락방에 살면서도 그림을 계속 그렸다. 그에게 낭만적 기질이 있음을 작품을 통해 알 수 있는데, <피난열차>(1951), <판자집>(1951), <뱃놀이>(1951년경) 등은 피난 군중, 가난한 삶, 그런 가운데서의 여가를 모티프로 한 것들로 단순한 조형 외에도 밝고 명랑한 혹은 시적 느낌을 주는 색이 사용되었다. 익살스러울 정도로 그는 실재 세계를 만화의 세계로 변형시켰다. 굳이 말하면 조형주의는 화가로 데뷔하면서부터 줄곳 그가 추구한 미학이다. 실재에 대한 조형의지가 얼마나 강했는지 <뱃놀이>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후 그는 더이상 창작의 동기를 실재 환경에서 찾지 않고 화실에서 상상을 통해 발견하기 시작했으며 본격적인 김환기의 조형이 시작되었다. 
 

그의 정물화에는 조선조 백자가 주로 등장한다. 피난가기 전 성북동 집에는 이조시대 탁자와 항아리들이 가득 했다. 전통미에 대한 관심이 컸음을 말해준다. 1950년대 그의 주요 모티프는 백자로서 예를 들면 <항아리와 시>(1954), <항아리와 여인>(1956), <백자>(1956), <항아리와 매화>(1957), <항아리와 새>(1957), <항아리>(1958) 등이다. 그는 '청백자 항아리'란 제목의 글에 적었다. "내 뜰에는 한아름되는 백자 항아리가 놓여 있다. 보는 각도에 따라 꽃나무를 배경하는 수도 있고 하늘을 배경하는 때도 있다. 몸이 둥근 데다 굽이 아가리보다 좁기 때문에 놓여 있는 것 같지가 않고 공중에 둥실 떠 있는 것 같다. 희고 맑은 살에 구름이 떠 가도 그늘이 지고 시시각각 태양의 농도에 따라 청백자항아리는 미묘한 변화를 창조한다. 칠야삼경에도 뜰에 나서면 허연 항아리가 엄연하여 마음이 든든하고 더욱이 달밤일 때면 항아리가 흡수하는 월광으로 인해 온통 내 뜰에 달이 꽉 차 있는 것 같기도 하다" 항아리에 대한 지속적 관찰과 찬양은 그의 특유 조형으로 여러 점 제작되었다. 고전미술에 자신의 회화를 접붙이려고 한 그는 항아리 외에 산, 새, 매화, 달, 구름, 나무, 사슴 등을 모티프로 삼았다. 
 

피난시절 1952년 홍대 교수에 부임했으며 5.16쿠데타 이후 1962년 대학정비령에 따라 미술학부만 남게 되자 홍익미술대학 학장이 되었다. 그가 파리로 간 건 1956년 5월이었다. 그는 말했다. "여기 와서 느낀 것은 시정신이오. 예술에는 노래가 담아져야 할 것 같소. 거장들의 작품에는 모두가 강력한 노래가 있구려. 지금까지 내가 부르던 노래가 무엇이었다는 것을 나는 여기 와서 구체적으로 알아진 것 같소. 밝은 태양을 파리에 와서 알아진 셈." <영원한 것들>(1956~57)은 아홉 개의 모티프를 가로 세로 세 개씩 병렬한 작품으로 그가 말한 화면을 채우는 그의 노래로서 3년 동안 파리에 체류하면서도 그의 주제는 이상적인 달, 구름, 학, 사슴, 산, 섬, 매화, 나무, 백자, 물고기 등이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영원의 상징으로 삼았던 것들이 그의 영원의 노래가 되었다. 전통 모티프를 현대적 회화의 세계로 운반하는 데서 그는 전통미를 계승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귀국 후 그는 홍대 학장으로 활동했지만 재단과의 갈등으로 대학을 떠나게 되었다. 그는 상파울로 비엔날레 커미셔너의 자격으로 출국한 후 돌아오지 않고 1963년 10월 뉴욕으로 가서 11년 동안 지냈다. 특기할 점은 뉴욕에서 회화에 큰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과거 작품이 김환기식 전통미의 재해석 혹은 전통적, 보편적 모티프를 새로운 조형으로 조명한 것이라면, 뉴욕에서 그는 미니멀리즘과 색을 평편하게 넓게 칠하는 컬러필드color-field의 영향으로 더욱 더 간소한 조형을 추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파란색을 선호하여 파란색을 자신의 색으로 확립했다. 그는 오브제의 형상을 더이상 사용하지 않고 완전추상으로 나아갔다. 색을 상징적, 기호적 그리고 감성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으므로 대부분 무제였고 제목을 붙일 경우 <봄의 소리>(1965),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1970) 등 개인적 감상의 표현이었다. <봄의 소리>,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10-08-70>(1970), <27-08-70>(1970) 등은 걸출한 작품이었다. 그의 조형이 최종에 이른 결실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종착지를 인식하지 못했다. 더이상 나아갈 수 없는 조형의 극단에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세계를 허물기 시작했다. 1970년 이후 작품들은 언급할 가치가 없다. 굳이 말하면 유치한 방법으로 격을 한층 떨어뜨린 것들이다. 그는 1974년 7월 7일 뉴욕 포트체스터의 유나이티드 병원에 입원해 수술받았고 14일 침대에서 떨어져 뇌일혈로 12일 동안 인공호흡을 계속하다가 25일 아침 9시 40분에 타계했다. 시신은 뉴욕시에서 한 시간 가량 떨어진 바할라의 켄시코 묘지에 안장되었고 뉴욕에 거주하는 조각가 한용진이 묘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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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작가들 중 박수근의 작품이 가장 고가이다
 

박수근은 프랑수아 밀레의 <만종>을 보고 감동을 받았으며 이는 화가가 된 동기가 되었다. 1932년 18살 때 제11회 조선미술전람회에 <봄이 오다>가 입선되자 고무되었지만 이후 세 차례의 낙선의 고배를 마셨고 1936년 다시 입선했다. 이후 1943년 제22회까지 빠짐없이 입선했다. 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상급학교로 진학하지 못했으며 미술교육을 받아보지 못한 그에게 조선전의 입선은 화가로서 자신의 재능을 인정받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당시 일본에 가서 회화를 수학한 사람이 적지 않았고 이들에 의해 서양 화가들의 양식이 소개되고 있었는데, 박수근은 그런 양식을 배우며 익히지 않은 상황에서 스스로 회화의 세계를 펼쳐나갔다. 평양의 도청 서기직으로 신혼가정을 꾸려나가며 곤궁한 생활을 했지만 화가의 꿈은 버리지 않았다. 6.25동란이 발발하자 서울로 피난한 그는 한때 미군 PX에서 미군의 초상화를 그리는 일을 하면서도 꾸준히 국전에 출품했다. 1956년경부터 반도호텔 내 생긴 화랑에서 미군들을 상대로 작품을 팔았는데, 미국인 여인 마가렛 밀러가 그의 작품에 관심을 갖고 자신만 콜렉트한 것이 아니라 친구들에게도 팔았다. 미 대사관 문정관 부인 마이아 핸더슨도 그의 작품에 관심을 갖고 자신도 구입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소개하기도 했다. 그의 작품이 대량 미국에 있는 건 이런 이유에서 비롯했다.
 

우리나라 작가들 중 박수근의 작품이 가장 고가이다. 미국의 경매장에서 고가에 팔린다. 고가에 매매되는 것과 작품의 우수성은 별개의 문제이다. 경매장의 가격은 경매장 시스템에 의해 가장 고가로 끌어올린 가격일 뿐이다. 따라서 작품의 가격은 작품에 대한 비평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박수근의 독특한 회화는 1950년대 중반부터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카메라로 클로즈업한 구성이 보통이고 모티프는 인물, 풍경, 정물이다. 구성으로 말하면 당시 화가들 중 가장 뒤떨어진다. 수줍음이 많은 사진가가 상대방에게 들키지 않고 사진을 찍으려고 대충 잡은 구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인물들이 등진 모습 혹은 옆모습으로 등장하기 보통인데 모델을 드로잉하는 훈련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눈치채지 못할 적당한 거리에서 드로잉하고 집에 와 채색한 것 같다. 고의적인 구성이 아닌 보여지는 대로의 구성이라서 오히려 독자성을 인정받는다. 특별히 인상을 주지 않을 뿐 아니라 너무 평범해서 무료해보이는 장면들이다. 풍경과 정물도 마찬가지로 교육을 받은 화가라면 일고의 가치도 없는 진부하기 짝이 없는 구성이다. 
  

밀레가 농부들을 주제로 그린 것에 감동한 박수근은 농가의 일하는 여인의 모습을 많이 그렸다. 밀레는 노동의 신성함을 찬양했는데 박수근의 모티프도 여인들의 일상 모습으로 <절구질하는 여인>, <맷돌질하는 여인>, <나물 캐는 여인들(봄)>, <시장의 여인들>, <아기 업은 여인> 등이다. 그는 개별적인 모델의 특성 있는 행위를 묘사한 것이 아니라 일상적 행위를 화석처럼 평편하게 압축한 듯이 그렸다. 원근과 입체는 없고 매우 간명한 선에 의한 도안적 구성이 보통이다. 현대판 동굴벽화라고 하면 적당할 것이다. 원시인들이 몇 가지 색으로 그렸듯이 20세기 원시인 박수근도 몇 가지 색으로 모노톤이 되게 그렸다. 헨더슨과 밀러가 아마 이런 원시성에 흥미를 느꼈던 것 같다. 그는 당시 흔한 장면들을 모티프로 삼았지만 역사적 기록의 가치가 없는 이유는 도안적으로 단순화하여 의상과 환경 등 시대적 상황을 설명해주는 요소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런 점은 풍경화에서도 마찬가지인데, <고목>(1961)과 <노목과 어린 나무>(1962)의 경우 나무의 본질은 묘사되지 못했고 다만 평편한 형상만 화면에서 구성을 이루고 있을 뿐이다. 그가 의도적으로 실재 상황을 그대로 나타내려고 하지 않았음을 동일한 제목 <나무와 여인>으로 1956년, 1950년대, 1962년에 그린 세 점을 보면 알 수 있다. 동일한 구성의 작품에서 중앙의 나무가 대충 줄기만 같을 뿐 가지들은 다르게 나타난다. 나무의 본질은 사라지고 박수근의 나무가 화면에서 자라고 있는 것이다. 
 

그의 화면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한결같이 무표정으로 그냥 그 자리에 서 있거나 앉아 있을 뿐이다. 행위를 일시 중단하고 박수근의 OK 사인이 떨어질 때까지 호흡도 멈추고 부동한 자세를 취한다. 그의 작품 앞에서 회화적 상황을 보고 감흥이 생기지 않는 건 이런 이유에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 앞에 오래 서 있게 되는 이유는 불명료함 때문이다. 동굴의 벽화처럼 형상이 형상 주변의 여백과 색채에 있어 동일하기 때문에 눈으로 형상과 여백을 분리하느라 시간이 걸린다. 그는 형상을 검정색 윤곽선으로 겨우 구분했다. 그의 작품이 사람들에게 호감을 주는 점은 바로 이 불명료함이다. 레오나르도의 <모나리자>가 불명료한 미소로 호감의 대상이 된 이래 불명료함 자체가 회화적 장점이 되었다. 박수근은 진부하기 짝이 없는 구성의 화면을 간명한 선으로 대상을 형상화한 후 모노톤 채색으로 불명료하게 묘사해 동굴벽화가 되게 했다. 오래되어 형상이 흐려지고 색이 바랜 것과 같은 효과를 극대화한 것이다. 이런 채색기교가 작품에 대한 호감으로 관람자에게 부각된 것이다. 박수근은 채색기교로 유명해졌으며 이는 전례가 없는 일이다. 그는 모노크롬의 선구자이다. 그의 화면은 고르지 못한 동굴의 벽처럼 두터운 층으로 이루어졌다. X레이를 투시하면 얼마나 많은 층으로 이루어졌는지 알 수 있다. 안료를 바르고 또 바르는 방법으로 두터운 층을 만든 후 최종적으로 자연색을 입힌다. 밝고 어두운 색을 번갈아가며 칠해 질감이 부조처럼 입체적 층을 만들면 그 위에 검정색으로 형상을 그리고 자연색이 겨우 드러날 정도로 해서 마무리했다.
박수근은 말했다. "나는 그림 제작에 있어서 붓과 나이프를 함께 사용한다. 캔버스 위의 첫 번째 층을 충분히 기름에 섞은 흰색과 담황갈색으로 바르고 이것을 말린다. 그 다음에 틈 사이사이의 각층을 말리면서 층 위에 층을 만드는 것이다. 맨 위의 표면은 물감을 섞은 매우 적은 양의 기름을 사용한다. 이런 식으로 해서 그것은 갈라지거나 깨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나서 나는 검은 윤곽선을 이용한 대담한 필법으로 주제를 스케치한다." 
 

바탕색은 눈으로 볼 수 없으므로 요철이 심한 두터운 한지를 사용하면 박수근의 채색기교를 대신할 수 있다. 박수근의 화면이 여덟 층으로 이루어졌다면 한지를 사용할 경우 세 층만 입혀도 같은 효과를 낼 수 있을 것이다. 박수근은 채색기교와 모노크롬으로 유명해졌고 그것은 그의 몫이 되었다. 그는 1965년 51세로 사망하기 전 10년 동안 창작활동을 왕성히 했는데, 이 시기에 간과 신장의 약화와 백내장으로 건강이 나빠지기 시작했으며 후기 작품은 거의 한쪽 눈에 의존해 그린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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